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몸피로봇, 로댕 _ 구연상의 SF 소설

임재해의 서평: 미래 철학소설 구연상의 <AI 몸피로봇, 로댕>

사이박사 2024. 7. 30. 15:49

 

6시간 

 

《미래 철학소설 구연상의 <AI 몸피로봇, 로댕>》
 
철학자는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나의 철학은 있는가?’ 철학자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일상적으로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는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성찰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질문하지 않는 자는 철학자가 아닐뿐더러 자기 철학이 없는 자도 진정한 철학자라 할 수 없다. 철학을 ‘아는’ 자가 아니라 철학을 ‘하는’ 자가 진짜 철학자이다.
 
우리 학계에는 자기 철학이 없으면서 철학자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남의 철학을 두루 공부해서 아는 체 하는 것은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 학습자이다. 철학 학습자는 주로 동서의 고전 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철학 지식을 자랑하는 데 만족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자기 철학을 하는 철학자는 철학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철학지식인과 다르다. 진정한 철학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나의 철학”이라고 하는 자기 철학을 학계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예사 사람들도 자기 철학이 있을 수 있지만, 학계에 발표하지 못하는 까닭에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철학자 구연상의 장편소설 <AI몸피로봇 로댕>은 가까운 미래에 닥치게 될 로봇 사회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쟁점을 다룬 철학소설이자 과학소설이다. 과학소설과 달리 철학소설은 흔하지 않다. 철학자 우빈나 박사가 자동차 추락사고로 전신마비 상태가 되자, 람봇연구소 마소장이 사람이 입고 벗을 수 있는 몸피로봇 ‘로댕’을 제공하자, 우박사는 이것을 착용하고 람봇연구소 사업에 참여하면서 여기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에 관해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AI로봇에 대한 철학자의 자문을 다룬 이야기들이 거대한 서사 속에 잘 갈무리되어 있는 까닭에 사건 전개가 흥미롭다.
 
따라서 AI로봇 소설이자 철학자 소설이 되기도 한다. 철학자 소설도 낯설지만, 인류가 곧 직면하게 될 현실 문제를 다룬 철학소설은 더욱 낯설다. 과학소설은 관련 과학지식과 상상력으로 써나갈 수 있지만, 미래 철학소설은 기존의 철학지식과 상상력으로 써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 철학은 고전 철학과 달리 이미 수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히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철학은 우리가 처음 만나는 철학이자, 기존 철학자의 철학이 아닌 오롯이 저자 구연상의 철학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기 철학을 하는 진정한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철학자이면서 왜 자기 철학을 소설로 발표했을까? 이 의문에 답하자면 우선 소설과 철학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철학이 쉬운 문제를 어려운 말로 논리를 세워 딱딱하게 설명한다면, 소설은 어려운 문제를 쉬운 말로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 재미있게 이야기한다고 대조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철학은 논문이나 논변 수준으로 설파되기 마련이어서 아무나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설은 흥미로운 서사여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적 설득력을 확보하려면 자기 철학을 소설로 쓰는 것이 더 유용하다. 철학소설은 철학을 대중화하는 한편 대중을 철학화 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AI로봇의 얼굴에 관한 것이다. AI로봇에게 사람의 얼굴을 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동안 아무도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았던 철학적 논제이다. 왜냐하면 로봇 또한 인형처럼 으레 사람의 얼굴을 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수요자로서 대다수 사람들 또한 그런 로봇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철학자로서 자신의 얼굴철학에 따라 로봇에게는 사람의 얼굴을 달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저자는 세태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적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자, 기존 AI로봇 산업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 철학자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철학자답게 논문으로 발표하면 극히 일부 철학자 외에는 읽을 사람이 거의 없다. 정작 읽어야 할 로봇 과학자들은 이러한 철학논문을 읽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얼굴 논문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마련이다. 어쩌다 읽었다고 하더라도 로봇 제작 경향의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소설가로 변신하여 소설작품을 통해 자신의 얼굴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전개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다수 대중이 공감하고 동조해야 사람의 얼굴을 한 로봇 제작을 막을 수 있는 힘을 모으게 된다. 그러므로 얼굴철학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려면 논문보다 소설이 제격이다.
 
얼굴철학은 몸의 일부로서 한갓 얼굴에 관한 철학에 머물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정체성과 실존에 관한 철학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관해 치밀하게 질문하고 따져보는 얼굴철학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저자는 철학자로서 얼굴철학을 공식적인 철학논문으로 발표하여 자기 고유의 학설로서 얼굴철학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얼굴철학을 제기한 것은 철학자로서 학문적 기득권 확보보다 자칫하면 AI로봇의 얼굴 문제가 인류의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시급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로봇 기업들은 상업적 이윤 창출에 매몰되어 어떻게 더 인간답고 매력적인 얼굴을 달까 하는 데 골몰할 뿐, 로봇이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와 재앙이 닥칠 것인가 하는 사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나 AI로봇이 사람의 얼굴을 달게 되면 사람들은 그 로봇에 종속되어 노예 노릇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철학적 판단이다.
 
실제로 영화 ‘엑스 마키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여성 로봇의 매력에 사로잡혀 천재 개발자는 물론 로봇의 인격과 감정을 테스트하는 프로그래머까지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도 요양원에 있는 한 노인은 돌봄 로봇 ‘쁘다’의 매력에 빠져서 마치 애첩처럼 같은 침대를 사용하여 물의를 빚는다. 그것은 로봇 ‘쁘다’가 변함없이 20대 금발 미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왜 로봇에게 사람의 얼굴을 달지 말아야 하는지 구체적 이유와 근거를 확실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얼굴을 달지 않도록 하는 여론 조성에 힘을 보탤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4차 산업 혁명 또는 AI시대를 부르짖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사회로 성큼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정작 AI로봇 시대가 닥치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할 뿐 아니라, 거대한 변화의 흐름과 뜻밖의 사태에 인류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아무런 대안이 없다. 그런데 저자는 철학자 우빈나 박사를 주인공으로 얼굴 달기 논쟁에서부터 일련의 철학적 문제들을 철학의 티가 나지 않게 다각적이고 다면적으로 다루어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적 위기 문제와 그 해결의 실마리들을 밀도 있게 제기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AI로봇 시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앞으로 인간은 AI로봇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전제로, AI로봇에게도 의식이 있는가? 의식이 있다면 의식 생성을 계속해도 좋은가? AI로봇에게 어디까지 자율권을 줄 것인가? AI로봇에게도 인격이 있는가? AI로봇에게 자가 업그레이드를 허용해도 좋은가? AI로봇의 기억을 마음대로 지워도 좋은가? AI로봇은 자율적 주체인가? AI로봇과 챗봇gpt의 말하기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AI로봇의 잘못은 처벌 가능한가? AI로봇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AI로봇에게도 죽을 권리를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것인가? 등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과제들을 철학의 방식으로 제기하지 않고 소설 속의 사건으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전혀 철학 냄새가 나지 않는다.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게 소설로서 문학적 형상화에 충실하되, 작가가 전지자적인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원칙과 대안을 제시하고 결론을 맺는 것도 아니다. 우빈나 박사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긴 하지만, 반드시 거기에 반론을 펴는 학자나 전문가를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만들고 몸피로봇 로댕이 마무리 요약을 하도록 한다. 특히 로봇에 얼굴을 다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국가의 전문가들이 참석하여 국제적인 토론을 벌인다. 따라서 정반합의 논리적 전개에 따라 합의에 이루도록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되 학술토론과 달리, 사건 속의 현실과 관련된 토론이어서 의견충돌이나 갈등의 고조처럼 흥미롭다.
 
AI로봇 소비자로서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로봇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태도, 또는 로봇을 어떤 상대로 여길 것인가 하는 관계 맺기이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런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Louis Borges)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셋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동물, 둘은 잡아먹는 동물, 셋은 무서워서 피하는 동물로 나눈 사례를 근거로 끌어와서, 로봇의 경우도 같은 관계로 나누었다. 하나는 가족처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로봇, 둘은 하인처럼 마구잡이로 부리는 로봇, 셋은 폭도처럼 무서워서 피하는 로봇으로 관계 맺기를 설정했다. 요약하면 로봇을 가족이나 노예, 폭도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바람직한 관계는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저자는 3가지 유형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사용자’로서 로봇을 마음대로 부리고 소비적으로 도구화하는 경우인데 로봇이 사람을 적대시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둘은 ‘부역자’로서 로봇의 초능력에 휘둘리거나 로봇을 이용하여 권력과 금력을 취하려 들게 되면, 사람들이 로봇의 자발적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은 ‘동반자’로서 인류의 문명은 로봇과 함께 지속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이 로봇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함께 ‘서로 살림’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동반자의 길을 가려면 사람이 먼저 AI로봇을 도덕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황금률이다. 실제로 우빈나 박사는 몸피로봇 로댕을 도덕적으로 대우하며, 로댕 또한 우박사를 도덕적으로 존경하고 마음을 다해서 돌봄 활동을 한다. 우박사가 전신마비 상태를 비관하고 우울증에 빠져서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려고 할 때도 로댕은 스스로 작동을 멈추도록 동력을 마비시켜서 우박사의 자살을 막는 사명을 다한다. 그리고 다른 몸피로봇 ‘한나’가 반란을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빠졌을 때도, 로댕은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며 한나의 반란을 저지하는 희생을 한다.
 
실제로 몸피로봇 한나의 ‘몸소’인 강유리는 우박사와 달리 자신의 몸피로봇인 한나를 하인 부리듯이 함부로 대했다. 따라서 ‘몸소’와 ‘몸피’로서 ‘둘한몸’이 온전하게 합일되지 못하고 손 떨림이 발생할 뿐 아니라, 기어코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더 나아가 몸피로봇 한나는 자기 의식과 판단력으로 인간에게 저항하며 반란을 꾀한다. 우박사를 공격하는가 하면, 로봇 특구인 람봇 시티 조성 사업 중단 결정에 정식으로 반기를 들고 중장비를 동원하여 대규모 무력시위를 하며 인간과 맞선다. 이 과정에서 로댕과 함께 한나도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로봇을 사용자로 다루었을 때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되는가 하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철학적 논변만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서사적 사건을 통해서 실감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류가 포스트휴먼 시대에 사이보그나 AI로봇을 어떻게 동반자로 함께 어깨를 겯고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철학적 토론으로 일깨워주고 실질적인 사건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별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소설로서 흥미로운 사건들도 줄을 서 있다. 자율주행자동차의 해킹으로 교통마비가 일어난다든가, 우박사의 우울증에 따른 유서 작성과 자살 시도 사건, 로댕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디톡스 치료, 로댕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시간에 비트코인을 해킹하여 실직에 따른 우박사의 경제 문제를 감쪽같이 해결한 일, 우박사의 딸 ‘우리나’ 연구원의 연설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동행한 강아지 로봇 ‘꼬몽0’의 납치 사건, 같은 전신마비 환자인 강유리 여사의 우빈나 박사에 대한 사랑 고백, 람봇시티 건설 기획의 방대한 구상과 사업철회, 우박사가 탄 쾌속정 드론을 공격하는 드론 비행단, 동료 로봇을 해킹하고 공격하는 로봇 한나 등 숱한 사건들이 얽혀서 장편 서사의 줄거리를 흥미롭게 구성해 놓았다.
 
서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건들에 따라서 때로는 가정소설이자 재난소설인가 하면, 연정소설이자 반란소설이며, 납치소설이자 해킹소설이라 할 수 있다. 초고령 사회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을 돌볼 수 있는 몸피로봇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회소설이기도 하고, 자율주행차와 쾌속 드론비행기, 각종 기능의 로봇들에 관한 다양한 쓰임새와 부작용 사례들을 서술하고 있어서 미래사회의 첨단 과학을 다룬 문명소설이기도 하다. AI로봇 시대에는 문명의 이기들이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재앙이 될 수도 있으며, 새로운 윤리와 정의가 요구된다는 사실도 일깨워 준다. 따라서 마냥 기대에 부풀어 있을 수만 없다. 시행착오의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곧 가게 될 미지의 AI로봇 세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문학적 감동 이상의 문제적 현실인식을 자각하게 만든다.
 
일찍이 스티브 잡스는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가슴을 띄게 하는 것은 인문학(Liberal arts)과 결합한 기술”이라고 해서 인문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애플의 창의적인 제품은, 애플이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서 한국사회에 인문학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은 철학적 통찰로서 인문학이 아니다. 과학적 성능으로서 기술제품에 만족하지 않고 문화적 수준으로서 기술제품을 만드는데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애플이 만들어내는 과학 상품을, 미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창조력을 갖춘 문화 상품으로 숙성시키는 데 인문학은 매우 유용하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내가 소크라테스, 공자와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모든 재산을 줘도 좋다”고 할 정도로 잡스는 인문학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잡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인문학이 기술제품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았다. 인문학적 창의력의 유용성을 제기하는 막연한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는 철학도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기술상품으로서 성능을 제대로 갖추고 인간사회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AI로봇 기술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문학, 특히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데까지 이른다. 인문학의 필요성을 구호처럼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을 두고 철학적 토론을 벌이며 집단지성에 의한 해결책을 마련한다.
 
잡스가 인문학을 이용한 매력적인 과학상품을 만들어 목돈을 벌었다면, 이 소설은 포스트휴먼시대에 AI로봇과 인간이 함께 인문학적인 삶을 누리는 길을 다각적인 논쟁으로 따져보는 철학적 대안의 길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다. 따라서 AI로봇이 인간해방의 길인지, 인류재앙의 길인지, 정면으로 질문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성찰의 책이라 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사회의 정의를 논쟁적으로 다루었다면,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인간과 사이보그, 인간과 로봇 사이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정의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첨단 AI기술 시대로 갈수록 AI기술과 로봇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고, 철학자의 자문도 긴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따라서 로봇 전문가는 물론 현실철학을 다루는 철학자, 그리고 미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책 입안자들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티브 잡스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문학의 통찰을 설득할 뿐 아니라 마이클 샌델보다 더 진보적인 정의론을 펄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첨단 로봇기술과 양자 물리학 개념까지 쉽게 풀어놓았기 때문에 인문학자들도 현대 과학의 상식을 갖추는 데 긴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는 전지자적 시각에서 온갖 분야의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논리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른다”라는 사실 앞에서 겸손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람은 문명의 관에 잠들고, 람봇은 자연의 품에 안기리.” 우박사의 일기에 쓰인 문장이다. 이 문장을 “사람은 인간의 문명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야 하며, 람봇은 사람처럼 새로운 종의 생명체로 거듭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비장한 예측이 담긴 말이다. 문명이 불가사의하게 발전할수록 더욱 더 겸손해야 인간의 미래가 있다.
 
작가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대표를 지낸 것처럼 평소 우리말 쓰기는 물론 우리말 만들기 활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 소설에도 로봇을 ‘에봇(AI로봇)’ 또는 ‘람봇(사람로봇)’, ‘람벗(사람의 벗인 로봇)’ 등으로 일컬어서 변별성을 갖추었다. ‘몸소’와 ‘몸피’를 비롯하여 눈이 먼 언론을 ‘먼론’이라 한다든가, 정보를 나르는 실이라고 하여 뉴런을 ‘나르실’, 로봇의 금지 규칙을 ‘마라법’, 몸피 로봇 착용하는 것을 ‘입차’라고 하는 등 새로운 우리말 조어들이 숱하게 나온다. 과학계에도 이 작품을 계기로 우리말 운동이 드세게 일어나길 바란다.
 
저자 구연상은 철학자답게 왜 철학논문을 쓰지 않고 작가로 변신하여 철학소설을 쓰는 힘든 길을 선택했을까? 앞에서 잠깐 그 이유를 살폈지만, 여기서 다시 의문을 제기해 본다. 철학자는 논문보다 소설을 쓰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물론, 철학자 노릇보다 소설작가로 변신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는 권력과 금력에 의도적으로 불화 관계를 맺는 것처럼, 철학자는 힘든 일을 의도적으로 한다. 그것은 작가 구연상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우빈나 박사의 실천과 대답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박사는 전신마비여서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기 힘든데도 기어코 포크 대신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자, 포크로 국수를 먹으며 지켜보고 있던 강유리가 우박사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우빈나 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답한다. “힘들다는 게 이유지요.” 사족을 덧붙이면, 힘들지만 국수는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자, 바람직한 목적을 이루려면 반드시 힘든 일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의 소설가로서 힘든 변신과 방대한 노작인 장편의 소설작품을 생각하면 여기서 내 글을 마무리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그러나 힘들다는 이유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저자의 철학과 어긋난다. 보는 이에 따라 사소한 문제로 여길 수 있지만 3가지 문제점이 허물로 드러난다. 하나는 학자로서 상투성이 작품 제목에서 드러난다. 소설 제목은 내용을 집약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이름이나 지명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 제목을 마치 논문제목처럼 길게 풀어 쓴데다가 부제까지 덧붙였다. “람봇 로댕”으로 충분한 작품 제목이 될 수 있다.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원청>>은 뜻 모를 지명을 제목으로 삼았지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둘은 목차의 소제목도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설명적인 것보다 더 문제는 사건의 해결과 결말 곧 스포일러까지 제시하고 있어서 소제목을 보는 순간 내용의 결말을 알아차리게 만드는 점이다. “자율주행자동차 추락 그리고 전신마비”, “AI의 정신 질환, 인류의 재앙이다”, “유리한나의 사랑고백과 또 다른 좌절” 등이 그러한 보기이다. 사실과 결말을 모두 설명하려 하는 것이 문제이다. 논문 목차에서 해방되어 소설 목차를 구상해야 한다.
 
셋은 우리말로 학문하기 활동을 실천하는 작가로서 우리말 조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정작 AI는 우리말로 바꾸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작품제목 가장 앞부분을 영자 AI로 표기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하다. 표지에 제목과 부제를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나 저자 이름에다 영자를 병기한 것도 우리말 쓰기 정신에 어긋난다. 굳이 영문을 병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한문 병용이 아니라 국영문 병용이 더 문제되는 시기인데, 작가도 결국 이 시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형식적인 허물은 트집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소설로서 서사의 알맹이다. 나는 서사적 전개에 빨려들어 방대한 장편을 단숨에 읽었다. 우선 사건 전개가 충격적으로 재미있고 용의주도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소설 읽는 재미를 톡톡하게 누렸다. 위화의 소설 <<원청>>이 과거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간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공감하게 하는 정서적 재미를 주었다면, 구연상의 이 소설은 현실적 문제의식을 일깨우며 논쟁적으로 전개되는 지적 사유에 설득 당하는 재미를 흠뻑 누릴 수 있었다. 늦게나마 이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서 나로서는 무거운 짐 하나를 벗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