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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귀화 꿈꾸는 `인천 사나이` 라돈치치

사이박사 2009. 6. 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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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귀화 꿈꾸는 '인천 사나이' 라돈치치

인천 유나이티드의 몬테네그로 공격수 제난 라돈치치는 한국말을 구사하고, 한국음식을 먹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반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5년째 생활하면서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결과다. 그리고 K-리그 시즌 초 화끈한 골 폭풍으로 인천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친해지는 유쾌한 사나이, 라돈치치를 만났다.

" 나는 인천 남자다! "

라돈치치(25)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K-리그 전반기를 마친 현재 8골로 득점부문 공동 3위다. 컵대회까지 합치면 8골(15경기)로 늘어난다. 2005년 13골을 터트려 인천의 K-리그 전반기 우승을 이끌었던 라돈치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K-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우뚝 섰다. 지난해 19골(36경기)을 터트렸던 데얀 담야노비치(FC서울)의 이적공백을 걱정하던 인천 팬들도 라돈치치의 복귀에 신이 났다. 오히려 데얀의 이적으로 이정열김태진을 얻었다며 좋아한다. 가난한 살림에 선수를 비싸게 팔아 두 명의 선수와 현금을 얻었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인천 팬들은 " 이게 다 라돈치치 때문이다 " 라는 우스갯소리로 라돈치치의 부활을 자랑스러워한다.

라돈치치는 2005년 13골을 터트린 후 2년간 4골(47경기)에 그쳤다. 한국생활에 적응한 2005년 이후 불성실한 훈련태도와 복잡한 사생활로 잡음이 많았다. 조직력을 강조하는 인천에서 라돈치치의 튀는 행동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라돈치치의 방황은 장외룡 감독이 영국으로 축구유학을 떠난 지난해에 더욱 불거졌다. 결국 인천 선수들은 라돈치치와 함께 뛸 수 없다며 그의 방출을 요구했다. 지난해 8월 J리그 방포레 고후로의 임대는 라돈치치의 방출을 의미하는 듯했다. 실제로 인천은 괌 전지훈련에서 라돈치치의 합류를 허락하지 않았고, 새로운 외국인선수 보르코와 네나드 인야치를 테스트했다. 그리고 라돈치치에게는 이적을 추진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렇지만 인천에는 '문제아'란 오명을 쓰고 있던 라돈치치를 끝까지 믿어준 장외룡 감독이 있었다. 장 감독은 인천의 키 플레이어로 라돈치치를 지목하며 주장 임중용으로 하여금 라돈치치가 동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라돈치치가 바짝 긴장하자 구단에서는 연봉 반액 삭감과 함께 득점에 따른 인센티브 및 출전수당을 높이는 자극적인 협상안을 제시했다. 라돈치치는 전년도 대비 50% 삭감된 연봉 20만 달러(2억 원)와 10골을 넣으면 10만 달러(1억 원), 20골을 넣으면 20만 달러(2억 원)의 보너스를 지급받는 옵션이 포함된 새로운 계약에 인천과 재계약했다. 3000달러의 출전수당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계약서에는 라돈치치가 다시 한 번 분란을 일으키면 구단 고위층의 합의하에 언제든지 방출할 수 있다는 조항까지 삽입했다.

인천은 라돈치치에게 득점원이란 중책을 맡기는 동시에 연봉 삭감 및 옵션 첨부라는 당근과 채찍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라돈치치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며 인천 상승세의 주역이 됐다. 인천 구단의 한 관계자는 라돈치치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날(4월 27일, 대구전) 옵션 계약에 따른 보너스 지급을 생각하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고 귀띔했다. 그래도 인천은 즐겁다. 라돈치치가 많은 골을 넣을수록 인천의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활약상이 좋은데 특별한 비결이 있나?
"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저 열심히 훈련하면서 매 경기 100% 최선을 다할 뿐이다. 훈련장에서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 꾸준히 땀을 흘린 결과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루 두 번 공식훈련을 모두 소화한 뒤 따로 남아 훈련할 때도 있다. 만약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비법 같은 게 있다면 좀 알려 달라(웃음). "

장외룡 감독이 특별히 주문하는 내용이 있는지?
" 최대한 간단하게 플레이할 것을 주문받는다. 감독님은 경기에 앞서 'Jsut Simple'이라는 한 마디만 하신다. 또 많은 골을 넣어서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도울 것을 주문하신다. 득점기회가 찾아오면 주저 말고 슈팅을 시도하라는 말도 들었다. 감독님의 믿음 덕분에 든든하다. 그래서 감독님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보르코가 새로 합류했다.
" 보르코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내가 인천에 입단했던 2004년이 떠올라 잘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도 인천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의 이색적인 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입단 첫 해에는 문제가 많았다. 보르코는 나이가 어리고 해외생활 경험이 없어 외로움을 타고 있다. 그래서 나와 드라간이 잘해주려고 무척 애쓴다. 얼마 전에는 보르코의 여자친구가 한국에 다녀갔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인천에 입단한 지 1년이 안 된 선수니 좀 더 지켜봐주면서 많은 격려와 응원을 해달라. 보르코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재능이 충분하다. "

한국생활은 괜찮은가?
" 지금은 매우 좋다. 주위 사람들도 친절하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몬테네그로와 한국은 너무 다르다. 특히 한국의 음식들은 너무 맵다. 개인적으로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해 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연장자를 존중하는 한국의 문화도 이색적이었다. 물론 몬테네그로에서도 연장자는 존중받지만, 한국만큼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연장자의 말은 무조건 우선시되는 것 같다. 인사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는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래서 지금 보르코에게도 많은 것을 교육시키고 있다(웃음). "

한국 귀화를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다.
" 그렇다. 인천에 오래 살면서 한국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약 한국대표팀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귀화를 선택할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 5년째 활동해 귀화요건도 갖췄다. 여러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도 내 선택(귀화)을 존중한다고 말씀하셨다. "

장외룡 감독도 대표팀 감독직에 도전하고 있다. 만약 장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 당신의 대표팀 발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와 장 감독님은 프로다. 프로는 실력으로 승부할 뿐 개인적인 감정으로 행동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장 감독님이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 (대표팀 발탁에) 약간의 도움은 될지도 모르겠다. 그분은 다른 감독님들과 달리 내 장점과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장 감독님은 기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지도자이다. 나뿐 아니라 한국축구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누가 대표팀 감독이 되든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준다면 대표팀 합류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

FC서울전(5월 11일)에서 전반 막판 슈팅한 공이 골라인을 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 정말 그런가? 몰랐다. "

최근 심판판정으로 손해를 많이 본 것 같다.
" 그것이 K-리그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심판은 선수들로부터 존경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K-리그 심판들은 선수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좀 더 공정한 판정을 내려주길 바란다. 종종 K-리그의 주인공은 선수가 아닌 심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판정의 정확한 기준과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주위의 압력으로 판정을 번복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보상판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유럽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심판은 자신의 판정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K-리그도 더 발전할 수 있고, 팬들도 관전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다. "

혹시 유럽축구 좋아하는가?
" 물론이다. 유럽에서 축구는 생활의 일부분이다. 축구만 잘하면 대장노릇을 할 수 있다. 나도 어려서부터 빅 리그 진출을 꿈꿔왔다.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유럽 빅 리그 진출을 꿈꾼다. "

챔피언스리그 출전 경험도 있는데.
" 파르티잔에서 뛸 당시 마르세유전에 출전했다.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었다. 당시 상대팀에는 한국팬들도 잘 아는 디디에 드로그바가 뛰고 있었다. 지금은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는 드로그바도 당시에는 무명 공격수였다. 그런데 그때도 정말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내가 챔피언스리그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유럽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곳에 내가 있었다고! 다만, 레알 마드리드 전에 출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호나우두, 지단, 피구, 라울 등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한 선수들이 뛰는 것을 벤치에 앉아 구경만 했다. "

당시 파르티잔 멤버들을 소개해 달라.
" 샤샤 일리치, 이고르 둘라이, 이비카 일리에프, 안드리야 델리바시치 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일리치는 파르티잔의 영웅이다. 그 선수와 함께 뛴 것은 큰 영광이었다. "

파르티잔의 감독은 로타르 마테우스였다.
"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자랑스럽다. 마테우스는 축구팬들이 존경하는 영웅이다. 루다르(Rudar)에서 뛰고 있을 당시 파르티잔과의 연습경기에서 1골을 터트렸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자 파르티잔의 감독 마테우스가 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파르티잔은 루다르와 협상을 시작했고, 마테우스는 나에게 정식으로 입단을 권유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환상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곧바로 파르티잔의 트레이닝캠프에 합류해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자 지역신문과 방송에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출전기회에 제약이 따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팀의 수석코치가 내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성인팀 경기에 뛰기에는 이르다고 결정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벤치에 앉는 시간이 길어졌고, 교체선수로 10분가량 경기에 뛰는 데 만족해야 했다. "

그래서 인천으로 오게 된 것인가?
" 꼭 그렇지만은 않다. 파르티잔은 2003~2004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조 최하위로 떨어져 3위에게 주어지는 UEFA컵 출전권도 획득하지 못했다. 국내리그도 끝난 상태였다. 기온이 낮은 동유럽 국가의 프로축구는 유럽 빅 리그와 달리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난다. 그러던 중 인천 관계자가 파르티잔을 방문해 나를 영입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 역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축구생활을 하고 싶었다. 당시 한국에 대해서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국가라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솔직히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영입을 결정했는지는 모르겠다. "

약점으로 지적되던 헤딩이 상당히 좋아졌다.
" 체격에 비해 헤딩이 약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꾸준히 연습한 결과 올 시즌에는 헤딩으로만 5골을 넣었다. "

당신의 왼발은 살인적이다.
" 왼발은 언제든 자신 있다. 팬들은 나에게 '비에리' 또는 '아드리아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 선수들은 모두 왼발의 스페셜리스트들이다. "

인천 구단 역사상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그날 경기공을 갖고 있나?
" 아쉽게도 경기공을 받지는 못했다. 내가 원한 건 매 경기 한 골이었는데, 한 경기 3골이나 넣어서 행복했다. 2부리그 시절에는 2년간 총 44골을 터트렸다. 너무 많은 골을 기록해서 해트트릭을 몇 차례 기록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대구전(4월 27일) 해트트릭은 프로통산 첫 해트트릭이었다. 뭔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천의 창단 멤버였고, 첫 우승(2005년 전기리그 우승)도 함께 했다. 그리고 인천의 첫 번째 해트트릭의 주인공도 나였다. 나와 인천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

드라간, 보르코, 데얀 등 모두 이름을 사용하는데, 성을 사용하는 이유는?
" 내 이름은 제난이다. 제난 라돈치치. 그런데 한국에서 제난(재난)은 홍수, 가뭄, 지진 등 상당히 안 좋은 것을 뜻한다고 들었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것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라돈치치를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드라간 믈라데노비치, 보르코 베셀리노비치, 데얀 담야노비치 등 세르비아 선수들의 성은 한국인들이 발음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라돈치치는 발음하기 쉽다. 라돈이라는 애칭도 마음에 든다. "

영화 < 비상 > 때문에 게으르고 심술궂은 선수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 정말 억울하다. < 비상 > 에서의 내 모습은 연기였을 뿐이다. 나는 우리 주장(임중용) 말을 정말 잘 듣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화에서의 내가 실제 생활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사람도 죽이지 않는가. < 비상 > 에서의 내 모습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연기였다. 영화를 영화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

어린 시절 가라데를 배웠다고 들었다.
" 몬테네그로에서 6년간 배웠다. 유년기에는 가라데와 축구를 병행했지만, 15세 무렵에 가라데를 그만두고 축구에 전념했다. "

경기장에서 당신에게 악의적인 파울을 가하는 수비수들은 긴장 좀 해야겠다.
" 경기장에서는 결코 가라데를 사용하지 않는다. 호신술로 배웠을 뿐이다. "

인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 2005년 챔피언결정전 직전까지다. 챔피언결정전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달라. 기억도 하기 싫다. "

인천 팬들은 당신의 활약을 기뻐하지만, 구단의 열악한 재정상 빅 클럽으로 이적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 지금까지 인천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것을 많이 봐왔다. 그래서 우리 팬들이 언젠가는 나도 팀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2005년 챔피언결정전 이후 빅 클럽에서 나를 원한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인천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제2의 고향과도 같다. 물론 축구는 인생과 같다. 사람이 한 곳에서만 살기 힘든 것처럼, 축구선수도 한 팀에서만 뛰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인천은 항상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

인천에서 가장 친한 팀 동료는 누구인가? 드라간과 보르코는 빼자.
" 성경모다. 그와는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반겨준 동료도 드라간과 성경모였다. "

K-리그 최고의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 특정 선수를 꼽기는 어렵다. K-리그에는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굳이 한 명을 꼽는다면 최근에는 수원의 27번 선수(서동현)가 인상적이다. 빠르고 결정력이 뛰어나다. FC서울의 박주영도 좋은 선수다. 유럽에서 뛴다면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최고의 외국인선수는? 물론 당신을 제외하고.
"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 난 K-리그 최고가 아니다. K-리그에는 나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드라간이 대표적이다. 우리 팀은 드라간 없으면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기 어렵다. 보르코도 몇 년 후에는 나보다 뛰어난 선수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데얀과 마토도 좋은 선수다. 모따도 개인기가 상당히 뛰어나다. 특별히 한 선수를 거론하기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어려운 질문은 자제해 달라(웃음). "

훈련 외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나?
" 그냥 집에서 쉬면서 인터넷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책을 읽는다. 가족의 안부를 묻는 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다. 아버지가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신데 최근에는 많이 호전되어서 다행이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항상 인천을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인천의 서포터스는 세계 최고다. 그들의 함성은 나와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다 표현할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홈경기는 무조건 이기고 싶다. 이기지 못하면 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좀 더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 오셔서 응원해줬으면 한다. 그러면 우리 선수들은 더욱 힘이 날 것이고, 인천의 성적도 더욱 좋아질 것이다. I LOVE INCHEON! "

최종욱 기자 사진 표명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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