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전례 없는 관심과 특수를 누리는 동시에 사상 최악의 위기국면에 놓여 있다. 인문학의 특수는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내세우고 인문학을 그 중심으로 지목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숙한 선진국이 되고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문화적 토양을 일구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인문정신문화”라는 대통령의 인식은 문화융성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설치하고 그 안에 별도로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문화체육관광부에도 문화기반국과 인문정신문화과가 신설되었다.
이 같은 정부의 행보 속에 한 재벌그룹이 인문학을 위한 메디치가를 자처하며 인문학 전파에 수십억을 쓰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인문학과 인문교육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함께 곳곳에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등 민과 관 모두에서 인문학 열풍이 표면적으로는 뜨겁게(?) 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인문학의 현실은 고사 위기를 넘어서 비루한 운명에 처해 있다. “취업은 했니?”라는 질문을 받은 학생이 “저 문과인데요”라고 답하자 아무 말 없이 안아준다는 최근 인터넷에서 회자된 그림이 단적으로 그 처지를 웅변해준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에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공계와 경상계 출신들로 자리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인문학 전공자에게는 아예 응시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에서 많은 인문학 관련 학과를 두지 않고도 인문학의 저변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으며, 국가적으로도 속도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며 4천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고 밤을 새우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다녀도 일할 곳이 없는 것이 인문학 전공자의 현실이라는 대그룹 회장 겸 대학이사장의 칼럼에서 인문학의 위상과 실상은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최근 한 ‘인문학 정책포럼’에서 우리 사회의 외형적인 인문학 진흥책이 현실에서는 ‘연구비 수주형 인문학’ ‘관주도 행사형 인문학’ ‘평생교육 차원에서의 교양교육으로서의 인문학’ ‘가진 자들의 시혜성 전시형 인문학’으로 전락했다는 한 발표자의 비판에 귀 기울이게 된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정부의 정책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하고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공계, 상경계, 인문계 가운데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각 학문이 균형 있게 성장, 발전하고 시대에 맞게 우수한 적정 인력이 대학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다시 거기서 배출된 인력이 사회 각 분야에 고루 진출하는 것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연구자들을 위한 생계형, 정부의 전시성, 기업의 시혜성 인문학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인문학이 왜, 어느 정도나 필요한지에 대한 깊이 있는 숙고와 합의가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인문학을 전공하는 미래세대에게 그에 맞는 진로와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의 요구에 맞춤한 인문학을 교양 수준으로 익힌 이공계와 상경계 학생들을 양산하는 장소로 대학을 몰고 가는 지금의 상황과 그것이 낳게 될 끔찍한 미래, 그리고 인문학 전공자에게 취업 응시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위선적인 사회현실이 진짜 인문학의 위기인 것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인문(人文)’이란 사람이 살아오고 또 살아갈 삶의 무늬를 가리키며 인문학은 그 삶의 무늬와 결을 살피고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보다 조금 앞서 나가서 시대를 기다리는 일을 ‘창의적’이라고 부르고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놓고 자유롭게 꿈을 꿔보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한다”는 최진석 교수(서강대)의 말처럼 정부와 기업이 그토록 한목소리로 외치는 국가 경쟁력의 동력인 창의성과 상상력이 발아하고 싹틔우고 열매 맺는 토양이자 생산기지가 바로 인문학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반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스티브 잡스나 “인문학이 없다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는 빌 게이츠의 말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이들이 가리키는 대상인 인문학은 이처럼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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