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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대(대학)에서 글쓰기 과목을 필수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사이박사 2019. 3. 11. 10:26

<숙대에서 글쓰기 과목을 필수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


따옴: 이 글은 유튜브에 올렸던 강의 녹음(갈하기 소담[소리 담기])을 한글로 적은 것이다.

(갈하기는 2019년 1학기 숙대에서 있었다.)


1)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가


코딩교육, 고전읽기, 전자공학 등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하는가? 기업에서 요구하는 지식들과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도 대학이 제공해 주는 게 맞다. 대학은 지도자를 길러내는 곳이어야 한다. 다만 모든 대학이 지도자 기르기를 사명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좋은 대학이라고 손꼽을 수 있는 대학들만이 이끌미를 길러내고자 하는 이상(理想)과 비전(꿈바라기)을 갖고 있다.


숙대는 좋은 대학이다. 숙대는 사회를 변화시킬 이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구국 창학의 이념도 갖고 있다. 숙대는 대한 제국 시기에 여성 지도자가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하던 그 시절에 구국(救國), 즉 나라를 살리고, 여성 인재를 균등하게 길러내고자 하는, 리더를 기르기 위한 대학이었다. 숙대는 지금도 이러한 비전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더 크고 다양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숙명인으로서 대학으로서의 숙명이 요구하는 하나의 사명을 잘 인식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한다. 숙대는 단순히 전문가, 기술가만을 길러내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더 나아가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는, 하버드와 같은 이상을 가져야 한다.


하버드 대학은 건물일 수도, 높은 교육비일 수도, 천문학적 재정(예산)일 수도 있다. 하버드의 본질은 사람을 제대로 길러내는 데 있다. 하버드의 명성은 거기서 길러내는 사람들의 능력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버드 대학이 길러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 하버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을 길러낸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대한민국 교육에서 빠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교육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진로교육과 같은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제 삶을 되돌아보고 미루어보는 가운데 저를 이루어가는 교육, 지난날의 말로 말하자면, 군자(君子)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군자 되기는 사람다운 사람, 나다운 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삶 전체를 설계하는 교육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 교육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까닭은 가르치는 분들 스스로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바는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칠 수 없나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하버드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하버드 졸업생들은 가장 인상 깊고 도움이 된 교과목으로 ‘글쓰기 과목’을 꼽았다. 그 이유는 글쓰기 수업이 전공 수업과 다른 그것만의 독특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가르친 글쓰기는 에세이 쓰기였다. 유명한 에세이를 한두 개 꼽아보자.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에밀』 그리고 『사회계약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이것들은 모두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책들은 이미 다뤄진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논증하고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들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 준다. 이 책들을 쓴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야 할 방법과 이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에세이는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부닥친 문제들을 푼 그 자신의 실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다. 첫 시간에는 학생들이 그러한 책을 읽히는 이유를 몰라 불평을 털어놓는다. 불경, 성경 등에 쓰인 뜻들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읽으미가 그 책의 저자와 대화를 나눌 때 비로소 알려진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읽은 책들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게 되고, 그렇게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은 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학생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되면서 그들은 오늘날 그 자신 또는 우리들이 함께 부닥친 문제들을 깨닫고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곧 문제 발견술이다. 하버드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너의 문제’를 발견하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문제를 발견하면 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어쨌든 하버드 학생들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교과목은 자기를 찾는 것이었다. 


자기를 찾은 사람, 문제를 발견한 사람은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만일 그가 그 문제를 풀었다고 치자. 자신의 문제를 푼 사람, 보기컨대 마크 주커버그(Mark Elliot Zuckerberg)는 학교를 더 다닐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풀어주거나 가르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푼 해결책을 갖고 뜻이 맞는 친구와 사회로 나아가 그것을 실현해 가나는 삶을 살았다. 만일 그 문제가 학문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푼 학생은 학계로 진출하게 될 것이다. 그 문제가 기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학생은 기업으로 진출하거나 창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가 성공하면 그가 속한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2) 나는 누구인가


글쓰기의 목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 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사회(社會)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모여 사는 동아리, 한 마디로 말해, “모아리”를 말한다.


사회=모아리=모여살이+동아리


“모아리(사회 社會)”라는 말에 쓰인 “모”는 “세모, 네모” 등의 말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지점 地點)를 나타낸다. 동그라미는 이 모들이 천 개 만 개 억 개로 모인 집합과 같다. 동그라미는 모든 모가 다 채워져 이루어지는 원만실성(圓滿實成)과 같다.

사람의 삶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모가 나 있기 마련이다. 둥글둥글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성깔이 있고, 개성이 있고, 살아온 삶과 궤적이 달라서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한데 모여살 수밖에 없다. 

생명(生命: 살으리)의 본질은 디앤에이(DNA), 말하자면, 자기복제이다. 산 것은 모두 자기복제를 한다. 세포가 저절로 그 자신을 복제하는 능력을 읽으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 어떤 컴퓨터가 자기 복사를 한다면, 그것도 살아 있는 것인가? 복사와 복제는 다르다. 자기복제는 암컷과 수컷의 만남, 나아가 그들의 짝짓기를 통해 일어난다. 

짝짓기는 특수한 종류의 무리짓기이다. 복잡계 이론의 핵심은 개체(한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일을 무리 속에서 설명하는 데 있다. 무리를 설명하지 않고는 예측(豫測: 미리 재어나감), 예기(豫期: 미루어 가늠하기), 예견(豫見: 내다보기)이 불가능하다. 낱개는 설명될 수 없지만, 무리 속에 놓인 낱낱은 예측 가능한 패턴을 갖는다. 우리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도 무리짓기를 통해 예측이 가능하다. 삶의 규칙들은 모두 무리짓기, 즉 모여살이의 원칙을 통해 생겨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나를 낳은 하늘과 땅이 결합하는 원리, 만물이 결합하는 원리를 알아야 하고, 나의 어버이나 한국 사회를 알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무리지어 낳아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왜 ‘나’가 더 중요한가? ‘나’보다 나를 낳는 것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와 관련해서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가 없으면 우주도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낳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의미를 낳고, 그 의미의 체계를 낳는 자이다. ‘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과 나를 낳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낳고, 그 체계를 낳는 자이다. ‘나’는 낳아진 자로서 낳는 자이다. ‘나’는 낳아짐과 낳음을 엮어 나가는 하나의 ‘짜임’이다. 

‘나’는 자아(自我)난 영혼(靈魂)과 같은 실체가 아니다. ‘나’는 불변하는, 죽지 않는 어떤 것이 있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검증이나 증명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증명될 수 없다. 신은 증명될 수 없다. 신은 증명의 영역 안에서는 다뤄질 수 없다. 학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증명될 수 있는 것뿐이다. 신은 ‘나’ 위에 있는 가물가물한 어떤 것, 우리말로는 감, 한자로는 신(神), 잉글리시로는 갓(God)으로서 증명을 넘어서 있다. ‘갓’은 ‘좋은 것을 주는 자’란 뜻이고, ‘신’은 번개처럼 신출귀몰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이 세계 전체를 밝히고 통제하는 그런 어떤 보이지 않는 자이고, ‘감’은 모든 것의 밑바탕, 옷감이나 물감처럼, 밑바탕을 이루는 자이다. 우리는 ‘나’의 위쪽을 찾아서 ‘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에게 ‘나의 누구임’에 대해 물음을 던져본다.


물음: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세요?”

갚음: “나는 000입니다.” 

물음: “000는 누구입니까?” 

갚음: “나는 숙대생입니다.”


(12:00) 이러한 갚음은 ‘소셜 퍼슨(Social Person)’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모아리가 나에게 부여한 신분, 지위, 껍질, 껍데기와 같다. 저 같은 경우는 ‘나는 숙대 교수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모아리-나’는 “겉-나”라고 부를 수 있다. ‘겉나’는 나쁜 뜻으로 쓰인게 아니다. ‘나’에게는 껍질이 필요하다. 내 안에는 속살이 있는데, 그것은 말랑말랑하고 과즙이 있어서 맛이 있지만, 그것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속살의 보호막이가 바로 껍질이다. 겉나는 사회적 신분으로서 직업이자 돈벌이 수단이 된다. 나는 ‘겉나’ 없이 살아가기 힘들다. 실업자는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저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기가 어렵다. 겉나가 망가지면 품위도 손상되는 듯 보인다. 자신이 해야 할 ‘떳떳한 일’이 없다는 것은 왠지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겉나가 깨지면 곧바로 그에 따른 갖가지 고통이 뒤따른다. ‘겉나’는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바람막이 노릇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껍질도 잘 마련해야 한다.

사람은 겉나가 있으면 ‘속-나’도 있게 마련이다. 겉나가 사회가 인정해 주는 나, 말하자면, ‘모아리-나’인데, 이때 인정을 받는 ‘나’, 바꿔 말해, ‘퍼슨(Person)’을 뜻했고, 이 잉글리시 낱말은 본디 페르소나(persona)에서 왔다. 우리는 이것을 “인격(人格)” 또는 “인간(人間)”이라 번역했는데, 그것의 본디 뜻은 연극에서 쓰이던 “탈”이다. ‘탈’은 고대 그리스 ‘트래저디(tragedy)’에서 쓰였다. “트래저디”는 흔히 비극(悲劇)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의 보다 정확히 낱말 뜻은 희생극(犧牲劇)이었다. 희생극을 무대에서 연기하던 주인공들은 자신이 연기하던 영웅들의 모습을 무릎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탈로 만들어 썼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 오르케스트라(orkhestra)의 끝에 앉은 관중이 주인공 영웅을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됐던 것이다. 아가멤논의 탈을 쓴 연기자는 그 스스로의 ‘나됨’을 잊은 채 아가멤논처럼 말하고 몸짓하고, 관객들은 그를 아가멤논으로 여긴다. 

‘퍼슨’은 사회가 부여해 준 누군가의 ‘신분(身分)’을 나타낸다. 신분은 한 사람이 자신의 모아리(사회)에 저마다의 역할(役割)이나 배역(配役)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퍼슨’은 주어진 마당(모아리)에서 거기에 참여자가 떠맡아 놀아야 하는 ‘노릇’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걸린 개인적인 경험 한 토막을 말하자면,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 독일인 여자 교수의 대답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독일인 교수가 한국 학생들에게 “Wer sind Sie?(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을 물었고,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나는 000이고, 나는 대학생이고…”라는 대답을 쏟아냈고, 같은 물음이 다시 던져질 때는 “나는 00 살이고, 나는 고향이 000이고…”라는 대답을 똑같이 내뱉었다. 모든 학생이 똑같은 대답을 이어갔다. 

나는 그 교수님의 의도가 궁금해 그 교수님께서 던졌던 물음을 거꾸로 던졌더니, 그 교수님은 내 물음에 “나는 스키 타기를 좋아한다.”라는 말로 갚았다. 나는 그 갚음말에 일반인도 스키를 탈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때 나는 스키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이 ‘나의 나됨’을 ‘말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그 교수님께서 “나는 교수다.”라고 답할 줄 알았지만, 그 분의 대답은 의외로 그러한 ‘모아리-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답변한 셈이었다. 그 분의 대답은 신분이 아닌 가치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때 “가치(價値)”는 ‘내가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 분의 대답이 내게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모아리의 명령’이 주어지면 스스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학교에 갔던 것이었다. 나는 학교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명령에 복종(服從)하기 위해서 다녔던 것이다.

독일인 교수님은 스키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분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를 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 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방향성이 곧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에로스(Eros)’인 것이다. 에로스는 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독일말로는 ‘슈트레벤(Streben)’이다. 이것은 추구(追求), 말하자면, 자신이 바라는 바를 끝까지 뒤쫓아나가는 일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밤하늘에 눈여겨보았던 별을 낮 동안에도 잊지 않고 그리고 쉼 없이 뒤쫓아 가는 것과 같다. 

나됨을 ‘저가 사랑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밤에만 보이는 별을 낮에 뒤쫓는 것처럼 그리고 현실적으로 저에게 주어진, 바꿔 말해, 껍데기로서의 ‘나’가 아닌, 그 안에 들어 싹트는 ‘속나’로서 규정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동양 사람들의 자기규정에도 그 나름의 타당성과 근거가 있다. 성리학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속나’보다는 그 ‘속나’를 극기복례(克己復禮)나 의리(義理)로써 닦아낸(수신 修身) ‘겉나’를 더 무겁게 생각했던 것이다.


겉나와 속나는 ‘나’의 두 모습인 셈이다. 이 둘이 한데 합쳐질 때 ‘참다운 나’가 생겨나는 셈이다.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겉나’와 ‘맛있는 속나’를 한데 아우른 ‘참나’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무리지음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놈으로서 이 참나를 나를 낳는 다른 모든 것들을 한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울러 나가야 한다. ‘나’가 모든 것을 저 혼자 아우르는 일은 마치 승자독식 사회가 도래하는 것과 같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은 “The Winner takes all.”의 번역어로서 ‘이기면 다 갖기’를 뜻한다. 이러한 ‘다 갖기 법’은 독재자(獨裁者)나 왕(王)이 다스리는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법은 이긴 사람들이 만든 것일 테고, 진 사람들은 힘이 없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집행되는 것이다. 진 사람들은 ‘이겨도 나눠 갖기 법’을 원한다. 다수(多數)가 진 사람이라면, ‘다 갖기 법’은 소수(小數)만을 위한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다수는 왜 소수가 정한 법을 따라야 하는가? 규칙(規則)은 사람들이 합의를 통해 정하기 나름이다.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사회적 계약(社會的 契約)’, 잉글리시로 말해, ‘소셜 컨트랙(Social Contract)’이다. 이것은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끼리 합리적인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으로써 이루어진다. 법은 이것을 ‘강제력에 근거해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왜 다수가 그러한 계약에서 소외되고 종속되고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근대 국가를 만들어온 그 동안의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육이 이러한 경제 부정의(不正義)를 문제로 보지 않고 있는 한 한국 사회는 큰 문제가 생겨난 셈이다. 누군가 “갑질(甲-)”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한국의 모아리 전체’를 위해 아주 중요한 발견을 한 것이다. 그 발견이 있기까지 사람들은 갑질은 ‘당연히 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누군가 그 갑질의 부당성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자기’를 찾은 사람이다. 그는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모욕(侮辱)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물은 사람이고, 그 모욕에 아무런 정당한 근거가 없을 때, 그는 그것에 저항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겉나’의 차원에서는 그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참나, 달리 말해, 그의 ‘속나’에서는 그러한 모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부당한 갑질’의 희생양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참나’를 발견한 사람들은 결국 ‘저’가 원하는 것, ‘저’가 사랑해 온 것, ‘저’가 가치 있게 여겨온 것을 말을 넘어 글로 썼고, 그 글이 교육을 통해 전파되고 확산되면서 온 세상이 그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그 결과로 세상이 바뀐다. 세상은 법을 통해 바뀌는 게 아니다! 법은 그것이 있어도 사람들이 안 지키면 그만이다. 법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킬 마음이 있을 때만 우리 삶을 옳게 가름해 줄 수 있다. 법은 사람들의 동의, 합의, 존중을 통해서만 힘을 갖는다. 이러한 힘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다. 음주운전자를 사형시키는 법이 마련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음주운전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법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음주운전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나 과거 아메리카가 했던 것처럼 금주령을 통해 술 자체를 만들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하는 극단적 방법 또한 좋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들은 결국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주령은 밀주를 낳는다. 

사람은 무리지어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사람은 무리 속에서 저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남들이 더불어 좋아하면,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함께 그리고 한데 어우러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로 모이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래로 모인다. 이 ‘모여살기’는 모든 생명체(生命體: 살으리)의 본성(本性), 달리 말해, 본디의 바탕으로서 그것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니, 그 반대이다. 그것은 누구나 제 본성을 잘 피워 나갈 수 있도록 서로가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군자(君子)’, 곧 ‘사람다운 사람’ 또는 ‘나다운 나’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내가 누군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가르침이 너무 약하거나 형식적일 때가 많다.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펼쳐 보자.


물음: [머리염색을 한 학생에게] 염색을 몇 번 하셨나요?

갚음: 2~3번이요.

물음: 염색을 좋아하세요? 그러면, 염색하는 것을 사랑하세요?

갚음: 아니요~.

물음: 그런데 인류는 머리염색을 언제부터 시작했을까요?

갚음: 모릅니다.


염색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랑까지는 하지 않는 학생은 인류가 염색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는지까지 알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염색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염색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했던 방법과 다른 여러 다양한 염색법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그는 염색 박사가 된다. 만일 그가 자신처럼 염색을 사랑하는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는 마치 세모가 모가 덧붙여짐으로써 마침내 동그라미가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염색에 관한 모든 지식을 속속들이 얻게 된다. 염색에 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누군가 그에게 염색에 관해 물으면 물음이 그칠 때까지 염색 얘기를 이어가려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저’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 물으면 신나서 떠들게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흘러넘침’이 곧 사랑인 셈이다.

우리는 겉나로서의 ‘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즉답(卽答)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속나’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숨겨져 있다는 데 있다. 겉나는 저가 일부러 드러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드러나 있지만, 속나는 ‘진정한 나’로서 ‘오센틱(authentic)’하다. ‘오센틱’의 본디 뜻은 ‘아우토(auto)’, 우리말로 말하자면, ‘스스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삶에서 그리 많지 않다. 대학 입학은 ‘스스로 들어왔다’라기보다는 ‘선택을 받은 것’이다. 결혼 승낙도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삶의 사다리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그 결정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남’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영역’에 국한된다. 결단은 대체로 ‘내’가 한다기보다 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의 뜻은 ‘저 혼자 서다’이다. 내가 온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은 ‘내’가 남들과 실질적으로 엮여 있지 않은 ‘내 마음속’뿐이다. 내 마음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스스로’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라는 목적(目的)의 차원인데, 목적은 내가 스스로 또는 혼자서 정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내가 그것[하려는 바]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手段)’의 차원인데, 이러한 방법 또한 내가 스스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만큼은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결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바꿔 말하자면, 무리지음의 원리에 따라서 빚어진다. 모아리에서는 ‘나’뿐 아니라 ‘다른 나들’도 ‘스스로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임자로 동등하게 여겨진다. ‘나들’이 서로 부닥치면, 그들은 서로를 사물, 즉 저마다의 낱낱(개체 個體)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때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끝까지 존중해 줄 수는 없게 된다.


참나에서 속나는 겉으로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채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서양의 낭만주의(浪漫主義), 달리 말해, 로만티즘(Romantism)은 이 숨겨진 마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외쳤다. “낭만(浪漫)”은 ‘로만’이라는 소리를 그대로 적은 낱말로 쓰이지만 그 뜻이 본디 ‘제멋대로 흠뻑 하다’로서 방탕(放蕩)이나 방종(放縱)까지 나타낼 수 있다. 로만티즘은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자유는 이 번잡한 세상의 끈을 끊고 숲으로 강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화랑도(花郞徒)가 바람과 물을 찾아 떠났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로만티즘은 방랑을 부추긴다.

로만티즘은 ‘신새러티(Sincerity)’, 즉 성실성(誠實性)을 버리고, 달리 말해, 모여살이에서 가장 중요했던 ‘약속 지키기’의 미덕을 떨치고 대신 ‘속나’를 찾으라고, 말하자면, ‘마음속의 진정한 너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외쳤다. 이러한 시대에 겉나는 외면되기 십상이다. 이때 사람들은 참나를 잃게 된다. 속나만 강조되면 사회적 일탈이 정당화되는 잘못된 경향이 생겨나기도 한다. 결국 로만티즘은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광기(狂氣)로 여기지게 되었다. 참나의 균형이 깨지고 만다. 참나는 속겉이 모두 가득 차서 고요해야 하지만, 겉나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순간 참나를 이루어가려는 움직임은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다. 즉 섭동(攝動)된다. 

로만티즘은 그 속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라는 표현주의(表現主義), 익스프레션니즘(expressionism)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감춰진 것을 감춰진 그대로 놔두지 말고 겉으로 드러내라는 외침과 같다. 이 요구에 따라 작가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까발리려 애를 썼다. 프로이트는 감춰졌던 마음의 영역도 그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 질서는 무리지음, 달리 말해, 모아리(사회)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오는 쉼 없는 여정(旅程)이었다. ‘누구’라는 말은 세계(世界)를 뜻한다. 그러므로 저 물음은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어떠한가?”와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그에 대한 대답은 내가 나아가는 별자리를 그려 보이는 것이자 내가 스스로 걸어온 발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누구’는 나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인 셈이다. 이 덩어리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 전체를 한데 아우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세계가 비록 나의 겉과 속을 모두 합친 참나의 세계일지라도 그 세계는 결코 다 드러내 보일 수 없고, 언제나 ‘조각으로’ 내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나’는 언제나 ‘조각-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나’의 미래(未來), 곧 아직 오지 않은 앞날은 현재(現在)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축복이다. 나의 현재까지는 바뀔 수 없지만, 나에게 남아 있는 나의 앞날은 완전히 열려 있다. 이 열려 있는 ‘나’는 ‘참나’에게서 빠지거나 뺄 수 없다. 이 빠져 있는 것이 ‘나’에게는 더 값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는 언제나 ‘조각-나’로 그칠 뿐이다. 

‘참나’는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더 내디디면, 보기를 들어 여러분이 숙대에 들어오면, 내 앞에 펼쳐지는 게 더 커지고, 그로써 채워지지 않은 게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거꾸로 현재의 내 ‘조각’은 더 작아지고 만다. 남들의 눈에는 ‘조각-나’가 더 커진 듯 보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내 조각이 점점 더 작아지기도 한다. 나의 이 작은 조각을 채워나가는 길은 ‘나 혼자’서는 갈 수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연대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삶을 살아본 사람의 지혜이다. 저를 혼자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허무하다. 산마루에 오르는 사람은 그곳에서 혼자 살려 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산을 내려와 그 아래에서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더 값지게 살아가려 한다.

나는 ‘조각조각’ 부서져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 자신의 조각들을 맞춰 나가야 한다. 나는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 말하자면, 코드(Code)가 맞는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 “코드”는 ‘어떤 실행 명령을 적어 놓은 줄’이다. 코드는 ‘법전(法典)’으로서 실행 명령을 담아 놓은 글월의 집합체이다. 거기에는 ‘도둑질한 사람은 손목을 자른다.’와 같은 규칙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코드는 ‘실행하기 위해 적어 놓은 글줄’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는 ‘나의 조각들’도 잘 들어맞는다. 들어맞음의 너비가 커지면, 마더 테레사가 물방울들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고 말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나’들이 ‘우리’로 질적 변화를 겪는다. 


3) 글쓰기의 무엇(본질 本質)


앞서 머리염색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학생이 자신의 ‘딴 조각’을 찾았다면, 달리 말해, 염색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그들은 서로 자신이 몰랐던 바들을 주고받으면서 염색에 관한 보다 완전한 앎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염색법을 창안하고자 하는 뜻이 서로 맞아 그것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 방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본질인 것이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면서 속속들이 알고 있던 바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글을 넘어 유튜브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사랑이다. 글쓰기의 본질은 논문을 통해 학점을 취득하거나 돈을 버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평가는 수업이라는 형식이 요구하는 것이지 글쓰기 자체가 요구하는 바는 아니다. 글쓰기의 본질은 내가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알림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만일 가치가 없다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다. 글쓰미 스스로도 자신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면 그런 글은 쓸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일기를 읽고도 그것이 쓰인 이유나 내용을 알 수 없다면, 그는 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왕조실록에는 “우박이 왔다.”나 “큰 비가 왔다.”와 같은 단순 사실을 적은 글귀들이 많이 나온다. 현대의 우리는 그러한 기록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 기상학자가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모아 고려나 조선 때의 기상 자료로 연구하자 그 기록들은 과학적 연구를 위한 소중한 자료로 바뀐다. 그 뒤 개기일식과 같은 주요한 기상 현상들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몫이기는 하지만, 글쓰미는 그 글을 읽을 사람을 위해 그가 자신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쓰는 게 좋다. 우박에 대해 쓴다면, 글쓰미가 우박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왜 왔는지 등까지 함께 적어 주었다면, 읽으미들은 그 기록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러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아무리 사실만 적고자 했을 때에도 이러한 원칙은 지킬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내 이야기의 알갱이(핵심 核心)는 ‘글쓰기의 핵심은 나를 깨닫는 데 있다.’라는 것이다. 이제 오늘의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이 이야기는 “글쓰기는 언제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을 갚아 나가기 위한 것이다. 글쓰기는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글쓰기는 인류가 글자를 발명한 뒤부터 첫자리가 열렸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글쓰기는 노래라는 형태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는 클레오스(Kleos: 명성 名聲)를 위한 것이다.


물음: 이순신 노래를 아시나요? 세종대왕 노래는? 3·1절 노래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는? 이러한 노래가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갚음: 잊지 말고 기리기 위한 것이요.

물음: 자기를 위한 노래가 있나요?

갚음: 없습니다.


자기를 위한 노래는 왜 없는가? 기릴 만한 영웅적 행위가 없어서? 하지만 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일기를 쓴 적이 있을 것이다.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그 자신의 삶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요즘 자서전이 유행하는 이유는 누구나 스스로를 기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자서전은 스스로 쓰기도 하고 누군가 나를 대신해 써 주기도 한다.


물음: 다음에 오는 “00”에 들어갈 사람은 누구인지 맞춰 보세요. “영웅은 00이 필요하다.” 영웅은 누구를 필요로 할까요?

갚음: 영웅은 기록자를 필요로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직업으로 말하자면, 영웅은 “시인(詩人)”이 필요하다. 시인은 오늘날의 직업으로 말하자면 작가(作家)나 기자(記者)를 뜻한다. 오늘날의 영웅인 대통령은 기자 없이는 활동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모든 활동은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영웅적인 것이고, 따라서 언론에 의해 끊임없이 보도가 되어야 한다. 취재 언론 없는 대통령 행사는 대통령에 걸맞지 않다. 대통령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함께 가야 한다. 대통령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자세히 보도할 기자들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취임 그 자체로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국민이 그를 좋아하고, 언론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열심히 취재할 때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이』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없었더라면 ‘아무도 아닌 자’가 됐을 것이다. 우리가 그 영웅들을 알 수 있게 된 까닭은 한 시인이 그들의 삶을 노래해 주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없었다면 영웅은 태어나지 못했다. 영웅 찬가(讚歌)는 실제로 축제에서 리라라는 악기에 맞춰 노래로 불렸다. 그 방대한 이야기들이 노래로 불려 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상연됐던 ‘트래저디(tragedy)’들은 비극(悲劇)이 아니라 희생극(犧牲劇)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자아내는 비극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바친 희생극이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희생”이라 불려야 한다. “트래저디(tragedy)”는 희생양으로 바치던 양의 울음소리를 나타낸다. 영웅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한다. 트래저디(tragedy)는 영웅의 이러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보여 준 아킬레우스의 희생을 노래했고, 또 오뒷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희생도 드높였다. 거기에서 시인이 기록한 모든 주인공들은 희생한 사람들이다. 헤로스(Heros)는 영웅(英雄)으로서 꽃부리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그의 이름은 공동체에서 영원히 드높여지고, 기려져야 한다. 그의 아름다운 명성(名聲)은 온 누리에 자자하다. 이러한 명성이 곧 클레오스, 우리말로 말하자면, 노래인 것이다. 구연상의 노래가 아직 없는 까닭은 그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노래해 줄 시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위한 시인이 되어 줄 수 있다. 자신의 노래가 불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그 노래가 말해 주는 바에 따라 살아야 한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으로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

노래는 칼보다, 돌에 새긴 글자보다 피라미드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글에 대한 찬양은 이어가고 있다. 작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소설 한 편을 쓰는 이유는 소설이 허구나 창작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포에티카(Poetika)』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놓았다. 작가는 자신이 현실에서 겪어나는 경험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놓는다. 이 경험들은 실제로는 조각나 있을 뿐 아니라 그다지 아름답지도, 비록 오늘 아름다울지라도 다음날 그 아름다움을 잃게 마련이다. 경험들은 그 빛깔마저 점차 바래져 볼품없는 잡동사니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누군가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되는 순간 권태로운 것으로 탈바꿈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필요하다. 시인은 누군가에게서 벌어졌던 하나의 사건을 조각조각 난 그대로가 아닌 완전한 모습으로 기술해 주는 사람이다. 이때 그는 허구가 필요하다. 그는 실제 벌어졌던 일을 우리가 완전한 모습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로써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잊힐 수밖에 없었던 한 사건을 영원히 기억될 환상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영원한 기억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노래는 소설로 바뀌어 현대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글쓰기는 클레오스를 위한 것, 말하자면, 영광과 노래와 찬가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학 글쓰기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한 과학자가 새로운 발견을 하면, 전 세계 과학자들과 언론이 그를 칭송합니다. 오늘날은 잊히는 게 없이 모든 게 기록되어 남는다. 모든 것이 기려질 수 있다. 그의 발견은 끊임없이 글마다 딸리거나 검증되거나 비판되는 방식으로 기억된다. 기록된 것들은 비록 현재 기억되지 않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뒤늦게 기억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좋은 보기가 프랑스의 진화론자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용불용설(用不用說: Theory of Use and Disuse, 1809)이다. 이것은 다시 발굴되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아무리 작은 한 조각의 진실도 버려지지 않고 인류 모두의 자산으로 거듭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이 쓴 글(논문)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나중에 유명해지면 나는 아주 뿌듯해질 것이고, 그 논문 또한 새로운 빛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은 여러분의 삶의 한 단계를 증명해 줄 기삿거리가 되거나 여러분의 문제의식이 자라난 인생의 궤적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아무런 기록도 없는 사람은 ‘빈탕-한데’와 같다. 그는 텅 빈 쭉정이와 같다. 


4) 글쓰기와 융합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글쓰기”라는 이름의 책 가운데 실제로 ‘융합적 사고’를 구현한 교재는 없다. 숙대의 교재가 유일하다. 글쓰기는 사람의 모여살이를 닮았다. ‘나’는 조각조각을 한데 그리고 함께 맞춰서 전체를 이루어가는, 아울러 짜나가는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기에 글쓰기 또한 ‘아울러 짜나감’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글은 삶을 담는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거꾸로 뒤집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모여살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사람의 밑바탕이 그렇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의 본성이 흩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람은 모여살이를 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유를 원하기도 한다. 사람은 모여살이 본성에 따라 함께 모여살기도 하지만 자유의 본성에 따라 저 혼자 따로 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여윈 채 저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자유로움은 사람이 모여살이를 해 나갈 수 있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그것의 예외가 아니다. 사람의 모여살이는 그 관계가 조여지거나 느슨해질 수도 있고, 저마다 따로따로 흩어졌다 한데 뭉쳐질 수도 있다. 연대는 깨질 수도 있고, 아주 강력해질 수도 있다. 우리 가운데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은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그 어떤 형태의 가족도 없는 사람은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은 적어도 강아지 한 마리라도 그를 반겨주어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모여살이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심지어는 식물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살으리)의 본질이 그렇다. 본성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그 본성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고, ‘나’의 글쓰기 또한 이러한 정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가 융합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글쓰기가 삶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데서 필연적으로 나온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융합”의 의미를 밝혀 놓는 순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융합이 요구되는 배경부터 살펴보자. 융합은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은 필연적 결과이다. “과학(科學)”은 “사이언스(Science)”의 번역어이다. 내가 번역의 문제를 거듭 거론하는 까닭은 글을 쓰는 사람은 저가 쓰는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쓴 작품에 쓰인 낱말 하나하나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은 “과목(科目)으로 나뉜 학문(學問)”을 뜻하는데, 이때 “과(科)”는 ‘헤아려 나누는 일’로서 한약방에서 약재들을 분류해 넣은 상자들과 같다. 그 상자들은 칸칸이 나뉘어 있다. 그 안에 든 약재들은 모두 서로 다르다. “학(學)”은 본디 어린아이가 집안에서 논다는 뜻이었지만 조선시대부터는 ‘배우는 일’로 새롭게 새겨졌다. ‘배움’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사이언스’는 배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낱말 에피스테메(Episteme)의 라틴말 번역어였다. ‘에피스테메’는 ‘속속들이 앎’ 또는 ‘증명된 앎’을 뜻했고, 그렇게 아는 사람이 곧 전문가이거나 장인(匠人)이었다. 에피스테메는 겉보기로 수박겉핥기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속속들이 증명할 수 있는 앎을 말한다. 물론 내가 ‘이미 증명된 앎’을 배우면, 그것도 ‘사이언스’라고 할 수 있지만, 이때도 ‘사이언스’는 배움, 즉 러닝(learning)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이언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계적인 앎’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이언스를 앞서 염색의 보기로써 다시 말해 보자면, 사이언스는 한 가지 색과 다른 색을 섞어 제3의 색을 만들어 낼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색을 섞는 원리가 설명되어야 하고, 그로써 예측된 실제 색이 재연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노란 색을 내기 위해 서로 다른 색을 섞었는데 노랑이 아닌 다른 색이 나왔다면, 그는 색 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증명된 앎은 예측된 결과가 그대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아울러 그것은 그러한 예측의 원리, 달리 말해, 하나의 색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과학에서 흔히 수학적 방법이 사용되는 것은 그러한 원리와 예측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한의학은 과학인가? 내가 겪은 개인적 사례를 들어본다. 나는 한의사에게 침을 맞았다. 그런데 한의사는 침을 맞으면 몸이 왜 좋아지는지를, 말하자면, 침술이 병을 고치는 원리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질 못했다. 침이 기 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고, 엔돌핀과 같은 것을 생성시킨다는 설명은 ‘과학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 추구하는 원리가 인과적 법칙 수준에 놓이기 때문일 것이다. 양방 의사는 같은 질병에 대해 내게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이러저러 한 약효가 생겨서 그 병이 좋아집니다.’라는 설명과 ‘그 약에는 이러저러한 부작용도 있는데,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약을 끊거나 줄이세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양방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은 그것마다 그것의 갖는 약효와 부작용 등이 모두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과학’이 된다. 원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앎, 나아가 그 설명에 따라 예측된 어떤 결과가 실제로 재연되는 것, 이것이 곧 과학이고, 이 두 가지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은 과학이 못 된다.

과학은 이러한 증명에 대한 요구에 걸맞게 그 탐구 분야가 더욱 좁아져 왔다. 앎은 물음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아나가는 것인데, 증명 요구가 강해질수록 물음의 범위 또한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물음의 대상은 더 잘게 쪼개질 수밖에 없다. 아메리카는 2만 2천 개가 넘는 학문 분야가 있고, 한국의 학문 분야는 2천 2백 개가 넘는다. “과학”이라는 말이 본디 이러한 ‘세분화’를 일컬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증명 요구에 발맞춰 발전해 오는 가운데 끊임없이 세분화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과학은 ‘속속들이 앎’ 또는 ‘증명된 앎’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이 세분화되는 바람에 창의성이 줄어들고 있다. 창의(創意)는 낱말의 뜻으로는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내는 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뜻한다. 보기를 들어 2006년 미국 주간지 타임(Time)이 올해의 발명(Best Invention 2006) 가운데 하나로 꼽은 스티키봇(Stickybot)에서 창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로봇은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개발한 것이다. 이 로봇은 도마뱀처럼 벽을 기어오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미세섬유조직으로 이뤄진 빨판 발’ 덕분이다. 이 로봇의 독창성은 ‘뾰족한 인공섬유 수백 개를 붙인 빨판 촉수’와 도마뱀이 벽을 타는 원리인 ‘발가락 조작법(Toe-curl release)’을 응용해 초속 4cm의 속도로 유리창과 타일 등을 올라가는 데 있다.

도마뱀은 벽을 타고 오를 때 발바닥이 벽에 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다음 발을 내딛으려면 또 쉽게 떨어져야 한다. 실제 도마뱀의 발을 연구한 결과, 도마뱀 발에 난 무수한 털 돌기는 특정한 방향으로만 끈적여서, 아래에서 위로 벽에 접촉할 땐 끈적이고,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발을 뗄 땐 쉽게 떨어졌다. 이 ‘방향성 접착력(Directional Adhesion)’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해 만든 게 바로 스티키봇이다. 정교하게 맞물린 근육과 도마뱀을 그대로 흉내 낸 ‘도마뱀 발바닥’은 ‘생체모방 기술’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스티키봇은 기계공학과 생물학의 벽을 넘나드는 가운데 그 둘을 하나로 융합해 냄으로써 만들어졌다. ‘기어오르는 로봇’을 만들겠다는 창의적 발상이 융합의 방법을 통해 구현된 셈이다.

융합의 밑바탕에는 창의적 발상이, 창의의 밑바닥에는 ‘스티키봇’과 같은 것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熱情)이나 사랑이 깔려 있다. 게다가 융합의 주체들인 사람들은 서로의 목적과 코드가 같아야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은 함께 만나기 어렵다. ‘함께 아우르기’를 위해서는 수단의 융합에 앞서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모아져야 한다. 사람이 모이면, 말이 달라질 수 있고, 소통이 어려울 수 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방법도, 개념도, 설명의 틀도 서로 끊임없이 함께 나누어야 하고, 그를 위해 사물(칠판, 의자, 커피 등)의 배치도 융합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대화가 잘 펼쳐질 수 있게 해 주는 살림살이(물담배, 소파, 산책할 수 있는 정원 등)도 필요하다. 사람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까지 모두 한데 아울러져야 한다.

한데 아우를 수 있음의 근거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의 모임은 이해타산으로 해체되기 십상이고, 그러한 융합으로부터는 별 볼일 없는 결과물만이 나올 뿐이다. 사랑이 빠진 융합은 그 시작은 거대했을지라도 지속될수록 자꾸 쪼그라든다. 계산에 사로잡힌 융합은 확장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에 근거한 융합은 사랑의 대상을 향한 희생과 열정으로 말미암아 좋은 성과를 낳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랑의 효과를 믿지 않고, 그로써 모여살이의 본능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며, 모임은 점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뭉쳤다 흩어진 사람들은 서로 싸움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갑자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한국 컬링 대표팀의 몰락이 사랑이 빠져 나간 팀의 운명을 잘 보여 준다. 우리는 기본적인 것, 즉 모여살이의 핵심인 사랑을 잃지 않고, 한데 그리고 함께 아우르기에서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갈등과 마찰을 잘 조율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

융합은 왜 필요한가? 세분화된 앎의 세계는 스티키봇과 같은, 21세기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출 수 없다. 융합은 창의를 위한 수단이다. 융합은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 또는 해결하고 싶어 하는 문제, 보기를 들어, 미세먼지 문제를 풀기 위한 실질적 수단이다. 한반도 미세먼지는 중국의 탓이 크다. 여기에 정부의 무능력이 한 몫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탓을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 자신이 여기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화력발전소를 철거하고, 자동차를 제거하며, 인구 증가로 말미암아 더불어 늘어나는 생활 폐기물들과 현재의 고도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들을 눈에 띄게 줄여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과잉소비시대를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러한 궁핍을 결단하는 대신 ‘남’을 손쉽게 탓하는 길을 선택해 가고 있다. 

만일 한국 정부가 대중의 요구에 못 이겨 미세먼지 문제를 책임을 지고 해결하려 하면서 중국 정부에게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는 미세먼지를 줄일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를 탓하기에 앞서 먼저 융합의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즉 두 정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 일 가운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미세먼지의 발생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것은 미세먼지가 어느 지역 어떤 공장 어떤 발생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지를 철저히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 두 정부의 연구자들이 함께 지역을 방문하여 그 상황을 과학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융합 연구가 가능하려면 서로 다른 연구자들이 함께 가야할 길, 말하자면, 로드맵을 자세히 그려놓고, 그에 대해 서로 합의를 해야 한다. 이것이 아우르기이다. 

미세먼지의 해결책을 찾는 일은 융합적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외교문제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융합의 범위는 점차 넓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데 아울러진 문제 덩어리는 전문가들이 그 문제를 조각조각 잘게 쪼개 아무리 정확히 해결해 간다손 치더라도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분야 그리고 제도와 방법 등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전문가 팀(team=떼)이 꾸려졌을 때만 풀어갈 수 있다.

(71분:19초) 그런데 “융합(融合)”이란 갈말(학술어 學術語)은 “컨버젼스(convergence)”의 일본 번역어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다. “convergence”는 “다이버젼스(divergence)”의 반대말로서 진화(進化, 이볼류션 evolution: 풀려나오기)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쓰였던 말이다. 사람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4만년에서 3만년 전)”인데, 이 ‘생각하는 생각하는 사람’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걷는 사람, 약 1백만 년 전~35만 년 전)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여기에서 함께 갈려나온 게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ans neanderthalensis: 30만 년 전~3만 4천년)와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 15만 4000년에서 16만 년 전 사이, “이달투”는 에티오피아 현지어로 조상의 뜻)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 2~5만년 전) 등이다. 다이버젼스는 ‘갈라지다’ 또는 ‘갈려나오다’라는 뜻으로 같은 종(種)이 더 잘게 나뉘는 것을 말하고, 컨버젼스는 그렇게 갈라진 가지들이 다시 한데 모아지는 것을 뜻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사피엔스에게 학살을 당해 멸종을 당했다고 추정했지만, 이는 지나친 주장이다. 인문지리학에 따르면, 인류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멸종의 위기를 거쳐 왔는데, 사피엔스는 모여살이, 즉 무리짓기의 능력이 뛰어나 그 무리의 규모를 300명 넘게 키워나갈 수 있었다. 무리짓기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그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침팬지나 원숭이 등도 50개가 넘는 음절을 구사할 수가 있고, 그 음절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무리의 수도 함께 늘어난다. 한국말은 1천 7백 개가 넘는 음절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모여살 수 있는 크기가 끝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지구인의 수가 74억 명을 넘는다는 사실이 말의 위대함을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할 줄 앎으로써 무리짓기의 천재가 되었다. 말하기는 새로운 문화와 제도 그리고 문명을 낳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이 지구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른 종족을 학살하고자 하는 잔인성이나 포악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스스로의 생존능력을 사회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키워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통한 무리짓기의 힘이 자랐을 뿐 아니라 그와 아울러 서로 사랑하는 마음도 키워왔다. 사람들은 미움이나 몰아내기 또는 죽이기나 대량 학살과 같은 일도 헬 수 없이 많이 저질러 왔지만, 이러한 것 또한 사랑 때문에 빚어진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대량 학살과 같은 것은 사람들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절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사람의 본성 파괴로 볼 수 있다.

컨버젼스와 다이버젼스는 하나가 둘로 셋으로 갈라져 나오고, 그렇게 갈라진 가지들이 다시금 하나로 모아지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컨버젼스는 이렇게 갈라져 나가 따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컫는다. “융(融)”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무쇠 솥에 생닭이나 대추 그리고 인삼 등을 넣고 물을 부어 푹 삶는 일을 뜻한다. 그런데 “아우르기”는 이렇게 그 섞인 것들이 한데 뭉그러지도록 녹이거나 삶는 게 아니라 그 아울러지는 것들의 고유성이 저마다 다 살아 있어야 한다. 화학자는 화학자로 있고, 생물학자는 생물학자로 있어야지, 그 둘을 합쳐 새로운 인물로 녹여내는 게 아니다. 아우르기는 꽃밭과 같다. 꽃밭의 백합과 장미는 저마다 빛나야 한다. 그것들이 뒤섞여 새로운 꽃이 만들어지거나 꽃밭의 모든 꽃들이 모두 뒤섞인 꽃이 태어난다면, 꽃밭의 아름다움은 없어지고 만다. 꽃밭은 전체로서는 아름답지만 낱낱으로는 저마다의 고유성과 개성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합(合)”은 그렇게 아울러질 수 있는 것들을 아름이 되도록 짜 맞추는 일, 또는 열어놓았거나 펼쳐 놓았던 것들을 본디 상태로 되돌려 닫는 일을 뜻한다.


5)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강의의 마지막 주제인 “짜임”에 다다랐다. 나는 “텍스트”라는 말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 설명에 앞서 먼저 한국이 처한 ‘텍스트 상황’을 짤막하게 말해 본다.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우리의 학문 전통이 있었다. 학문에 종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사람들로 전체 사람의 4%에 다다랐다. 그들은 천재라고 볼 수도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한시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오늘날의 지식인 가운데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천재들이 학문을 한 것은 맞다! 천재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위험에 처하자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한자로 읽고 쓸 수 있어야 하는 학문을 할 수가 없다. 요즘은 잉글리시로 학문하기 힘이 날로 부풀어 오르고 있어, 한문으로 학문하기는 이미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가 된 셈이다.

텍스트는 우리말로 흔히 글이라고 새겨지기도 하는데, “글”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처럼 ‘금이나 줄을 긋는 일’과 관계된다. ‘글’은 글자들을 한 줄로 이어놓은 꼴을 갖고, 그 글자의 쓰인 줄이 누군가에게 읽히면 그 안에 담긴 뜻이 드러날 수 있다. “텍스트(Text)”라는 낱말은 ‘짜인 것’ 또는 ‘거미줄’을 뜻한다. 거미가 몸에서 실을 자아 거미집을 짓는데, 그렇게 짜인 것이 텍스트인 것이다. 거미집에 빗대어 말하자면, 글은 글자로 짜인 것이다. 

삶은 ‘나’라는 바늘과 거기에 달린 실로써 짜인다. 조선시대 용포(龍袍)를 지을 때 24개의 바늘을 한꺼번에 찔러 짜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바늘이라면, 이 바늘은 귀가 수십 개 또는 수백 개가 달렸고, 그 귀마다 갖가지 빛깔의 실이 꿰어 있다. 나는 그러한 바늘로 날마다 바느질을 한다. 내 삶은 마치 이러한 바느질로써 짜이는 것과 같다. 시간의 귀와 공간의 귀, 그리고 또 다른 갈래의 헬 수 없이 많은 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바느질에 참여한다. 그렇다면 내 삶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글은 내 삶의 짜인 것(텍스트)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글자로써 짠 것이다. 삶은 춤으로 드러내 짜일 수도 있다. 춤은 몸짓으로 짜는 것이다. 21세기는 동영상으로 내 삶을 캠코더로 찍어서 담아낼 수도 있다. 우리네 삶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말하자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도 가끔 일어난다. 우리는 말하지 않고도 서로 통할 때가 있다. 삶이 기본적으로 헬 수 없이 많은 요소들이 ‘나’를 통해서 복잡하게 짜여 나가는 것과 같기에 글도 삶을 닮아 그렇게 짜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어진 짜인 것(텍스트)’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것은 글자들뿐이다. 이 글자들은 누군가 짠 것이다. 글자에 앞서 이미 ‘누구’가 있어야 한다. 이 ‘누구’는 글자 자체 속에는 들어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글자의 뒤에 ‘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는 그것을 쓴 사람의 손길을 마음에 더불어 새겨둔다. 이러한 것을 “컨텍스트(Context)”, 우리말로 “맥락(脈絡)”이라고 부른다. 컨텍스트는 ‘함께 짜인 것’을 말한다. 함께 짜인 것은 짜인 것 그 자체 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짜이기 위해 반드시 함께(Con-)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글쓰미, 즉 작가(作家)이자 오써(Author)이다. 글쓰미는 글자의 바느질을 한 사람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는 바로 글자를 짠 사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작가연구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가 살던 시대의 아들딸로서 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말하는 이다. 시대가 달라지면 짜인 것에 대한 이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용포가 있던 왕권 시대에 쓰인 글과 누구나 이끌기(민주주의)의 시대에 쓰이는 글이 그 시대정신을 달리하는 것처럼 짜인 것마다 그것을 짜는 사람이 살던 시대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규정하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은 우리가 스마트폰을 할 때 그것이 내 삶을 조정해 나가는 것처럼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든 모르고 있든 내 삶을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다스른다(조율 調律).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소스 코드(Source Code)’이다. 비록 그 사실이 그들 자신에게 드러나 있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 소스 코드는 나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각인하지만 위로 두드러지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시대정신은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 내 글쓰기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고 부른다. “하이퍼”는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히페리온 또는 그리스의 은둔자(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1779)』에 쓰인 바대로 ‘운둔(雲屯)’, 즉 ‘숨어 있음’을 뜻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숨겨진 채 짜인 것’, 달리 말해, 시대와 역사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글이라는 글자도 숨겨진 채 짜인 것이다. 한글은 알파벳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글자를 짜게 만든다. 우리말 한국말이나 한국문화 등도 ‘숨겨 짜인 것’이다.

글은 그것이 짜이는 방식에 따를 때 세 겹(층위 層位)으로 되어 있다.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의 세 겹을 잘 살펴서 그 뜻을 일구어 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삶이 속살과 겉살(껍질)로 겹겹이 이루어진 것을 닮았다. 읽으미는 글 속에 담긴 겹겹의 뜻들을 껍데기를 벗겨내어 가지런히 벌여 놓고 그 속에 숨겨진 속살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듯이 알아가야 한다. 읽으미는 그렇게 글 속에 숨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겹겹이 드러내어 그 안에 간직된 뜻들을 밝혀내야 한다. 읽기는 의미를 캐내는 일과 같다. 캐냄은 그렇게 밝혀진 것들을 나의 의미 체계로 짜나가기 위한 것이다. 하나의 책이 나에게 체계화가 되고 나면 나는 그 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내가 그 책의 뜻하는 바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나는 그 책에 더는 얽매일 필요가 없다. 나는 나의 짜인 것을 들고 현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는 굳이 남의 체계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대신 나는 나의 깨달음을 말과 글 그리고 움직임 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실천은 나눔이다. 나눔은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인 셈이다. 


오늘 강의는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