<짜깁기와 앎짜나가기_수입상과 고물상의 우상을 넘어>
■ 수입상과 고물상은 모두 수집을 기초로 물건을 판다. 수입상은 보통 소개학을 전개하고, 고물상은 훈고학을 내세운다.
소개학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그 둘을 만나게 해 주는 일을 하는데, 이때 알려주미는 그 스스로의 앎새를 짜나가는 게 아니라 저쪽의 앞선 앎새를 뒤쳐진 이쪽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여기서 전달은 건네주기이거나 옮겨놓기와 같다. 건네주미는 한쪽에서는 그가 건네는 바의 알속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 채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이쪽의 사정, 즉 이쪽이 처한 상황이나 그 필요성 그리고 그 전달의 효과나 결과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상태이기 십상이다.
훈고학은 모시는 경전의 뜻을 가르치거나 풀이를 주된 일로 삼는다. 경전은 앎쇠들이 거기에 쓰인 글의 알속이 참되다고 여기는 책을 말한다. 경전뜻풀미는 그것의 참됨을 굳굳게 믿고 있어 경전의 참을 의심하며 거기에서 다뤄진 문제나 그에 대한 대답들을 새로이 묻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그들은 저 때에 일궈진 글들의 옛뜻에 얽매어 오늘 이 때에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까막눈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기 십상이다.
수입상과 고물상은 모두 저들이 ‘이미 참이라고 믿는 앎새’를 그 앎을 갖지 못한 이쪽 사람들에게 파편적으로 건네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지식들의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 지식들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스스로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교수나 책 등에서 듣거나 읽어서 배우는 것이지 저희들 스스로 물음을 묻고, 그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찾아나서며, 그 대답의 올바름을 엄격한 방법론에 기초해 증명하는 것으로 깨우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식 건네주미’로 그치는 이유이다.
수고상(수입상+고물상)은 저쪽의 앎새뿐 아니라 이쪽의 상황도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 저쪽의 앎새는 그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이쪽의 상황은 사설이나 평론의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는 수준에 그친다. 앎쇠의 칸막이(전공분야)에 갇힌 사람는, 달리 말하자면, 다른 쪽의 앎에 대해서는 캄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고, 상황에 대한 어설픈 담론 지식은 그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앎과 크게 다를 수조차 있다. 수고상의 캄캄다름은 한밤에 내려치는 번개가 갈라놓은 하늘처럼 그들의 전문성과 겉멋 담론에 가려져 밤보다 더 까맣게 감춰져 버린다.
셀 수 없이 많은 수고상들이 좌판을 펼치고 있는 한국의 지식 시장은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과 다를 바가 없다. 그곳은 마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갖가지 지식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왔다가 길게는 10년 짧게는 몇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저잣거리와 같다. 이러한 격변의 끝에 살아남은 지식의 갈말들(개념, 용어)은 ‘족보 없이’ 단지 그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이 곁들여진 채로 여기저기 유통된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유행하는 갈말들―제4차산업혁명, 젠트리피케이션, 유비쿼터스, 통섭, 워라밸, G20 정상회의 등―을 소비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지식의 새로움에 빠져든다.
오늘날 이 시대에 떠돌아다니는 대부분의 갈말들은 수고상들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이다. 한국의 최고 지식 전문가 그룹인 수고상들은 저마다가 생산해 낸 갈말들이 그 양과 연결성 그리고 복잡성이 날로 커져 나감에 따라 그들의 지식 영역이 상대적으로 쪼그라들고 있다는 무기력감에 사로잡히고 있다. 수고상들은 무지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더 다급하게 더 많은 것들을 소개하거나 훈고하려 안달한다. 그로써 한국의 지식 시장은 그 정체도 알 수 없고 족보도 가릴 수 없는 갈말들이 넘쳐 나는 ‘무국적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사잇그물(인터넷)에 걸려 있는 크큰 정보들―책, 논문, 보고서, 기사, 사전류, 갖가지 글들―을 활용해 자신들의 지식을 키워나갈 뿐 아니라 그것들로써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은 늘늘어나는 알속들 무더기 속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재빨리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알속(정보) 찾아낼 줄 아는 힘으로써 어떠한 글이든 쉽게 써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부력에 힘입어 어떤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없는, 달리 말해, 이 말 저 말을 어지럽게 기운 누더기 글을 쓰기도 한다.
난삽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바로 이 시대의 아들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물음도 물을 줄 모르고, 저가 쓰는 갈말들의 올바른 뜻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그 갈말들을 왜 쓰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 뜻을 깨달을 힘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 갈말들의 정확한 뜻은 그것들을 지어낸 수고상들조차 미처 바루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갈말들을 보자. 존재, 공공성, 커넥톰, 시상·피질계, 비오톱 등. 이러한 갈말들을 지식의 열매로 수확한 대학생들은 그것들로써 글을 써 댄다. 그들의 글에는 분명 매우 중대한 메시지(알림속)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메시지를 자신의 말로 풀어내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글 속에 담긴 메시지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갈말들을 씀으로써 그들이 그 주제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흉내를 냈던 셈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이 흉내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글이 지식 시장에서 버젓이 유통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나중에는 자신도 진짜로 아는 사람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고 만다. 그들은 점점 ‘덧없는 갈말들’의 마술사가 되어 간다. 글은 짜깁기의 한 작품으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그들은 글을 쓴 뒤 그 글을 잊는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그 글을 기억할 수도 없다!
한국 사회는 망각의 축복으로 굴러가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거세차게 “민주주의”를 외치다가도 어느새 그 갈말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권력이 생기자마자 갑질의 유혹에 젖어 들고, 돈벌이가 생기자마다 의리와 약속 그리고 계약조차 헌신짝처럼 저버린다.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본디 뜻이 갑질의 반대이고, 계약의 딴 이름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가며 외쳤던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民主)”란 낱말을 잘 들여다보라! 거기서 ‘갑질의 횡포질’이 안 보이는가? 거기에 ‘계약 존중’의 정신이 느껴지는가? 이 두 물음에 대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라는 낱말은 “民의 主”로서 ‘군주(君主)’, 말하자면, 임금이나 황제 또는 최고 권력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놓아 불렀던 저 “민주주의”라는 갈말은 실제로는 ‘군주-주의(主義)’였던 셈이었다. 말과 뜻의 어긋난 만큼이 이토록 크다면, 우리는 저 말을 폐기처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욕조가 더럽다고 아이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주의”라는 갈말은 뜻을 담은 그릇으로서 욕조와 같고,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은 아이를 일컫는다. 20세기 내내 사람들이 외쳤던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였다. 이 잉글리시 낱말은 ‘데모스가 데모스에 의해 데모스를 위해 나라를 이끌어가기’라는 뜻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다음의 두 항으로 나뉜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때 ‘민주공화국’은 ‘a democratic republic’을 뜻한다. 이때 ‘리퍼블릭’은 통치 형태로서 ‘국가(나라)는 모두의 것으로서 모두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라는 것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민주주의”를 “데모크라시”의 본디 뜻에 따라 ‘민(民)이 주(主)가 되는 주의(主義)’로 읽고 싶다면, “민주주의”라는 갈말도 그런대로 쓸만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의 “주(主)”가 ‘권력의 주체’가 아닌 임자를 뜻하는 한, 저 갈말은 끝내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국가는 모두의 것이자 누구나 의사 결정에 참여하거나 그에 필요한 정보가 두루 공개되어 있어야 하는 ‘공적 기관’이기에 독재(獨裁)와 연결될 수 있는 주인이나 임자의 개념은 피하는 게 마땅하다. 데모크라시는 ‘국민끌기’로서 국민은 끄는 주체이자 그 끎의 목적이며 그 끎의 대상이 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낱말 대신 “국민끌기”와 같은 갈말을 새로 바꿔 쓴다면, 우리의 대학생들은 데모크라시에 대해 더 이상 짜깁기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남침(南侵)”을 “쳐내려옴”이라고 바꿔 씀으로써 이제까지 우리 학생들이 겪었던 혼란, 즉 ‘남이 북을 침략한 것’인지 아니면 ‘북이 남을 침략한 것’인지의 말 문제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그것이 상현인지 하현인지를 가려낼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가 “현(弦)”의 생김새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상현(上弦)”은 ‘달의 오른쪽이 차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이 말을 ‘오른쪽+오름’을 함께 가리킬 수 있는 “차오름달”이라고 바꿔 부르기만 해도, 저 혼란은 쉽게 없앨 수 있다.
다음사람(다음 세대)이 글을 짜깁기 방식이 아닌 앎 짜나가기 꼴로 써나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앎을 담고 있는 갈말들이 우리말답게 바로 빚어져 있어야 한다. 보기컨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갈말은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Ruth Glass)가 1964년에 처음 썼고,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쇠퇴한 구도심 재활성화 방안으로 ‘도심 재활성화(urban rehabilitation)’란 말과 같은 뜻으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둥지 내몰림”이나 “둥지 내쫓김” 또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쓰이고 있다.
이 말을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려면 무엇보다 “젠트리(gentry)”라는 낱말이 영국의 전통적 중간계급인 지주계급 또는 신사계급을 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상류층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돈과 교양을 갖추었던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전통에서 이러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중인(中人)”이라 불렸다. 중인은 양반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기술관과 행정실무관으로서 국가의 주요한 일을 도맡았을 뿐 아니라 그 사는 곳도 서울의 중심부였다. “중인”이 오늘날에는 “중산층 무리”로 볼 수 있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은 ‘중산층 들이기’가 된다.
“중산층들이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뒤떨어진 지역에 중산층 사람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말한다. 어떤 지역은 중산층이 떠났던 곳일 수도 있고, 다른 지역은 처음부터 중산층이 전혀 살지 않았던 곳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젠트리피케이션은 돈과 교양이 있는 중산층을 특정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말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곳으로 몰려올 수도 있고(북촌마을), 지자체나 정부가 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그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도시재생사업). 중산층이 들어와 둥지를 틀고 살면 그곳의 집값이 오르고 마을이 크게 달라져 먼저 살던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게 되는 일도 생긴다. 그것이 “둥지 내쫓김”이다.
앎을 제대로 짜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의 사슬이 끊김이 없이 튼튼하게 이어져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갈말은 그것이 담아내야 할 문제와 현상 그리고 사태를 전체적으로 묶어낼 수 있을 만큼 올발라야 한다. “민주주의(民主主義)”나 “상현(上弦)” 그리고 “둥지 내쫓김”과 같은 갈말들의 우리말다움은 우리가 그것들로써 글과 말을 짜깁기로써 이어나갈 만큼은 되지만 ‘속속들이 앎’을 올바로 짜나가기에는 너무도 무디고 엉성할 뿐 아니라, 게다가 그 뜻마저 뒤틀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지식계는 수입상과 고물상 전문가들의 노고로 갈말의 수가 나날이 치솟고 있다. 소개와 해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것 못지 않게 반드시 갖춰야 할 일이 현재의 우리와 다음의 우리들이 써야 할 ‘갈말들’을 ‘우리말답게’ 바꿔 가는 일이다! “남침(南侵)”과 같은 한자 우리말은 그 뜻이 알기 쉬운 “쳐내려옴”으로 바꿔 나가야 하고, “민주주의(民主主義)”와 같은 시대의 낱말은 이제라도 “국민끌기”와 같은 바른 우리말로 고쳐 나가야 하며, 오늘날 비 온 뒤 죽순 돋듯 퍼져나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같은 잉글리시 낱말은 한국 사람 누구나 알기 쉬우면서도 그 뜻이 올바른 “중산층 들이기”와 같은 갈말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
슬기맑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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