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다스리기)/외교

[서화숙의 만남] 한일문제 관심 유재순 제이피뉴스 대표

사이박사 2012. 7. 2. 12:11

"전여옥에 너무 큰 배신감 느낀다"

[서화숙의 만남] 한일문제 관심 유재순 제이피뉴스 대표
"일본, 국내의 불만을 해외에서 해결하려 했던 메이지 유신정국 때와 비슷"
입력시간 : 2012.07.01 21:18:43
수정시간 : 2012.07.02 1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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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을 제일 잘 이해하는 대통령이라고 한국에서 왜 그렇게 싫어하느냐고 물어봐요." 한창만기자 cmhan@hk.co.kr
한일정보협정 체결 불발
구심점 없던 우익단체들 자위대 군대화 계기 삼으려 해… 무산되자 불평 목소리 쏟아져

일본사회의 혐한 현상
일본 여성들 한류에 매혹… 시골까지 한류 불자 위기의식… 남성·일반인들 우익 늘어

'일본은 없다' 표절 승소
"미안하다" 한마디면 되는데… 전여옥, 되레 명예훼손 소송… 8년 고생… 손배 제기할 것


이번 주는 만남이 아니다. 1999년 이래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한일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유재순(54) 제이피뉴스 대표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일본소식을 한국어로 전하는 인터넷 언론 제이피뉴스를 2008년에 창간한 데 이어 한국소식을 일본어로 전하는 케이알뉴스를 작년에 창간하면서 최근에는 한국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하필 한일문제가 복잡해진 이 즈음에 그는 도쿄의 제이피뉴스 사무실에 있었다. 도대체 일본은 누구인가. 군대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정보협정) 체결을 디딤돌로 군국주의의 길을 다시 가려는 위험천만한 국가인가, 원전사고와 경제침체로 가라앉는 불안한 나라인가, 한국연예인과 한국음식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좋아하는 친근한 이웃인가 물어보았다. 아울러 8년간의 재판 끝에 유 대표의 승소로 5월에 끝난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의 책 <일본은 없다> 표절과 관련한 소송 문제도 들어보았다.

_어떻게 지내세요?

"케이알뉴스를 창간해서 더 바쁩니다. 한국의 문화를 일본에 알리는 일인데도 지자체나 공공기관 지원을 얻기가 힘드네요. 한국 명소는 남대문 동대문시장에서 벗어나 모란시장이나 지방의 3일장, 5일장도 다 소개하고 있거든요. 힘들어도 성형광고는 받지 않아요. 제이피뉴스 창간하면서 기자들에 게 3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촌지 안받기, 취재원에게 안 얻어먹기, 광고얘기 안 하기. 이 세 가지를 세 번 어길 경우 자동해고입니다. 일본은 워낙 음식값이 비싸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라고 기자 4명에게 점심 저녁을 집에서 만들어줘요. 신주쿠의 와세다 대학 가까이 있는 아파트 4층은 집이고 1층이 사무실이거든요. 그러니까 더 바쁘네요."

_일본 분위기 요즘 어떻습니까?

"정보협정 체결이 불발되면서 실망한 기색이 완연하지요. 일본 분위기가 요즘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였거든요. 구심점 없이 표류하는 상태에서 이 협정을 계기로 우익이 분위기를 일신하길 원했는데 되지 않았으니까요. 일본은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가 그 후에 '잃어버린 20년'이라는 표현을 쓰더니 지금은 아예 그런 표현조차 쓰지 않고 있어요. '잃어버린'이란 표현은 뭔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과거형을 써서 현재가 그렇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이런 표현조차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뜻입니다. 노다 수상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5%인 소비세를 10%로 인상하는 것을 적극 밀어붙였어요. 같은 민주당내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 이를 반대하며 계파의원들과 함께 분당을 꿈꾸었지만 정치자금 일본노총반대 리쿠잔카이(陸山會)의 정치자금법 위반 재판 등으로 물건너 갔습니다. 게다가 일본수상 재임기간이 겨우 1년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좋은 정책을 세워도 시작하자마자 그만둬야 하는 상태가 계속됩니다. 이 틈새를 치고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오사카유신회라는 지방정당을 만들어 일본정치의 근간을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시장은 한국에는 호의적이지 않은 우익성향이지요. 일본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국내의 불평불만을 국외로 돌려 해결하려 했던 메이지 시대의 유신정국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_그래서 일본이 재무장할 수도 있는 걸까요?

"일본우익세력들이 오랫동안 지향해오던 것이 바로 자위대의 군대화입니다. 이번에 한국정부와 정보협정이 체결되면 자위대가 군대로 격상될 뻔 했지요. 일본우익세력들은 정보협정은 군대간의 협정이므로 일본도 당연히 자위대를 군대로 격상시켜 한국과 동등한 입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국민들을 설득시키려 했겠지요. 북한을 핑계로 군예산도 증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테고요. 저는 다른 측면에서도 정보협정은 반대해요. 어차피 한국군은 미국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에 의한 북한정보도 상당합니다. 북한은 언젠가는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같은 민족이고요. 제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시사주간지 주간현대의 북한특파원을 맡아 북한을 세 번 다녀왔습니다. 그때마다 북한의 철도나 항만 도로 다리 같은 기간시설과 행정체계가 대부분 일본식이라는데 놀랐습니다. 북한의 관리가 그래요. 당장 일본이 엔화를 들고 들어와 북한을 개발한다면 1년도 안돼 모두 완성할 것이라고. 이걸 일본의 경제단체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고이즈미 수상 시절에 북일교류를 경단련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것 아닙니까. 북한에 매장된 광물들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여기에 북한의 군사정보까지 넘겨준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북일간 국교가 맺어진다면 북한이 일본의 경제식민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_일본대사관 앞 위안부소녀상에 말뚝을 거는 극우정치인까지 등장할만큼 일본의 극우성향은 심해지고 있나요?

"과거에는 극우성향의 일본인들이 주로 혐한 감정을 표출했는데 최근에는 일반인들까지 가세하는 추세입니다. 특히 일본 남성들의 혐한 반한감정들이 커지고 있어요. 이게 한류 붐과도 연관이 있어요. 한류가 드라마로만 끝나는 줄 알았더니 대중음악 음식 화장품으로 이어지고 있잖아요. 우리 딸 말로는 요즘 일본 고등학교에서 한국 노래 한 두 곡을 모르면 안될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 케이팝이 인기입니다. 한류붐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일본여성들이고요. 그러다 보니 일본 남성들이 와이프를 한류에 빼앗겼다는 위기의식을 가지면서 한국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 극우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_그런 분위기에서 대중스타인 각트가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트윗을 날릴 수 있는 것은 뭐지요?

"각트는 원래 소신있고 의사표현도 거침없는 연예인이에요. 다른 연예인이 그랬으면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을텐데 2채널에서만 떠들었어요. 'GO' '역도산' 등 재일한국인 작가 원작인 영화에 나왔던 야마모토 타로라는 배우는,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공중파 방송에서 발언했다가 우익들의 맹렬한 항의를 받아도 굽히지 않았지요. 그는 원전 반대운동으로 소속사를 나와서 4월에는 태양열 에너지 회사에 직원으로 입사했어요. 일본 연예인의 사회참여는 많지 않지만, 할 경우에는 확실하죠. 반면 일본에 진출한 한국 연예인들의 발언에 대해서는 일본 언론도 날카롭게 반응을 합니다. 김태희씨의 과거 반일 발언이 뒤늦게 문제가 된 것도 이때문이에요. 경제위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진보언론이던 아사히 신문의 논조도 예전같지 않고 진보적인 지식인층이 노령화하면서 진보세력안의 피로감도 보입니다. 제가 아는 진보인사도 '총리가 바뀔 때마다 한국 사회가 사과를 요구한다, 언제까지 똑 같은 사안에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냐'고 하더군요."

_원래는 '난지도 사람들'같은 사회성 짙은 르포물 전문작가였는데 왜 일본 전문가가 되었어요?

"81년에 대학(동서울대 전자공학과)을 졸업하고 현대경제라는 잡지에서 취재기자로 있었는데 당시는 전두환 때라 어려운 사람들의 현장을 취재하면 나가질 않는 거에요. 그래서 (쓰레기하치장이던) 난지도에 가서 사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어요. 거기에 쓰레기를 주워서 사는 어른이 2,000명, 애들이 200명이 있었는데 애들이 놀림 받는 게 싫어서 학교를 안가요. 애들한테 공부 가르치면서 1년여를 살았어요. 그때 경험을 살려서 르포를 쓴 것이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면서 르포작가가 되었지요. 일본은 1987년에 남편이 유학 오면서 따라왔어요. <난지도 사람들>이 한국에서 100만부 팔리면서 일본에서도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한일관계로 취재영역을 넓혔지요. 94년 12월에 귀국했는데 표절 문제가 터졌잖아요. 당시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준비중이었는데 전여옥이 그 내용의 대부분을 빼내서 책을 냈으니까 그 책을 낼 수도 없었고요.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친하게 지낸 일본인 번역가가 와서 '<일본은 없다>를 일본어로 번역해달라고 하는데 네가 취재한 내용과 너무 똑같아서 못하겠다고 했다'고 말을 해서 뒤늦게 알았어요. 전여옥이 일본에 특파원으로 부임해 왔을 때 제가 아는 인맥을 다 소개해주고 제가 취재한 내용도 다 가르쳐 줬기 때문에 배신감이 너무 컸지요. 그때 충격으로 전신마비가 와서 몇 달을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어요. 그 때 한약재료상을 하는 시집에서 몸에 좋다는 약을 보내서 그걸 먹었더니 그 동안 노력해도 안되던 임신이 되어서 95년에 둘째를 낳았어요. 아기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과 싸움질 하기도 싫어서 표절 문제는 덮어버렸고 대신 <하품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일본에서 출간했어요. 99년에 이혼을 했는데 <하품의 일본인>을 낸 출판사 사장님이 표절문제를 뒤늦게 들었는지 '소송을 하면 당신이 이긴다. 하지만 오래 걸릴 것이다.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지 말고 그 에너지 가지고 일본에 와서 공부를 해라.' 그래서 일본유학을 왔어요. 살아보니 일본이 아이 키우기는 더 좋았어요. 아들은 한국에서 중앙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지금 곁에 와서 제이피뉴스 일을 돕고 있고요. 딸애는 현재 일본 미술고교 2학년이에요. 일본 국회도서관과 후생성 자료실에는 한일 관련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요. 작년에는 한국전쟁에 일본이 군수물자만 댄 것이 아니라 직접 참전도 했다는 사실을 찾아내 특종을 했는데 일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말레이지아에 한국인 징용자를 끌고 갔다거나 한일관계의 비사들이 무궁무진해요. 제이피뉴스와 케이알뉴스를 빨리 자리잡게 하고 현장 취재로 돌아갈 겁니다."

_표절은 전여옥씨가 했는데 명예훼손 소송에 걸려 8년을 허비하고 출판까지 따지면 19년을 시달렸는데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요?

"우아한 작가로 세계를 누비고 있었겠지요. 당시 이태원 르포로 미국에도 초청받아 갔으니까요. 하지만 덕분에 쓰러졌고 쓰러진 덕분에 한약을 먹었고 한약을 먹은 덕분에 딸을 가졌으니까 후회는 안해요. 하하 사실은 아들이 옆에서 딸한테 이른대요."

_손해배상 소송을 할 법도 한데요.

"표절문제는 미안하다 그 한마디만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되려 저를 명예훼손으로 걸었어요. 국회의원이 된 후 자꾸 문제가 되니까 등떠밀려서 소송을 제기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내용은 너무 치졸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이에요. 처음 만나던 날도 제가 허름한 옷을 입고 꽃을 들고 찾아왔다며 일거리를 부탁하러 간 사람 취급을 하는데 제가 그때 자비로 일본 내 주요 인사를 불러 심포지엄을 열 정도로 특강 방송 기고 책인세로 수입이 넉넉할 때였어요. 저는 지금도 옷은 허름하게 입어요. 유니클로에서 2,000엔 이상짜리는 안 사요. 하지만 그건 표절과는 상관도 없고요. 우리집안이 충청도 공주라, 싸움하지 말라고 해요.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전여옥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는 점이었어요. 저한테 처음 표절문제를 들려준 일본인 번역가가 (전씨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던 1심에서는 '둘이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 2심에서는 '유재순이 그런 걸 쓸 능력이 안된다'는 식으로 바뀌더군요. 이런 것을 그대로 덮어두면 세상에 누가 정의를 위해 나서겠어요? 손해배상금을 받아서 기부하더라도 손해배상 소송은 제기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