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에 대한 뜻매김>
사이 구연상(숙대 기초교양대 교수/철학 박사)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읽기(독, 讀)는 일굼이다. 일굼은 땅과 같은 것을 파서 흙과 같은 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는 것은 잠자고 있던 것이거나 묻혀 있던 것이다. 땅일구미(농부)가 논밭을 일구는 까닭은 잠자던 흙을 깨워 그 속에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다. 흙이 눈이 닫혔던 씨앗을 품어 돌봐주고, 물과 바람이 그 씨앗을 깨우면, 씨앗은 싹을 틔워 자란다. 자람과 열매는 하늘의 해와 땅의 거름 그리고 그 사이에 살아가는 것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일굼으로서의 읽기는 ‘글 속에 심긴 뜻의 씨앗’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뜻의 씨앗이 피어나면 그 속에 메말라 있던 생생모습(이미지, image)이 활짝 되살아난다. 글은 뜻의 씨앗으로서 그 자체로는 뜻을 싹트게 하거나 자라게 해 주지 못한다. 글에서 뜻이 돋아나게 해 주는 해와 거름은 사람의 마음, 꼭 짚어 말하자면, 생각하기이다. 글은 열매이자 씨앗이다. 씨앗으로서의 글이 그 안에 담긴 생생모습을 다시 내보이기 위해서는 글의 껍질이 깨지거나 벗겨져야 한다. 읽기는 ‘글-깨우기’인 셈이다.
딱딱한 글이 읽기를 통해 생각의 부드러운 흙 속에 묻히자마자 글에서는 곧바로 뜻이 솟구친다. 글로부터 솟아오르는 뜻들은 물줄기처럼 흐름을 이루기도 하고, 나뭇가지처럼 퍼지는 꼴을 갖추기도 하며, 물결처럼 흔들리기도 하고, 꽃처럼 송이로 맺히기도 하며, 덩이뿌리처럼 아무렇게나 뻗어나가기도 하고, 화살처럼 의도(意圖)의 과녁으로 쏘아지기도 한다. 뜻은 우리의 마음속에 드러나는 모든 것이다. 마음속에 없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뜻이 될 수 없다. 잠긴 것, 막힌 것, 감감한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싹을 틔우지 않은 씨앗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바닥에서는[일차로는] 그 글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꼴로 바꾸어주는 것을 말한다. 글은 보통 글자로 쓰이지만, 그림으로 그려지거나 금긋기(도표)로 나타내지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글은 이렇게 여러 짜개(要素)로 짜일 수 있다. 우리는 글을 입으로 그것이 소리 나는 대로 읽을 수도 있고, 눈으로만 읽을 수도 있다. 글 읽기는 글의 말소리나 생긴 꼴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ㄱ”을 “기역”으로 소리 낼 것이다. 도표나 그림은, 만일 그것들이 읽혀야 할 고유한 방법이 있다면, 그러한 방법에 따라 되풀이되어야 한다.
읽음은 글에 쓰인 것을 ‘말로써 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노래하미가 악보에 쓰인 노랫말을 음표에 따라 부르는 것과 같다. 읽음은 글로 쓰인 것을 ‘눈으로 받아들임’이자 ‘입으로 말해 줌’이다. 점자로 쓰인 글은 ‘손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눈-들이기’는 쓰인 것을 눈여겨 바라보는 것을 뜻하고, ‘입-말하기’는 쓰인 것의 소리를 불러 주는 것과 같다. 읽기는 쓰인 것이 무엇인지를 눈과 귀(감각기관)를 통해 알아듣게 해 주는 것이다. 읽음은 받아들이기가 먼저이고 말하기는 나중이다. 읽으미가 쓰인 것을 그것의 소릿값으로 바꾸어 말로 불러주면, 들으미는 그 소리를 다시 글로 쓸 수 있다. 우리는 읽기로써 글 자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
우리는 글을 읽음으로써 쓰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읽음이 앎을 받아들이는 한 방식임을 나타낸다. 글 읽기는 단순한 소리내기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글을 건성으로 읽든, 심심풀이로 읽든, 어떤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읽든, 어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 주인공과 공감하기 위해 읽든, 우리가 글을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앎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읽음이 곧 앎을 낳는 것은 아니다. 앎은 언제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읽으미가 자신이 읽은 바에 대해 스스로 묻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런 앎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자신이 읽은 것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앎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읽음은 앎을 받아들이는 일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앎을 낳거나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이는 읽을 때마다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는 글을 읽는 동안, 그 소리를 듣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앎 짜임새를 조정해 나간다. 새 앎은 있던 앎을 허물기도 하고, 있던 앎에 덧대어 놓이기도 하며, 옛 앎과 뭉쳐지기도 하지만 그냥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읽은 것은 그것이 읽으미의 마음속에 새겨지지 않는 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것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를 잡게 되면, 마음속 앎들 사이에는 조정(調整)이 일어난다. 읽음은 앎의 단순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앎 짜임새에 맞춰 들임이자 그 앎 짜임새를 새롭게 들이맞춰 나가는 것이다. 읽음은 ‘맞춰-들임’이자 ‘들이-맞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글들도 헬 수 없이 많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글자로 쓰인 글뿐 아니라 알 수 없는 그림이나 뜻 모를 아이콘 또는 종잡을 수조차 없는 갖가지 상징물,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이라는 책에 쓰인 신비로운 현상들도 읽어낼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는 ‘드러난 비밀’로 남는다. 읽을 수 없음은 곧 쓰인 것의 뜻하는 바를 풀 수 없음(해독할 수 없음)이 된다. 이러한 비밀은 우리가 그러한 것들의 읽는 법을 배움으로써 더는 비밀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러한 배움에도 끝까지 비밀로 남기도 한다. 또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의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거나 때마다 바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마음은 읽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글 자체가 우리에게 비밀이 아니라는 것, 달리 말해, 글의 비밀이 우리에게 공공연히 풀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글 읽기를 공적으로 배우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능하다. 글 읽기와 쓰기가 누구에게나 공변될 때 그 사회는 문화적으로 보다 공평해진다. 모두에게 두루 고른 글은 누구나 그 쓰인 것을 쉽게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절로 풀어낼 수 있다. 고루 읽힐 수 있는 글은 읽으미에 따라 그 소리가 들쭉날쭉해서도 안 되고 그 풀이 또한 제멋대로여서는 안 된다. 읽기가 ‘올-고를[옳고 한결같을]’ 때 글은 모두에게 두루 소통될 수 있다.
누군가 글을 읽어주면, 글은 읽으미의 목소리와 보는 눈을 통해 비로소 ‘적힌 소리’를 낼 수 있고 ‘새겨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글은 읽으미의 입과 눈에 따라 그 소리와 모습을 달리한다. 글은 그것이 되풀이하여 읽힐 때마다 그 맛이 달라진다. 아니 같은 사람이 같은 글을 읽는다손 치더라도 그 읽는 맛은 읽을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 읽음은 읽으미가 글이 말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 소리를 자신의 입으로 뒤따라 말하는 것이고, 그 글이 알려주는 것을 읽으미 자신의 눈과 생각으로 뒤따라 알려주는 것과 같다. 글을 읽는 맛과 멋은 주로 입과 눈, 즉 들음과 보임에 의해 결정되지만, 때론 깨달음이 결정적일 때도 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글이 된다. 사람은 글의 입이자 눈이고 머리이다.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쉴 새 없이 읽는다. 사람의 읽을거리는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자 사람에게 그 맛과 멋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읽을거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느낌과 생각의 틀에 길들여지게 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읽혀진 것은 읽으미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야생의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읽힘으로써 그 처녀성을 잃으면, 그 세계는 공변된 글로 미끄러지듯 번역되어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된다. 모두리(세계)는 읽힘에 의해 조종(操縱)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읽음에는 지배의 의지가 숨겨져 있다.
읽음이 비록 글에 담긴 모든 것을 그대로 되살려내는 것, 즉 소리는 소리대로 모습은 모습대로 되살아나게 해 주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되살림은 읽으미의 눈과 입 그리고 그의 생각에 단단히 묶여 있다. 반면 읽으미가 비록 자유의지로써 글을 자기 안으로 가져들어와 그 글에서 되살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낸 뒤 그것들을 자신의 기관들로써 그래도 되풀이해 준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되풀이는 언제나 글 자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너무 읽기 쉬운 글은 싱거워 읽기가 지겹고, 너무 어려운 낱말이나 복잡한 도표 또는 추상적인 상징물로 된 글들은 막히는 곳들이 많아 읽는 데 애를 먹게 만든다.
읽음에서의 이러한 묶임은 읽으미와 들으미 사이의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누군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 보고서를 읽을 때,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읽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교과서를 읽을 때, 시인이 자신의 시를 대중에게 읽어줄 때, 읽음의 뜻하는 바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다름이 위계적 또는 주종적인 것이 될 때 읽는 일 자체는 부담스럽게 마련이다. 글을 읽어야 할 목소리가 떨리거나 다리가 후들거리거나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일 등은 읽는 행위가 대인 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임을 잘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미는 다른 사람의 값매기는 눈길에게 얽매일 수 있는 것이다.
읽음은 글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꼴(형태)로 바꾸어주는 일이자, 그로써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때 알아들음이라는 말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배운 적이 없는 낯선 말로 쓰인 글은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입으로는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눈앞의 글이 말해 주는 소리나 뜻을 전혀 알아듣지도, 아니 그 글이 말해 주는 바를 그대로 되풀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읽음에서 알아듣는 것은 귀나 눈을 통해 들리고 보이는 소리나 그림이나 도표와 같은 것뿐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만일 누군가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하는 경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너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반문하곤 한다. 이러한 되물음은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궁극적으로 알아듣고자 하는 바가 ‘그 글이 뜻하는 바’임을 잘 보여준다. 글의 뜻은 그 글을 쓰거나 지은 사람의 마음(의도)과 세계를 내보인다. 그러나 마음이나 세계는 글 자체 속에 직접 담길 수 없다. 글 속의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바는 사물이나 인물, 또는 그것들의 다양한 모습들일 뿐이다. 그것들이 비록 마음과 세계를 드러내 주기는 하지만, 그것들 자체가 곧바로 마음과 세계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세계는 글 너머에서 떠오른다.
글은 우리가 그것을 읽어줄 때마다 그것의 본디 모습으로 되풀이되고 되살아난다. 되살아난 글은 우리에게 그 안에 깃든 모든 것을 다시 말해준다. 만일 우리가 그 말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글은 뜻의 분수(噴水)가 되어 뜻의 물줄기를 쉼 없이 쏘아 올린다. 읽음은 일굼이자 샘솟게 함이다. 글에서 뜻의 물길이 열리어 숨겨져 있던 뜻들이 우리에게 줄기차게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면, 읽기는 더욱 빨라지고, 뜻 줄기는 커다란 강물처럼 흐르게 된다. 읽으미는 글의 뜻에 흠뻑 젖음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글 읽기를 통해 쌓는 경험은, 그것이 읽으미 자신의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한, 일종의 선물과 같다.
읽기는 글에 담긴 뜻, 또는 글이 말하는 바를 일구어내어 그 뜻이 또렷이 떠오르도록 해 주는 일이다. 글의 뜻이 떠오른 뒤에야 우리는 그 뜻을 뜻매김하거나 풀이할 수 있다. 뜻의 떠오름은 우리가 글을 마음속에 품을 때만, 즉 그 글을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글을 읽고 그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셈이다. 읽음은 글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도록 해 줌, 보게 해 줌, 깨닫게 해 줌이다. 읽기는 읽으미로 하여금 글이 뜻하는 세계에 이를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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