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7 18:25 수정 : 2014.06.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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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요조 영화 연구자 |
박유하 교수의 저서 <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간 박유하 교수의 저술활동에 관심을 가져 왔고 이 책이 단순 친일로 매도되는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지지하기가 어렵다. 불편함은 민족주의 서술을 반박하는 예시들 때문이 아니라, 반복되어 강조되는 ‘진정한 화해’와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실체’에 대한 강한 의지 때문이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사실이 전시 성노예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다고, 그(녀)들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책이 비판하는 대로 한국의 민족주의나 일본의 우익논리가 여성들을 대표할 수 없는 것처럼, 책이 예시하는 민족주의 서술을 거스르는 위안부들의 일화나 일본 양심세력의 화해의 의지 역시 이 문제의 실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서술을 해체하고 약화시키는 기능은 할 수 있지만, 이전 가치를 대체하는 대표적 진실의 지위로 등극할 수는 없다. 또한 표상과 개인을 혼동하는 것 역시 문제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술에 의해 “끌려간 순결한 소녀 - 투쟁하는 할머니”로 위안부 피해자의 사회적 표상이 단순화되었고 그 서술에 부합하지 않는 위안부 피해자의 진술과 주장은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책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이 대표적 표상이 ‘일부
할머니’이고 ‘다수의 다른 할머니들’이 진실과 실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한 명의 여성, 소수자 주체의 입장과 기억, 욕망은 일원화되지 않는다. 이 가변적일 수 있는 피해 당사자의 입장을 가공하는 것이 이들의 사회적 표상에 관여하는 사회의 가치관과 욕망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를 사유할 때 그 표상 자체보다 종종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유하고자 하는,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이다. 책은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을 민족주의로 읽어낸다. 하지만 ‘화해의 의지를 가진 일본 내 양심세력’들에 대해서는 선의와 화해의 의지를 강조할 뿐 그들의 가치관 역시 현재의 고정된 “위안부 상”을 만들어내는 데 참여해 왔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개인들의 선의를 의심하거나 일본 비판과 흔히 결부되는 ‘혼네’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후 일본의 좌파 영화감독들은 재일동포와 조선인들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고 사회적 약자로서 환기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들에게 ‘조선’은 근대 일본 국가가 정상화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모순의 집약으로, 약자인 조선인을 대변하는 것은 전범국으로 상처 난 남성-민족-국가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하라 가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
전신소설가>(全身小說家)는 일본의 대표적 좌익경향 소설가 이노우에 미쓰하루의 말년을 다룬다. 이노우에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당에서 제명되었고 좌충우돌 반골의 개인사를 자부심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후 그가 진술했던 과거 개인사가 거짓임이 밝혀진다. 특히 그가 사회적 약자와 일본의 모순에 대해 눈을 뜬 계기로 회상했던 조선인 유곽에서 사는 소녀와의 첫사랑은 완전한 허구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전후 일본 남성 좌파 지식인들의 정체성과 윤리가 조선, 특히 조선 여성을 낭만적으로 타자화시키며 형성된 것임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제국의 위안부>는 또 하나의 진실의 대리자를 자임하는 대신 그것을 그 누구도 자임할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에 집중했다면 위안부 피해자의 표상에 대해, 그리고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의해 재단된 식민지 기억에 대해 더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황미요조 영화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