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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_니체(스턴_이종인)

사이박사 2006. 3. 1. 18:01
니체. J.P 스턴. 이종인 번역. 시공사. 1998.

 아! 니체. 솔직히 니체의 저작이 아니라 니체에 대한 저작이기에 사실 니체를 이해했다기보다는 저자인 스턴의 니체 이해를 접한 것이리라. 그러나 어쨌든 참 이해하기가 힘든 책이었다. 니체 스스로가 기존의 문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철학적-문학적 실험을 한 사람이기에 일반인들이 읽어내기엔 무리가 많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내용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겨우 글의 뼈대를 통해 니체의 사상과 삶의 여러 파편들을 조금 정리해본 정도인 것 같다. 그래서 뽑아낸 것들도 하나의 제대로 된 체계로 묶어내기보다는 항목별로 나열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 1 ] 니체와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는 서양 지성사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간을 그렇게 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고 모두 그 바탕은 무신론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답을 '토대' 즉, 경제구조와 생산방식이라 생각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 했다. 또 이들은 종교를 부정했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를 '민중의 아편'(물론 이건 레닌식이지만), 프로이트는 종교를 벗어나야할 집단 신경증으로 규정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아예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 2 ] 니체가 정신병자였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현대인들의 사고에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람이 정신병자였다는 것이 참 그랬다. 게다가 그가 독실한 루터파 목사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뭐 사실 니체를 처음 알았으니까. 그의 가정은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같은 루터파의 영향 아래에서 본 회퍼는 진정한 신학자로 성장했고 니체는 무신론의 대부처럼 성장했으니.... 그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리고 정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그는 이 세상의 삶의 풍요를 누리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에서도 마르크스와 일맥 상통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외로웠다. 이렇게 살다간 그의 삶에서 나온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도 사실은...

[ 3 ] 니체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이성적으로 체계화되고 규정되어서 정돈되어져 있는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고정되어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상태를 거부했다. 그는 아폴론적인, (이성중심적인) 이성적 의식이 과잉된 세계를 부정하고 의식의 결핍과 감각의 고양으로 대변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긍정했다. 그래서 이성적 논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역시 이성적인 도덕과 초월을 말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을 비판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미학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면서 예술이 인간을 구원해줄 길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즉 그는 다분히 현대 철학의 흐름으로 이야기하며 이성중심주의를 벗어나 감성중심주의로의 지향을 보였다.

[ 4 ] 니체는 근본적으로 세계의 모든 현상(종교를 비롯해 진리까지 하여간 몽땅)을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롯해 플라톤이나 관념적 철학자들이 언어(이성)를 통해 제시한 초월적 세계, 진정한 세계, 이상적 이데아, 역사를 초월해 영원의 가치를 지니는 절대적인 세계를 거짓으로 판단하고 모든 것은, 진리도, 역사적으로, 즉 일정한 역사 속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음... 모든 것은 역사적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인본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생성되어 그 역사 속에서의 삶과 연결되므로 가치를 가지게 된다면 당연히 진리는 변화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생성'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되어 버린다.

[ 5 ] 니체는 지식과 '삶'의 연결을 중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식은 무척 중요하다. 이 지식은 바로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힘'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좁혀 말하면 바로 '지식'에의 의지가 될 것 같다. 니체는 그러나 이 지식이 기독교나 관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거부한다. 니체가 기독교와 관념론을 거부하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그것이 현실의 삶을 부정하게 하고 현실, 즉 땅에 발을 디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위'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본 때문이다. 지식은 현실의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일치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과 분리된 무제한적인 지식의 추구는 곧 '시대의 타락'을 의미한다.

[ 6 ] 이쯤 되면 충분히 짐작을 하겠지만 니체의 진리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그는 이 상대성을 매우 중시했다. 그리고 이 진리관은 니체의 핵심 사상과 연결된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나 인간 개인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공동체적, 집단적 신념이나 믿음이 아니라 개인 자신의 실존주의적 선택이었다. 니체는 공동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개인이 중심이고 이 개인이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자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도 '민중'과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충족적, 자기결정적 개인, 즉 범용(평범)한 인간이 아닌 좀더 수준 높은 인간인 초인(고양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초인을 향한 '인간의 고양'을 위해 모든 것은 희생되어야 하고 '힘'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개인이 가치의 창조자이므로 모든 지식과 그 가치는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 의해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 7 ] 니체는 지식이 삶, 더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연결되어야 한다 했다. 그런데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책이라 이야기한 걸 그대로 옮기면 '모든 사물의 유동 상태', 개인이 불공평하게 성장하는 모든 과정, '진리'라는 오류를 본질로 가진 세계라 했다. 어렵지만 그냥 내식대로 '존재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했다. 니체는 바로 이 삶 속에서 개인은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꿔 '나는 나(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와 각종 관념론적 위인들에 의해 부여된 각종 믿음과 신념체계를 거부하고 자신이 창조한 개인의 가치의 실현(즉 실존주의적 참여-관여)에 철저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신념에 가장 철저했던 사람은 바로 '히틀러'였다. 니체의 사상이 파시즘과 나치즘의 원류가 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부분과 함께 영웅주의적 역사관이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 8 ] 이제 니체 사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자. [ 1 ]에서 언급했던 질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니체의 대답은 바로 '힘에의 의지'였다. 쉽게 이해하자면 바로 권력에의 의지,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려는 의지, 가치의 복종자가 아니라 가치의 창조자가 되려는 의지가 바로 인간 행위(삶)의 동인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말로는 '자기 자신 이외의 대상을 복종시키기 위한 마음의 기질, 파괴적 힘을 향한 욕망'이다. '힘에의 의지'는 파괴와 폭력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물론 저항이 약한 곳에서는 '힘'은 부드러운 모습을 지닐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의 본질이 '힘에의 의지'이기에 니체는 '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주인으로서의 모든 빼앗고 복종시키는 신을 니체가 좋아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제 그는 당연히 '신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 9 ] 니체는 기독교를 싫어했던 것 같다. 왜 그런지는 니체의 사상을 더듬으면 쉽게 나올 것 같다. 그는 기독교가 이상과 영원을 강조하면서 감각적 세계인 현실의 삶의 치열함을 제거해 버렸다고 보았다. 즉 이 세상의 개인의 주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초월적 세계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해버렸다는 생각일 터, 그리고 '신'을 인정하면 주인으로서의 개인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 당시의 타락한 교회에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당연히 기독교를 싫어했던 것 같다. 니체 개인에게는 안타깝지만 니체가 기독교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삶을 보지 못했다는 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 본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 스턴이 타락한 기독교를 통한 니체의 왜곡된 기독교 인식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게다가 니체 사상에 가장 치명적이면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신의 죽음)이후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가? 주인이 되었는가? 오히려 그 이후의 더 파괴적이고 극악 무도한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이 없는 세계에서 현대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10 ] 니체도 신이 없는 세상의 모습을 어느 정도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고 해서 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파괴한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는 루터파의 전통 속에서 그리 자유로웠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여전히 인간의 삶에서 도덕적인 삶을 추구했다. 니체에게 있어 인간의 삶의 의미는 제멋대로 사는 데 있지 않았다. 개인에게 존재와 삶의 이유, 목적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 보지는 않았다. 그 목적을 고정시키지는 않았지만 '치열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이를 수 있는 개인 스스로 찾아낸 고상하고 엄숙한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니체는 안타깝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고상한 존재의 이유를 찾기가 신의 세상에서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고, 그러면서도 불가능하고 보람없는 일임을 알지 못했기에... 개인이 자신의 고상한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으려면, 즉 개인이 그 자신만으로 자기 충족적이며 자기결정적인 존재가 되려면 보통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지 않은가?

[ 11 ] 이제 니체의 사상에서 초인은 필수불가결해 보인다. 초인은 마음과 행동이 이상을 실천하는 예언자, 인간의 무제한적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자란다. 별로 뛰어나 보이지 않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이제 이런 영웅적인 초인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여기서 잠깐 니체가 '반그리스도'(책에는 이렇게 나왔지만 아마도 '적그리스도'겠지)라는 책에서 말한 예수와 바울에 대한 언급이 재미있다. 니체는 예수는 단순히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혁명가도 아니며 특정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를 이상하게 왜곡시키고 기독교를 만들어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나쁜 인간은 바로 바울이었다. 그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리를 제도화한 광신적인 랍비였다. 바로 이 바울로 인해 그리고 그를 잇는 루터를 통해 니체가 동경했던 로마와 르네상스라는 인본주의의 영화와 위대한 삶은 파괴되었고 이들로 인해 '교회'가 부활하는 우려할만한 사태가 벌어졌다. 흐흐 정말 흥미진진한 언급이다. 다시 초인으로 돌아가서 니체의 초인인 차라투스트라는 선악 이원론의 창시자인 페르시아 예언자 조로아스터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가 30세에 세상에 무언가를 알려주려 내려왔다는 식의 설정에서부터 말이다. 어쨌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한 가지 희망은 안간이 스스로 창의성을 높여 더 고귀한 가치와 힘에의 의지를 위해 자기를 극복해야만 된다.

[ 12 ] 니체는 개인을 중시했지만 그 개인의 사회적 관계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 역시 당연한 귀결. 본질적으로 개인은 사회 속에서 격리된 존재이다. 니체가 좋아한 것은 개인, 천재, 영웅, 파격적인 지각, 영감(물론 개인적인), 독재(지도자 개인에 의한 절대적 체제), 민족, 자기 충족적 세계, 자기 결정적 인간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인간 개인을 묶어두는 사회적 관습과, 규정, 여기에 바탕한 도덕을 싫어했다. 그가 그토록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것도 기독교의 '죄'와 그 책임, 심판과 같은 판단행위, 그리고 각종 의식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거나 풍요롭게 한다기보다는 제약하고 억압하고 묶어둔다고 보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언어관을 마쳐야겠다. 니체는 언어가 진리를 말하거나 세상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실을 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언어로 나타나는 모든 진리는 거짓이며 언어가 가진 가치는 그 언어가 일상 생활 속에서 가지는 기능에 따라 결정된다하여 그의 상대적 진리관과 부합시킨다. 언어는 기호론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은유이고 따라서 이런 언어로 된 '진리'는 세상에 대한 진정한 진실이 아니라 너무 '오래 사용'해서 사람들이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망각해버린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쓰기는 특이하다. 스턴의 표현대로라면 문학적-철학적 담론이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니체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것을 거부하고 독특한 것을 추구했다. 그는 고정적이며 불변하는 세계를 부정하고 삶이 지닌 역동적이고 비규칙적 개성적 본질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스턴은 결론내리고 있다.

니체, 희망을 주지 못하는 기독교와 비참한 삶 가운데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려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바이지만 안타깝고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