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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신약 성경 번역_홍혜정

사이박사 2014. 5. 16. 15:37

1521년 4월 보름스Worms 제국 회의에서 종교 개혁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한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추방 명령을 받았다. 독일 내에 설 곳이 없었던 루터는 작센 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제후의 도움을 받아 아이제나흐Eisenach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 몸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며 생활을 해 나갔다.

 
 쉼표 마침표: http://www.urimal365.kr/?p=5651
 


 


1541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출판된 루터 성경본
 
루터가 번역한 신약 성경,
독일의 ‘읽기 혁명’을 이루다

 

루터는 성탄절을 며칠 앞둔 1521년 12월 21일,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단했다. 놀라운 것은 루터가 독일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지 11주 만에 220쪽에 달하는 신약 성경을 모두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는 1522년 3월 번역한 성경 원고를 몸에 지닌 채 바르트부르크를 떠났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 1522년 9월, 3천 부의 신약 성경을 인쇄했으나 금방 모두 판매되었으며, 엄청난 수요 때문에 3개월 후 다시 인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루터의 성경 번역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22년부터 1546년까지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만 신•구약 성경이 10판 인쇄되었으며, 신약 성경만은 따로 80판이 인쇄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 전역에서는 260판의 성경이 인쇄되었으며 1712년부터 1883년까지 할레Halle 지역에 있는 성경 인쇄소에서만 거의 580만 부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읽기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독일의 거의 모든 계층에서 성경을 읽게 된 것이다.

 

루터 당시 이미 독일에는 15개의 독일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으므로 성경의 독일어 번역 자체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단순히 단어별로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쓰는 말, 의미가 정확한 말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루터는 마치 해변가에서 수많은 조개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조개를 찾아내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껏 들여다보며 성경 번역을 해 나갔던 것이다.

 
 
 
루터의 성경 번역이 만들어 낸
독일어의 변화

 

루터가 성경 번역을 통해 독일어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로써 독일어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다. 또한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를 통해 독일어가 아름다워지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아베 마리아, 그라티아 플레나Ave Maria, gratia plena”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마리아는 은혜가 꽉 찼더라.”이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은 ‘꽉 차다’라는 말을 ‘배가 꽉 차다’, ‘맥주통이 꽉 차다’라는 뜻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루터는 이 말을 “마리아는 은혜로 충만하더라.”로 번역했다.

 

이러한 루터의 작업으로 인해 독일어 어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한 예로 독일어로 ‘직업’을 의미하는 ‘베루프beruf’는 루터 당시에는 목사들에게만 사용되는 어휘였다. 그러나 루터는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직종에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독일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 당시 독일에는 20개 정도의 지역어가 존재했다. 이들은 크게 북독일어, 남독일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루터는 두 지역의 경계인 비텐베르크에 살았기 때문에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알았다. 루터는 두 지역 언어의 요소를 모두 지닌 단어로 성경을 번역하고자 했다. 또한 남독일에서 발간된 루터 번역본에서는 남독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북독일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남독일에서는 ‘트레넨Tränen’이라고 하고 북독일에서는 ‘체레Zähre’라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서로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 피지배층, 남녀노소 등 다양한 세대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루터 성경 번역본은 독일어의 통일에도 기여를 했다. 당시 독일은 영국런던이나 프랑스파리와는 달리 지방 분권적 제후국이었던 탓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없었고, 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집권자나 집권 세력도 없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 번역본의 출현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인들은 통일된 언어로 말하게 되면서 비로소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숨어서 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과 루터의 방 사진
 
 
 
 


 

루터의 독일어
모든 독일인의 언어가 되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쓰인 독일어가 모든 독일인의 언어가 되기까지는 약 3~4백 년이 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 성경은 독일에서 5가정마다 1권씩 비치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여서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동네의 공터에 모여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 주는 성경을 들었다. 이에 루터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도시의 시장이나 지배층에게 학교를 세워 달라고 했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오랫동안 독일 내 개신교 지역 학교에서 유일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목사들은 설교에서 루터 성경본을 인용하였다. 레싱Lessing, Gotthold Ephraim, 헤르더Herder, Johann Gottfried, 괴테Goethe, 하이네Heine 등 루터의 독일어를 칭송한 독일 작가들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서 루터가 쓴 독일어는 비로소 일반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독일의 동화 작가 야코프 그림Jakob Grimm은 1822년, 루터의 독일어는 그 순수함과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해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루터는 1534년 성경 번역본에서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 시작했다.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은 17세기 들어 다른 유럽어에서는 사라졌지만 독일어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루터는 독일사뿐 아니라 독일어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루터는 독일어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독일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언어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de.wikipedia.org/wiki/Wartburg
 
글_홍혜정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독일 함부르크대학 역사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함부르크에서 프리랜서 통ᆞ번역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함부르크 한글 학교에서 독일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