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화학 반응의 전후에서 전체 물질의 질량에는 증감이 없다. 물질의 존재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언어도 ‘물질’인 한 ‘쇠멸’된 뒤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고 있지 않을까? 말의 ‘시원이자 결말’인 침묵 또한 무가 아니고 말이다. 김애란의 단편 〈침묵의 미래〉는 죽어가는 소수 언어의 ‘마지막 화자’에게서 방금 빠져나온 ‘언어의 정령’침묵을 화자 삼아 우리 시대의 언어의 행방을 묻고 있다. 침묵을 화자로 삼은 전략이 이미 징후적이지만, 죽음 이후의 언어적 정령, 곧 ‘침묵의 무게’나 ‘상실의 밀도’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죽음의 고비에서 꾸는 누군가의 마지막 꿈과 비명이 메아리치고, 사멸된 부족어소수어들의 영혼이 무늬져 있는 어느 행성의 황색 먼지 또는 얼음 알갱이가 된다는 소문이 있다고 ‘나’언어의 정령는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목가적이지 않다. ‘나’가 가는 곳은 “‘내세’도 ‘우주’도 아닌 ‘공장’”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르면, 소수어의 쇠멸은 정해진 절차를 밟는다. ‘소수 언어 박물관’에 유폐되었다가 마지막 화자가 죽으면 그 언어의 정령마저 ‘중앙어’라는 흡진기로 흡수된다. ‘죽은 뒤 한 번 더 죽는’ 탓에, 침묵은 무無다. ‘침묵의 미래는 없다.’ 언어 제국주의 시대의 묵시록적 풍경이라 할 만하다. 제국주의의 최종 목적은 식민지 수탈에 따른 경제 독점이다. 언어 제국주의에서는 그 경제 독점이 언어 수탈로 자행된다. 그러므로 언어 제국주의 시대의 부족어들은 중앙어를 배 불리는 ‘에너지’이거나 ‘연료’, 혹은 ‘자원’일 뿐이다. 그뿐인가. 중앙어 역시, 스스로 경제 독점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연료’나 ‘자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작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그 안에서는 수탈하는 언어 역시 이미 수탈되고 있다는 이 언어 제국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데올로기는 구성원 자신이 그 이데올로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를 때 진짜 이데올로기가 된다.
‘완전한 이데올로기’를 위해선 ‘죽은 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두 번째 죽음이 첫 번째 죽음을 완성한다. 따라서 진짜 죽음은 두 번째 죽음이다. 언어 제국주의에서는, 언어의 죽음도 문제지만 그 죽음 이후의 존재인 침묵의 죽음이 더욱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음색이나 표정, 억양, 성조 등 언어의 비분절적 잉여들―침묵 혹은 언어의 정령들―을 소거한 인지화된 언어이면, 설사 중앙어일지라도, 그것은 죽은 언어인 ‘소수어’다. 이 경우, 경제 독점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주의가 바로 ‘대문자 언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대로, 설사 소수어일지라도, 그것이 언어의 정령을 지워 낸 언어이면, ‘중앙어’다. ‘중앙어’ 역시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소수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 번의 죽음’이라면 소수어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다. 그러나 굳이 ‘두 번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중앙어는 영어라는 ‘사실 내용’에 가려져 있는 언어 제국주의의 ‘진리 내용’이다. 〈침묵의 미래〉는 영혼 없는 언어들만 횡행하는 이 부박한 언어 제국주의 시대에 문학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는 작품이다.
침묵을 털어 낸 영어는 오늘날 더욱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영어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석유 다음이라는 말은 결코 소문이 아니다. 자본의 인지화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아이디어, 정보, 미디어, 교육, 치유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서비스 업종들의 사회적 생산에서 ‘노동하는 언어’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크리스티안 마라치, 《자본과 언어》. 노동 역시 근력을 털어내며 인지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자본주의 축적 체계의 거대한 전환이다. 신경제의 핵심 기제는 경제의 금융화이다. 신경제에서 언어와 소통은 곧 생산의 역량이 된다. 밀턴 프리드먼 식의 통화주의의 연장 선상에서, 생산의 사슬이 기호의 사슬로 변주되는 금융의 세계화 시대엔 그중에서도 영어의 생산 역량이 가장 높다. 노동자가 투자 회사를 통해 자신의 저축을 세계 증권 시장에 투자하는 한 노동과 자본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마라치는 말한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는 당연하게도 영어일 것이다. 노동과 자본이 영어에서 조우하는 이 기이한 풍경이라니. 언어 제국주의가 최고 단계에 이른 모양새다.
오늘날 세계 시장의 ‘진리’로 등극한 영어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기축 통화다.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에 불과한 진리는 마멸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들이자 문양이 닳아 버린 동전이라고 니체는 말한다《비극적 사유의 탄생》. 기축 통화로 작용하는 한 영어라는 ‘관계 형식’은 다양한 부족어와 그 정령들, 곧 그 고유의 음색과 표정들, 억양들을 지워 낸 ‘마모된 동전’이다. 그러나 영어가 마모된 동전이기 이전에, 마모된 동전이 영어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한때 언어 제국주의의 ‘원조’를 시늉했으나 그 역시 한낱 ‘술어’에 불과했던 한문이나 라틴어, 또는 아랍어 같은 몇몇 ‘보편어’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세계어’를 자임하는 영어 또한 언어 제국주의의 술어일 뿐이다. 아니, 술어에 불과한 영어를 중앙어로 실체화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언어 제국주의다. 수탈하는 영어 역시 수탈되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렇다면 혹 언어 제국주의 자체는 아예 실체 없는 빈말이 아닐까? 그럴 것이다. 언어 제국주의는 오늘날 그 안에 영어라는 ‘술어’를 채워 넣어야만, 다시 말해 영어를 ‘자원’으로 해서만 비로소 ‘실체’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우리 시대의 ‘기이한 화폐’이다. 따라서 내용물 없는 텅 빈 기표 혹은 언어의 정령이 휘발된 ‘마모된 동전’은 영어 이전에 우선 언어 제국주의 자체이다.
마모된 동전 혹은 텅 빈 기표로서의 언어 제국주의가 ‘주범’일 때, 한국어라도 그것이 마모된 언어라면 그 또한 언어 제국주의의 ‘주식’을 나눠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영어든 한국어든 마모된 동전의 전형은 언어의 정령을 살균한 문자 언어이며, 그 최고 단계는 텅 빈 기표 혹은 ‘대문자 언어’인 언어 제국주의이다. 그 점에서 부족어의 정령이 ‘공장’에서 문자로 주조되어 박물관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침묵의 미래〉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언어의 죽음은 곧 문자화를 뜻한다.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보는 듯하다. 물론 이것이 전혀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어떤 기하학적 도형의 이데아가 가시적 형태로 그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린 만큼이나 말이 문자화되는 것에도 거부 반응을 보였던 플라톤이나, 플라톤의 대화술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단절된 것을 아쉬워한 하이데거도 말의 ‘문자화’에 어떤 타락의 혐의를 걸고 있다. 사물의 상징 기호로서 문자와 숫자의 발생이 동근원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따라서 문자는 태생적으로 말의 유통 속도와 자의적 확장을 위해 모종의 연산으로 정보 처리 된 언어이며, 이는 오늘날 디지털 연산으로 서로 합종연횡하기도 하는 전자 등록기들 안에서 더욱 확산하고 가속화되고 있다. 바야흐로 ‘대문자 언어’로서의 언어 제국주의가 그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형국이라 할 만하다. 이에 따라 존재 진리에 대한 위협이나 그 망각의 병증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언어의 정령을 살균한 문자는 사물을 기호화한 말을 다시 한 번 기호화한 것이며, 이는 사물을 기호화한 금을 다시 일반화된 등가물로 기호화한 화폐의 다른 이름이다. 그 점에서, 〈침묵의 미래〉의 작가가 ‘유리구 안에 갖은 형태의 활자가 분방하게 떠다’니는 ‘지구본 모양의 특별한 조형물’을 소수 언어 박물관의 명소로 배치한 것은 시사적이다. ‘여러 부족의 언어’들의 ‘활자가 떠다니는 이 지구본’은 여러 부족어의 ‘활자’들을 거느리는 ‘대문자 언어’로서의 언어 제국주의의 ‘완벽한’ 재현물인 동시에, 사물과 노동의 흔적을 지워 낸 지구 자본주의의 상징 형식이다. 그 자체로 마모된 동전인 유리구는 거대한 문자-화폐 제국의 축약판이다. 유리로 꾸며진 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은 ‘더러운’ 정령들로 ‘감염’되어 있지 않은 투명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은, 그것이 역설적인 만큼이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점점 ‘이해’로 만들어 주었다’는 데 있다. ‘가상의 실체화’인 언어 제국주의가 바로 그런 것처럼.
오늘날 언어 제국주의는 ‘영어’를 등에 업고 우리 삶의 깊숙한 지점까지 스며들어와 있다. 직접적으로는 입시나 입사를 위한 토플, 토익 시험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영어 산업이 그렇지만, 영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요 길목과 등록기들에서 일정한 통과제의를 요구하는 스핑크스가 되어 있다. 시민 사회의 전 부면과 층위에서 언어 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멀리 있는 친구들과 카카오톡이나 문자 메시지 주고받기에 열중하는 사회를 ‘단속사회’로 명명한 사회학자 엄기호의 지적은 날카롭다. 마우스와 키보드, 혹은 자판으로 ‘찍어내는’ 말, 목소리를 실물로 주고받지 않는 말은 더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직접성을 상실한 계산 가능하고 정보 처리 된 문자 기호이다. 출연자들의 말이나 대화를 화면 하단에 자막으로 재처리해 줌으로써 텔레비전을 묵독하게 하는 일상화된 관행도 그 한 징후다. 동네 이름을 ‘도로명 주소’로 일원화한 것도 문제이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이름 붙은 ‘서촌’의 한옥마을은 ‘옥인길’ ‘자하문로’ ‘필운대로’로 구획되었다.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은 각각 자하문로2길, 10길, 16길로 번호를 매겼다. 기하학적 작도에 따른 기호의 정치경제학이 작동한 결과다. ‘마모된 동전’ 혹은 언어의 정령들이 거세된 인지적 언어만을 추구할 때, 우리는 이미 ‘중앙어라는 흡진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거나 언어 제국주의에 접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 민족주의가 포스트 식민지 시대 혹은 세계화 시대의 언어 제국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우선 언어 민족주의의 이른바 ‘지배의 전이’가 문제다. 민족의 저항 논리는 이민족에 대한 지배 논리로 손쉽게 변환된다. 그것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배타적이 되는 언어 순혈주의로 종종 변질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순혈주의’는 ‘마모된 동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타자를 배제하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타인의 언어를 전제해야 나의 언어가 있을 수 있다. 화자가 단 한 사람만 있는 언어를 사멸된 언어로 간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 자체가 이미 복수의 기원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다. 중앙어의 지배 아래 부족 언어들을 사멸시키는 언어 제국주의가 허구에 불과한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닌가.
영어를 초월적 ‘세계어’로 물신화하고 있는 언어 제국주의처럼, 언어 민족주의도 역사적 산물일 수도 있을 민족어를 물신화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후자는 전자의 ‘위임 양식’일 수도 있을 테다. 언어 민족주의는 언어 제국주의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은폐술이거나 자기 조정술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양자를 피해 갈 수 있는 간극을 여퉈 낼 수는 없을까? 그 길 중의 하나로 언어도 하나의 ‘사물’로 대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서두에서 “언어도 ‘물질’인 한 ‘소멸’된 뒤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고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였다. 이미 ‘이해’되고 있는 언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 길이 쉽지 않은 길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언어를 ‘두 번 죽이고’서야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초월적 물신으로서 언어 제국주의를 똑같이 ‘두 번 죽여서’ 다시 삶의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매우 벅찬 과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 언어 안에서 언어의 정령을 다시 불러내는 작가의 고뇌만큼이나 말이다. 그러나 어렵긴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 길밖에 없을 만큼 작금의 영혼 없는 언어 현실은 우울하다. 화폐의 전신이 금이었던 것처럼, 말은 본래 문자 이전에 우리가 입으로 뱉어 낸 언어적 실물이자 육성이 아닌가.
한글의 국제화나 한류 등을 통한 한국어의 문화적 수출과 보급은 그것대로 소중한 일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기축 통화로 작동하는 영어가 과거 그 어느 보편어보다도 언어 제국주의의 패권적 지배를 관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역학적 대응 역시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경제 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한국어를 심층에서 옥죄고 있는 것은 언어 제국주의의 정점을 찍는 언어-화폐의 결속이다. 이는 사물을 상징화하여 그것을 다시 초월적인 자리에 올려놓고 물신화한 데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언어에 대한 추상적이고 자명한 이해에서 벗어나 마모된 감각적 힘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또한 어려운 주문이긴 하지만, 이를 위해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안한 ‘대위법적 읽기’도 언어 제국주의에 맞설 대항 독법으로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 제국주의의 현실적 역학과 그 심층의 이데올로기성을 함께 읽어 내자는 이 독법은, 앞에서 얘기한 언어 제국주의의 ‘사실 내용’과 ‘진리 내용’에 대한 복수적 이해와도 무관치 않다. 이러한 독법으로 읽는 한 세계화 시대의 ‘초중심어’가 영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한국어라는 랑그langue 안에서는 하나의 이질적인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언어적 타자로서의 그것은 이질적 차이화를 통해 한국어의 언어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이 틀림없다. 이상李箱더러 ‘일본적 서정을 조선어로 쓰고 조선적 서정을 일본어로 쓰라’고 질타하는 김수영의 말은 좀 과도한 문학적 주문일 수 있다 하더라도, 영어를 잘하는 것이 언어 제국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우리말을 잘하는 것이 언어 민족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말이다.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가 전자의 처지를 대변한다면, 이오덕의 《우리 말 바로 쓰기》는 후자를 대변하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지식인이나 행정가가 아닌 백성의 삶에 뿌리를 둔 토박이말 혹은 입말을 강조하면서도 ‘국민’이 들어간 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오덕의 주장은 거듭 음미해 볼 만한 것으로 보인다.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