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소포클레스 초상. / 스핑크스와 마주한 오이디푸스. / 오이디푸스를 열연하는 배우. |
그중에서도 ‘운명’ 하면 딱 떠오르는 고전이 있다. 바로 소포클레스(BC 496~406)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이 비극은 한 영웅의 굴곡진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끔찍한 신탁(神託)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런 노력이 도리어 신탁을 불러오는 통로가 되고 만다. 사건의 고비마다 베토벤의 ‘4음 모티브’가 작렬한다. 인간은 과연 운명의 꼭두각시일까.
이 극(劇)은 시민들이 테베에 창궐하는 역병(疫病)을 물리쳐 달라고 탄원하면서 시작된다. 아폴론은 선왕(先王)의 살인범을 찾아내 죽이든지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예전에 테베가 스핑크스의 재앙으로 시달릴 때, 선왕은 신의 뜻을 물으러 가다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때 오이디푸스가 방랑길에 테베에 들러 스핑크스를 격퇴하고 왕위에 추대되었다. 그는 선왕의 비(妃)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테베를 통치해 왔다.
오이디푸스는 반드시 선왕의 살인범을 밝혀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눈먼 예언자는 “그대가 범인… 낳아준 자의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를 죽인 자로 드러날 것”이라는 이상한(?) 예언을 한다. 이오카스테가 예언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해 가슴속 비밀을 털어놓는다. 선왕 부부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아들을 낳자마자 두 발을 묶어 왕실의 목자(牧者)로 하여금 깊은 산속에 버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오히려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도 똑같은 신탁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그는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랐다. 어느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자, 신탁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등지고 방랑을 시작했다. 더구나 테베로 향하다가, 어떤 노인 일행을 우발적으로 죽인 일도 있다. 혹시 그 노인이 바로 선왕…? 아버지…?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뒤숭숭해진다.
마침 코린토스로부터 사자(使者)가 부왕(父王)의 부음(訃音)을 가지고 온다. 그는 부왕의 자연사(自然死)에 안도한다. 그러나 생존 중인 어머니로 인해 귀국을 꺼린다. 사자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오래된 비밀을 말한다. 예전에 자신이 알고 지내던 테베의 목자로부터 갓난 오이디푸스를 넘겨받아, 아들 없는 코린토스 왕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사자에게 넘겨 주었다는 늙은 목자를 찾는다. 끌려온 목자는 선왕 부부로부터 받은 오이디푸스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지금 사자로 온 자에게 주었다고 자백한다. 궁전 안으로 뛰어들어간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자결한다. 뒤쫓아간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옷에서 브로치를 떼어내 자신의 두 눈을 마구 찌른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장례를 부탁하고, 테베를 떠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비극은 세 개의 물음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누가 범인인가’로 시작해 ‘내가 범인인가’를 거쳐 ‘나는 무엇인가’로 마무리된다. 범인을 밝혀내 도시를 구하겠다고 호언한 오이디푸스 자신이 범인으로 드러난다. 그는 뛰어난 지혜를 가졌어도 정작 ‘나는 무엇인가’를 모르는 존재이다. 예언자는 눈이 멀어도 훤히 보지만, 정작 눈뜬 인간은 아무것도 보지를 못한다.
오이디푸스는 지적(知的) 호기심이 강하고 자신만만하다. 수많은 사람을 절망시켰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다. 이번에도 살인범 수색을 자신한다. 그의 성격은 급하고 독단적이다. 노상에서 다툰 노인, 아니 친부(親父)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오지 않으려는 예언자나 증인을 억지로 부른다. 그냥 돌아가려는 예언자를 돌려세워 기어코 그 무서운 말을 듣고 만다.
이처럼 그의 파탄에 운명만 관여한 것이 아니다. 그의 지적 열망과 성급한 성격도 심각한 결함으로 작용하여 그의 몰락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결함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결코 타인을 해치거나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의 강직함을 통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공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이 끔찍한 비극에 그의 고의성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는 운명을 피하려고 발버둥친다. 정작 운명이 덮쳐오자, 적당한 타협이나 무마를 거부한다. 자신이 범인으로 드러나는 순간, 단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손으로 두 눈을 찔러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단죄하고 추방을 자청한다. 그의 행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을 드높인다.
‘오이디푸스 왕’이 초연(初演)된 것은 실제로 아테네에 역병이 창궐했던 직후로 추측된다.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오랫동안 번영을 구가하던 아테네는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맞았다. 불행히도 이듬해부터 2년간 역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엄청난 시민이 희생되었다. 심지어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감염사(感染死)했다. 자신감 넘치던 아테네에 갑자기 좌절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테네의 처지는 바로 극중의 오이디푸스의 처지와 다름없었다. 시민들은 운명 앞에서 좌절하는 영웅의 무력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초라함을 탄식했다. 동시에, 그런 불운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그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 작품은 불후의 고전이기에 앞서, 이렇듯 동시대인의 가슴을 뒤흔든 강렬한 시대극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맥없이 쓰러진 것이 아니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전이든 후든 한결같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려고 분투노력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을 찌른 것은 어느 누구의 손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손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투사였다.
운명의 그리스어 어원의 뜻은 ‘몫’이다. 오이디푸스는 극단적인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감당했다. 그가 단순히 운명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면, 이 극의 제목은 결코 ‘오이디푸스 왕’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보다 더 적합한 비평은 없을 듯하다.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