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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뜻매김

사이박사 2019. 4. 11. 14:53

생각에 대한 뜻매김

 

구연상(숙명여대 교수/철학박사)

 

1. 생각의 자리들

 

[이름]:벌레잡이통풀(네펜데스)[출처]:아마아마

생각은 식물, 동물, 사람, 로봇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듯 보인다. 흔히 벌레잡이식물(Nepenthes)로 불리는 식물들은 덩굴손 입이 덮개 달린 항아리 또는 주머니모양으로 진화했다. 그 덮개와 주머니 입구는 꿀샘이 있고 미끄럽다. 벌레들이 주머니 안으로 떨어지면 소화액이 분비되고 벌레는 소화된다. 이는 식물이 생물적 차원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식물은 보통 햇빛을 받아 자라기 때문에 식물의 줄기는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굽어지는 성질을 갖는다. 이는 식물이 스스로의 자람을 조절한다는 것을 말한다. 옥신(auxin)이란 물질은 줄기나 뿌리 끝에서 만들어져 잎 쪽으로 흘러가는데, 이때 이 물질의 흐름이 빛이 비치는 반대쪽으로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옥신이 많이 흘러간 쪽이 더 잘 자라며, 마침내 나무줄기는 덜 자란 쪽으로 굽어진다.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과 꽃 등을 피우고 열매를 맺거나 하여 그 씨앗을 늘여나간다. 이는 식물의 생리가 매우 정교한 신호전달체계에 의해 제어되고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제어가 생리적 메커니즘[기계장치/틀짜임]’을 통해 일어난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생명틀[체계]를 갖춘 살아있는 식물은 매우 정교한 자동항법시스템을 사용해야 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시스템을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될 테고, 이때 식물은 일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넓은 의미의 생각과 같다. 한 식물이 새로운 선택을 감행하여 진화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변종의 탄생을 의미한다. 식물은 스스로의 형질을 바꾸는 방식으로 생각을 진행해 나간다. 식물은 생리적 선택 과정으로써 생각한다.

동물은 흔히 손이나 발 또는 날개 등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동물도 태어나 자라난다는 점에서 식물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움직임의 자유를 갖는다는 점에서 식물과 크게 다르다. 자유는 환경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자신을 둘러싼 서식지에 얽매일수록 동물의 자유도는 낮아지고, 반대일수록 자유는 많아진다. 환경의 조건을 덜 받거나 스스로 환경을 바꿔나갈 수 있는 동물일수록 더욱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은 식물의 자유, 달리 말해, 생리적 자유를 넘어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 나서거나 개선할 수 있는 자유, 즉 문화의 자유를 갖는다.

수달은 천연기념물 제330호로서 하천이나 호숫가에 살며 물가 바위구멍 또는 나무뿌리 밑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산다. 드나드는 구멍은 물가 쪽으로 나 있는 반면 공기구멍은 땅 위쪽으로 뚫려 있다. 수달은 메기, 가물치, 미꾸라지, 개구리, 게 등을 잡아먹고 사는데, 사는 곳 주위에는 잡아먹은 물고기 뼈가 흩어져 있다. 수달은 야행성 동물로 낮에는 휴식을

수달

취하고 밤에 주로 먹이를 잡는다. 수달은 눈이 좋아 밤이나 낮이나 잘 볼 수 있고, 귀도 밝아 아주 작은 소리까지 잘 들을 수 있다. 또 수달은 냄새를 맡아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이나 천적의 습격을 재빨리 알아챈다. 수달은 성질이 온순해서 사람과 친숙해지기 쉽다.

수달은 자신의 먹이에 대해서는 훌륭한 사냥꾼이지만 자신의 천적에 대해서는 훌륭한 도망꾼이며 어린 시절에는 미끄럼을 탈 줄 아는 놀이꾼이기도 하다. 수달은 집짓기와 수로건설로 유명하다. 수달의 행동권은 7정도에 달할 뿐 아니라 자신의 배설물을 통해 이 영역을 관리하기까지 한다. 수달은 어릴 때 수영이나 사냥법을 어미로부터 배운다. 수달은 생리적 메커니즘을 넘어서 자유로운 행동학습된 행동을 펼쳐나간다. 수달의 행동들은 순간순간 내려지는 상황 판단에 따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분명 자유롭기까지 해 보인다. 수달은 주위의 변화에 생각하듯 반응 지체를 보이기도 할 뿐 아니라 수달만의 문화라고 할 만한 특징을 이어간다. 이것은 수달이 그 나름의 생각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생리적 메커니즘에 얽매이지만 자유로운 행동 방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수달과 비슷한 측면을 갖지만 몸 자체와 지각 방식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누린다는 점에서 새롭게 다른 차원에서 살아간다. 사람의 눈코귀입뿐 아니라 손발 그리고 생각 기관으로서의 뛰어난 두뇌등은 사람의 몸이 얼마나 뛰어난 자연적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사람의 삶은 몸을 써먹는 단계를 넘어서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도구 사용과 학문적 지식 체계의 구축을 통해 세상을 이용하는 단계로 초월해 있다.

지난 2006년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 최신호(713일자)에는 전신마비 환자의 뇌 속에 컴퓨터 칩을 심어 뇌파의 힘으로 TV를 켜고 끄거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미국의 생명공학회사인 사이버키네틱스와 브라운대학 그리고 시카고대학 등 7개 기관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뇌는 이상 없으나 척추가 손상돼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브레인 게이트(brain gate)”라 불리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뇌에 이식한 초소형 칩이 뇌파를 인식해 칩에 연결된 컴퓨터에 전달하고, 그로써 머릿속의 생각이 컴퓨터를 거쳐 컴퓨터나 기계 팔을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칩을 장착한 환자 네이글은 처음에 약간의 연습만으로 컴퓨터를 켜고 간단한 게임을 하거나 전등도 끄고 켤 수도 있게 됐다. 이 칩은 1년 만에 오작동을 일으켜 제거됐지만, 연구팀은 그 뒤 문제점을 보완한 시스템을 만들어 200755세 여자를 포함한 3명의 환자에게 다시 장착했다.

이러한 의학적 시도는 기술적이고 생명 윤리적인 어려운 문제를 낳지만 사람의 생각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사람이 몸의 도움 없이 뇌의 활동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면, 몸과 맘의 분리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이원론이 더 큰 설득력을 얻게 될 것처럼 보인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물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은 레스 엑스텐자(res extensa)”, 달리 말해, “공간적 크기를 갖는 것으로, 이와 반대로 플라톤의 프시케와 같은 정신(精神)레스 코기탄스(res cogitans)”, 생각하는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몸과 맘은 공간적 크기라는 잣대에 따를 때 서로 완전히 다른 것임도 불구하고 한 사람에게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실제로 함께 융합될 수 있다. 물질계의 변화가 감각 기관들을 통해 머릿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정신의 활동인 생각은 물질로 만들어진 컴퓨터로 복사될 수 있다.

컴퓨터로 옮겨질 수 있는 뇌파는 머릿속의 물리적 사건이다. 문제는 생각이 비록 뇌파의 활동을 통해 낳아진다 손치더라도 생각의 중추 기관으로 알려진 뇌나 머리의 활동 자체가 곧바로 생각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신호의 전달 자체가 곧바로 의미의 전달과 동일시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둘을 이어주는 게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해석자가 없다면 발생된 신호는 그저 신호에 그칠 뿐 아무런 의미를 낳지 못한다. 해가 솟고 빛이 쏟아져도 그러한 자연의 신호를 해석할 생명체가 하나도 없다면 우주는 아무런 의미 없이돌아갈 뿐이다. 생각이 생겨나기 위해 뇌의 움직임이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움직임 자체가 생각을 낳거나 생각이 되려면 그 움직임을 감지하고 해석할 수 있는 뇌의 임자’, 즉 해석의 임자가 있어야 한다. 생각과 의미는 그것들이 특정한 체계의 신호 안에 담기는 것만으로는 아직 세상에 태어날 수 없고, 오직 그러한 담겨진 신호들을 적절히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만 낳아질 수 있다.

식물이나 짐승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의 움직임을 다스려 나갈 줄 안다. 식물이 비록 이러한 앎의 돌쩌귀 자리인 머리가 없을지라도 식물은 몸 자체에 배어 있는 생리 시스템을 통해 가장 낮은 단계의 생각을 펼친다고 할 수 있다. 식물의 생각의 자리는 그 몸 군데군데 퍼져 서로 이어져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짐승과 사람은 생각의 자리가 머리에 덩어리져 빽빽이 몰려 있지만, 머리는 다시금 온 몸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이음매가 끊겨 머리 자체만으로도 생각이 가능하긴 하지만, 머릿속 생각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각의 끊임없는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 감각 없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경우 생각의 자리는 주로 머리이지만, 생각의 유래와 상호작용과 관련해서는 몸 전체가 바로 생각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2. 생각의 모습[현상적으로 드러내기]

 

만일 몸이 생각의 자리이고, 머리가 생각의 으뜸 자리라면, 생각은 몸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생각은 생각하는 사람이나 짐승 또는 식물이 없다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생각하미는 생각의 뜻매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물음은 도대체 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물음은 생각이라는 낱말의 뜻하는 바 위에서만 올바로 던져질 수 있다. 바 위[지평]’는 물음의 걸음이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자 길이며 그에 대한 대답을 세울 바닥 터이다.

나는 생각생겨난 것과 같은 뜻으로 새기고자 한다. 생각이 생겨나는 자리는 넓게는 몸이고, 좁게는 머리가 된다. 머리는 물레처럼 굴리거나 돌릴 수 있다. 생각의 물레로서의 머리는 그것이 돌아감으로써 샘물처럼 생각을 자아낼 수 있다. 생각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나 도리를 말한다. 생각은 헤아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생각은 헬 수 있기 때문에 그 차림의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배열될 수 있다. 생각에는 앞뒤가 있기도 하다. ‘-생각은 일종의 전제 또는 현재의 처한 현실에 대한 고려를 말하고, ‘-생각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예견이나 예측을 뜻한다. 생각은 머리에 떠오른 것 또는 머리로 떠올린 것을 말한다.

머리가 생각의 자리로서 몸의 한 부분을 뜻하는 말이라면, 마음은 그 머리가 돌아가거나 쓰이는 공간과 같다. 마음은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자리하는 상징 세계 또는 의미의 거미줄 집과 같다. 마음은 머리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한데 머무르면서 서로 다양한 관계로 맺어질 수 있는 마을과 같다. 마음은 마을로서는 머무름의 자리이지만 맺음의 매듭을 묶고 푸는 임자로서의 매개자이자 동시에 주재자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은 마음에 떠오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마음에 의해 떠올려질 수도 있다. 생각은 마음속에 저절로 떠오른 것이거나 마음에 의해 떠올려진 것이다.

생각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 - 느낌, , 냄새, 소리, 모습, 예감, 욕망(채우려 함), 욕심(싶은 마음), 환상(헛생각) - 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자 마음에 일어난 것에 대한 앎[참 거짓,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사실(그러함), 사물(생김새), 행위(할 줄) 등에 대한 앎]과 그 앎에 대한 기억[되새김, 품음] 그리고 그 앎의 뜻에 때한 깨달음 등을 말한다. 생각은 과거를 떠올려 떠올려진 것을 죽 되짚어 보는 것[반성, 평가, 후회]이기도 하고, 현재를 마주해 떠오르는 바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는 것[분석, 종합]이기도 하며, 미래를 미루어 떠올라지는 바를 앞서 헤아려 주는 것[예측, 예견, 예상]이기도 하다. 생각은 되짚어 보고 곱씹어 보며 헤아려 주는 일이다.

생각의 떠오름과 떠오른 생각에 대한 두루 살핌의 일은 아무렇게 또는 밑도 끝도 모르게 또는 랜덤 형식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생각하미가 생각의 효율을 위해 특정한 차례나 조작 지침에 따라 진행될 수도 있다. 생각 차례는 주로 말로써 짜이거나 특정한 방법론의 도움을 받는다. 실험이나 관찰, 말의 앞뒤 맞음, 글쓰기 차례, 그림 그리기 순서, 음악의 진행 방법 등 수많은 절차나 방식에 따라 생각이 펼쳐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어긋나지 않고 올바르게 나아가려면 생각하미는 스스로의 생각 자체에 대해 그것의 올바름을 거울에 비춰 보듯 되새겨야 한다. 생각의 되새김은 생각에 대한 생각으로서 생각의 흐름 자체를 그대로 뒤쫓아 가면서 하는 평가일 수도 있고, 그 다다를 결과에 대한 예측일 수도 있으며, ‘이미 이루어진 생각을 보다 넓고 깊고 긴 지평에서 반성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일, 짧게 말해, ‘생각 거듭하기는 생각했던 바를 생각이 펼쳐졌던 상황 전체를 다시 고려하면서 복기(復棋)하는 것과 같다. 복기의 목적은 생각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없었는지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즉 자신의 실패와 성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교훈 삼으려 하는 것이다.

생각이 잘못 되었을 때 그 생각을 따라 실천하는 것은 스스로 잘못된 길로 걸어 들어가 넘어지는 것처럼 어리석다. 생각은 잘 했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피치 못할 난관들 때문에 그 생각이 끝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면 그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 된 생각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낳고, ‘좋은 생각이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낳는 법은 없지만, 생각을 잘못 해서 나쁜 결과가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스스로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더욱 뼈아픈 실패인 것이다. 좋고 올바른 생각을 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았다면 그것은 생각의 보람이 된다. 우리가 생각을 열심히 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함이다. 이때 좋음은 무르익음으로 한정될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회개할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 거듭하기는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마음을 다잡게 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더욱 강한 악마의 계약을 강제한다. 생각 되풀이는 생각의 잘못을 살피기 위한 까닭도 되지만, 앞선 생각에 잘못이나 틀림이 없을 때 그 생각대로 실천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마음이나 그 생각이 옳으므로 마땅히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마음을 굳히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생각 되풀이 끝에 우리가 어떠한 의심가능성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그 생각을 참 생각으로 믿게 된다. 물론 의심이 끝없이 지속된다면 믿음은 끝까지 미루어지겠지만, 그러한 의심이 쉽사리 끝나거나 우리가 중간에 의심 자체를 거두어들인다면, 우리는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손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의심과 믿음은 생각 되풀이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생각이 되풀이될수록 믿음이 커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의심이 커질 수도 있다. 생각은 믿음과 의심[밑없음/흔들림]의 사이에 있다.

생각에는 뻗어나가는 방향성이 있다. 생각은 꽉 막히기도 하지만 저절로 흐르는 것처럼 한쪽으로 터져 나가기도 한다. 술 생각은 주어진 어떤 상황 전체가 생각의 흐름을 술 쪽으로 틀기 때문에 일어난다. 날이 궂다든지 문득 옛날에 술 마시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든지 할 때 생각에는 어떤 이나 이 생겨나고, 생각은 탄력을 받아 더 빨리 흐르게 된다. 그러나 그 물이 닿는 곳이 넓고 깊지 않으면 생각의 물줄기는 금세 멈추거나 고이고 만다. 우리는 삶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생각의 성격으로서의 긍정성과 부정성은 생각의 흐름의 갈래를 나타낸다. 행복은 우리의 생각이 긍정의 물줄기를 이루어 나갈 때 피어나는 기분이자 감정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부정적 생각은 개인주의를 거부하게 만든다. 물론 생각은 바뀔 수 있다. 개인주의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까닭은 개인주의가 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개인주의 원칙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개인주의 사상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의 경향성은 일차적으로 감정이나 기분에 의해 조율된다. 보기를 들어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치자. ‘두려운 생각에는 두려움의 기분이 짙게 배어들고, 두려움에 젖은 우리 마음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뜬금없는 예감을 떨치려는 마음가짐을 다지게 된다. 그럼에도 만일 뭔가 뒤탈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이가 크게 다쳐 고생을 하게 되거나, 혹시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거나 하는 등의 커다란 걱정이 밀려들기도 한다. 이때 우리 입술은 앙 다물어지고, 눈길은 빈 곳으로 뻗어가며, 굳어진 얼굴에는 애를 태우는 모습이 와락 번져 나온다.

애끓는 마음이 누그러들면서 우리는 자신이 연락 받은 내용만을 갖고 생각을 곰곰이 해 나가게 된다. 아버지로서의 나는 불확실한 추측이나 부풀려지거나 가공된 상상을 접어두고 들썽거리는 두려운 마음을 억누른 채 아이가 다쳤다는 사실의 뜻하는 바를 곱씹는다. 내가 주어진 사실의 뜻하는 바를 거듭해서 생각하는 동안 내게는 내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깨달아진다. 뜻에 대한 생각은 할 일에 대한 깨닫기로 이어진다. 만일 내게서 이러한 이어짐 사슬이 끊어진다면 나는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내가 두려움의 기분을 이기지 못한 채 점차 어두운 무서움으로 빨려 들어갈 때 일어난다. 만일 내가 무서움에 휩쓸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아이가 되레 크게 놀라기라도 했다면, 그것은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어른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움의 기분과 같은 것을 적절히 잠재워 자신의 할 일들을 올바로 깨닫는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은 기분이나 감정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할 일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방향을 잡아나가기도 한다. 즉 생각은 느낌이기도 하고 이해이기도 하며 앎이기도 하다. 또 생각은 뜻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지만 물음을 맴돌기도 하고 믿음으로부터 자라나기도 한다. 즉 생각은 뜻함이나 바람이기도 하고 의심이나 비판이기도 하며 따짐이 밝힘이기도 하다. 생각에는 그 다다르거나 미치는 거리가 있어 짧거나 길 수도 있고, 얕거나 깊을 수도 있으며,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생각은 말이나 기호를 뒤따르거나 앞세우거나 나란히 갈 수도 있지만, 소리나 노래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출 수도 있고, 그림이나 냄새와 더불어 펼쳐질 수도 있다.

생각은 원리에 근거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보기를 들어 누군가 바람직한 통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다. 만일 그의 생각 갈래들이 뿔뿔이 나눠져 있을 뿐 그에게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둘 가늠자가 없다면, 그의 생각은 섞갈리거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바람직한 통치 모습을 찾으려는 그의 생각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국민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통치가 바람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는 이제 비로소 통치에 대한 여러 갈래의 생각들을 그 으뜸 생각에 비춰볼 수가 있게 된다. 으뜸 생각(메인 아이디어)’은 다른 생각들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생각은 마음에서의 일이다. 생각은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다. 생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가 꿈을 갖는다고 그 꿈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과 같다. 우리는 생각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실제로는 수많은 제약 아래 놓여 있다.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다 된다면 사람에게 무슨 걱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펼쳐 나가는 것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각이 글러먹은[그릇된 생각] 사람은 하는 짓도 올바르지 않다. ‘올바른 생각과는 거리가 먼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생각한 대로 행동함으로써 결국 헛된 길로 빠져들고 만다.

 

3. 생각남[현상학적으로 풀어내기]

 

생각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이다. 생각은 눈을 뜨면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이나 귀가 열리면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소리들처럼 머리가 돌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발생하는 산물들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배고픈 생각이 들고, 몸이 아프면 아픈 생각이 든다. 들어오는 생각들 틈에서 그것들과는 다른 생각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배고픈 생각이 들자 어릴 적 엄마가 끓어주던 김치찌개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 생각과 더불어 입에서 군침이 돌거나 그때에 얽힌 사연들과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생각의 강물을 따라 생각의 뗏목을 타고 마냥 흘러가기도 한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오거나 일어나면 우리는 그 생각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엄마 생각이 너무 거세게 일면 우리는 보통 그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다른 일이나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멍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의 눈은 먼 곳을 보는 듯 초점이 허공으로 향해 있거나 감겨 있고, 두 손은 목 뒤로 깍지를 끼거나 팔걸이의자 위에 척하니 얹혀 있으며, 얼굴은 옅게 웃음 띤 푸근한 표정이거나 그리움에 짙게 물들어 있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 생각이 떠오르면 그는 화들짝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린 채 서둘러 약속 준비에 허둥대곤 한다. 그의 바쁨은 약속 생각이 몰고 온 것이다.

생각이 무엇이든 우리가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문제이다.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 약속 생각은 느닷없이 일어났다. 약속 생각이 난 사람은 그때까지 빠져 있던 앞선 생각에서 재빨리 벗어나 약속에 얽힌 여러 가지 일들을 화닥닥 생각해 내면서 그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한 순서나 방법을 결정한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대충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결정이 끝나면 곧바로 행동이 이어진다. 생각과 움직임 사이에는 아무런 틈도 벌어져 있지 않아서 생각이 곧 움직임이 되고, 우리는 생각한 그대로 곧바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계단을 오르며 발의 움직임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생각과 움직임 사이에 또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반응 지체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약속 생각까지는 생각이 났는데 약속의 구체적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생각을 약속에 집중한다. 생각이 모아질수록 약속과 관련된 내용들도 하나 둘 되살아나고, 그렇게 되살려진 기억들을 더듬어 약속의 정확한 내용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약속 내용을 아무리 생각해 내려 해도 그 내용이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나지 않는 생각때문에 생각의 침묵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것은 누군가 크리스마스이브의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함박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일은 시험을 볼 때 자주 일어난다. 어떤 문제들은 분명 공부를 해서 알고 있는 문제임에도 막상 그 순간에는 공부한 내용이 떠오르질 않아서 알고도 틀리는 수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곤 하지 않던가?

구조적 현상으로서 생각이 난다는 것은 그것이 눈에 보이도록 떠오른다는 것, 즉 밑에서 위로 솟아오르거나 속에서 겉으로 돋아난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 나면 생각이 있게 되고, 생각이 안 나면 생각이 없게 된다. ‘은 곧 생김이다. 생각이 나면 그것은 그것이 놓여 있던 것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것으로서 차이를 갖는 것, 달리 말해, 개별화되고 구별된 것이다. 생각은 머리끝까지, 아니 끝없이 날 수 있다. 생각은 그것이 이는 처음부터 그것이 마무리되어 마감되는 끝까지 그 때[동안]를 갖는다. ‘난 것은 맵시나 모양이나 짜임새나 됨됨이 등을 갖추기 때문에 난 것들 사이에는 보다 멋 있고, 보다 맛 있고, 보다 잘 짜이고, 그 됨됨이가 보다 뛰어난것이 있을 수 있다. 생각은 그것이 나자마자 그것 나름의 차림새를 갖게 된다. ‘나는 것으로서의 생각은 생각하미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의 기미가 보인 뒤에야 생각이 나곤 한다.

생각은 여드름과 같다. 여드름은 사춘기가 되어야 나듯 생각도 조건이 갖춰져야 난다. 배가 고프면 밥 생각이 절로 나듯 에는 어떤 비롯되는 까닭이 주어진다. 이 까닭에는 까닭 없음의 까닭까지 포함된다. 생각이 인다는 것은 희미하거나 약했던 생각발[세기/짙음/불길]이 거세진다는 것을 말한다. 생각은 폭풍처럼 세찰 수도 있고, 산들바람처럼 잔잔할 수도 있으며, 불길이 번지듯 한꺼번에 타오를 수도 있고, 물기에 젖어 잘 타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이 난다는 말은, 빗대어 말하자면, 윷놀이에서 윷이 나오는 것과 같다. 윷 네 가락이 모두 뒤집어지면 윷이 난 것인데, 윷남은 일종의 경우의 수로서 확률적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다만 생각의 경우 그 경우의 수는 윷놀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을 뿐이다. 어쨌든 던져진 윷가락의 결과가 윷을 던진 사람에게 돌아가듯 생각이 또한 그것이 일어난 사람의 것이 된다. 생각이 누군가의 몸이나 머리 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생각은 언제나 누군가의 것이 된다.

생각은 몸 신경의 자극(안에서 터진 것이든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든)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낮은 단계의 생각) 자극(刺戟)은 칼이나 창 또는 뾰족한 어떤 것[찌르개]에 의해 찔림을 뜻한다. ‘찌륵은 무엇인가 겉몸에 닿은 느낌에서부터 몸속에서 발생한 느낌까지 포괄한다. 생각은 감각이나 지각 또는 생각으로부터 촉발되어 출발하고 전이되며 목적지에 도달한다. 촉발(觸發)이다. “자극(刺戟)”닿은 느낌’, 닿낌이다. 닿낌은 몸속이나 살갗의 감각 세포로부터 신경을 거쳐 마리로 주어진다. 나는 어떤 것이 손에 닿은 느낌이나 내 손이 어딘가에 가닿은 느낌을 손 닿낌이라 부르고자 한다. 생각은 온갖 닿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 삶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가슴에 담이 결리는 닿낌이 느껴지면, 느끼미는 즉시 담을 피하기 위한 몸놀림을 펼칠 뿐 아니라, 담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방책들을 생각하거나, 담에 결렸을 때 겪게 될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사람은 나쁜 닿낌은 피하려 하지만 좋은 닿낌은 더욱 누리려 한다. 사람은 삶지기[-지키미]’이자, 주어진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누리꾼[-누리미]’이기도 하다.

생각이 난다는 말은 그 생각이 어떤 전체로부터 솟거나 돋거나 하여 두드러지는 것, 그로써 전체에서 따로 떨어지는 것,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구분되지 않은 채로 있던, 그러나 구별될 수 있는 전체로부터 따로 하나가 되는 일은 마치 아이가 태어나는 것, 즉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들어 있다가 그곳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 한 사람으로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나는 것이라면, 나온 생각이 포함되어 있던 전체는 무엇인가? 생각의 자궁, 즉 생각의 덩어리[태반]는 무엇인가? ‘생각들의 전체 집합인가? 이 전체 집합이 곧 마음인가? 생각은 어디에 배어 있었는가?

생각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먼저 앉아있었거나 누워있어야 한다. 만일 생각남이 일종의 깨어남과 같다면, 생각은 깨어날 수 있기 위해 먼저 잠들어 있어야 한다.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잠들어 있는 생각들은 눈에 덜 띄거나 안 띈다.’ ‘눈에 띔앞이나 가운데로 두드러져 나옴’[두드러짐]을 뜻한다면 눈에 안 띔뒤나 옆[배경]으로 물러나 있음을 뜻한다. 한 생각이 바닥에서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늘[공중(空中)]로 오르면 그 생각은 이리저리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 떠오른 생각은 그것을 불어 올리는 바람[부력/마음/감정]이 멎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만, 그 생각이 둥실 떠올라 있는 동안은 이리저리 움직여질 수 있다.

닿낌이 주어지고, 그로부터 첫 생각이 일어나면 그 하나의 생각은 다른 생각들의 닿낌이 되어 생각들이 줄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다. 생각은 사슬지어 줄줄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물처럼 넓게 출렁이기도 하며, 섬처럼 드문드문 삐져나오기도 한다. 생각의 일어나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생각의 흐름에 휘말리게 되고, 심지어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각 속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몸 또한 그 사로잡힘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마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몸이 공포에 의해 조율되듯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생각이 든다는 것은 생각이 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에게는 사과의 모양과 색깔, 맛과 냄새 그리고 그것을 먹을 때 나는 소리(사각사각), 과수원, 햇빛, 농부, 사과를 사고파는 시장, 사과에 얽힌 추억들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어떤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생각이 들어와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에 들어온 생각이 말해 주는 바가 많을수록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들어오거나 일어난 생각은 사람이 몸 느낌이나 기분(감정) 그리고 이해했거나 하고자 하는 바 등을 마음으로 한데 결어 엮은 것이다. 생각 안에 함께 결린 것들은 서로 어긋매끼게 엮여 짜인다. 이렇게 한데 엮인 것은 서로 끼이거나 서로 걸쳐지거나 서로 맞물려 그 짜임새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생각에 얽어지는 가닥들은 눈코입귀맛살갗의 바깥가닥들과 몸 안 구석구석에서 전송되는 안쪽가닥들이고, 이 안팎 가닥들이 씨줄날줄처럼 결리어 엮임새를 이루어낸다. 생각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때마다 만들어진 엮음새이다. 생각은 마음에 안개처럼 마음에 일어난 것들을 한데 겯거나 붙잡는다. 여기서 일어난 것은 머리에 떠오른 것을 말한다.

우리는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흔히 깨닫다는 말로 표현한다. 깨닫기는 +달음으로서 넋 - [, , , ] 안에 깃들여 몸을 조종하고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는 임자 - 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바가 사라져 넋이 본디 있던 것들에 걸림 없이 닿을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한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 깨달아진 것의 생김새[한데 엮인 모습]’이다. 생각은 결코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복수이다. 생각에는 언제나 공통 감각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누군가 어떤 생각을 가지려면 먼저 그 생각 자체가 일어나야 하고, 그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그 생각이 떠나지 말아야 한다. 즉 일어난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생각들은 겹겹이 그리고 켜켜이 다양한 방식으로 쌓이고, 그 생각들이 다시금 머릿속 공중[빈 마당/작업대]에 떠오르고, 그렇게 떠오른 것들이 서로 맺어지거나 엮이거나, 또는 강제로 엮어나감으로써 생각의 씨줄날줄이 짜여 나간다. 우리가 이러한 씨줄날줄을 짜나가는 것이 곧 생각하기에 다름 아니다.

 

4. 양떼 비유

 

이러한 현상[낯짝]을 설명하기 위해 들판에 노니는 양떼 비유를 들어본다. 끝없이 너른 들판에 여기저기 양떼가 흩어져 있다. 양치기는 양떼를 돌보긴 하지만 양들을 직접 붙잡아 움직일 수 없고, 양치는 막대기나 목소리 등과 같은 간접적 수단을 통해 양들을 통제한다. 하지만 양들은 양치기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일 양치기가 없다면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거나 사나운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양치기는 이리저리 날뛰는 양떼를 다잡아 다스리기도 하지만, 양떼를 어느 한 곳으로 몰아가거나 몰아넣기도 한다.

엄마 생각은 엄마와 관련된 모든 양들이 떼를 이루어 무리지어 있는 모양과 같다. 엄마 생각이 마치 한 무리의 양떼처럼 무리무리 옹기종기 웅성웅성 법석법석 모여 있다고 치자. 엄마 생각의 양떼가 들판에 나타나는 순간 양치기는 그 엄마 생각 양떼를 돌봐야 한다. 양치기가 그 양떼 가운데 있는 어느 양 한 마리를 불렀다 치자. 그런데 그 양이 양무리 한 가운데 있다가 그 부름을 듣고 양치기에게로 나오려 하나 서로 똘똘 뭉쳐 있으려 하는 다른 양들의 움직임 때문에 길이 막혀 무리 바깥쪽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치자. 이때 양치기는 자신이 부른 양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엄마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게 된다. 반면 갑자기[문득, 느닷없이, 불쑥, 밑도 끝도 없이] 부르지도 않은 다른 양 한 마리가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치자. 보기컨대 엄마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치자. 그때 양치기는 이 소리 양을 소중히 보살피거나 아니면 그 양을 다시 무리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만일 양이 무리로 돌아가길 거부한 채 벋댄다면 양치기는 그 양이 돌아갈 때까지 그 양을 달래 돌려보내기 위해 씨름을 해야 할 것이다. 즉 엄마 웃음소리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엄마 생각 양떼가 무리지어 나타나 양치기가 그 양떼를 선물 생각의 울타리로 몰아가려 한다 치자. 양치기는 엄마양떼를 선물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엄마가 기뻐할 선물을 골라내려 애를 쓸 것이다. 만일 양치기가 선물 울타리에서 엄마에게 어울리는 어떤 선물을 발견한다면, 양치기는 곧바로 그 선물을 구입하여 엄마에게 전해 드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양치기가 엄마 양떼를 몰고 가던 길에 다시금 뜬금없이 약속의 양떼가 나타났다 치자. 이 약속 양떼는 까맣게 잊혀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양치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치기는 잊었던 약속을 되살리면서 엄마 양떼를 버려 버리거나 나중을 기약하며 돌려보내거나 일시에 싹 잊어버린 채 약속 양떼를 돌보는 데 정신이 팔릴 수도 있다. 양치기는 약속 양떼를 약속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 쪽으로 몰고 갈 것이다. 만일 이때 엄마 양떼 가운데 몇몇 양들이 물러나기를 거부한 채 길을 가로막고 선다면 양치기는 그 가로막고 선 양들에 붙잡혀 애를 먹게 될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 몇 마리 양 때문에 약속을 취소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생각은 양떼와 같아서 어느 정도 길들여져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야생성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생각들은 살아있는 양떼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길들여진 가축으로서 양치기의 명령에 순종하기도 한다. 양치기는 말과 그림 또는 다양한 상징들의 도움을 받아 양들을 길들인다. 양 길들이기는 양떼를 몰고가야 할 길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양떼를 푸른 초원과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데 양치기의 사명이라면, 양치기는 양떼를 살찌우고 그 털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일 양치기가 엄마 양떼 속에 비비대고 있는 어느 양 한 마리를 불렀고, 그 양이 바깥으로 나와 양치기 앞에 섰는데 그 양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면, 보기컨대, 다리도 없고 눈도 없고 털도 듬성듬성 빠지고 볼품이 하나도 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면, 양치기는 그 양을 부른 걸 후회할 것이지만, 반대로 자신을 뽐내며 나타난 양이 찬란한 햇빛 아래 반짝거리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면, 양치기는 그 양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뿌듯하고 벅찰 것이다.

길이 잘 든 양떼는 양치기의 말을 잘 듣게 되고, 따라서 양치기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젖과 털과 고기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새로운 새끼들도 울타리 가득 낳아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에 자유롭게 뛰노는 양떼들은 그것들을 잡아먹는 늑대에 대한 무서움 없이 안전하게 살아갈 것이다. 반면 양치기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중뿔난 양떼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마침내 늑대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로써 양치기는 양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해 가난뱅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양치기는 모습을 갖지 않는다. 넋이 곧 양치기이다. 양떼는 밖에서 사온 것들이다. 양떼들은 경험의 산물들이다. 양들은 양치기보다 더 예민하게 바깥의 신호들[닿낌/다음/닿임; 닿은 느낌(감각)]을 들을 뿐 아니라 더 빠르게 맞대[반응/맞닿기]하거나, 아니면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되먹임 체계를 갖추고 있다. 양떼는 양치기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