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절망하는 유가족 위로해준 많은 사람들을 통해 ‘약자들의 연대’ 배워
세월호 참사는 2014년 한 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충격과 슬픔을 안긴 사건이었다. 최소한의 안전도 담보되지 않은 여객선 운항에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은 정부의 구조·수색작업 때문에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까지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그리고 이들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4·16’ 이전과 이후를 가른 세월호 참사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간경향>은 올해의 인물로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선정했다. <편집자 주>
광화문광장의 겨울바람에 바짓자락이 펄럭거렸다. 바지 안에 감춰진 다리는 얼핏 봐도 여전히 가늘다. 단식을 중단할 무렵 몸무게였던 46㎏에서 10㎏ 정도는 회복했지만 아직 60㎏도 채 안 나간다고 했다. 소화가 잘 안 돼 하루 두 끼밖에 못 챙겨먹으니 회복이 더디다. 생활에 큰 무리는 없을 정도로 상당히 회복됐다면서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걱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동문서답하거나 했던 소리를 또 할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해해 달라며.
2014년은 ‘유민 아빠’ 김영오씨에게 가장 가혹한 해였다. 유민이를 비롯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들은 끝내 세월호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세월호는 가족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뒤덮은 혹독한 기억이었다. 가족들은 이 기억이 지워져가는 현실에 맞서야 했다. 기억력까지 갉아먹는 46일간의 단식 기간 중 김씨가 버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이 기억 때문이었다. 3일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단식은 40일을 넘겨 끝났다. 그리고 가족들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해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에 대해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심경으로 세밑을 맞고 있다.
특별조사위 생각하면 희망과 불안 교차
“아직도 멍하니 있다가 눈물이 터져요. 어제도 그래서…. 미안합니다.” 김영오씨는 처음 만나기로 한 약속날짜에서 하루를 미뤘다. 미룬 이유를 말하는 김씨의 표정에는 자식을 보낸 부모의 슬픔이 어려 있다. 광화문 농성장에서의 단식, 그리고 단식 중단 이후 이어진 입원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갔을 때 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가족대책위 간담회 활동을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만 있는 텅 빈 집에서 슬픔과 맞서야 한다.
그래도 겉으로만이라도 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익숙해져 있다. “전에 단식할 때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힘든 티를 내면 주위에서 당장 그만하라고 그러니까. (단식) 계속해야 되는데 중간에 말리면 안 되잖아요. 멀쩡한 척하는 데는 이골이 났죠.” 그 덤덤한 모습을 하고 15일에는 자신이 넉 달 전 실려갔던 그 병원을 다시 찾았다. 김씨와 닮은꼴로 40일 넘는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는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수많은 분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 가족들을 찾아와 안아주고 위로해준 걸 생각하면…. 그분들 덕에 저희도 버틴 거죠.” ‘약자들의 연대’를 배운 김씨는 23일에는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해직자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도 8달이 지났다.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던 가족들은 하나둘씩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남겨진 일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달라진 것은 떠난 가족의 빈 자리만은 아니다. 당장의 생계비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가족들은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일상을 절감하게 된다. 아직 보상 및 배상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지원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빚낼 여력 없어 새해에 복직
휴직계를 낸 김영오씨도 새해 1월이면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입은 없으니 대출을 받아서 생활비로 쓰죠. (대출금이) 아직 2000만원쯤 남았어요.” 더 이상 빚을 늘릴 여력이 없다는 점은 회사로 복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나마 휴직을 받아줘서 돌아갈 직장이 있거나, 부부 둘 중 한 명이라도 수입이 있는 경우는 나은 편이다. 사고 이후 돌아올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이미 직장을 그만두거나 운영하던 가게를 닫아버린 막막한 현실의 가정도 흔하다. 가족을 잃은 아픔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친 스트레스는 가족들 서로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가족대책위 모임에 참여하다가도 이런 변해버린 일상에 절망해 점차 발걸음이 뜸해진 가족들의 집안 속사정은 하나하나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현실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결국 생활로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는 이유는 남은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영오씨 역시 유민이를 잃은 뒤 슬픔에 빠져 있던 어느날 문득 남아 있는 둘째 딸 유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유나 역시 언니를 보내고 학교에 가지 못해 출석일수를 다 채우지 못할 위기였다. “유나가 커서 하고 싶은 일이 은행원이랬는데, 이번 일 때문에 출석일수가 모자라 은행 들어가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단식에 들어간 아빠를 하루가 멀다 하고 중단시키려고 말리던 작은딸이었다.
유나는 김씨를 향한 비방이 쏟아질 때도 아빠를 위로했다. 아빠는 단식 기간 중 몸도 마음도 지쳐 유나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하다. “자주 만나고는 싶은데 어찌어찌 또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지난주에 오랜만에 만났죠. 그냥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평범하게 보냈어요.” 휴대전화를 꺼내 유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는 초췌한 김씨의 얼굴에도 ‘아빠 미소’가 번졌다. 지난달 펴낸 <못난 아빠가>라는 책의 제목도 유민이뿐만 아니라 유나를 향한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다.
책에는 김씨가 단식 기간 메모한 일기 형식의 짧은 소감이 중간중간 들어 있다. “유민이는 참 기특한 딸입니다. 그리고 저는 참 못난 아비입니다. 주말에 유민이를 만났다고 해도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건 아니었겠죠. 아니죠, 저와 장난치다가 발목이라도 다쳐서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됐다면 죽지는 않았겠죠. 부질없는 생각만 해봅니다. 마지막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제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못난 아비입니다.”(책 본문 중)
단식을 마치고 들어간 병원에서 가정을 내팽개쳤다는 비방 때문에 유나가 더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해 책을 낼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 그만두고 중국집에서 일했던 거나 빚 때문에 부부가 이혼해야 했던 사정까지, 참 알리기 부끄러워 숨겼던 과거들도 솔직하게 적었어요. 솔직하게 다 밝혀야 떳떳하니까.” 입원 중 집필에 들어갔지만 정작 회복은 다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병실을 나와야 할 사정도 생겼다. 보수성향의 시민들 몇몇이 매일 병원으로 전화해 김씨를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 때문에 ‘눈치 보는 데’ 익숙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을 마주하는 것은 김영오씨만이 아니라 세월호 가족들 전체가 겪는 공통된 문제다. 일정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간담회를 진행해가는 동안 가족대책위 구성원들은 ‘눈치 보며’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 “저도 그렇고 다른 가족들도 느끼는 게 그냥 우리 얘기 하는데도 괜히 꼬투리 잡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눈치 보게 되더라는 거죠.” 시민들과 만나는 간담회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격한 감정을 토로할라치면 그 장면만 인터넷에 올려 비방을 일삼는 움직임도 발견된다. ‘일베’ 회원, 서북청년단 등이 광화문 농성장을 찾아 ‘폭식투쟁’이나 특별법 제정 반대 활동을 벌인 것과 맥을 같이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것이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시각은 4월 16일 오전 8시 48분쯤이었다. 당일 구조된 172명을 제외한 304명은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205일이 지난 11월 7일에서야 진상규명과 보상·배상, 책임자 처벌 등의 기틀을 제시한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가족들이 세월호에서 숨져가기까지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바람은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지게 됐다. 김영오씨 역시 유민이의 삼우제를 지낼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7·8월의 광화문광장 한가운데 앉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김씨였다. 단식 일수가 늘어갈수록 갈비뼈가 내려앉아 내장을 찌르는 아픔을 버텼다. 허리를 세울 힘이 떨어져 지팡이를 짚고 기대야 했다. 물 속에 잠겨 숨진 유민이가 더 힘들었으리라 생각하면서 아픔을 잊은 곳이다.
그 광장에 이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철이 왔다. 유민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팽목항의 기억,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번번이 경찰에 가로막혔던 기억,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을 잡고 위로를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농성장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김씨의 손에 유민이 이름이 적힌 리본을 건넸다. 세찬 바람에 희생자와 실종자 전부의 이름이 적힌 304개의 리본이 이따금 떨어지곤 했지만, 함께 트리를 꾸미는 김씨와 가족들, 시민들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트리를 보던 한 시민이 작게 말했다. “하늘에는 영광, …바다에도 평화가 오면 좋겠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는 2014년 한 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충격과 슬픔을 안긴 사건이었다. 최소한의 안전도 담보되지 않은 여객선 운항에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은 정부의 구조·수색작업 때문에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까지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그리고 이들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4·16’ 이전과 이후를 가른 세월호 참사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간경향>은 올해의 인물로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선정했다. <편집자 주>
광화문광장의 겨울바람에 바짓자락이 펄럭거렸다. 바지 안에 감춰진 다리는 얼핏 봐도 여전히 가늘다. 단식을 중단할 무렵 몸무게였던 46㎏에서 10㎏ 정도는 회복했지만 아직 60㎏도 채 안 나간다고 했다. 소화가 잘 안 돼 하루 두 끼밖에 못 챙겨먹으니 회복이 더디다. 생활에 큰 무리는 없을 정도로 상당히 회복됐다면서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걱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동문서답하거나 했던 소리를 또 할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해해 달라며.
2014년은 ‘유민 아빠’ 김영오씨에게 가장 가혹한 해였다. 유민이를 비롯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들은 끝내 세월호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세월호는 가족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뒤덮은 혹독한 기억이었다. 가족들은 이 기억이 지워져가는 현실에 맞서야 했다. 기억력까지 갉아먹는 46일간의 단식 기간 중 김씨가 버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이 기억 때문이었다. 3일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단식은 40일을 넘겨 끝났다. 그리고 가족들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해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에 대해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심경으로 세밑을 맞고 있다.
특별조사위 생각하면 희망과 불안 교차
“아직도 멍하니 있다가 눈물이 터져요. 어제도 그래서…. 미안합니다.” 김영오씨는 처음 만나기로 한 약속날짜에서 하루를 미뤘다. 미룬 이유를 말하는 김씨의 표정에는 자식을 보낸 부모의 슬픔이 어려 있다. 광화문 농성장에서의 단식, 그리고 단식 중단 이후 이어진 입원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갔을 때 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가족대책위 간담회 활동을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만 있는 텅 빈 집에서 슬픔과 맞서야 한다.
그래도 겉으로만이라도 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익숙해져 있다. “전에 단식할 때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힘든 티를 내면 주위에서 당장 그만하라고 그러니까. (단식) 계속해야 되는데 중간에 말리면 안 되잖아요. 멀쩡한 척하는 데는 이골이 났죠.” 그 덤덤한 모습을 하고 15일에는 자신이 넉 달 전 실려갔던 그 병원을 다시 찾았다. 김씨와 닮은꼴로 40일 넘는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는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수많은 분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 가족들을 찾아와 안아주고 위로해준 걸 생각하면…. 그분들 덕에 저희도 버틴 거죠.” ‘약자들의 연대’를 배운 김씨는 23일에는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해직자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도 8달이 지났다.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던 가족들은 하나둘씩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남겨진 일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달라진 것은 떠난 가족의 빈 자리만은 아니다. 당장의 생계비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가족들은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일상을 절감하게 된다. 아직 보상 및 배상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지원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빚낼 여력 없어 새해에 복직
휴직계를 낸 김영오씨도 새해 1월이면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입은 없으니 대출을 받아서 생활비로 쓰죠. (대출금이) 아직 2000만원쯤 남았어요.” 더 이상 빚을 늘릴 여력이 없다는 점은 회사로 복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나마 휴직을 받아줘서 돌아갈 직장이 있거나, 부부 둘 중 한 명이라도 수입이 있는 경우는 나은 편이다. 사고 이후 돌아올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이미 직장을 그만두거나 운영하던 가게를 닫아버린 막막한 현실의 가정도 흔하다. 가족을 잃은 아픔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친 스트레스는 가족들 서로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가족대책위 모임에 참여하다가도 이런 변해버린 일상에 절망해 점차 발걸음이 뜸해진 가족들의 집안 속사정은 하나하나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현실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결국 생활로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는 이유는 남은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영오씨 역시 유민이를 잃은 뒤 슬픔에 빠져 있던 어느날 문득 남아 있는 둘째 딸 유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유나 역시 언니를 보내고 학교에 가지 못해 출석일수를 다 채우지 못할 위기였다. “유나가 커서 하고 싶은 일이 은행원이랬는데, 이번 일 때문에 출석일수가 모자라 은행 들어가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단식에 들어간 아빠를 하루가 멀다 하고 중단시키려고 말리던 작은딸이었다.
유나는 김씨를 향한 비방이 쏟아질 때도 아빠를 위로했다. 아빠는 단식 기간 중 몸도 마음도 지쳐 유나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하다. “자주 만나고는 싶은데 어찌어찌 또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지난주에 오랜만에 만났죠. 그냥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평범하게 보냈어요.” 휴대전화를 꺼내 유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는 초췌한 김씨의 얼굴에도 ‘아빠 미소’가 번졌다. 지난달 펴낸 <못난 아빠가>라는 책의 제목도 유민이뿐만 아니라 유나를 향한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다.
책에는 김씨가 단식 기간 메모한 일기 형식의 짧은 소감이 중간중간 들어 있다. “유민이는 참 기특한 딸입니다. 그리고 저는 참 못난 아비입니다. 주말에 유민이를 만났다고 해도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건 아니었겠죠. 아니죠, 저와 장난치다가 발목이라도 다쳐서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됐다면 죽지는 않았겠죠. 부질없는 생각만 해봅니다. 마지막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제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못난 아비입니다.”(책 본문 중)
단식을 마치고 들어간 병원에서 가정을 내팽개쳤다는 비방 때문에 유나가 더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해 책을 낼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 그만두고 중국집에서 일했던 거나 빚 때문에 부부가 이혼해야 했던 사정까지, 참 알리기 부끄러워 숨겼던 과거들도 솔직하게 적었어요. 솔직하게 다 밝혀야 떳떳하니까.” 입원 중 집필에 들어갔지만 정작 회복은 다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병실을 나와야 할 사정도 생겼다. 보수성향의 시민들 몇몇이 매일 병원으로 전화해 김씨를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 때문에 ‘눈치 보는 데’ 익숙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을 마주하는 것은 김영오씨만이 아니라 세월호 가족들 전체가 겪는 공통된 문제다. 일정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간담회를 진행해가는 동안 가족대책위 구성원들은 ‘눈치 보며’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 “저도 그렇고 다른 가족들도 느끼는 게 그냥 우리 얘기 하는데도 괜히 꼬투리 잡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눈치 보게 되더라는 거죠.” 시민들과 만나는 간담회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격한 감정을 토로할라치면 그 장면만 인터넷에 올려 비방을 일삼는 움직임도 발견된다. ‘일베’ 회원, 서북청년단 등이 광화문 농성장을 찾아 ‘폭식투쟁’이나 특별법 제정 반대 활동을 벌인 것과 맥을 같이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것이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던 시각은 4월 16일 오전 8시 48분쯤이었다. 당일 구조된 172명을 제외한 304명은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205일이 지난 11월 7일에서야 진상규명과 보상·배상, 책임자 처벌 등의 기틀을 제시한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가족들이 세월호에서 숨져가기까지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바람은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지게 됐다. 김영오씨 역시 유민이의 삼우제를 지낼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7·8월의 광화문광장 한가운데 앉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김씨였다. 단식 일수가 늘어갈수록 갈비뼈가 내려앉아 내장을 찌르는 아픔을 버텼다. 허리를 세울 힘이 떨어져 지팡이를 짚고 기대야 했다. 물 속에 잠겨 숨진 유민이가 더 힘들었으리라 생각하면서 아픔을 잊은 곳이다.
그 광장에 이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철이 왔다. 유민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팽목항의 기억,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번번이 경찰에 가로막혔던 기억,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을 잡고 위로를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농성장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김씨의 손에 유민이 이름이 적힌 리본을 건넸다. 세찬 바람에 희생자와 실종자 전부의 이름이 적힌 304개의 리본이 이따금 떨어지곤 했지만, 함께 트리를 꾸미는 김씨와 가족들, 시민들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트리를 보던 한 시민이 작게 말했다. “하늘에는 영광, …바다에도 평화가 오면 좋겠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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