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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온 글+풀이 글: E. H. 카아,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사이박사 2019. 3. 21. 14:56

E. H. 카아,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01), 17~24, 47~50

 

1장 역사가와 그 사실 (부분)

 

19세기는 사실(事實)을 탐구했던 위대한 시대다. 어려운 시절Hard Times1)에서 그래드 그라인드 씨는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인생에서는 사실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랑케2)1830년대에 도덕적인 역사학에 대해 근거 있는 항의를 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이 경구는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약 90여 년 동안 독일과 영국의 역사가들, 심지어는 프랑스의 역사가들마저도 단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구절을 마치 주문(呪文)처럼 읊어대면서 싸움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대부분의 주문과 마찬가지로 이 주문 역시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성가신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하였던 실증주의자들(positivists)은 이와 같은 사실 숭배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실증주의자들은 먼저 사실을 탐구하고, 그리고나서 그 사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역설했다. 영국의 경우 로크3)에서부터 버트런드 러셀4)에 이르는 이러한 역사관은 영국 철학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경험주의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했다. 지식에 대한 경험주의적 이론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한다. 사실이란 감각적인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혀 들어오는 것으로서, 관찰자의 의식과는 별개다. 그리고 그 수용과정은 수동적이다. 관찰자는 먼저 자료를 수용하고 난 다음, 그 자료에 반응한다. 옥스퍼드 영어 소사전(小辭典, 유용하기는 하지만 경험주의 학파의 영향력이 스며들어 있는)에 따르면, 사실이란 결론과 별개인 경험의 자료라고 정의함으로써 그 두 과정을 명백히 분리하고 있다.

이를 상식적인 역사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fact)’은 생선 가게의 좌판 위에 놓인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碑文)이나 기타 등등으로부터 역사가들에게 제공된다. 역사가는 그것을 수집한 다음, 집에 가지고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대로 요리를 하여 내놓는다. 요리 취미가 소박(素朴)했던 액턴은 그것을 담백하게 요리하기를 원했다. 초판 케임브리지 근대사의 필자들에게 보낸 기고문에서 액턴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우리가 워털루 전투에 대해 기술한 것은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 네덜란드인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저자의 명단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옥스퍼드의 주교가 어디에서 펜을 놓았는지, 그 펜을 다시 집어든 사람이 페어베언5)인지, 또는 개스큇6)인지, 리베르만7)인지, 해리슨8)인지 모르게 해야 한다.” 심지어 액턴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조지 클라크 경마저도 역사에서의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해석(解釋)이라는 과육(果肉)’을 대비하였다. 아마도 그는 과일의 과육 부분이 딱딱한 씨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점을 잊었던 같다.

먼저 사실을 움켜잡아라. 그리고나서 해석이라는 움직이는 모래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빠져들어라.” 이것이 경험주의적 역사, 즉 상식적인 역사를 옹호(擁護)하는 학파의 궁극적인 지혜다. 이것은 위대한 자유주의 저널리스트인 C. P. 스콧(1846-1932)이 말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격언을 상기시킨다.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롭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은 분명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지식의 본질에 관해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 편의상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방 한가운데 탁자가 있다는 사실이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두 사실은 같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그 두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객관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대담하긴 하지만 그다지 그럴듯하지 않은 이 가정에서조차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즉 과거에 대한 사실(facts about the past)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이 될 수 없으며, 혹은 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사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구별해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 더 면밀히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다. 상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모든 역사가가 동일하게 취급하는, 말하자면 역사의 뼈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사실이 있다. 예를 들면 헤이스팅스 전투가 1066년에 벌어졌다는 사실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두 가지 고찰해야 할 점이 전제되어 있다.

먼저, 역사가들이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대전투가 1065년이나 1067년이 아니라 1066년에 벌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스트본이나 브라이턴이 아니고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적어도 역사가는 이런 사실에 관해서 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는 정확성은 의무일 뿐 미덕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먼9)의 말을 떠올린다. 어떤 역사가를 두고 정확하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은, 마치 어떤 건축가가 잘 말린 목재나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그의 작업상 필요한 조건일 뿐이지 본질적 기능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역사가는 역사학의 보조학문인 고고학, 금석학(金石學), 고전학, 연대측정학 등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도자기나 대리석 조각의 기원과 연대를 결정하거나, 불분명한 비문을 판독하거나, 정밀한 천문학적 계산을 하여 정확한 날짜를 확정하는 데 필요한 전문적인 특별한 기술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든 역사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본적인 사실이란 것은 대개 역사가가 취하는 원료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역사 그 자체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고찰해야 할 점은, 기본적인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은 사실 자체가 지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내리는 선험적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스콧의 경구(警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언론인은 언론에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적절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配列)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고 한다. 물론 이는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들이 불러줄 때에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등에 대한 결정권은 역사가에게 있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인가를 넣기 전까지는 서지 못 한다.”고 말한 사람은 피란데로10)의 작중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헤이스팅스 전투가 1066년에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유일한 이유는, 역사가들이 그것을 주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나름대로의 근거(根據)를 가지고 카이사르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결정한다. 그 전이나 후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러분이 30분 전에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거나 차를 타고 이 건물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똑같이 과거에 대한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아마도 그 점을 무시할 것이다. 톨콧 파슨스 교수11)는 과학을 실재에 대한 인식 지향(指向)의 선택적 체계라고 정의했다. 이를 좀 더 간단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다른 학문보다 선택적이다.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가 역사가의 해석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다. 그러나 이 오류를 뿌리 뽑기는 매우 어렵다.

단순한 과거에 대한 사실역사적 사실로 전환(轉換)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850년 스톨리브리지 웨이크스라는 곳에서 생강빵 장수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성난 군중의 발에 차여 살해되었다. 그것은 다분히 고의적인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것을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을까? 1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주저 없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목격자의 비망록 속에 기록되었다. 나는 이 사실이 역사가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판단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1년 전 키트슨 클라크12)는 옥스퍼드 대학의 포드 기념 강연에서 그 사실을 언급했다. 이 언급을 통하여 그 사실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이 처해 있는 현재의 지위(地位)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상류 클럽의 회원 후보로 추천된 상태다. 그것은 이제 후원자와 보증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이 사실이 19세기 영국에 관한 논문이나 저서의 각주(脚註)에 나타나거나, 혹은 그 이후 본문에 실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실은 20~30년 내에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아무도 이 사실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은 키트슨 클라크 박사의 용감한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비역사적 사실로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중 어떤 경우가 발생할 것인지를 결정(決定)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그것은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이 사건을 인용한 논문이나 해석이 다른 역사가들에 의해 타당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즉 그 사건의 지위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해석 여부에 좌우된다. 이처럼 해석이라는 요소는 모든 역사적 사실에 개입한다. - 중략(中略) -

그러면 20세기 중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의무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사실과 문서를 너무 대범하게 취급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문서를 찾아 정독하고, 역사 서술 속에 적절하게 주석(註釋)에 달아야 할 사실을 채워 넣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의무는 사실이 정확한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주제나 자신이 제시하려는 해석과 이런저런 의미로 관련이 있는, 알려지거나 또는 알려질 수 있는 모든 사실을 그려내도록 애써야 한다. 만일 그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묘사(描寫)하고자 한다면, 1850년 스톨리브리지 웨이크스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생명원(生命源)인 해석을 제거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전문가, 즉 학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혹은 다른 학문 분야에 있는 학자들이 이따금 나에게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할 때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상식적으로 역사가의 작업은 뚜렷하게 두 가지 단계나 시기로 나뉜다. 먼저 역사가는 사료(史料)를 읽고 그의 공책에 사실을 적어 넣는 등 오랜 준비 기간을 보낸다.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사료들을 치워 놓고, 공책을 펼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서술해 나간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나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그럴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경우를 보면, 주요 사료라고 생각되는 것들 중에서 몇 개만이라도 입수되면 너무나 좀이 쑤셔서, 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더라도 어느 부분이든 상관없이 쓰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는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읽기를 계속하면서 써 놓은 것을 추가하거나 재구성하거나 삭제(削除)한다. 읽기는 쓰기를 통하여 인도(引導)되고 지시를 받으며 결실을 맺는다.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발견한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마치 장기판과 말도 없이 머릿속에서 장기를 두듯이, 펜이나 종이나 타이프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준비 단계의 글쓰기를 머릿속으로 해내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부러워하지만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다. 그러나 나는 이름 있는 역사가들은 경제학자가 투입(input)’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두 과정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믿는다. 이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일부분이다. 만일 이것들을 분리하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극단적인 과정 중 하나에 빠지게 된다. 즉 의미나 뜻도 없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쓰면서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류의 글쓰기를 장식하기 위해 과거의 사실(fact of the past)을 이용할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를 검토해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다음 두 가지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했다. 우리의 입장은 미묘하게도 두 위험 지역 사이에 있다. 즉 하나는 역사를 객관적인 편집(編輯)으로 보고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위에 있다고 믿는 역사이론과, 다른 하나는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이를 지배하는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보는 역사이론이 그것이다. 둘다 스킬라13)나 카리브디스14)와 같이 모두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과거에 무게 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무게 중심을 두는 역사관 사이에서 어렵사리 항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은 생각보다 덜 불안정하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이 강연의 다른 장에서 사실과 해석의 이분법과 동일한 이분법(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역사가가 빠진 곤경(困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으며 무조건 그것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도 않고, 환경의 절대적 지배자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연구 주제의 관계와 같다.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奴隸)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 연구 중인 역사가가 잠시 멈추어서 자신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반성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 내고 또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에 대한 잠정적인 선택과 자신이나 남들이 선택한 것을 참고삼아 잠정적으로 내린 해석을 가지고 시작한다. 역사가가 연구를 계속하는 동안 해석의 과정과 사실을 선택하고 정돈하는 과정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미묘한 변화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작용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상호 필수적인 관계에 있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역사가를 갖지 못한 사실 역시 죽은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글풀이>

 

카아(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20여 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하였고, 웨일즈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5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책은 카아가 1961년 동일한 제목으로 BBC 방송과 여러 대학에서 강연(講演)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1960년대 초 유럽 사회에는 역사에 관한 매우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 여러 나라의 독립, 러시아에 이은 중국의 혁명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유럽인은 자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 카아는 이와 같이 역사적 패배주의나 냉소주의가 팽배하게 된 근본 원인이,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데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아는 역사란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보한다.’고 강조하며 역사에 대한 낙관론(樂觀論)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사실을 숭배하였던 19세기 실증주의 역사가들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 연구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역사가는 현재에 비추어 과거와 미래를 보기 때문에, 역사는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解釋)이고, 해석에는 그 자신의 현재 입장과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카아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규정한다.

그런데 사실을 해석하는 행위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카아는 역사 해석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현재적 인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실재성에 바탕을 두더라도,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가의 해석 여하에 달린 것이므로 사실을 대하는 역사가의 해석의 객관성이 문제되게 마련이다. 카아는 이런 점을 의식하여,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준거가 되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역사가의 방향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가란 진보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방향 감각을 지녀야 하고, 자신의 비전을 미래에 투사(投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역사를 인간이 이성을 활용하여 환경을 이해하고 개척해온 오랜 투쟁의 과정으로 간주하는 카아는, 역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진보란 과학적 지식의 축적(蓄積)을 통하여 자연환경에 대한 지배력과 사회를 조직하는 인간의 힘이 증대된 것을 말한다. 카아의 진보 개념은 비연속적이고 만인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19세기식의 단선적이고 낙관적인 진보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날 카아는 모더니즘 역사가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가들은 카아의 역사 이론에 대해, 대화의 주체는 언제나 현재의 역사가이므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결과론에 입각해서 원인과 결과를 짜맞추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으며, 역사 서술의 담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제 이성과 진보를 이정표 삼아 역사를 정의하였던 카아의 역사관도 과거의 사실로 남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연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실린 부분은 총 6장 중 제1장의 일부분으로,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