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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인구절벽, 잉여인간 / 박권일

사이박사 2016. 4. 2. 18:04
인공지능, 인구절벽, 잉여인간[한겨레] 
민주와 인권 | 2016/03/10 22:19 산해정
[세상 읽기] 인공지능, 인구절벽, 잉여인간 / 박권일

등록 :2016-03-10 20:53수정 :2016-03-10 21:09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 대국이 몇 차례 남아 있음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격렬하다. “씁쓸하지만 인간의 지력을 기계가 넘어섰음을 인정하자. 앞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업무 대부분을 대체할 것이다.” 이런 입장들을 묶어 인공지능 현실론이라 부를 수 있겠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감정과 체력 같은 변수 때문에 인간은 인공지능을 이기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못한 가능성과 윤리를 지닌 존재다!” 냉소적인 사람은 이런 주장을 ‘정신승리’로 치부할지 모르나, 대다수는 이 정도 휴머니즘에 동의하는 것 같다.

자율주행차의 윤리적 딜레마에서부터 ‘초지능’(superintelligence)과 ‘인간향상’(human enhancement)의 존재론적 위험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은 확실히 이야깃거리가 많은 주제다. 그런데 알파고의 승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건 좀 엉뚱하게도 ‘인구절벽’이다. 투자전략가 해리 덴트가 만든 개념인 인구절벽은 ‘노동하고 소비하고 투자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을 가리킨다.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는 적고 부양할 인구는 많아서 경제가 활력을 잃고 침체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경험한 이 문제를 한국은 더 심각하게 겪을 거라 경고하면서 출산율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말한다.

그런데 알파고의 경이로운 능력은 인구절벽이라는 문제를 난센스로 느끼게 만든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전할 텐데, 이건 미래에 태어날 인간들이 우리보다 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출산율을 높여야 할 이유가 사회의 생산성 향상에 있다면 인구를 늘리는 것보다 인공지능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물론 인구절벽이 야기하는 문제가 그것만은 아니다. 소비 위축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가난할 테니까 소비를 진작하는 데 도움이 될 리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지만 맬서스가 현대에 살았다면 이렇게 되물었을지 모른다. “왜 굳이 출산율을 높이고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기본소득까지 지급하는가? 애당초 인구를 적절히 조절하면 될 일이다. 이 해법은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는 메리트도 있다.”

인공지능에서 휴머니즘을 거쳐 인구절벽론과 맬서스주의에 닿는 이 논의들은 얼핏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호르크하이머 식으로 말하면 ‘도구적 이성’만 있지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인간의 가능성과 윤리’를 말하는 휴머니즘조차 기계보다 인간이 우월한 면을 내세울 뿐, ‘무엇을 위하여, 왜 기계보다 우월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결락된 건 마찬가지다.

알파고가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 거라 호들갑 떨기 전에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게 있다. 우리가 알파고 등장 훨씬 전부터 잉여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오늘날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내쳐진 존재로 살아간다. 만성적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 슬럼가 빈민, 불법 이주자, 홈리스…. 그들은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키지도 못하기에 2등 시민처럼 다뤄지고 ‘사회적 비용’으로 집계된다. 그들은 착취에 저항하기는커녕 착취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자신을 혐오하면서 점점 주변부로 밀려난다. 한쪽의 사람들이 비만으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기아로 죽어간다. 세계의 비참이 지속되는 이유는 인류의 생산력이 낮아서, 혹은 뛰어난 인공지능이 없어서일까? 천만에.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모두 인간의 소행이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