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모여살이)

[스크랩] 제프리존스 2000년도 글

사이박사 2007. 1. 29. 15:06
-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 제프리 존스 -

프롤로그


당신은 한국을 얼마나 아십니까?
어떤 한국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나는 잠시 생각하다 50%쯤 아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많이 아시네...."
질문도, 대답도, 또 그 대답에 대한 대답 역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나 논리적인 근거가
뒷받침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선문답'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한국은 고매한 스님들의 선문답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나라다. 그 까닭이야 여러 가지겠
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가 무척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단지 그 변화의 속도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가끔 한국 친구와 어울려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날이면 '아, 나도 이
제 한국 사람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신문을 펼치면 나는 어
김없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을 맛보곤 한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전날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쓸모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 사람들처럼 변화에 대한 부담(혹은 두려움?)이 적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핸드폰, 컴퓨터, 자동차 등 다른 나라에서라면 5∼10년은 족히 갈 물건들도
한국에서는 1∼2년만 지나면 골동품이 된다. 한국사람들은 그만큼 변화에 익숙하며, 변화를
좋아하고, 또 즐기기까지 한다.
21세기는 변화의 시대다.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따라서 변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그만큼 유리한 출발점에 서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책
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변화를 쫓아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스스로 변화를 꾀하는 사람, 변화를 이끄는
사람만이 진정한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사람들은 아
직 몇 가지 약점이 남아있다.
변화를 쫓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어떻게 스스로 변화를 꾀하느냐고 지레 겁먹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 점이 무척 안타깝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로 능력이 모자란다면 겸허하게 자신
의 한계를 받아 들이고 분수를 지키는 게 옳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고
만족하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죄스러운일 아니겠는가.

IMF 금융 위기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혜택 또한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에 기업가 정신이 부활했다는 것이다. '부활
'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이미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아주 강력한 기업가 정신이 한
국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기업가 정신이 주로 재벌 기업을 성장시켰다면, 새롭게
부활한 기업가 정신은 고스란히 벤처 기업 열풍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기업들이 구조 조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동안, 수많은 인재가 뛰어난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인터넷 기업과 관련 산업에 뛰어들었다. 채 2년 반도 안되는 기간에 한국에서는
6,500여 개의 새로운 기업이 생겨났다. 인터넷, 그리고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는 비즈니스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전혀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으며, 벤처 자본과 벤처 기업이라는 말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
에게나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젊은 학생들은 의사나 변호사, 교수 대신 벤처 기업의 사장이
되겠다는 희망을 공공연히 피력한다.
한때 미국의 나스닥 시장이 폴락하고, 그에 따라 미국의 유명 벤처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한국도 이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한국의 인터넷 기업 혹은 벤처 기업
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기업이나 투자자를 위한 건전한 현실
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로써 인터넷 신생 기업들이 경제적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주 바람직한 양상
이다. 겉으로는 벤처 기업들이 혹독한 위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부정적인 관점
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정보 산업 분야는 앞으로도 급격한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을 세계적인
강국으로 끌어올릴 새로운 기술과 기업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의 초창기를 목격하고 있을 뿐
이다.

나는 이 책이 한국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시각을 조금만 달리
하면 우리에게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늘 그래 왔듯이 나는
앞으로도 짜릿한 흥분과 두려움을 간직한 채 한국의 변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준 '중앙 M&B' 여러분에게 감사 드린다. 그곳에
서 일하는 많은 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포기
하고 싶던 나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형편없는 원고를 매끄러운 한국어로 다듬고 손질해 준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00년 9월 제프리 존스

제 1 장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 한국의 힘

바나나와 달걀

한국 사람들의 언어 습관 중에는 나를 몹시 곤혹스럽게 만든 것들이 더러 있다. 가장 대
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다.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 사람들이 왜 자신의 조극
을 '내 나라(my country)'라고 하지 않고 '우리 나라(our country)' 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학교', '우리동네', 심지어 '우리 마누라' 라고까지 한다. 이는 곧
'내 마누라도 되고 네 마누라도 된다'는 뜻이니,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한국을 '마누라'
한 사람들을 여러 남자가 데리고 사는 나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우리'라는 말 속에 담긴 한국 사람 특유의 공동체 정신을 깨닫기까지
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한국 사람 중에도 이런 언어 습관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나는 이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도 습
관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였다. 내가 나도 모르게 '우리 나라', '우리 국민
', '우리 기업' 같은 말을 자주 하니까 진행자가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우리, 우리 하시는데 그 우리가 미국입니까, 한국입니까?"
나는 내심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얼떨결에 "둘 다죠, 뭐. 사실은 저도 헷갈립니다."라고 얼
버무렸다.
솔직한 내 심정을 토로한 셈이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정체성의 혼란'이라고나 할까.
어떤 때는 나 스스로도 내가 미국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가끔 주변 사람들도 그런 모양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아내에게 "하
루 종일 양식만 먹었더니 속이 거북해 죽겠어, 청국장 좀 끓여 줘" 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아내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잠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또 내 입에서 '뽕간다'느니 '그냥 냅
둬라' 하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당신, 미국 사람 맞아?"라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다. 특히 내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집을 찾아갔는데, 대문 앞에 '개조심'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나
는 그것이 당연히 문패일 거라고 생각하고 용감하게 대문을 두드린 다음, 큰 소리로 물었다.
"개조심 씨 계십니까?"
요즘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내가 괜히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방송국 주최의 외국인 웅변 대회에서 입상한 뒤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인터뷰 도중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것이 방송을 타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만든 말 중에 '달걀론'이라는 것도 있다.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 2세들 중 친하게 지
내는 사람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친구는 자기 같은 사람을 바나나에 비유한다. 몸에는 분명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사고 방식도 완전히 미국식으로
굳어 있으니 겉은 노랗지만 속살은 새하얀 바나나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야, 네가 바나나면 나는 달걀이다."
겉은 하얗지만 속에는 노른자위가 든 달걀,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요, 달걀론의 정체이
기도 하다.
'현각'이라는 미국인 스님이 쓴 책을 보면, 자신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대목
이 나온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는데, 제목도 의미도
몰랐지만 웬지 가슴이 뭉클한 게 자꾸만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음악
이 바로 '애국가'였고, 현각 스님 자신은 일제 시대 때 독립 운동을 하던 열사의 환생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내가 전생에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언젠
가는 문득, 내가 경주 지방에 살던 상인이었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환상에 사로집한 적도
있다.
1971년, 나는 열아홈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물론 내가 원한 것이 아니
라, 선교사 활동을 자원했는데 나에게 한국이 배정된 것이었다. 당신 내가 알고 있던 한국에
대한 정보는 '얼마 전에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 사람이 많이 죽은 나라'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엉뚱하게도 후각을 통해서였다. 비행
기가 공항에 도착해서 말 그대로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묘
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별로 아름다운 냄새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마늘 냄새와 김치
냄새, 된장 냄새, 좀 심하게 말하면 화장실 냄새까지 온통 뒤범벅된 냄새였다. 마침 그때는
날씨가 덥고 습기가 많은 8월이라 냄새가 더욱 심했는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한국을 찾은 선교사가 모두 18명이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 냄새를 못 견뎌
했다. 사실 혈기왕성한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2년 동안 낯선 이국 땅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생활해야 할 나라의 첫인상이 그런 냄새로
시작되었으니, 다들 '앞으로 2년을 어떻게 지내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에 돌아온 것처
럼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앞으로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곳이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에 빗나가지 않게, 2년 동안 한국에 적
응을 가장 잘한 선교사가 바로 나였다. 한국에 도착한 첫날 연습 삼아 전도를 나갔는데, 그
때부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은 젖가슴이 절반쯤 드러나 보이는 허름한 모시 적삼을 입은 할머니
였다. 서튼 한국어로 말을 거는 나를 처음에는 잔뜩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마치 귀한 손님이
라도 되듯 나를 당신의 집으로 데려가 설탕을 뿌린 토마토까지 대접해 주었다. 그 할머니와
손녀로 보이는 10대 중반의 소녀를 상대로 몇 시간 동안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다른 동료들은 한국 사람에게 말도 붙여 보지 못한 채였다.
우리는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에 하와이에 있는 연수원에서 두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는데,
그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한국어를 무조건 외우는 방식의 교육을
받았다. 짧은 시간 동안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교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말들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려 예닐곱 시간에 해당하는
분량이라서 뜻도 모르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말들을 그대로 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
능 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두 달이 채 끝나기 전에 그 과정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나는 머리가 특별
히 좋은 것도 아니고 암기 실력도 신통치 않은데,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랐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록을 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튼 나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피 끓는 청춘기를 보냈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주로 마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도 내 한국어에는 간간이 경상도 사투리가 배어
나온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한국을 떠날 때, 동료들은 모두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며 희
희낙락했지만, 나는 한국 상공을 벗어나는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약간, 아주 약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당시의 내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내 눈에 비친 1970년대 초반의 한국은 굉장히 가
난한 나라였고, 나는 순박하고 착한 한국 사람들이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질병으
로 고통받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훌륭한 의사가 되어 한
국으로 돌아올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꿈은 아주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의사가 내 장래 희망
을 알고는 분위기도 익힐 겸 병원 응급실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제안을 해 왔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평소 동경하던 의사들의 일과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
꺼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나는 그 병원에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와 버렸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특히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는 환자들
을 옆에서 지켜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법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고는 세
계에서 가장 큰 법률 회사 가운데 하나이던 '베이커 & 매킨지(Baker & Mckenzie)'에 취
직을 했다. 그런데 마침 회사에서 서울 지사 설립을 위해 변호사 한 명을 도쿄로 파견 하
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도쿄 근무를 자원, 도쿄와 한국을 오가며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미국 법률 사무소의 한국 진출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계획은 무
산되고 말았다.
한국 진출이 좌절된 뒤 나는 미국 시카고의 본사로 돌아갔다. 시카고에서 보낸 1년은 따
분하고 무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고,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80년 6월, 회사 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영무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한국이 그렇게 좋으면 아예 우리 사무실로 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당신 김영무 변호사가 설립한 '김&장 법률 사무소'는 소속 변호사가 고작 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회사였다. 게다가 당시의 한국은 광주 항쟁등의 민주화 운동 세력과
군부 세력이 언제 어떤 충돌을 빚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다. 반면에 내가 몸담고 있
던 '베이커&매킨지'는 세계 최고의 법률 사무소였고, 보수도 아직 젊은 나에게는 과분할 정
도였으며,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평생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행을 택했다. 나로서는 인생을 건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결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한국은 그 당시 내가 버린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내게 선물했다.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던 '김&장 법률 사무소'는 변호사만 240명이 넘는 세계 최고의 법
률 회사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한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친구
들을 만났으며, 더욱이 사랑스러운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이루는 기쁨도 맛보았다.
한국은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준 기회의 땅이었다. 나를 낳고 가르친 것은 미국이지만,
나에게 내 젊음과 열정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은 한국이다. 비록 내 몸속에 한국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를 아버지에 비유한다면 한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머니의 나라다.
따라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잘되고 한국 사람들이 잘살기를 누구 못지않게 간절히 바
란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똑E고하
기까지 하니, 머지 않아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
에 없는 여건들이 하나하나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희망을 '인터넷 세상'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발견했다. 새로운 잣대를 들이대 보니,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의 단점이라고 생각해 온 것들도 어마어마한 잠재력으로 전환할 기미
가 보이는 것이다.
한국은 '인터넷 열풍'을 등에 업고 머지않아 세계 최고의 나라로 우뚝 설 것이다. 그날이
오면, 비록 변변히 한 일은 없어도 이 제프리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한국이 잘되기를 기
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냄새 없는 사이버 공간

얼마 전에 미국 출장을 가면서 노트북 컴퓨터를 장만한 적잉 있다. 나는 물건을 사기 전
인터넷에 들어가 수많은 회사의 노트북을 비교해 본 뒤 성능이나 가격 면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물건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판매점에 가서 다른 제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가 택
한 노트북을 샀다.
내가 대단한 인터넷광이라거나 누구에게서 값싸고 성능 좋은 물건을 사려면 인터넷을 뒤
져 보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아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직접 시장에 나가서 발이 부르트도
록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뿐이다.
어느 날 잡지를 보다 문득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처럼 비교적 가
격이 비싼 제품을 구입하는 미국의 소비자들 가운데 65%가 시장에 나가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결정한다는 통계였다.
그 기사를 보면서 문득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의 물건 구매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같은 사람도 물건을 사기 전에 인터넷으로 시장 조사를 했으니, 그 비
유리 65%에 달한다는 통계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인터넷으로 제품을 소개하
지 않는 회사는 어떻게 될까?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했고,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그 변화
한 세상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게에다 진열을 해 놓아야 했다. 마침 재수 좋게 그 가게 앞
을 지나던 손님의 눈에 띄면 물건이 팔리고, 그렇지 않으면 팔릴 기회가 엇었다. 하지만 이
제 그럴 필요가 없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통신 기술의 발달로 굳이 가게가 없어도 얼마
든지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
지금은 그나마 소비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할 뿐 직접 구매까지 온라인으로 이
루어지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아직도 물건을 직접 만져 보고 싶은 소비자들의 욕구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머지 않아 지구상의 모든
가게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컴퓨터나 자동차는 물론, 치약이나 화장지 같은 작은 생활
필수품들도 온라인으로 거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모든 사람에게 적지 않은 혜택을 가져다 주겠지만, 특히 한국 기업들에게는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게 시장을 겨냥해야 하
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 세계보다 사이버 세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
하다.
미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마케팅 분야에서 미국인, 특히 백인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인종 차별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백인 소비자들이 백인 영업 사원을 선
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비자들 중에는 아직도 흑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꺼리는 사람이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왠지 찝찝해서...'라
고 대답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지역 감정이라는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
는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는 계층은 아주 다
양하다. 특해 백인들 사이에서도 동부 출신이냐 서부 출신이냐에 따라 알게 모르게 서로 얕
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동부 출신들은 자신들이 유럽ㅇ서 건너와 처음으로 미국 땅에 정착한 조상들의 후예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정통(original)'이라 여긴다. 반면에 서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개척자(frontier)'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동부
사람들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로 생각한다.
이러한 지역 감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
상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한 것이 사실이지만, 마치 이 때문에 나라 전체가
망할 것처럼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특히 국경조차 이미 희미한 연필 자국이 되어 버린 인터넷 시대, 글로벌 세상에 지역 감
정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이러한 추세는 차별화한 세상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
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상놈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
람이 없는 것처럼 인터넷 시대에는 적어도 국적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
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즐겨 먹는 음식이나 체질에 따라 고유의 몸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이 서양 사람에게서 '노린내'가 난다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처럼 서양 사람 중
에는 한국 사람들의 김치 냄새, 특히 마늘 냄새를 남보다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어느 미국 기업의 사장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출근길에 한국인 운
전사에게서 나는 김치 냄새 때문에 무척 괴롭다고 한다. 자동차나 엘리베이터처럼 좁고 밀
폐된 공간에서는 곁에 있는 사람의 체취가 더욱 강력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 미국인 사장에게 "당신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당신도 김치를 먹으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이야기다.
김치가 세게적인 식품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김치를 먹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외국인 중에
도 오묘한 김치 맛에 반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취향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 스스로 김치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문화적인 측
면은 차치하더라도, 한국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김치를 먹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어 있는 모
양이다. 지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벌어진 에피소드 한 토막을 기억하는지.
원래 올림픽 선수촌에는 김치를 들여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조직위원회측에서 전문가들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며칠 동안 김
치를 먹지 못한다고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 사람들의 위장 속에는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필요한 특수 유산균이 있는
데, 그 균은 김치를 먹어야만 생겨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사
람들은 김치를 먹지 않으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 연구 결과로
올림픽 선수촌에 김치 반입이 허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미국 사람들 중엔는 외국에 나가서까지 한국 식당만 찾아 다니는 한국 사람들을 좀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 먹지 못하는 좋은 음식이 많은데 왜 쌀밥에다 김치만
찾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잖은 말로 그들을 타이른다.
"김치 먹는 한국 사람들을 우습게 보지 마라. 그들은 모두 중독자들이다. 김치를 먹지 않
으면 소화가 안 되는데 어떡하느냐."
사실은 나 역시 김치 중독자다. 외국 출장을 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한국 식당을 찾아 다
니는 나 자신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갓는데, 인터넷 시장에서는 김치 냄새, 마늘 냄새 때문에 걱정할 필요
가 없다. 인종 차별도 없다. 동양 사람이건 아프리카 사람이건 누구나 좋은 아이디어로 좋은
제품을 만들면 얼마든지 전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다.
이는 국제 무대의 물이 한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올림
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기량을 보유하고 있는 양궁이나 태권도의 금메달 수
가 서른 개쯤으로 늘어난다고 생각해 보자. 지금도 한국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히는
스포츠 강국이지만, 그렇게 되면 대번에 미국이나 러시아를 따라잡을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비즈니스는 한국 경제를 단숨에 세계의 최정상급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종목이다. 이제 지금까지 우리 한국 사람들을 짓눌렀던 모든 한계와 콤플렉스를 떨
쳐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출처 : 지속적인 사고의 혁신을 꿈꾸며~~`
글쓴이 : 이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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