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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자란 과정_최은경

사이박사 2014. 5. 21. 12:58

  • 말의 역사 1 세계어로서의 영어 1 영어의 태동
     
     

    지구상에는 7천여 개의 언어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각 언어를 사용하는 7천여 이상의 민족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민족들의 의사소통의 편리를 위해 일각에서는 공용어를 지정해야 하고, ‘영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렇게 세계인들의 공용어로까지 주목받고 있는 영어 또한, 어느 작은 민족의 언어일 뿐이었다. 그런 언어가 어떠한 흐름 속에서 세계의 공용어로 오르내리는 오늘에 이르렀을까. 그 흐름을 통해 우리말의 현재 위치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세계에는 온갖 형태와 특성을 지닌 언어가 수천 개 있다. 이 중에서 많은 언어들이 다양한 이유로 사용자가 감소하여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소멸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는 생명체가 진화하는 것처럼 장기간에 걸쳐 탄생과 성장, 쇠퇴기를 경험한 후에 소멸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즉 모든 언어의 생성과 소멸에는 역사가 있다.

     

    우리는 종종 희귀 언어들의 위기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만난다. 대만 원주민들의 사라져 가는 언어인 ‘초우어’, 멕시코 산골 마을의 전통 종교 의식 진행 때 주로 사용되던 ‘북부 토토나코어’,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사용되는 ‘블라슈키어’, 아프리카 서부에서 구사되던 ‘카리푸나어’ 등은 심각한 위기 언어의 예이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언어가 있는 한편 최전성기에 있는 언어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실상부한 세계어 ‘영어’이다.
    ‘하늘 아래 모든 지역의 지류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바다’라고 영어를 묘사했던 에머슨Emerson의 말대로 영어는 세계 방방곡곡에 그 뿌리를 내려 막강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영어는 영국인 또는 미국인의 모국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큰 나무에서 뻗어 나와 그 잔뿌리까지 굵어져 싱가포르, 홍콩, 호주,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 나아가 인도, 아일랜드 등지로 힘차게 그 영역을 넓혀 왔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많은 나라가 영어를 제2 국어로 혹은 제1 외국어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살펴보아도 영어는 외국 관광객을 태운 한국의 택시 기사를 비롯하여 의사, 변호사, 어부, 광부, 공장의 근로자, 보험설계사, 바나나 재배자, 구두 수선공, 컴퓨터 해커의 소유물이 되어 사용 범위와 다양성이 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지 않은가! 실상 영어는 모국어 화자의 품을 떠나 만인의 의사소통 도구로 가상 공간까지 넘나들고 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영어는 누구의 소유물인가?
    영어는 부자와 빈자, 남녀노소 세계인 누구에게나 속한다. 그러나 이들이 반드시 좋아서 모국어보다 영어를 우선시하게 된 것은 아니다. 세계 도처에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영어 사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영어는 생존을 위한 선택인 것이다.
    또한 영어는 모국어 화자보다 비모국어 화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언어이기도 하다. 세계 역사를 더듬어 볼 때 한 언어가 세계 방방곡곡을 지금처럼 누비고 다닌 적은 없었다. 실로 영어는 지구인의 대표적인 언어, 최초의 세계어가 되었다.
     

    이렇게 영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번성하게 된 데에는 경제적인 배경이 가장 크다. 영어의 영토는 그 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의 세력만큼 확장해 왔다. 물론 언어 자체의 특성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조금의 운도 따라야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영어의 태동에서부터 융성에 이르는 세계화 과정을 살펴보고 그 과정 속에 다듬어진 영어는 세계어가 되기 위해 어떤 특성을 갖추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영어의 태동
     

    2,000년 전 시저Julius Caesar가 영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영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500여 년이 지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인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주트족Jutes 등이 해안을 침공하여 정착하면서 침략자들의 언어인 초기 영어는 외국어의 외모를 차차 벗어 버리고 영국인이 애용하는 모국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어의 시작인 셈이다.
    앵글로 색슨 방언에서 시작된 영어는 이후 1066년 영국을 침공한 노르만족 언어인 프랑스어, 다양한 라틴어, 그 외에 많은 세계 언어가 섞이며 그 깊이와 다양성을 띠게 된다.

     

    영어의 역사는 보통 3단계로 구분한다.
    450~1150년경까지의 고대 영어 시기Old English Period, 1150~1500년경까지의 중기 영어 시기Middle English Period, 그리고 1500년 이후의 현대 영어 시기Modern English Period, Baugh 1978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법의 한 범주인 굴절 현상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고대 영어 시기에는 현대 독일어와 같이 심한 굴절이 나타나는 데 비해, 중기 영어 시기에는 그 굴절이 다소 축소 수평화되었다가, 현대 영어 시기에 이르면 고대 영어와 같은 굴절은 거의 소실되고 만다. 이를 정리하면 영어는 완전 굴절의 시기Period of Full Inflections로부터 수평화된 굴절의 시기Period of Leveled Inflections를 거쳐 굴절어 상실 시기Period of Lost Inflections로 이어진 것이다. 언어의 굴절이 상실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어순의 유연성이 높아지면서 단순해진다는 뜻으로, 보다 많은 문화권에서 수용하기 좋은 언어 체계로 진화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영어의 세계화 과정
     

    근대화의 과정에서 영어는 몇 가지 중요한 기회와 위기를 맞게 된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 시장화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자 영어는 자연스럽게 영국 문화, 제도, 기술 등과 함께 식민지와 주변 국가로 이식되었다. 영국과 거래할 때는 영어 사용이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문화를 주도하고 상대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영국은 식민지의 고유 언어를 말살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영어를 경제와 정치, 문화 분야의 공용어로 지정하면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한 국가 안에도 수백 수천 개의 언어가 있었던 인도와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 근대화를 위해서는 하나의 공용어가 필요했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이 점을 잘 이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의 세력하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영어를 사용하면 더 뛰어나다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 주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영어는 아메리카 신대륙으로의 확장을 하게 된다. 초기 아메리카는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13개의 영국 식민주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이 정착민들과 영국이 합세하여 프랑스를 견제하여 북미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의 수탈 구조에 대한 저항이 커지고 결국 미국의 독립선언을 시작점으로 영국은 그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이 더 이상 식민 지배 통치력을 강제할 수 없게 된 이후에도 영어는 유일한 공용어로 살아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의 이주민들이 프랑스를 적대시하면서 프랑스어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고 승리자의 언어인 영어가 그 전리품을 챙기게 된 형국이다.

     

    이와 같이 경제 문화적 침탈의 과정을 거쳐 세계어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영어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제국주의 시대의 위세는 한풀 꺾였지만 오히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국과 미국이 각각 승전국이 되면서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에 따라 영어 역시 그 세력권을 넓히게 된다. 이후 현재까지 영어는 세계 유일의 세계어의 지위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혹은 세계 영어
     

    흔히 우리는 영어를 브리티시 잉글리시와 아메리칸 잉글리시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두 언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과연 세계어로서의 영어는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 보고자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새 토양에 심어진 영어를 단지 영어라고, 또는 영어의 변이형으로 취급하는 것이 합당할까? 이 점에 관해 앨버트 마크워트Albert Marckwardt는 일찍이 그의 저서인 〈미국 영어American English1958에서 “단지 영어라는 명칭만을 사용하면 영어는 신대륙에 이식되었을 뿐 그것이 왕성하게 성장하여 온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 영어’라는 명칭이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실상 미국 영어는 영국의 이주민 100여 명이 존 스미스John Smith 선장의 지휘하에 버지니아 해안에 도착하여 제임스타운Jamestown을 중심으로 소위 버지니아 식민지를 개설한 1607년에 시작된다.

     

    미국 영어의 역사도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1607~1790는 이민자의 90%가 영국의 동남부로부터 온 영어 사용자의 시기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임스타운에 정착했을 때는 모국에서는 벤 존슨Ben Jonson이 절정에 있었고,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왕성하게 집필 중이었다. 당시 미국 영어는 이른바 엘리자베스 왕조 영어Elizabethan English로 릴리Lyly, 말로Marlowe, 그린Green이 구사하던 영어였다.
    제2단계1790~1869는 제1기 식민지 확장 시기로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
    ains
    동쪽을 넘어 신대륙 전역으로 이민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때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 주종을 이루며, 네덜란드인, 스웨덴인도 이민 대열에 끼어 비영어 사용자가 영어권에 섞이게 되었다.
    제3단계1869~현재는 다채로운 이민의 원숙기였다. 북부에 쏠렸던 이민자의 분포가 유럽 남부, 동남부로 확산되며 다채로운 인종이 모국에서 가져간 언어를 신대륙 언어에 전파하게 된다.
    이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자들이 각각의 자신의 언어를 신대륙으로 가져갔으나 영어는 고유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흡수 통합하였다.

     

    지난 180여 년 동안, 아니 그보다도 더 이전부터 영국인과 미국인은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의 무수한 차이점을 논해 왔고, 어느 때는 한쪽 영어만을 좋은 영어 혹은 표준 영어로 고집하는 특이한 애국심을 보이기도 했다. 영어를 모국어로, 제2 외국어로 또는 외국어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른바 두 영어의 차이점이 강조되어 다음과 같은 의문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어느 영어가 과연 세계어로 합당할까?’

     

    1960년대 초반에 있었던 마크워트Albert H. Marchwardt와 쿼크Randolph Quirk 두 교수의 대담은 이 문제에 대해 영어학자다운 해답을 보여 주고 있다. 실상 마크워트와 쿼크는 각기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로 대담을 했는데, 두 교수는 그들이 구사한 영어의 차이로 의사소통에 지장이 있기는커녕 두 영어의 유사성이 더 많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Marchwardt & Quirk, 1965. 일찍이 영국 공영 방송BBC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가 이들의 대담을 수차례에 걸쳐 방송한 바 있다.

     

    멩켄H.C.Mencken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출판된 그의 저서를 〈미국 언어The American Language〉라 일컬었다. 이는 그 당시 만연해 있던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의 차이를 강조한 결과라 하겠다. 1800년경 두 영어가 세월이 흐르며 점점 차이를 더해간다고 주장하다가 다시 1828년 그의 생각을 바꾼 노아 웹스터Noah Webster처럼 멩켄은 1936년경 그의 종전 주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미국 영어가 영어의 변이형Variety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영국 영어나 미국 영어에는 각기 방언이 존재하므로 미국 영어를 영국 영어의 방언이라고 일컫는 데는 무리가 있겠다.
    아메리칸 잉글리시American English라고 할 때 ‘아메리칸’이란 어휘가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지칭할 수도 있어 곧 아메리카 대륙의 언어가 아메리칸 잉글리시인 양 오해될 소지도 있듯이, 브리티시 잉글리시British English라고 할 때 ‘브리티시’도 영연방을 의미하는 코먼웰스Commonwealth와 이어지는 혼란을 빚기도 하나, 오늘날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명칭이 각기 다르므로 브리티시 잉글리시라고 할 때는 영국 전체의 영어를 지칭하게 된다Marchwardt & Quirk, 1965.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세계어로 등극하게 된 언어는 이미 순수 혈통을 밝히는 작업 자체가 무의미하게 들린다. 거기에는 그저 한국 영어, 일본 영어, 필리핀 영어와 같이 큰 틀에서 의미가 소통되는 언어 체계가 있을 뿐이고 우리가 영어라고 부르는 말은 더 이상 영국이나 미국의 틀로 해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은경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와 하와이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런던대학교에서 초빙 교수로 강의하였고, 현재는 덕성여대 영문과 명예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영어로 펴 보는 한국》, 《영어 회화로 엮은 한국과 한국의 전통》, 《영어 숙어의 길잡이》, 《영어 이야기ㆍ언어 이야기》, 《영어 구동사의 벗》, 《English Dialogue on Things Korean》, 《영국적 특성과 영국ㆍ영어 이야기》 등이 있다. 역서로는 《붉은 무공훈장》, 《길을 묻는 그대에게》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진실의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천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