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뛰빼[뛰어나고 빼어남])/이경복(조각가)

공공미술제 도입 방침에 미술계 반발

사이박사 2020. 2. 12. 21:47

공공미술제 도입 방침에 미술계 반발… “비리 척결” VS “창작활동 위축”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을 지나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 검은 거인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걸리버를 연상시키는 듯한 이 거대한 설치 미술품은 독일 작가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이란 작품이다.

흥국생명 빌딩뿐만 아니라 규모가 어지간히 큰 건물이라면 옥외 조각품 하나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미술품 대부분은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제도’에 따라 설치된 작품들이다. 물론 건축주가 의무감이 아니라 순수하게 미관을 위해 설치된 작품도 있지만 많은 옥외 미술품들이 이 제도에 따라 설치된 것은 사실이다.

“의무제는 탈세의 온상” 지적

이 건축물 미술장식제도가 미술계 안팎에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 문화관광부에서는 이 제도를 공공미술위원회 설치와 운영을 핵심으로 하는 공공미술제도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미술협회 등 미술계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제도’는 1982년 도시문화 환경개선과 미술창작활동 진흥을 위해 연면적 1만㎡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 비용의 1% 이하를 미술장식에 사용하도록 하면서 도입된 제도다. 처음에는 ‘1%법’으로 통했지만 이후 민간 건축주의 경우 건물을 짓는 것과 함께 조각이나 벽화·서예·회화 등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데 총 공사비의 0.7%를 사용하도록 조정했다.

서구의 ‘예술을 위한 퍼센트법’(percent for art ordinance)’을 모델로 한 이 제도는 시작할 당시에는 권장사항으로 출발했지만 1995년부터 의무사항으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제도는 그동안 시민들에게 삭막한 도시공간에서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도시문화 환경개선에 어느 정도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IMF 이후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 있던 국내 미술시장에 만약 이 제도마저 없었다면 제대로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할 만큼 어려움을 겪었을 작가들도 많았다는 것이 미술인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95년부터 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으로 바뀐 이 제도는 일부 부작용이 지적되기도 했다. 건축주와 미술가가 입만 맞춘다면 이중계약에 의한 비자금 조성이나 탈세가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리베이트와 공무원 및 심의위원 매수, 공사비 지급에 관련한 뇌물 공여 등은 이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부작용의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었다.

실제로 2000년 6월 수원지검 특수부는 건축물의 조형물 설치를 둘러싸고 거액의 리베이트를 주고받은 화랑 대표와 건축미술심의위원 및 공무원 등 22명을 적발한 적이 있다. 당시 사건은 우리 공공미술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유명 조각가와 화랑 대표, 건축주, 미술품 심의위원, 공무원 등이 금전적 대가를 약속받고 미술품을 무더기로 거래하려다 덜미가 잡혔는데 오간 리베이트의 규모가 무려 15억 원에 달했다.



건축주 입장에선 당연히 0.5%

문광부 예술정책과 김갑수 과장은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미술에 대해 정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 브로커가 개입되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미술품 가격의 20~30%가 리베이트로 오갔던 경우가 많았다”면서 “최근에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같은 관행은 아직도 여전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직접적으로 표면화된 부작용 이외에도 이 제도는 시행과정에서의 편법동원과 유명무실한 심의절차, 저질작품 양산 등으로 인해 많은 우려를 낳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몇몇 작품들을 놓고 되레 도시미관을 해치는 ‘시각공해’니 ‘문패조각’이니 하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오갔다.

이번에 문광부가 건축물 미술장식제를 공공미술제로 바꾸는 내용의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미술제에 따르면 건축주는 조형물을 직접 선정하고 설치하는 대신 ‘공공미술위원회’에 건축비의 일정비율을 기금으로 출연하거나 시·도지사에게 의뢰해 공원 등 공공장소에 회화 등 환경미술작품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문광부는 현재 시·군에 설치된 심의위원회도 광역시·도 단위의 공공미술운영위원회로 개편한다는 방침이다.


문광부에서는 공공미술제도의 기금관리 문제나 세부운영 방안, 현행 민간 건축비의 0.7%로 돼 있는 비용 문제 등은 향후 논의할 예정이며 국가와 지자체, 공공기관 건축물의 부담 비용은 1% 이상으로 상향조정할 계획이다.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전환하겠다는 문광부의 이같은 계획에 대해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한국화랑협회 등 1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한국공공미술협의회’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왜 민간부문에 책임 떠넘기나

공공미술협의회는 지난 5월 7일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는 “작년 5월 건축물 미술장식제 개선안과 관련해 문광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도 건축주가 0.7%로 직접 설치하거나 0.5%로 기금납부하는 소위 ‘옵션기금제’와 ‘공공미술위원회의 권력화’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위축시키거나 미술시장 축소, 리베이트의 재생산, 부정·비리의 만연 등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어 대다수 미술인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었다”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지 꼭 1년 만에 오히려 그 당시보다 더 개악된 상태로 부활했다”고 비난했다.

한국미술협회 이영길 사무처장은 “문광부 안에 따르면 민간 건축주의 경우 현재 총 공사비의 0.7%를 미술장식품에 사용하는 대신 할인율을 적용해 0.5% 안팎의 기금을 출연해 기타 공공성 있는 장소에 공공미술위원회가 선정한 작가의 작품을 설치하게 돼 있다”면서 “이같은 조건이라면 어느 건축주가 따르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사무처장은 또 “이밖에도 건축주는 자신이 0.7%를 내서 작품을 설치할 때도 작품의 의뢰나 작가선정을 공공미술위원회에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건축주에게 이는 일종의 협박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서 “어차피 미술품을 직접 선정해 설치하더라도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심의를 받아야 했던 건축주로서는 가급적 편한 방법을 선택할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예원화랑 염기설 대표는 “문광부에서는 리베이트나 브로커 문제를 거론하지만 요즘 대기업들이 얼마나 회계를 투명하게 하고 있나”라고 반문한 뒤 “문광부 안은 공공미술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하는 ‘줄서기’ 등 또 다른 문제점들을 양산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공공미술이란 결국 공공기관이 자체 예산을 갖고 나서야 할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공공미술제라는 ‘이상한’ 법을 들고 나와 이를 민간부문으로 떠넘기려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즉 건축물 미술장식공공미술은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진정 문화발전을 위한다면 국고를 사용한 ‘공공미술제도’를 별도로 만들되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


지난해 건축물 미술장식에 소요된 금액은 약 70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열악한 환경에 놓인 미술품의 창작 주체인 작가와 매개 주체인 화랑에 상당한 도움이 됐던 이 돈을 사이에 두고 정부와 미술계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미술품 덕에 건물이 확 사네

“광화문 동화면세점 옥외 환풍구는 돌과 스테인리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덕수궁미술관 정준모 관장의 말이다. 정 관장은 “이 환풍구는 비록 미술작품은 아니지만 기능성과 조형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건축물 미술장식제 때문에 억지춘향식으로 설치한 대다수 미술품보다 오히려 낫다”고 말했다. 그만큼 우리나라 건축물에 설치된 미술품의 전체적인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중에는 뛰어난 평가를 받는 미술품들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된 ‘해머링 맨’이나 같은 빌딩 내부에 설치된 독일 잉고 마우어의 ‘홀론즈키’, 강익중 작가의 ‘아름다운 강산’, 신현중 교수의 ‘아름다운 우제르를 위하여’ 등은 이 빌딩을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이 빌딩을 찾은 사람들은 1층 로비에 인테리어를 위해 설치된 초대형 바코드까지도 미술작품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미적 감각이 충만한 공간이다.

흥국생명 허정민 홍보팀장은 “빌딩에 극장과 갤러리 등 문화시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과 도시미관 등을 위해 건축물 미술장식제도에 의해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작품 이외에도 미술품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앞에 세워진 조형물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 ‘아마벨’은 뛰어난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모양 때문에 결국 철거논란을 부른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최근 설치된 미술품 가운데서는 부천 상동 홈플러스 외벽에 설치된 이경복 화백의 초대형 벽화가 주민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가나화랑의 박수진 부장은 “가로 65m, 높이 25m의 이 작품은 작업을 하다보니 오히려 심의가격을 초과한 경우”라고 말한 뒤 “건축주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들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최성진 기자 cs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