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당시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일본 내각 관방장관은 100시간 넘게 잠을 안 자고 일했습니다. 보다 못한 일본인들이 “잠 좀 자라”고 하기에 이르렀고, 누군가 ‘edano_nero(에다노 자라)’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린 뒤부터 ‘edano_netekure(에다노 잠 좀 자요)’, ‘edano_daijobu?(에다노 괜찮아?)’ ‘edano_shinuna(에다노 죽지 마)’ 등의 응원이 잇달았습니다. 사고 나흘 만인 3월 15일 그가 일단 집에 간다고 하자 ‘edano_oyasumi(에다노 잘 자)’ ‘edano_my_angel(에다노 나의 천사)’, ‘we_are_the_edano(우리는 에다노)’처럼 애정을 담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당시 차분한 상황 브리핑으로 혼란을 최소화한 에다노는 일본인들의 심리적 공황을 덜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에 빗댄 ‘에다루’(えだるㆍ에다노의 이름 ‘えだの’와 ‘∼한다’는 ‘する’의 합성어ㆍ‘수면부족 상태로 극한상황까지 일하다’라는 뜻)라는 동사까지 생겼습니다.
에다노는 “중국이나 조선반도(한반도)가 식민지로 침략을 당하는 쪽이 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거나 “독도 문제에 강력 대응할 것”이라는 말도 한 사람입니다. 우리로서는 호감을 갖기 어렵지만 세월호 침몰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왜 한국엔 에다노 같은 사람도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미증유의 사고가 안긴 충격과 슬픔은 동일본 대지진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도 미증유의 혼란과 난맥상을 보이고 있어 과연 이게 나라인가, 정부가 있기는 한가 싶습니다.
사고의 규모나 파장으로 볼 때 처음부터 국무총리 정도가 자리를 걸고 상황을 장악해 일관성 있게 지휘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부 부처마다 대책본부를 차려 각개 약진하더니 사고 이틀이 지나서야 국무총리 지시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가 발족됐습니다. 하지만 총리가 맡겠다던 본부장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전행정부 장관이 재난 총괄 사령탑을 맡게 돼 있는 법과 달리 엉뚱한 장관이 책임을 떠안은 것입니다.
지휘ㆍ구난 체계도 문제이지만 공직자들의 자세와 행태는 더 실망스럽습니다. 2008년 5월 12일 중국 쓰촨(四川)성에서 발생한 규모 8.0의 초대형 지진으로 사망ㆍ실종자가 8만 명을 넘었을 때,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늦은 밤 현장에 도착해 안전모를 쓰고 확성기를 든 채 구조를 독려했습니다. 고아가 된 아이들을 붙잡고 “울지 마라. 내가 원자바오 할아버지야. 정부가 너희들을 집에 있는 것처럼 보살펴 주마.”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TV를 통해 중계돼 중국 국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홍원 총리로부터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원래 표정이 별로 없는 분이지만 사고 이후 그가 보여준 불안하고 겁먹은 듯한 얼굴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는커녕 정부 불신을 키웠습니다. 2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범정부대책본부장이 누구냐?”는 질문에 “재해대책 수습본부장은 해수부 장관이 하고, 국무총리는 점검 차원에서 같이 참여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총리를 감싸기 위해 한 발언이지만 점검이나 하고 있는 총리가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공직자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유족들이 울부짖는 실내체육관에서 의전용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가족들을 더 가슴 아프게 하는 자작시를 트위터에 올리고, 안전 업무의 주무장관이 긴급 보고를 받고도 행사 참석을 이유로 4시간이나 지나 현장에 나타나고.... 어쩌면 다들 이렇게 무심하고 분별이 없을까?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실망과 분노를 키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어떻게 우리 정부에는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습니까?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하니 집단 무력감과 집단 분노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단원고의 한 학부모는 “정부가 처음부터 아이들을 건질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청소년을 수장(水葬)시키는 나라를 어떻게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는데, 사고 이후 박근혜 정부의 대응이 국민들에게는 더 큰 ‘참사’로 보입니다. 페이스북에 “세월호는 대한민국이고 선장은 박근혜고 선원들은 공직자들이고 선내 방송은 정권의 시녀가 된 언론이고 승객들은 국민”이라고 쓴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국민들은 지금 구조받지 못한 채 병들거나 죽어가는 상태입니다.
기관사, 조종사, 기장이나 선장, 소방관, 경찰관, 군인 등은 그 직업을 선택할 때부터 승객이나 시민,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직자라면 일이 닥쳤을 때 자리를 걸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도 다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쓴 오스트리아의 의사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1905~1984)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가치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창조적 가치, 경험적 가치, 태도적 가치입니다. 이 중에서 태도적 가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태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태도적 가치가 강하고 일관성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을 배려하고 사회 성숙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승객들을 버리고 도주한 선장과 승무원들, 남의 불행에 대한 동정과 배려가 없는 공직자들은 태도적 가치가 결여된 장애인들과 다름없습니다.
이번 사고와 같은 큰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 이겨내면 성숙해지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심각한 병이 됩니다. 환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사회가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며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외상후 울분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이 손상돼 얻게 된 국민들의 이 병을 대체 어떻게 해야 치유할 수 있나요?
내각 총사퇴, 총리와 해당 장관들의 경질 등 정부를 쇄신하기 위한 조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 효과는 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을 바꾼들 무엇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겠습니까? 공직자들의 피를 갈아 끼워 넣고 뇌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절망이 절망을 키우고 있는 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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