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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James D. Watson, 1928~)의 인종차별 발언과 혐오 문제

사이박사 2017. 9. 19. 13:01

자신의 ‘DNA 단두대’에 오른 왓슨

2017.09.18

2014년 노벨상 수상자 왓슨(James D. Watson, 1928~)이 ‘피눈물 나는 빈곤(crying poverty)’에 시달리다 못해 수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외신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신이 규명한 DNA로 사람의 유전체를 해독하는 길을 열어놓은 왓슨은 인종차별론을 언급하다가 결국 자신이 만든 ‘DNA 단두대’에 스스로 오르는 아이러니에 함몰되고 말았습니다. 

필자는 의대 초년생이던 1960년 생화학 강의 시간에 DNA 분자 구조를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분자 구조를 보면서 단백질(Protein) 구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강의하던 교수님(Theodor Buecher, 1914~1997)이 약간 들뜬 음성으로 “앞으로 DNA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뜬금’없는 코멘트를 남기고 강의를 끝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2년 미국 과학자 왓슨과 영국 과학자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이 DNA 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당시에도 ‘아, 그 DNA…’ 정도로만 인식하고 “DNA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교수님의 예언은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인간 유전체(Human Genome) 구조가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암(癌) 진단을 비롯한 의학 분야에서는 물론 범죄 수사에서도 DNA 구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DNA는 그야말로 일상생활 용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30여 년 전 ‘앞으로 DNA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선견지명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생활상을 확 바꾸어버린 그 왓슨이 ‘피눈물 나는 빈곤’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뉴스 내용을 살펴보니, 왓슨이 어느 자리에서 “사람들은 모든 인종이 동등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지만, 흑인 종업원을 대하다 보니 진실이 아니더라(People may like to think that all races are born with equal intelligence, those who have to deal with black employees, find this not true)”라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자신이 참여하던 기업에서 쫓겨나고 대중 강연도 할 수 없어 수입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DNA 분자 구조를 규명함으로써 현대 유전학을 크게 발전시킨 주인공이 인종문제를 유전학적으로 해석하다가 큰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사진 1)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범죄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콜럼버스와도 같은 ‘개척자’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피눈물 나는 빈곤’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겠습니까. (註: 메달은 지인이 구입해서 왓슨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인종차별 거울’과 관련해 얼마 전 독일의 한 언론 매체에서 무게 있게 다룬 기사가 있었습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여성 전문 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에 처음으로 남성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Der Spiegel, 14. April 2017). 그 기사에 곁들여 실은 사진의 ‘남성’은 눈에 띄는 피부색을 하고 있었습니다(사진 2). 그런데 기사에서는 그 남성이 가나(Ghana) 출신이라고 단 한 번 언급했을 뿐 피부색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공공 매체가 표현의 선택에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우리 사회의 현상을 염려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LA 흑인들, 한인 주류점서 ‘블랙 파워’ 외치며 소동”이란 한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을 들 수 있습니다(2017. 9. 9.). 길지 않은 이 기사에서 ‘흑인’이라는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이런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그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거나, 어쩌면 그렇게 써야 독자한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이런 ‘무의식의 속마음’을 단호하게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국내 정치인이나 유명인사가 줄줄이 ‘갑질 논란’에 휘말려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편견의 도가니’를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이를 극복해야 우리 사회가 남을 배려하는 격조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당대의 큰 인물인 노벨상 수상자 왓슨을 ‘DNA 단두대’에 오르게 만든 미국 사회의 준엄한 경고장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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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