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조각품부터 가로등까지 시민 직간접 참여 설치
미국 등 인프라로 인식 투자 늘어…예산 1% 배정도
국내선 안양 예술공원화 실험…법 개정안 국회에
1980년, 미국의 서울 워싱턴에서 새로 설치할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조형물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1421건이나 되는 응모작에서 뽑힌 당선자는 뜻밖에도 예일대학 건축과 4학년에 재학중인 마야 린이란 여학생이었다. 더욱 뜻밖인 것은 수상작의 콘셉트였다. 조형물은 공원 안에 검은색 돌벽을 만들고, 그 위에 베트남전 전사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전사자들의 이름에는 계급 구별도 없었다. 우뚝 솟은 탑이나, 용사들의 전투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재향군인회를 중심으로 군 쪽이 이 작품을 반대하고 나섰다. 전사자들의 숭고한 희생장면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민단체들이 이 작품을 지지하며 일어났다. 논란 끝에 작품은 결국 원래 계획대로 설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시민들의 지지가 작품을 살린 것이다. 1982년 완공된 이 추모조형물은 이후 워싱턴에서 가장 성공한 기념물로 자리잡으며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왜 이 작품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포함한 모든 과정이 그 바탕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야 린만의 작품이 아닌 시민 모두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실제 논쟁에 참여한 시민들 모두 이 작품을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이고, 그래서 시민들은 이 작품을 “내 작품”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졌던 것이다.
린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공공미술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 성공사례로 일컬어진다. 특정 소유주에 속해 소수만 감상하게 되는 일반 미술과 달리 공공장소에 놓여 공익적인 목표를 구현하면서 모두의 미술품이 되는 미술이 바로 공공미술이다. 개인의 미술이 아닌 사회의 미술,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에 살맛을 더해주는 미술, 칙칙한 회색도시에 은근한 문화의 향기를 덧씌우는 미술이 바로 공공미술이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도시를 문화도시로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꼽힌다.
공공미술은 그 범위가 실로 넓다. 빌딩 앞 조각품부터 각종 기념조형물, 가로등이나 보도블록 같은 각종 공공설비 디자인, 그리고 공공적 내용의 퍼포먼스미술까지 포함된다. 일반 미술과 달리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 전체의 소통과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엇보다도 공공미술은 도시 전체의 품위와 멋을 높이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세계 주요 도시들은 도시의 이미지 변신이나 거주의 질을 높이는 데 공공미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쇠락한 공업도시였던 리버풀과 게이츠헤드다. 리버풀은 문화도시로 변신하기 위해 리버풀 출신 최고 스타인 전설적 록그룹 ‘비틀스’를 내세웠다.
그러나 비틀스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공공미술에 집중 투자해 새로운 도시 이미지를 창출했다. 도시를 대표할 이미지가 없었던 게이츠헤드도 앤터니 곰리란 작가의 거대한 조각 〈북의 천사〉를 시의 랜드마크로 내세우는 한편 사람들만 건널 수 있는 곡선 모양의 독특한 다리 ‘밀레니엄 브리지’로 도시공간에 포인트를 주어 새로운 도시로 이미지를 바꿨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마지막 새도시로 개발된 ‘배터리 파크 시티’는 공공미술로 문화적 이미지를 높여 단지의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한 경우다. 도시설계 단계부터 공공미술을 핵심 목표로 설정했고, 분야별 전문가들이 처음부터 협업체제로 작업해 새로운 도시로 탄생했다.
선진국들은 공공미술 자체를 중요한 사회인프라로 인식하고 투자를 늘려가는 추세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일부를 공공미술에 의무 배정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이제는 그 범위를 모든 공공공간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국이 도입한 ‘사회기반시설향상법’(CIP)은 모든 공공 기능 시설을 만들고 운영할 때 예산의 1%를 공공예술로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공공미술이란 개념 자체에 무관심했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서서히 공공미술이 삭막한 도시를 살맛 나는 도시, 문화도시로 만드는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 1월 문화관광부 예술정책과의 공공미술 태스크포스팀이 근간이 되어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그런 경향을 반영한다. 전문가들로 짜인 추진위원회는 앞으로 실제 사업을 통해 공공미술 정책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이끌게 된다. 지자체 차원의 시도도 나왔다. 안양시는 도시 전체를 예술공원으로 만든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하고 안양유원지를 첫 실험대상으로 삼아 새로 꾸미고 있다.
술계에서는 공공미술에 주목하는 미술가들이 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 그 장소를 무대로 미술적 실험을 하는 형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들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이주노동자 인터넷방송국을 차려 비물질적인 형태의 예술적 소통을 추구한 박경주씨의 작업이나, 서울 목동의 예술인회관을 점거하는 퍼포먼스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작업을 펼친 오아시스 프로젝트 등은 새로운 유형의 공공미술로 평가받았다. 작가 이경복씨가 기획해 일곱 팀이 300만원씩으로 일곱 동네에서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벌인 ‘300만원 프로젝트’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공공미술이란 개념을 알렸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공공미술법 개정안이다. 문예진흥법 안에 건축물 미술장식 조항으로 있던 것을 공공미술 조항을 신설해 그 개념을 장식 수준이 아니라 공공미술로 넓히는 것으로, 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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