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사건, 재난(참사)인가 악행인가
구 연 상(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
<한글요약>
이 글의 목적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성격을 재난과 악행이라는 두 가지 특성에서 각기 분석하여 그 사건이 재난(참사)보다는 악행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먼저, 재난의 특성은 ㉠ 커다란 피해, ㉡ 돌발성과 통제 불가능성, ㉢ 사회적 혼란, ㉣ 위험 가능성의 현실화 등의 요소들로 제시될 것이다. 이 네 가지 특성에 비추어 이 사건의 재난 여부를 분석한 결과는 이 사건이 피해자 입장에서는 재난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재난의 특성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까닭에 주로 ‘참사’로 불린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악에 대한 정의와 그 구조에 대한 선행 이론에 근거하여 이 사건을 ‘저지름과 당함’의 얼개와 ‘질책 받을 만한 탐욕’의 동기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이 사건이 ‘악행’으로 판정되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이다.
[주제어] 가습기살균제, 재난, 참사, 악, 악의 얼개, 악행, 질책
1. 들어가기
이 글의 목적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살균제 사건” 또는 “사건”으로 줄임)이 재난이나 참사를 넘어 ‘악의 사건(악행)’으로 규정되어야 함을 밝히는 데 있다. 참사는 보통 재난의 구조로써 설명될 수 있고, 악행은 저지름과 당함의 얼개에 근거한 ‘무숨의 발생’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살균제 사건은 피해자들이 그 원인 물질이나 가해자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무방비로 당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고(事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사건이 나중에 밝혀진 바처럼 기업의 잘못과 탐욕(貪慾) 그리고 정부의 늑장 대응과 환경과 안전에 관한 법률 미비(未備) 등의 복잡한 원인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惡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살균제 사건을 주제로 다룬 학술논문은 모두 이 사건을 대체로 재난(災難)이나 참사(慘事)로 규정하거나, 또는 ‘제조물에 따른 피해 사건’ 정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규정은 살균제 사건이 어떤 잘못이나 부주의(不注意)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고, 또는 불운(不運)한 사고이거나 일종의 예기치 못했던 참변(慘變)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형성한다. 그런데 사고처럼 보이는 것이 악행, 달리 말해, 누군가의 몹쓸 짓으로 판명된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크게 달라질 것이고, 그에 따른 법률 개정이나 보상이 좀 더 힘 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안건에 대한 구체적 대응은 분과 학문들의 몫일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인식 바로잡기는 인문학의 주요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균제 사건을 악행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 물음이 이 글의 쟁점이 된다. 살인죄는 누군가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법률적으로 ‘증명(證明)’되고 나아가 그 죽임이 정당방위가 아니었을 때 살인자에게 ‘선고(宣告)’되는데, 이때 증명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짓’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인과 관계가 뚜렷이 성립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유죄 판결에서 인과성 증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증명의 방식은 물증(物證)과 증언(證言), 또는 정황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그리고 판사의 확신에 따라 이뤄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균제 사건을 ‘악행 사건’으로 선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건이 ‘악행’이었음을 인과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가습기살균제 사건(事件)이 “사고(事故)”나 “참사(慘事)”로만 불린 까닭은 그 사건 속에 놓인 ‘악의 인과성’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증명에는 재난과 악행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내어 그 둘을 구분하는 일, 달리 말해, 재난과 악의 본질에 대한 저마다의 뜻매김이 필요할 뿐 아니라 살균제 사건의 특성에 맞는 인과성 증명 방법이 요구되는데, 이 논문은 그 가운데 재난과 악행의 뜻매김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이 재난인지 악행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재난의 네 가지 특성’을 임의적으로 선택할 것이고, ‘악의 본질’에 대한 선행 연구 결과를 끌어올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재난”이라는 낱말의 뜻을 실제의 재난(참사)에 맞추기 위해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 사용되는 재난의 개념을 구조화한 뒤, 거기에 살균제 사건을 끼워 맞춰 분석할 것이고, 다음으로 ‘악의 얼개와 성격’에 대한 선행 분석에 근거해 살균제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악의 연관성에서 분석할 것이다. 이로써 만일 살균제 사건이 ‘재난의 구조’ 대신 ‘악의 얼개’로써 발생한 것임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그 사건을 ‘재난(참사)’을 넘은 ‘악행’으로 새롭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2. 풀어내기
1) 재난의 의미를 통해 본 가습기살균제 사건
(1) 재난의 의미
한자 우리말 “재난(災難)”은 사람이 불이나 물과 같은 자연의 변고(變故)로써 겪게 되는 커다란 어려움이나 고통(苦痛)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그 벌어지는 사고가 사람이 미리 미루어보거나 막을 수 없었다는 순응(順應)의 태도가 깔려 있다.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커다란 재앙(災殃)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데, 이때의 재난은 ‘하늘이 내리는 벌’로 해석되는 셈이다. 재난을 뜻하는 잉글리시 낱말 “디재스터(disaster)”는 그리스어 ‘뒤스(δυσ-)’(갖추고 있지 않음, 나쁨)와 ‘아스테르(ἀστήρ)’(별, 행성)로 짜였는데, 그 뜻은 하늘의 별자리가 잘못되는 바람에 이 세계에 발생하는 재앙을 뜻했다.
하지만 오늘날 재난은 더 이상 ‘하늘의 분노’나 ‘하늘의 잘못 된 별자리’로 해석되지 않는다. 현대는 가뭄, 홍수, 기아, 전염병 등의 자연재난뿐 아니라 인류의 생산력과 기술력의 발전으로 말미암은 인공재난 또한 커지고 있다. 2011년 일본 동부를 강타했던 지진과 쓰나미는 그 자체로도 끔찍한 자연재난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이라는 인공재난으로 이어진 복합 재난의 모습을 실증해 주었다. 이 논문에서 재난의 특성은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경험되는 다음 4가지 요소로 재구성될 것이다.
㉠ 커다란 피해
한국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개정 2011.3.29.) 제3조(정의)에 따르면, 재난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으로 짧게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이 속하는데, 먼저 것은 태풍, 홍수, 호우, 강풍, 해일, 대설, 낙뢰, 가뭄, 지진, 황사, 적조, 조수 등에 의한 피해 등을 말하고, 나중 것은 화재, 붕괴, 폭발, 교통사고, 화생방사고, 환경오염사고 등에 의한 피해, 국가기반체계(에너지, 통신, 교통, 금융, 의료, 수도 등)의 마비, 감염병, 가축전염병 등이 있다.
재난 기본법에서 정의된 재난 규정은 전통적 재난 개념에 포함되어 있던 재앙의 의미는 떨어져 나간 채 ‘피해(被害)를 주는 것’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을 뿐 재난을 발생시키는 주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이 그저 ‘자연’과 ‘사회’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기본법의 초점은 재난의 피해 규모에 놓이고, 피해를 받는 주체나 재난의 발생 방식이나 그것에 대응하는 주체나 절차 등은 빠져 있다. 한국의 재난 기본법에 정의된 ‘재난’은 일본의 재해대책기본법 제2조 제1항에 규정된 것과 거의 똑같다.
㉡ 돌발성과 통제 불가능성
이와 달리 미국의 연방위기관리청(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FEMA)에 따르면, “재난은 통상 사망과 상해, 재산피해를 가져오고 또한 일상적인 절차나 정부의 차원으로 관리할 수 없는 심각하고 규모가 큰 사건, 돌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정부와 민간조직이 복구를 신속하게 하고자 할 때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사건”을 말하는데, 이러한 재난 규정에는 재난의 발생 방식(돌발성)과 관리의 어려움이 들어 있다. 재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가 그 일어남의 때와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이 느닷없이 터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난이 발생하면 그에 대한 관리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 사회적 혼란
하지만 이러한 재난 정의에도 재난이 물리적 결과보다는 사회적 결과로써 규정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프리츠에 따를 때, 재난은 ‘어떤 사회조직에 심한 피해를 입혀서 그 사회구성원이나 물리적 시설의 손실로 인하여 사회구조가 혼란되어 그 사회의 본질적인 기능수행이 어려운 사건으로서, 통제가 불가능하며, 시공간상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위협적 사건’이라고 정의된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를 때, 재난은 ‘사회의 기본조직 및 정상기능을 와해시키는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큰 재난으로서 재난의 영향을 받는 사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극복할 수 없고, 정상적인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재산, 간접사회시설, 생활수단의 피해를 일으키는 단일 또는 일련의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재난은, 낱말 뜻대로 말하자면,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사고와 그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회적 혼란(混亂)이나 곤란(困難)을 뜻한다. 사고는 뜻밖에 터진 크게 잘못된 일, 달리 말해,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큰일을 말한다. 사고 가운데 ‘마음이 갈가리 찢길 만큼 슬픈 일’은 보통 불행한 일로서 흔히 참사라 불린다. 재난은 사고로서 ‘사람이나 재산이나 국가가 다치거나 죽게 되는 큰일’이지만, 그 발생 방식과 관련해 보자면, ‘뜻밖에 일어난 큰일’이며, 관리의 어려움까지 포함시켜 규정하자면,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재산이나 국가에 커다란 손실을 끼치는, 통제(統制)되지 않는 사회적 혼란’이다.
㉣ 위험 가능성의 현실화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로써 끊임없이 새롭게 축조되어 가는 인공 세계이고, 그런 점에서 이 세계는 인간에 의해 통일적으로 건립되고 합리적으로 통제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세계는 ‘미래’의 개방성과 불확실성에 맞닥뜨려 있을 뿐 아니라 인류는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닥쳐오는 갖가지 위험들에 대해 “누구도 이 위험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적절한 보호책을 마련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을 느낀다. 오늘날의 재난은 인류가 문명의 ‘승리’로써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규모로 빠르게 커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언제 어디서든 대형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고위험사회(high risk society)로 이미 접어들어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를 때, 현대적 위험(리지코, Risiko: 위험스러움)―기후변화, 대량실업, 테러리즘, 핵폭발 등―은 성공적인 현대화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인류가 여전히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글로벌한 문제들이다. 위험사회를 살아가야 할 현대인들은 집단적 불안 속에서 자유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보다 ‘안전’을 더 갈구하게 되는 경향성을 갖게 마련이다. 오늘날 위험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지만 다만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채’로 있을 뿐이다. “리스크[위험]는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있는, 우리를 위협하는 미래사건이다.” 이 가능성으로서의 ‘위험’이 현실화되는 사건이 곧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2)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재난 분석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살균제 제품이 시장에서 팔리는 순간부터 ‘잠재된 재난’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사회가 그 제품의 상품화를 막지 못한 까닭에 ‘현실의 재난’은 무려 17년이 넘도록 지속되었고, 그로써 그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재난의 지속 시간, 피해자의 수, 그리고 영유아 및 산모가 주로 피해를 입었다는 점 등에서 ‘재난(참사)’으로 보는 게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던 재난이나 참사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사회 전체가 1995년 처음 출현한 가습기살균제의 피해를 ‘원인 미상의 질병’으로 치부하는 바람에 그 재난(참사)을 오랜 세월 동안 키워왔다는 점이다. 가습기살균제 소비자는 17년 동안 누구든 그가 가습기살균제를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하기만 하면 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가습기살균제는 생활용품으로서 나날이 쓰이던 제품이었고, 그것이 “인체 무해”라는 광고 문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즉 가정이나 병원이나 관공서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두루 쓰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살균제 물보라를 피부에 직접 닿게 하거나 폐 속 깊이 들이마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재난(참사) 성격은 어떠한가? 앞서 나는 재난의 주요 특징으로 ㉠ 커다란 피해, ㉡ 돌발성과 통제 불가능성, ㉢ 사회적 혼란, ㉣ 위험 가능성의 현실화 등을 꼽은 바 있다. 이 사건의 재난 여부는 이 특징들을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다.
가장 먼저, 이 사건은 그 피해 규모로 보자면 ‘재난’으로 인정되기에 충분하다. 2017년 2월까지 이 사건의 피해신고는 5,432건이고, 그 가운데 사망자는 1,131명(신고건의 20.8%)이다. 가습기살균제 판매량에 비춰 보자면, 살균제 노출 인구는 약 894~1,087만 명에 이를 정도이고, 조사 방식에 따라서 관련 피해자 수는 2만 명 규모로 추정되기도 한다. 앞으로 그 피해 범위가 확대되면, 피해자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의 사망 피해자 가운데 태아에서 5세까지의 어린이가 253명, 71~75세가 119명, 26~35세의 산모가 80명이었다는 점이 피해의 심각성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이 사건은 겉보기로는 ‘마치’ 어느 날 느닷없이 돌발적으로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발생한 재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은 속보기로는 제조 기업과 검증 학자들이 검은 돈벌이를 위해 소비자의 피해 가능성에 대해 고의(故意)로 눈을 감았던 ‘상품 사기 판매극’이었고, 정부가 ‘살균제 참사’에 대해 ‘재난 대응’커녕 검찰조사나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부작위 은폐극’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수많은 소비자들이 기업의 사기극에 대규모로 다치거나 죽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비자들의 입장에서 그러한 피해가 돌발적이었으며 어떠한 병원 진료로도 통제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명 ‘재난’으로 규정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해 ‘재난 선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사회적 참사’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가습기살균제 사용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근거해 ‘미리’ 금지될 수 있었고, 또 금지됐어야 했다는 점에 비춰 보자면 인재(人災)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정부가 이미 갖춰진 법률만 제대로 따랐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달리 말해, 얼마든지 ‘관리 및 통제’가 가능했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1990년 제정, 당시 2003년)에 따를 때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할 기업은 [그것의] 주 노출경로인 ‘경피 또는 흡입’에 대한 ‘시험성적서’를 제출했어야 했는데, 그 어느 기업도 이 성적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심사기관은 ‘주 노출 경로에 대한 독성시험’이 빠진 신청서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제8조제2항에 근거해 되돌려 보냈어야 했다. 만일 독성심사와 그 결과에 대한 정부심사만 제대로 이뤄졌더라도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늦어도 2008년 1월 1일 효력을 발생한 「소비자기본법」에 따르면 결함이 있는 제품을 만들거나 팔거나 서비스하는 모든 당사자(기업, 판매처)는 그 결함의 위험성(독성, 유해성)을 소비자에게 “고지(告知)할 의무”가 있었다. 만일 기업이 이 의무를 다했다면, 기업은 살균제 제품에 “인체 무해”라는 말 대신 “물뿌림(스프레이)이나 물보라(에어로졸)의 형태로 사용하면 사망의 위험이 있음”이라는 경고 문구를 적었어야 했고, 소비자들은 그 경고에 따라 ‘닫힌 방안’에서 살균제 물보라를 뿜어내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도 2008년부터는 그 어떤 살균제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의 재난여부를 앞서 전제했던 재난의 4가지 특성에 비추어 판가름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그 피해 규모(㉠ 커다란 피해 항목)에서는 분명 ‘재난’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재난의 나머지 특성들, 즉 ㉡ 돌발성과 통제 불가능성, ㉢ 사회적 혼란, ㉣ 위험 가능성의 현실화 등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돌발성과 통제 불가능성’은 피해자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의 돌발성과 통제 불능성은 악행의 특성에서 따지는 게 맞는다고 본다. 아울러 사회적 혼란 또한 당시 정부가 안정성 검사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부작위의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재난보다는 범죄나 악행의 측면에서 다루는 게 맞는다고 본다.
만일 우리가 이 사건의 피해자 입장에 공감하여 그 피해의 참혹성과 집단성 그리고 원인 미상에 따른 돌발성과 어떠한 병원 치료로도 통제되지 않는 고통, 그리고 피해 범위 등을 둘러싼 사회적 혼란 가중, 아울러 위험 가능성의 지속성 등을 인정한다면, 이 사건은 분명 ‘사회재난’의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 사건의 피해자들을 정부나 언론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처음부터 ‘피해 집단’이 아닌 ‘피해 개인’으로 인식하려 했다. 그로써 이 사건은 ‘사회적 성격’을 갖는 재난 대신 ‘개인적 불행’으로 탈바꿈되었다.
나는 이 사건이,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기업의 탐욕과 정부의 관리 실패가 빚은 악행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이 사건에 드리운 사고나 참사 또는 재난의 너울을 걷어내면, 우리는 거기에서 섬뜩하게 드러난 ‘악(惡)’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은 누군가(개인, 집단) 돈벌이 탐욕과 같은 권력에 눈이 멀어 안전을 전혀 돌아보려 하지 않는 가운데 그(탐욕,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사라진 곳에서 피어난다. 나는 다음에서 이 사건의 진실을 좀 더 깊이 파고든 뒤 그 사건이 재난보다는 악행이라는 말로 부르는 게 맞는다는 것을 밝혀볼 것이다.
2) 악의 얼개로써 살균제 사건 분석하기
이 사건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재난의 네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익숙하게 써오던 생활용품’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소비자 피해 사건’으로서 재난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이 기업이 돈벌이 탐욕에 양심의 눈을 감은 채 의도적으로 저지른 “악행”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사건의 악행 여부에 대한 판단은 악의 본질과 그 얼개에 대한 구연상의 선행 연구에 기초해 내리기로 한다.
악(惡)은 어떤 사람(집단)이 누군가의 본디 모습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무수는 몹쓸 일이다. 악행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첫걸음은 누군가 부당한 무숨을 당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무숨은 저지레를 일으키는 짓으로 무숨을 당한 사람이 그 자신이 본디 갖고 있던 바(목숨, 재산, 관계 등)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악행의 가장 큰 특징이 무숨이 ‘저지름과 당함’의 얼개로써 일어난다는 점에 착안(着眼)하여 이 사건의 악행 여부를 검토해 나갈 것이다. 이 얼개에 따를 때, 악은 누군가 몹쓸 짓을 저지르고, 그 짓에 의해 다른 누군가가 무숨을 당하는 일(몹쓰리)이 일어나야 한다. 반면 재난은 피해(무숨)를 당한 사람은 있지만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없거나, 그 피해(결과)의 원인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건을 말할 것이다.
(1) 저지름과 당함의 사실에 대한 증명
재난과 악행은 무숨의 피해가 생겨났을 때에만 인정될 수 있다. 이 사건의 실마리는 처음에 원인 미상(未詳)의 폐질환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원인의 알려져 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질병(疾病)으로 간주되었고, 그 때문에 ‘재난’이나 ‘악행’으로까지 추정(推定)되거나 연관(聯關)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가 그런 피해를 ‘어쩔 수 없는 불행’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 사건에서 당함의 사실은 앞의 ‘재난 분석’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여기에 다음의 사실이 덧붙여질 수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우리가 그 피해 범주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 범주를 폐렴이나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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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6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추모대회 모습 |
식까지 넓혀야 한다는 주장에 따랐을 때, 이 사건의 피해자 수는 2만 명을 넘을 수 있고, 나아가 그 피해자를 ‘피해자 가족의 고통’까지로 확장한다면, 이 사건의 피해 규모는 그보다 더 커진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우리사회에서 ‘아직’ 악행으로까지 불리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그 피해자들에게 벌어진 몹쓸 일(폐 섬유화, 폐질환, 발작성 폐렴 등에 따른 죽음과 고통)이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몹쓸 짓’으로 말미암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이는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김평산의 최치수 죽이기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김평산은 조준구에게 첩이 남편을 죽이고 그 재물을 가로챘다는 몹쓸 이야기를 듣고, 최치수를 죽여 그 집 재물을 가로채려는 ‘몹쓸 마음’을 먹은 뒤, 귀녀와 짜고 최치수를 죽이는 ‘몹쓸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최치수의 죽음은 처음에는 그가 동네 미친 여자 ‘또출네’의 실화(失火)의 탓으로 알려지면서 그저 ‘불행한 사건’ 또는 일종의 사고나 참사로 여겨졌지만, 그 일이 윤씨 부인에 의해 귀녀 일당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이 밝혀지는 순간 최치수의 죽음은 ‘참사’가 아니라 ‘악행’, 즉 귀녀 무리에 의해 저질러진 몹쓸 짓의 결과로 뒤바뀌게 된다.
이 사건이 ‘그저 불행한 참사’가 아닌 ‘기업의 탐욕에 따른 인재(人災)’, 달리 말해, 악행으로 바뀌는 데는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 결과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역학 조사는 질병관리본부, 서울아산병원,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안전성평가연구소 흡입독성센터,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이 공동으로 2011년 5월 동안 전국 상급종합병원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이 조사에서 최종적으로 가습기살균제가 위험요인으로 밝혀졌고, 뒤이어 ‘가습기를 통한 입자 발생 시험’이 실시됐다.
특히 입자발생 실험 결과에 따를 때, 가습기살균제 제품을 초음파 가습기에 넣고 1500L의 밀폐된 챔버(방)에서 가동시킨 뒤 그것을 SNPS(Scanning Nano Particle Sizer)로 분석하면 평균 30-80nm 정도의 나노 입자가 발생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왼쪽 사진은 살균제 오염 공기를 1 L/min으로 포집한 필터를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이 사진을 통해 우리는 필터 표면에 고체 입자가 포집되어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이어진 동물흡입독성실험으로써 사람들이 가습기살균제를 밀폐된 공간에서 직접 들이마시는 것이 폐와 간 그리고 피부 등을 손상시켜 폐 손상(inhalation lung injury)에 따른 죽음이나 천식 등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아울러 2006년부터 매년 봄철에 나타나곤 했던 ‘가습기살균제’ 호흡곤란환자들이 2011년 11월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판매 중단되고 리콜이 된 다음해인 2012년부터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살균제 기업들이 그로 인한 피해를 낳은 가해 주범(저지르미)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로써 이 사건은 ‘원인 미상의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주의나 고의 또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몹쓸 짓에 의한 악행’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사건의 ‘악행의 구체적 행위자’를 콕 집어 증명하지 못할지라도 다만 이 사건을 불러일으킨 데 대한 ‘포괄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나 집단을 ‘[법률적으로] 추정’할 수 있기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2) 질책 받을 만한 탐욕과 악행의 악질 정도
이 사건은 1천 명이 넘는 애먼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몹쓸 짓(악행)이었다. 나는 이 악행에 포함된 악의(惡意)와 그 피해의 부당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이 악행의 악질의 정도는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악에 대한 뜻매김, 즉 악은 사람의 행위가 “질책 받을 만한 욕망에 의해서 이루질 때(nisi quod libidine, id est improbanda cupiditate)” 발생한다는 주장으로써 평가해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를 때, 사람의 의지는 그것이 제대로 쓰이기만 하면 몹쓸 짓을 저지를 수 없다. 악행은 사람이 ‘올바로 행하는 것’(recte facere)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ignorantia), 또는 올바른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육체의 잘못된 강력한 습관’에 이끌려 그렇게 할 능력을 잃게 될 때 잘못 쓰일 수 있다. 악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난다.
살균제 기업들이 저지른 악행의 악질 정도는 그 행위에 대한 질책의 정도에 따라 측정될 수 있다. 여기서 측정 지표는 ‘선한 의지를 제대로 쓸 수 없었는지(무능력)’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는지’가 될 수 있다. 이를 이 사건에 적용해 보자. 살균제 기업들은 가습기 이용의 편리성을 높여 준 대가로 돈을 벌었고, 소비자들은 그 편리성을 누리기 위해 돈을 냈다. 이러한 사고팔기는 만일 그 기업들이 판 제품이 안전한 것이기만 했다면 몹쓸 짓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악행의 악질 정도에 대한 평가 지표는 첫째로 그 기업들이 살균제 제품의 안전성을 ‘제대로 알고자 했는지’이고, 둘째로 그들이 제품의 안전성을 ‘알 길이 없었는지’가 된다. 이 두 지표를 차례로 검토해 본다.
첫째, 살균제 기업들은 살균제 제품의 안전성을 ‘제대로’ 알고자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는 옥시 기업이 “[해당] 제품의 안전성을 확인해야 한다.”라는 독일의 전문가와 옥시 내부 전문가의 문제 제기를 묵살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옥시는 2001년 IMF(국가재정부도)의 여파로 레킷벤키저에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2000년부터 쓰기 시작한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PHMG)이라는 살균제 물질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한 내부의 검사 요구마저 묵살했다. 이는 옥시가 소비자의 안전을 뒷전으로 하고 돈벌이만을 앞장세워 제품의 안전성 여부를 제대로 알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둘째, 옥시는 살균제에 쓰인 화학물질인 PHMG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위험성은 이 물질을 만든 SK 케미칼 주식회사가 제출한 2000년 특허출원과 2002년 ‘물질안전보건자료 SKYBIO 1100’에 분명 나와 있다. 아울러 옥시는 미국이 PHMG의 가습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영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관련 국가의 안전 기준(법률)에 위반되는 관계로 해당 제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다국적 기업(옥시)은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을 적용해 한국에서는 ‘어린이에게도 안전한 제품’이라고 한국 국민 전체를 속여 ‘독성 물질’을 팔았던 것이다. 이는 옥시가 한국 소비자들을 돈벌이 대상으로 삼아 ‘의도적으로’ 위험에로 내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살균제 기업들은 그것을 제조하거나 판매할 때 지켜야 했던 ‘안전성 심사 절차’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키지 않았다. 이는 칸트의 ‘악 개념’에 따를 때도 악행으로 규정될 수 있다. 칸트에게서 ‘악’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의무), 또는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에 따를 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알고도 그 일을 온 마음을 다해 다하는 대신 그 의무에 거슬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를 때, 살균제 기업들이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했어야 할 ‘안전성 검증 의무’를 저버린 것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무지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제품의 제조나 판매가 금지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검증에 들어가는 ‘작은’ 돈마저 줄이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그들’은 관련 법률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독성시험을 엉터리로 진행했고, 심지어 그 시험성적서를 조작하기까지 했다. 유공의 가습기살균제 유해성 증명시험은 이영순(전 식품의약품안전청장,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명예교수)이 맡았었는데,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제대로 된 실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제품이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제품 개발자 노승권씨와 제조사 유공은 이 엉터리 실험결과를 근거로 제품이 안전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고, 매일경제신문, 중앙일보 등은 그것을 그대로 보도했다. 그 뒤에 유공을 따라 유사제품을 쏟아낸 다른 회사들은 아예 독성시험 자체를 건너뛰고 말았다. 이로써 소비자들은 살균제 제품들이 안전하다고 믿게 되었다.
다섯째, 2002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제조물책임법」에 따르면 기업은 ‘결함 있는 제품’을 만들지 말아야 했지만, 살균제 기업들은 소비자 안전의 토대였던 이 법마저 철저히 무시한 채, 위의 세 가지 결함을 모두 갖춘 제품을 ‘엉터리 실험결과’와 기업 홍보용 보도 자료를 통해 안전 제품으로 ‘거짓으로’ 만들어 팔았다. 기업의 거짓말과 그것을 감시하고 관리했어야 할 정부의 무능력이 결합됨으로써 소비자들로서는 이 제품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말해, 소비자들이 당한 피해는 기업의 주도면밀한 속임수와 정부의 관리 소홀(법률 용어로는 해태(懈怠))에 의한 것이므로 매우 부당한 것이었다.
살균제 기업들의 악행의 질은 그들이 살균제 제품에 쓰인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안전성을 검사해야 할 자신들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검사 결과를 ‘거짓’으로 조작하기까지 했으며, 소비자의 안전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의 악행은 그것이 사고나 참사로 위장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불거진 책임까지 회피하기 좋았다는 점에서 교묘(巧妙)하고 교활(狡猾)했다고 볼 수 있다. 살균제 기업들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부라퀴 집단과 같았다. 우리사회가 이런 기업들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 한 이 사건과 같은 대규모 ‘악행’은 거듭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3. 끝맺기
2000년대 들어 한국사회는 가정과 사무실뿐 아니라 관공서에 이르기까지 가습기가 일반화되었고, 그에 따른 가습기살균제 시장도 해마다 커져 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기업이 그토록 위험한 제품을 ‘설마’ 물질독성시험도 거치지 않은 채 ‘인체 무해’라는 대대적인 거짓 광고를 하면서까지 제조하고 판매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소비자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정부조차 살균제 성분의 유해성 심사 의무를 저버린 채 그 성분들을 ‘안전 물질’로 인정해 주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처음에는 ‘개인적 불행’이나 ‘재난’ 또는 ‘참사’로만 여겨졌을 뿐, 기업의 돈벌이 탐욕과 정부의 무능력이 결합된 악행으로 볼 수조차 없었고, 이러한 시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재난’으로 선포되어야 마땅했다고 보지만, 그 사건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재난사태’로 선포되지 않은 이상, 그것은 ‘사회재난’으로 다뤄지기 힘든 상황이고, 사회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 사건이 재난의 4 가지 특성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하기에 ‘재난’보다는 ‘참사’라는 말이 더 맞는다고 본다. 만일 이 사건이 재난으로 지정될 수 없다면, 보다 확실한 피해 보상책이 주어질 수 있는 ‘환경성질환 인정’의 길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논문에서 이 사건을 ‘악행’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이 악행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건이 누군가의 몹쓸(질책 받을 만한) 짓으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것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관련 기업의 ‘몹쓸 짓’은 그들이 PHGP 물질의 위험성을 모른 척했다는 점뿐이 아니라 법과 소비자를 의도적으로 속이기 위해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 나아가 피해자가 속출하는 가운데도 제품 판매를 강행했다는 점 등이다. ‘양심 있는’ 기업은 PHGP 물질을 ‘물에 녹여 섞어 물보라로 뿌리는 방식’으로 설계하거나 제조할 수 없고, 만일 가습기 살균을 위해 해당 제품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밀폐된 공간에서 살균제(PHGP)로 소독을 할 때는 반드시 마스크와 같은 보호장비를 착용하시오.” 또는 “입이나 코로 들이마시지 마시오”와 같은 경고 문구를 붙였을 것이다.
비록 가습기살균제 상품의 구매가 피해 소비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그 피해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산 것은 ‘깨끗하고 손쉬운 살균 능력’이었지 유해성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습기살균제는 그것이 가습기 ‘속’을 살균하는 데만 쓰였다면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처음 개발한 유공과 다른 살균제 제조 기업들은 살균제를 “가습기물에 넣어 희석하고 나서, 이를 초음파 진동 또는 가열을 이용해서 공기 중으로 바로 내뿜는 방식”으로 쓰도록 만들었다. 이는 독성이 강한 살균제를 마치 농약을 뿌리듯 방안에 살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살균제 제품을 만들고 판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그 제품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는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업이 자신들이 만들어 파는 제품의 안정성을 검증하는 의무를 저버리는 바람에 천문학적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그 제품의 제작과 판매의 공급망에 걸려 있는 기업과 판매사 그리고 서비스 업체의 행위는 모두 그 자체로 악행으로 규정될 수 있다. 살균제 기업들이 이러한 의무를 회피한 까닭은 그들이 그 의무를 다하는 순간 가습기살균제의 제조와 판매가 불가능해지고, 그것은 곧 그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을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난과 책임을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기업이 화학물질로써 상품을 만들어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시장을 통해 팔고, 소비자가 정상적인 시장을 통해 자율적으로 그 제품을 산다면, 그 사고팖은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이익(利益)을 줄 것이다. 기업은 돈을 벌고, 소비자는 필요했던 바를 얻으며, 정부는 세금을 더 걷게 된다. 하지만 살균제 기업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믿음을 배신하여 고의로 살균제의 위험성을 은폐했다. 물론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무능력도 큰 몫을 했다. 이는 우리에게 기업이 “이기적 욕망의 동기”를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악의 피해가 “인과적으로 비롯되는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없을 때 비로소 악행의 꽃이 피어나는 법이라는 사실을 잘 일깨워 준다.
2001년 유럽 정부가 펴낸 ‘미래전략 백서(White Paper)’에 따르면 1981년 보고된 기존화학물질의 수는 100,106개이다. 1996년 한국 환경부 자료에 따를 때,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통된 기존화학물질은 약 4만4천종으로 추정될 정도로 많지만 이 가운데 그 독성이 파악된 것은 15 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사회가 앞으로 맞닥뜨릴 재난의 심각성을 잘 말해 준다. 만일 이러한 재난 가운데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그 화학물질의 독성이 이미 알려져 있음에도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거나 ‘나노 물질’처럼 그 독성이 아직 채 밝혀져 있지 않은 물질을 무턱대로 사용함으로써 부당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그러한 사건을 ‘재난’이나 ‘사고’가 아닌 ‘악행’으로 규정하여 그것의 저지르미(개인+집단)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강도를 높여갈 필요가 있고, 아울러 그에게 ‘징벌적 손해 배상’이나 ‘수위가 높은 법적 처벌’ 등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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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outh Korea's Humidifier Disinfectant Case: Is the Case a Disaster or an Evil Deed?
Gu, Yeon-Sang(Sookmyung Women's Univ.)
The paper is to present that the case of toxic humidifier disinfectants (hereinafter "the case") is more about evil deed than disaster, through an analysis on the case by traits in terms of two aspects: evil deed and disaster. First of all, the aspect of 'disaster' is defined as some factors like: a) Large-scaled damage, b) Unpredictability and uncontrollability, c) Social turmoil, d) Potential danger and so on. According to the analysis performed based on those four characteristics, to identify whether the case can be seen as a disaster or not, it is shown that the case is a disaster on the victim's part, while it is often mentioned just as a 'catastrophic event' at a social level, as the case was considered to have not enough traits to be classified as a 'disaster'. Nextly, the case was further analyzed, not only based on the literature review of the definition of evil and its structure, but also from the two aspects of 'the structure of the committing and suffering' and 'excessive greed to be denounced by public', reaching a conclusion that the case has every reason to judge the case as an evil deed.
Keywords: Toxic humidifier disinfectants, Disaster, Catastrophe, Evil, Structure of Evil, Evil deed, Denounc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