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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사이박사 2013. 1. 14. 11:16

조선의 마지막 문장(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8.5 | 네티즌리뷰 4건
이건창|송희준|글항아리 |2008.05.23
페이지 407|ISBN 9788954605472|도서관 소장 정보 국립중앙도서관
판형 A5, 148*210mm
정가 16,000원

책소개

어떤 문장이 사람을 울리고 아프게 하는가

19세기 명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문장들을 번역하고 해설한 책. 구한말의 지식인이자 조선시대 문장가인 명미당 이건창을 소개한 것으로 최연소 과거급제 기록을 깬 천재적인 명문장가인 그의 시와 산문 등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글을 모았다.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은 조선의 한 지식인이 문장의 현실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다하여 고민했는지, 백성들과 국가의 위태로운 현실이 어떻게 뛰어난 비평과 따뜻한 감동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문장》은 이건창의 글을 통해 문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학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으며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치현실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 대한 삶의 묘사, 생활 주변에 솔직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건창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려 애썼으며 조선시대 당쟁사를 기록한 사료인 '당의통략'을 서술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문장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논설과 평론, 선조들에 대한 충성과 절의,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아내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제문,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바라본 백성들의 삶을 기록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이건창

지은이
이건창(李建昌, 1852~1898)
강화 출생으로 본관 전주,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다.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했으며, 김택영·황현과 함께 한말삼재로 불렸다. 고종 3년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역대 최연소 과거급제자이다. 1870년 벼슬을 시작했으나 1875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했다가 벽동으로 유배돼 벼슬생활을 접었다. 이후 고종의 부를 때 어사로 나가 비리를 고발하며 민폐를 해결했으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일체 응하지 않다가 왕의 미움을 사고 고군산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병인양요 때 조부의 자결을 목도하면서 현실과 역사에 눈뜬 후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했고, 양명학자로서 정치·경제의 기반을 심학心學에 두고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했다. 무엇보다 이건창은 김택영에 의해 여한구가麗韓九家에 꼽힐 정도로 천재적인 문장가였다.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옮긴이
송희준
1958년 대구 달성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계명대 한문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 한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서거정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5년 전부터 대구 지역 학자들과 한문 고전 공부모임인 ‘주덕회周德會’를 만들어 사서四書 및 『고문진보』 『심경』 『근사록』 등을 윤독해왔다. 또한 관선서당觀善書堂을 열어 옛 선현의 문장을 조금이나마 후학들에게 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들어가는 글

제1부 문장 이론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될까?
뺨의 수염을 그려야 좋은 문장
질質과 문文이 조화를 이루는 글
쉽고 단순해져야 정밀한 것이 온다
순정한 고문의 추구
이 시대의 시인은 창강 하나로다
자하의 시는 화려한 꽃에 불과하다
글 찍어내는 세태를 비판함
사모의 정이 간절할 때 훌륭한 문학이 탄생한다
마음心을 떠난 학문은 논할 수가 없다
규방 여인이 풍아의 뒤를 잇는 아름다움

명미당 이야기: 여한십가란 무엇인가-변려한 세상의 문장을 꾸짖다

제2부 논설과 평론
허물을 고치기를 남에게 표시 나지 않게 하라
잔인하지 않으면 매가 아니다
그렇게 살면 인생 어려울 것이 없겠다
문장이 최고의 도는 아니다

명미당 이야기: 최연소 과거 급제와 『당의통략』 저술-조선은 도학을 너무 존숭하였구나

제3부 충성과 절의
신숙주는 들어라
김시습과 김인후에 대한 재평가
역사서를 잘못 읽어 죽지 못하다
허리에 찬 칼이 사람의 마음을 비추네
미국 군함대가 기가 질려 물러나다

명미당 이야기: 이건창의 피 끓는 상소문 읽기-“폐하, 빨리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궁을 지키소서”

제4부 가족과 나에 대하여
모름지기 자기 마음속에 정해진 가치관이 있어야
마음과 육신이 병든 지식인에게 고함
깨끗함에 대한 변론
이제 누구의 가르침을 얻을까
가장 불행한 자가 나의 처 아니겠는가
다정한 말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는가
눈물을 닦으며 술잔을 권하네
천 장의 종이에 만 자를 써도
진실로 슬퍼할 만한 일

명미당 이야기: 18~19세기 제망실문의 경향-죽은 아내를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

제5부 백성들의 삶을 논하다
누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말렸던가?
도적질도 할 수 없고 살아갈 방법도 없다
불효자를 참회하게 만든 대국민 담화문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
짚신 삼기...(하략)

[알라딘 제공]

출판사 서평

이건창 문집, 국내 최초로 번역되다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생몰연대에서 보듯 그는 19세기의 절반이 꺾어진 무렵 태어나 20세기를 2년 앞두고 죽은 구한말의 지식인이다.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건창은 19세기 후반에 정확히 갇혀 있다. 살아서도 그랬고 죽어서도 그랬다. 그는 고종高宗이 인정한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 글 쓰는 문인들도 이건창이라는 존재를 별로 접해보지 못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명미당집』이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조선의 19세기가 잊혀진 치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저술 『당의통략黨議通略』이 번역돼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참조가 되기는 했지만 관심이 이건창 개인에게로 뻗치지는 못했다. 이것은 꽤나 비극인데, 왜냐하면 이건창의 삶이 사람을 울리고 때리는 묵직한 문장을 만드는 데 바쳐진 장인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500년의 글쓰기 전통은 이건창이라는 한 개인의 붓을 빌어 비로소 완성되었다. 현실의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고 싸운 흔적이 역사를 상고하고 문예를 비평하고 정책을 논하고 취미를 완상하고 삶을 철학하는 과정에 순고정대하게 녹아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이건창의 문장이 갖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표정이다. 그가 글쓰기의 온갖 요소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전개한 그 귀하고 아까운 현장이 아직 우리의 현재와 접속하지 못했고, 이 시대의 문장론 속으로 갈무리되지 못했다.

그런 안타까움 끝에 『조선의 마지막 문장』(송희준 엮어 옮김)이라는 책이 이번에 선보이게 됐다. 이 책은 이건창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는 책이다. 아직 이건창 평전이나 전기가 쓰여질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우선 그가 남긴 글을 번역하는 순서를 밟았다. 대구지역 젊은 학자들에게 “훈장 선생님”으로 통하는 재야 한학자 덕암德庵 송희준宋熹準 선생이 지난 몇 년간 어렵기로 소문난 『명미당집』 전체를 완역했고 특히 뛰어난 명편들과 당대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을 선별해서 보여주고 해설을 붙였다. 시에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문까지 골고루 만나볼 수 있게 했다.



이건창은 누구인가? - ① 호랑이 암행어사



이건창의 문장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의 불꽃같은 삶과 이중주를 이루면 더욱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조선의 양명학적 실천을 대표하는 강화학파의 전통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19...(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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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이건창은 이범진의 추천으로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1895년 민비 시해 사건 이후에 이미 벼슬에 나가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으로 결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는 조정에 벼슬을 해도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들의 권위의시고가 당파로 점철된 당시 조정의 풍조는 이미 고질화되어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풍조 때문에 이건창은 이미 두 차례나 귀양살이를 다녀와야만 했다. 1차는 187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조병식의 탐학을 고발하다가 도리어 그다음해에 벽동으로 귀양을 간 것이고, 2차는 1893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가 보성으로 귀양을 간 것이다.
이처럼 정의에 의거한 처신과 곧은 언사는 당시 조정에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해를 입을 뿐이었다. 1896년에 임명한 해주 관찰사에 대하여 세 차례에 걸쳐 사직서를 올리면서 결국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99~201쪽, '모름지기 마음속에 정해진 가치관이 있어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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