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바[우리말답게 바로쓰기]/ 세계문자

수화에 대해_김아영

사이박사 2014. 5. 21. 13:09

  • 또 하나의 언어, 수화

     


    우리나라 청인청각에 장애가 없는 사람을 농인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중 82.2%가 '수화는 언어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수화에 대한 통념을 들여다보면 수화가 정말 국어와 같은 어엿한 언어로 여겨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수화에 대해 널리 퍼진 오해 몇 가지를 살펴보고 "수화는 언어다"라는 명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
    수화는 국어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청인의 대화에서 의미는 음성을 통해 전달되므로, 대화에서 행해지는 여러 동작은 음성 언어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농인의 대화에서 손동작, 몸동작, 표정 등은 모두 소리를 대신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청인은 음성 인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들리는 언어'를 모어로 습득한다. 그러나 농인은 음성 언어를 습득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언어'인 수화를 모어로 습득한다. 세상에는 한국어가, 중국어가, 일본어가 모어인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수화가, 중국 수화가, 일본 수화가 모어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곧, 수화는 국어를 보조하는 하위 수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언어이다.


     

    두번째
    농인은 청인과 똑같이 읽고 쓸 수 있다?

     

    글자마다 정해진 '소리'가 있다. '소리' 없이 글자를 배우는 일은 매우 어렵다. 처음 보는 글자로 쓰인 책이 앞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글자의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알 수가 없다. 여러분은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얼마 만에 파악할 수 있을까?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농인이 문자를 익히는 과정이 이와 같다. 한글은 한국어의 '소리'를 적는 글자이므로 한국어가 모어인 청인은 쉽게 익혀 쓸 수 있지만, 한국어가 모어가 아닐 뿐더러 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농인에게 한글이 '소리'글자인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랜 학습과 각고의 훈련이 있어야 '소리'와 '글자', 그리고 '의미'의 관계를 파악하여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자를 읽고 쓰는 일에서 농인과 청인이 처한 조건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동안 수화를 국어의 보조 수단으로만 인식해 왔다.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 말고 다른 의사소통 수단은 농인이나 청인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 여겨 왔으며, 농인도 청인과 같은 방법으로 국어를 완전히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수화는 한국어와는 다른, 언어 그 자체이다. 국어를 잘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나 극복해야 할 장애가 결코 아니다. 농인이 수화를 제1 언어, 즉 모어로 습득하고 사용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할 일이며,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다.

     

     

    세번째수화는 국어로 말하듯이 차례대로
    하면 된다?

     

    '나는 어제 학교에 갔다.'를 영어로 번역할 때, 'I-neun yesterday school-e go-atda.'와 같이 한다면 어떨까? 한국어 어순에 따라 단어만 바꾸어 넣고, '-는, -에, -았다' 등은 영어에 없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이를 영어라 할 수는 없다.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적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국어에 영어를 끼워 맞춘 것뿐이다. 'I went to school yesterday.'가 제대로 된 번역이다.

     

    국어와 수화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수화는 그 자체로 별도의 체계를 갖춘 언어이기 때문에 표현 방식이나 어순이 국어와 전혀 다르다. '내일 몇 시에 만날까요?'를 수화로는 '내일, 만나다, 몇 시'의 순서로 손동작을 표정, 몸동작과 함께 전달한다. 한국어와 한국 수화는 어순도, 의미 전달 요소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국어 문장에 단순히 수화 단어를 대치한다고 해서 수화 문장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수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
     

    에스놀로그에서는 한국에서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 한국 수화 두 가지라고 하였다. 뉴질랜드는 '수화 언어법'을 제정하여 수화를 국가 공식 언어 및 공용어로 지정하였고 헝가리, 핀란드, 체코 등에서는 법적으로 수화가 하나의 언어이며 수화 사용이 보장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은 학교 교육에서 수화를 매개 언어로 제공하거나 수화 통역을 제공한다. 이는 모두 수화가 독립적인 언어이며, 농인들이 모어로 사용하는 언어라는 인식의 결과이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수화 표준화 사업'을 벌여 온 국립국어원에서는 앞으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수화 관련 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수화 실태를 조사하고, 수화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를 통하여 농인이 수화를 매개로 국어를 더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연구, 개발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수화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한 홍보도 활발하게 벌이고자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언어 복지와 언어 인권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우리 사회의 통합과 소통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글_김아영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