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몹쓰리)의 문제

노르웨이 우토야 섬 테러(브레이빅)_임종건 칼럼

사이박사 2016. 1. 6. 10:31
천국의 사탄
임종건2011년 08월 02일 (화) 03:52:57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그래서 낙원이라고 부를 만한 나라가 있다면 노르웨이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주는 나라, 1인당 GDP 9만 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 낮은 인구밀도에 석유 목재 수산물 등 자원보고의 나라, 완벽한 복지의 나라, 인구 비례로 세계 최대의 원조국 등등 어느 모로 보나 낙원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나라입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비즈니스맨으로 한국에서 제지회사 사장으로 근무하다 본국으로 돌아가 지금은 은퇴한 노르웨이 친구로 인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매우 사려 깊고, 여유 있고,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어 한반도에 사건이 날 때마다 걱정 어린 글로 평화를 기원해 주곤 했습니다. 

그는 소득이 많다지만 세금도 많아서 쓰고 남을 돈이 없다며 교육, 의료, 노후복지를 위한 것이니 감내해야겠지만 완벽한 복지가 노르웨이의 경쟁력을 약화시킬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피우곤 했습니다. 

지난달 23일 새벽 CNN-TV가 노르웨이의 테러를 긴급뉴스로 중계하고 있을 때 나는 다급히 그에게 e메일을 띄웠습니다. 그는 68명의 젊은이들이 테러리스트의 총격으로 피살된 우토야 섬이 자기 동네에 있다면서 어떻게 이 조용한 마을에서 이런 참극이 일어날 수 있냐고 망연자실하고 있었습니다. 

앤더스 베링 브레이빅(32)은 그런 나라에서 자생한 테러리스트 였습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이후 목격된 최대의 ‘괴물’로 기록되겠다”고, 그가 작성한 ‘2083-유럽독립선언문’에 밝히고 있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최대 괴물’이라 할 히틀러를 능가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죄의 크기를 알았고, 그것의 대가가 무엇일지를 알았기에 자살을 택했습니다. 

브레이빅은 인종적 종교적 편견으로 무고한 인명 76명을 죽이고도 태연히 경찰에 투항했습니다.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잔인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유럽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중세 때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기독교 원정군인 십자군 복장으로 재판을 받겠다고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으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이슬람원리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도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9·11 테러를 저질러 무고한 미국시민 3,000여명을 죽였습니다. 브레이빅의 테러의 동기가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 즉 종교와 인종에 대한 편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나 빈 라덴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테러의 대상이 자국민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반성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릅니다. 

전통적으로 이민정책에 우호적인 노르웨이 노동당 정치집회에는 이민자의 자녀들이 많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 청소년들과 함께 이슬람계 청소년들의 희생도 많다고 합니다. 또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고 알려진 브레이빅은 여자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는지 여자들을 주로 살해했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인종·종교적 편견에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아울러 지닌 범죄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 테러 이후 노르웨이가 얼마나 평화로운 나라였는가를 알게 하는 사실들이 몇 가지 더 드러났습니다. 경찰이 무장을 하지 않는 나라, 그래서 우토야 섬 범행현장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이 현장 경비에 나섰던 경찰관이었던 나라, 총리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나라, 살인사건 한 건 나면 신문의 1면 톱을 장식하는 나라, 살인에 대한 최고 형이 징역 21년이고 반인륜범죄를 적용해도 30년 징역형밖에 내릴 수 없어 수년 전에 폐지된 종신형이나 그보다 앞서 폐지된 사형의 부활 논의가 일고 있는 나라가 노르웨이입니다. 그것이 브레이빅으로 하여금 자살보다 투항을 선택하게 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나라에 그런 악령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요? 브레이빅은 에덴 동산의 사탄이었던 것일까요? 노르웨이의 비극 이후 지구상에는 평화로운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에 담겨있는 공포, 입센 원작, 그리그 작곡의 오페라 ‘페르귄트’중 ‘솔베이지의 노래’에 담긴 비탄, 비틀즈의 ’Norwagian Wood(노르웨이산 통나무 집)‘에 담겨있는 허무(*註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同名)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번역됨). 

노르웨이하면 떠오르는 내가 좋아하는 이런 이미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잿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가들은 고요와 평화의 나라에 이런 공포와 비탄과 허무의 날이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나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는 말했습니다. “악마가 우리를 죽일 수는 있지만 정복할 수는 없다. 테러범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넓은 개방이어야 한다”고. 나의 친구가 현장에서 찍어 보내온 오슬로 광장의 꽃 무덤(사진)에 노르웨이 총리의 절규가 겹쳐집니다. ‘노르웨이의 복락원(復樂園)’의 염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