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데이트] ① 김민수
인간과 인간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한겨레> 문화부는 이 위기를 진단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연재물 `인문학 데이트'를 신설해 연구실 안에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학문의 길을 가는 학자들을 초청해 젊은 연구자와 함께 그들의 고민과 관심을 들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데이트'에서는 디자인문화비평가로 활동하는 김민수(39.사진 오른쪽) 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초청했으며,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신국어독본>을 쓴 윤세진(30·사진 왼쪽)씨가 대담자로 나와 김씨의 최근 저서 <멀티미디어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를 기초 텍스트로 삼아 진지하고 즐거운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학문이 삶에서 떠나있습니다"
“디자인을 생산하는 쪽이든 소비하는 쪽이든, 일반적으로 디자인을 아주 특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나 패션 디자인 같은 아주 특수한 영역에만 디자인을 국한시키는 것이죠. `디자이너'라고 하면 우선 `앙드레 김'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디자인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문화 일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자인은 특정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저는 디자인을 흔히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산업과 기술의 맥락에서 끌어내 철학과 더불어 인간 삶의 실존과 문화의 풍경 속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디자인은 인문학적 바탕에서 삶을 다루는 학문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현재 학문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학문이 일상적인 삶과의 접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에 매몰되어 삶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그건 마치 예배당에 예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디지털 매체 등장하는데 기존 패러다임 답습 무능력 노출
윤세진 안녕하세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김민수 반갑습니다.
윤 지난해 말에 <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내셨던데요, 저는 최근에야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가 결국 인문학과 학문하는 태도 일반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했는데요, 선생님께서 이 책을 통해, 혹은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제기하신 문제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김 저의 이번 책은 현재 급변하는 디지털 문화 내의 흐름 속에서 막연한 선동과 무지로 인한 거부가 아니라 침착한 이해방식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하면 그런 변화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이끌면서 새로운 인문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 그럼,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군요.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이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재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김 일반적으로 디지털ㆍ이미지 시대와 함께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들 하는데, 저는 이것이 `이미지 문화'에 대한 문자적 지성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면서 기존 문자중심에서 다중매체적 환경으로 변하는데도 인문학은 오직 문자적 지성과 사유에만 의존한 학문적 패러다임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이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을 노출했다는 것이죠.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위기의 실체는 인문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이 지식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고 봅니다.
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매체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 방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김 현재의 학문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디지털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능성과 함께 문제점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디지털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전체를 헤집어 놓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학계는 이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죠. 환상에 사로잡혀 무작정 디지털 문화를 추종하는 태도와 그것에 대해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무관심한 태도가 두 극단이라고 하겠는데요, 이런 태도들은 공통적으로 디지털 미디어를 단순히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디지털의 은총과 저주를 동시에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매체환경 안에서 세상을 보려는 태도는 필수적입니다.
윤 선생님께서 여러 글에서 주장하신 `멀티미디어적 개체'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디지털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근대적 주체를 뛰어 넘는 새로운 개체를 형성해낼 수 있을까요?
김 저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체를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하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는 실제 모습에 있어서는 매체종속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한 `멀티미디어적 개체'라는 것은 이런 태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A와 B를 뒤섞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매체들을 결합하면서 새로운 C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개체인거죠. 제가 즐겨 읽는 무협지 식으로 얘기하자면, 매체들을 통해 내공을 증폭시키는 개체라고나 할까요?(웃음)
무학점 연대강좌 불법 강좌지만 말할수없는 쾌감 느껴
윤 디자인을 통해 그런 `멀티미디어적 개체'를 설명할 수 있는 예가 있을까요?
김 지금까지 미술이나 디자인은 지나치게 시각중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건축을 예로 든다면 우리의 전통 건축이 인간의 오감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갖는 미디어였던 데 비해, 오히려 현대의 많은 건축들은 시각적 형태와 구조에만 한정되어 있거든요. 현재의 디지털 미디어를 새롭게 사고한다면, 인간의 마음과 몸 전체와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내면에 새로운 자유를 제공하는 건축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반 제품, 그래픽, 패션도 마찬가지겠지요.
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학제간의 연구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인문학적 방법론은 어떤 차원에서 디자인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김 저는 디자인 자체가 학제간의 연계가 있어야만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게는 디자인만의 단독적인 밑그림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성으로부터 디자인학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계속 써 왔던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학제간의 연구라는 것이 단순히 이것과 저것과의 묶음 또는 병치가 아니라 학문 연구자의 마음 속에서 용해가 이루어짐으로써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는 딱딱한 당구공과 같은 분파주의가 만연돼 있습니다.
윤 저는 학교라는 기존 체제 안에서 실질적 의미에서의 학제간 연구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새로운 학문이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김 연구자들 자신의 전방위적으로 열린 작업이 일단 필요하겠죠. 제가 현재 복직대책위 교수님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무학점 연대강좌의 긍정성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불법강좌'이지만 저는 이 작업을 통해 여러 학자들의 생각과 공명하는 데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학문적 융합이 제가 재임용 탈락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거지요. 아마도 새로운 학문이란 구조와 내용이 교란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윤 마지막으로, 이상에 대한 연구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는데요, `멀티미디어적 인간'으로 제시하신 이상은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 묘한 인연이죠. 남과 다른 새로운 사유를 했던 한 인간을 현해탄 건너로 내친 시대의 무지가 6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땅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게 절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처음에 재임용 탈락시킨 명분으로 대학측에서 흘린 말은 이 논문이 소위 `디자인 논문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행정법원에서 제가 승소하니까 이제와서는 `그 논문은 괜찮았다'고 말을 바꾸더군요(웃음). “왜 나를 미쳤다고 하는지”라는 이상의 독백이 지금도 통한다는 사실이 끔찍하죠.
윤 그래도 이상보다는 우리에게 그런 무지를 깨고 나갈 수 있는 잠재적 힘들이 더 많지 않은가요?
김 그렇겠죠. 그러나 잠재력만 있으면 뭐합니까. 당장에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걷어내려는 실천력이 따라 주어야지요. 내용 없는 커리큘럼, 패거리 교수사회, `조직의 쓴맛' 같은 문제만 해결되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죠.정리/윤세진
김민수가 본 김민수
"난 웃음이 나온다"
모순. 누군가 요즘 내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들어보라고 한다면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연구부실로 낙인찍혀 재임용탈락에 기여한 내 논문은 학제간 연구의 탁월한 성과로 인정되어 국제학술지에 게재되었고, 최근에는 다중매체ㆍ영상 시대에 학제간의 접점을 찾는데 적합한 학자라고 여기저기 불려 다닌다. 서울대에서 성희롱 사건으로 무리를 일으킨 모 교수는 안식년까지 챙기고 돌아와 버젓이 강의하고, 며칠 전 대학당국은 2년 전 내가 재임용 탈락할 때 고액과외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 퇴진했던 전 총장을 교수로 복직시킨다고 전격 발표했다. 하기야 나는 성희롱, 고액과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미천한 학문연구와 교육만을 했으니 대학이 쉽게 나를 복직시키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나는 지존신성한 대학의 중세식 종교재판에서 파문당한 자가 21세기 가상공간과 디지털 문화를 아우르는 저서를 쓰고 연구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오곤 한다. 근대성은 고사하고 상식조차 확보되지 않은 나라에서 중세와 미래를 가로지르며 불확실성ㆍ불연속성 속에 살고있는 모순된 상황이 나를 이상(李箱)처럼 `멀티미디어 인간형'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란 용어는 내게 단순히 매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실존적 상황이자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지 시대, 문화적 저항과 재생산을 위한 학제적 저널 <디자인문화비평>을 지난해 창간했다. 나는 지난 2년간 전화도 끊긴 대학 연구실에서 핸드폰만을 사용하는 최첨단 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나를 이렇게 첨단형 인간으로 만들어준 대학에 감사한다.전서울대 교수/<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getto@chollian.net
김민수는 누구?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산업디자인학 석사 ▲뉴욕대 대학원 박사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나 재임용심사 과정에서 서울대 미대 초창기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고 교육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탈락해 현재 행정소송 1심에 승소하고 복직투쟁 중 ▲한국영상문화학회 기획학술이사 및 학술지 편집위원 ▲<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 ▲저서:<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생각의나무, 1999), <모던디자인비평>(안그라픽스, 1994), <21세기 디자인문화탐사>(솔, 1997) 등. [인문학데이트] ② 이정우 김미경=항상 강의실에서만 뵙다가 이렇게 밖에서 일대일로 뵈니 색다른 느낌이네요.
이정우=저도 기분이 한결 좋습니다.
김=제가 오늘 들고 나온 게 선생님께서 이화여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3학기 동안 했던 강의를 정리한 세 권의 책인데요, 이 책들이 일으킨 가장 큰 반향은 철학을 대중화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사실, 이 강의록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강의록이라는 형식이 좀 쉽다는 느낌을 주었을 겁니다. 그건 제가 고민한 바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철학을 좀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거요. 앞으로도 강의록을 통한 계몽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김=이 책들에서 들뢰즈, 라이프니츠 같은 서구 철학자들과 함께 동북아 사상의 하나인 기학을 언급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선생님은 동서를 가로지르며 연구대상을 넓혀 왔는데, 어떤 내적 동력이 그런 가로지르기를 밀어붙인 것일까요.
이=처음에는 그리스 철학과 프랑스 철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 철학이 굉장히 폭이 넓다는 것 때문이었죠. 성격 탓일 수도 있는데 저는 세상의 여러 가지 면모를 함께 보고 싶었어요. 특정 분야에 대한 정교한 탐구보다는 상대성이론에서부터 테크노음악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이죠. 그리스 철학이나 프랑스 현대철학이 바로 그런 사유를 하고 있더라구요.
김=선생님이 동북아의 전통사유로 나아간 것도 그런 가로지르기의 한 예이겠군요.
이=주역이나 한의학은 어렸을 때부터 관심사였어요. 아마도 아버지가 한학자여서 그랬던가 봐요. 이 동북아의 사유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느냐가 저의 오랜 과제였는데 푸코를 통해 들뢰즈를 알게 되고 들뢰즈에게서 영감을 받고서, 이제는 현대학문과 동북아 전통사유를 엮어서 하나로 이해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뒤늦게 동양철학으로 관심 영역을 넓힌 게 아니군요.
이=그렇죠. 다만 서양철학을 공부한 건 그쪽의 철학이 동양철학에 비해 훨씬 날카롭고 엄밀하고 분석적이서 학문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에 좋다는 이유에서였어요.
김=양쪽 철학을 다 하시면서 느낀 점을 비교해본다면….
이=서양철학은 하면 할수록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요. 분석적이라는 성격이 그런 느낌을 들게도 하고 도덕적·심미적 차원에서도 메마른 사고를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반면에 불교나 유학, 기학은 서양처럼 분석만 해서는 얻을 수 없는 삶의 총체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김=선생님이 형이상학에 대해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것이 기학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 개념이 기라고 한다면 말이죠.
이=그렇습니다. 형이상학을 과학적·정치적·예술적 경험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이라고 한다면 그 담론을 풀어갈 실마리가 필요한데 그게 저한텐 기인 거죠. 기는 물질성이자 에너지이자 생명이기도 하고, 구체적인 지각·사물 등을 담은 개념인데 나쁘게 보면 애매모호한 것이고, 좋게 보면 갈라진 지식을 통합할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가 가진 두루뭉수리한 부분을 현대 학문에서 보충한다면 새로운 형이상학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그런 말씀을 듣다 보면 선생님이 교수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강의록에서도 밝혔듯이 선생님은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수시로 동양철학을 이야기한 것이 다른 교수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 아닙니까?
이=돌이켜보면 제가 사회화가 덜 된 탓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학은 직장이고 교수는 거기에 취직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웃음). 서양철학 교수가 동양철학을 가르쳐서는 안 되고, 독일철학 교수가 프랑스철학을 가르쳐서도 안 되는 것이죠. 교수들 밥그릇 뺏는 일이 되니까요. 철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담론을 종합하는 것이고 당연히 연구주제나 범위를 넓혀가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대학제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죠.
김=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생기 있게 시대를 호흡하는 철학은 대부분 제도권 바깥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저는 인문학 자체가 반제도적이라고 봐요. 제도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옛날 공자나 불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제자를 거느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인문학의 본디 정신인 것 같습니다.
김=얼마전 전주국제영화제에 가서 존 조스트라는 감독의 영화를 봤는데, 라이프니츠가 생각났습니다. 근대 속의 탈근대 사유가 기술문명과 만났다고나 할까요. 기술문명과 인문학의 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인문학은 근대 이후 계속 기술과 대립해왔어요. 그러나 오늘날 기술은 인문학 안에 들어와 있어요. 가령 컴퓨터를 배제하고 인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죠. 이제는 서로 섞여서 통합을 이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 강의에도 과학기술을 적극 끌어들이고 싶어요. 영화를 보면서 하는 철학 강의도 해보고 싶고, 강의록이 아니라 비디오로 철학 강의를 내보고도 싶어요.
김=선생님의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인 근대와 탈근대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또 그것이 동북아 철학과는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도요.
이=탈근대는 근대와 단절하거나 근대를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근대가 산출한 병리현상을 치유함으로써 근대를 더욱 좋게 만들자는 것이죠. 근대가 개인주의를 발견한 건 좋은 것이죠. 그게 극단으로 가 소외와 소통불능 상태를 낳은 게 문제죠. 또 물질문명도 환경파괴로까지 나아가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저는 탈근대 철학의 실마리를 동북아 철학에서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주의가 낳은 공동체 해체의 지양에는 유교가 필요하고, 자연과 인간의 분리, 환경파괴를 극복하는 데 기학이 필요하고, 고립과 고독에는 도가나 불교 같은 내면을 닦는 학문이 필요합니다. 단, 봉건적인 색깔을 씻어내고 현대적인 형태로 재창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렇다는 것이죠. 정리/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이정우는 누구? 1959년 충북 영동 출생
▲1983년 서울대 공대 졸업
▲1994년 서울대 철학과 박사
▲현재 철학아카데미 원장
▲프랑스문화학회 부회장
▲저서:<담론의 공간>(민음사, 1994)
<가로지르기>(민음사, 1997)
<인간의 얼굴>(민음사, 1999)
<시뮬라크르의 시대>(거름, 1999)
<삶, 죽음, 운명>(거름, 1999)
<접힘과 펼쳐짐>(거름, 2000) [인문학데이트] ③ 고미숙 고미숙=반갑습니다.
이=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논문이건 비평이건 당대의 주류를 마치 망치로 부수는 듯한 패기가 느껴지는데요, 선생님이 쓰신 책에서는 87년 6월의 `거리의 열정'이 그걸 가능케 했다고 하셨는데, 그런 경험이 학문하는 데 어떻게 투영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고=80년대를 혁명의 시대라고 하지만, 저는 대학 시절에는 기독교 형이상학에 빠져 있었어요. 87년 6월 항쟁에서 처음 역사의 거대한 얼굴을 마주보았다고나 할까요. 거리에 나가 몸으로 역사를 체험하고 그 뒤에 마르크스를 알게 됐지요. 그 거리의 열정을 지식의 영역에서 능동적인 생산력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내 논문 하나하나에 그 감동을 최대한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이=고전문학이라는 학문 영역에서 그걸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고=고전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통념을 깨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현실에서 진보적인 사람은 모두 카프 문학(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문학)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싫었던 거죠. 고전문학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어요. 단재 신채호가 20세기 제국주의와 싸우면서 상고사 연구를 했잖아요. 고대사를 통해 현실과 싸운 것이죠.
이=선생님의 활동공간인 수유연구실은 통상의 재야연구소와는 성격이 다른 것 같은데요.
고=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지식인 코뮌'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 공동체예요. 학부 출신에서부터 박사학위 소지자까지 다양한 연배의 연구자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죠. 특징적인 것은 서열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이에요.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까 고독하지 않고 즐겁죠.
이=선생님은 94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19세기 사조의 예술사적 의미>에서 적용했던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버리고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 포스트구조주의의 탈근대 철학으로 관심을 옮겼는데, 그 내적 필연성을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제게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적 방법론을 쓰느냐 하는 것보다는 현실에서 얼마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어떻게 보면 저는 유행이 한참 지난 뒤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 셈인데, 당시에는 그게 절실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거시적인 것을 논하는 데는 능하지만 미시적인 것을 분석하는 데는 맹점이 있더라구요. 탈근대 철학에서 미시적인 차원의 분석 방법을 배운 것인데, 다만 그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저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어요.
이=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
고=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서 이제까지 한국의 담론은 민족주의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 갑갑함을 느끼는 것이 한국 인문학의 현실인 거죠. 대학 안팎에서 모두 그래요. 계간 <창작과비평>만 해도 민족주의 담론을 돌파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다고 봐요.
이=민족주의 담론의 구체적인 예로 어떤 걸 들 수 있습니까?
고=국문학을 포함해서 한국학 전반에 스며 있는 `내재적 발전론'이 그런 예죠. 조선시대 후기에 자본주의 근대를 향한 내적 발전의 양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식민지, 분단, 독재를 거치면서 좌절하고 굴절됐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의 완성이다 하는 그런 논의죠. 저는 다르게 보는 것이죠. 식민지화가 한국 근대화의 좌절이 아니라 근대화의 코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보아야 민족주의의 보수적 담론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이=선생님이 최근 주창하신 `동아시아근대성론'이 그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군요.
고=20세기 초 동아시아의 근대화 담론을 탈근대적 문제틀 아래서 읽어내는 작업이 동아시아근대성론으로 발전한 거죠. 근대화 담론이 한·중·일 세 나라에서 어떻게 비슷하게 또는 다르게 형성됐는지를 보면서 민족주의 담론에서 벗어날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죠. 신채호와 루쉰을 비교하거나 이광수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요. 가령, 루쉰을 이제까지 민족주의자로 해석해 왔지만 니체의 영향을 받은 루쉰, 무정부주의자 루쉰의 측면에서 보면 다르거든요.
이=탈근대적 문제틀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고=제가 수유연구실에서 지금 강의하는 주제가 `계몽의 수사학'인데, 근대 계몽기의 신문 기사를 수사학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거예요. 신문에 담긴 텍스트가 계몽 담론을 어떻게 조직했는가를 추적하는 건데, 재미있는 게 신채호, 박은식 같은 분들이 논설 기사, 시, 소설, 대담 등 모든 양식을 총동원해 민족주의 계몽담론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근대 문학양식의 관점에서는 이런 것들이 다 시시한 것이 되고 최남선의 신체시 같은 근대적 텍스트만 부각되는 거죠. 개화기에 최남선의 신체시는 영향면에서는 미미했는데 말이죠. 근대가 아닌 탈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장르의 구분이 없는 신문의 다양한 양식이 변이와 생성의 힘이 넘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겁니다. 시 소설 평론 따위로 양식을 나누어 고착시키는 근대의 코드를 넘어선 글쓰기라고 할까요.
이=문학비평가로서 활동도 활발하신데 그것도 일종의 학문적 가로지르기입니까?
고=문학비평을 하게 된 건 우연이었어요. 류철균씨 등 계간 <상상>의 멤버들이 동아시아문화론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시대 문학사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하고 80년대 민족문학론을 마구 공격하는데, 조선시대 문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 천박한 거예요. 전공자로서, 이거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다보니 평론가라는 딱지가 붙게 된 거죠,
이=페미니스트 비평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악조건과 억압상황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고=저더러 페미니스트 비평가라고 하는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로 규정받는 게 싫기도 하고 사실 제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억압받는다는 느낌도 없거든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남성적인 면도, 여성적인 면도 함께 나타나고 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래서인지 저는 90년대 여성 소설을 보면서 답답했어요. 여성들이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게, 현실이 그렇다 해도 거기에 그냥 매몰된 게 아닌가, 전근대적인 여성의식을 세련되게 변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비판을 했죠. 사실이 이런데, 페미니스트 비평가로 불리는 게 역설적이죠. 아마도 이인화 이문열 씨의 가부장제적 소설들을 비판하면서 그런 딱지를 얻은 게 아닌가 싶어요.
이=최근에 낸 평론집을 <비평기계>라고 붙였는데, 들뢰즈의 `기계'라는 개념을 쓴 게 낯설게 다가옵니다.
고=저는 근대적 개념인 주체보다는 기계라는 개념을 쓰고 싶어요. 현실을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반영한다고 생각되거든요. 곧, 어디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것들로 변이되고 표현된다는 점에서 주체 개념보다는 기계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봐요. 제가 쓴 글들은 제 고유의 산물이 아니에요. 저는 주변의 수많은 사건과 사유의 편린들을 `절단·채취'하는 기계였을 뿐이죠.
고미숙이 말하는 고미숙
어설프나마 독일문학에 심취해 있다가 대학 4학년 때, 김흥규 선생님 강의에서 <춘향전> <홍길동전>을 읽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동을 맛보고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전환점. 사설시조, 판소리 등 조선 후기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석사 과정을 마쳤고, 박사과정을 밟던 88년 무렵 늦깎이로 <공산당 선언> <독일이데올로기> 등을 읽으며 고전문학 연구도 계급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불면의 나날을 보냈다. 두번째 전환점. 그때부터 국문학계에서는 `얼치기 빨갱이'로 찍혔지만, 그래도 혼돈의 아수라장인 19세기 시조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촉발 덕분이었다. 이후, 우발적인 계기로 현장평론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공부든, 직업이든 제도권에 속박당하는 게 싫어 헤매던 차에 푸코, 들뢰즈를 만나면서 `외부에서' 사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다는 철학적 명분을 얻고서 환희용약했다. 세번째 전환점. 지금 서 있는 지점이다. 니체가 그랬다던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열거해 보라고.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는 수유연구실의 연령, 학벌, 성별 관계 없이 만나는 벗들, 아침 저녁으로 타고다니는 자전거, 늘 지적으로 나를 긴장시키는 선생님과 동료들, <말과 사물>, <천의 고원>, 루쉰과 나쓰메 소세키, 신채호, 계몽기 신문자료 등등, 이들이 바로 나다. 이 모든 것들과의 기계적 접속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유쾌하게 질주하고 있다. 또 다른 전환점을 향해.
고미숙은 누구?
▲1960년 강원도 정선 출생
▲83년 고려대 독문과 졸업
▲94년 고려대 국문과 박사
▲현재 연세대 출강
수유연구실 운영
▲저서:<한국고전시가선>(임형택 공편, 창작과비평사)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태학사)
<18세기에서 20세기초 한국 시가사의 구도>(소명출판)
<비평기계>(소명출판) [인문학데이트] ④ 김동춘
“저는 사람들이 좁은 격자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좁은 연구실, 좁은 전문분야, 좁은 생활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는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철학은 이런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를 전체로서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전체 속에서 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형이상학적 임무가 철학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를 인식했다는 것이 곧 나를 바른 삶으로 이끌어주지는 않습니다. 세계인식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확립이 역사 허무주의를 낳을 수도 있고, 히틀러처럼 니체철학을 잘못 끌어와 파괴를 일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나를 정초짓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고 거기에 기반해 행위할 때 충동이나 부화뇌동이 아닌 근거 있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근거를 찾는 것이고, 근거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명원=평소 선생님의 글을 유심히 읽는 독자이기도 한데, 직접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문학 데이트' 네 번째 초청자는 김동춘(41ㆍ 사진 오른쪽) 성공회대 교수다. 김 교수는 해외파 박사에 권위를 부여하는 한국의 학계 풍토에서는 이례적으로 순수 국내파 박사로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의 활동은 대학의 강단에 멈추지 않고 시민운동에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기보다는 한국 현실을 파고들어 새로운 이론을 산출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박정미(24ㆍ사진 왼쪽)씨가 그와 만나 김 교수의 최근 저작 <근대의 그늘>을 놓고 장시간 이야기했다. 편집자
"우리는 아직 근대를 완성못해"
박정미=사회학을 공부하다보니 선생님의 저서를 많이 읽은 편입니다. 이번에 나온 <근대의 그늘>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과 같은 책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김동춘=제 책을 열심히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박=선생님의 연구를 따라가면서 느낀 것이 관심사의 다양함인데요, 지식인 문제, 사회운동, 노동운동, 민족주의, 가족 문제에 이르기까지 참 넓습니다.
김=제 연구 영역들은 서로 연관돼 있고,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의 폭이 넓어진 거죠. 저의 주된 연구 영역은 사회운동인데, 사회운동의 잠재적 주체가 어떻게 현실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조건 때문에 그 잠재적 주체가 현실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그 동안의 연구 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말씀하신 대로 선생님의 근본 관심사는 노동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현실에서는 시민운동을 하시잖습니까?
김=노동계급을 연구한다는 것이 노동계급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의 당면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계급이 정치적·사회적 주체로 등장하는 지름길이 무엇이냐를 놓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에둘러 가는 길이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모순이 그대로 노동계급에 투영되는데, 이 시민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노동계급의 주체형성이 어렵다고 보는 거죠. 예를 들어 남북한 군사적 대치가 존재하는 한 계급정당 등장은 불가능합니다. 예산의 30%가 넘는 군사비가 복지비·교육비로 옮겨가지 않는 한 노동자투쟁이 기업 중심의 경제투쟁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요.
박=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정치적 성격이 강합니다.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하는 운동이지요. 이번 4·13 총선을 앞두고 전개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4·19혁명,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동시에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21세기 엔지오 운동의 싹이기도 합니다.
박=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구실을 나눠가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김=그 동안 시민운동이 담당했던 과제를 노동자가 스스로 떠안아야 합니다. 일례로, 대우 자동차 해외매각문제나 `국부 해외유출 문제'는 노동자들이 제기했어야 합니다. 사회복지나 재벌개혁 문제도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위 기업 중심으로 임금·고용 같은 낮은 수위의 투쟁만 하다보니까, 재벌개혁에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해고되면 갈 곳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박=현 정부 들어 시민운동은 급성장하고 노동운동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 지배계급의 계산과 맞물린 측면도 있다고 보이는데요.
김=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엔지오를 키우는 것이 노동운동을 `왕따'시키는 결과를 빚는 것이죠. 그러나 여전히 시민운동은 노동계급과 대립하기보다는 우리사회의 핵심적 지배세력과 대립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일보>를 대표로 하는 극우반공세력, 곧, 과거의 군부와 3~5공 세력, 재벌 등 인구구성비로는 얼마 안 되지만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과 시민운동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부분적으로도 개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근대의 그늘>로 이야기를 옮겨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아직 근대를 완성 못했다고 보는 것 같은데, 탈근대론자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근대의 과잉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김=국민국가 건설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근대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조건을 놓고 본다면 국민국가의 완성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제를 마무리지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이나 환경문제 같은 탈근대적 문제 제기가 보편화하기 어려운 것이 근대의 완성이 안 된 것과 관련 있습니다. 호주제도가 철폐 안 되는 것은 남성이 반대해서가 아니라 독재권력과 그것을 뒷받침한 군사주의적 억압에서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그건 투쟁의 선차성을 따지는 문제라고 보는데요. 반독재투쟁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내부의 차이를 억압하는 것과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김=저는 탈근대 운동들이 근대의 미완성이 낳은 문제들과 연결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독자적으로 풀기보다는 이 문제들이 국가나 자본의 문제와 어떻게 접합돼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박=저는 여성운동을 탈근대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은 근대와 함께 출발한 운동입니다.
김=저도 그렇게 봅니다. 다만 지금 페미니즘 운동이 너무 서구적이어서 반감을 느끼는 것이죠.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대중적 여성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의 억압적 가족제도를 뒷받침해온 식민지 억압구조, 분단, 군사독재 문제를 함께 봐야 합니다.
박=화제를 바꾸어서, 선생님이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왜 민족주의가 중요합니까?
김=서구의 사회과학 담론만 연구해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내적 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해관계를 중심 주제로 하는 서구 사회과학에는 민족주의 담론이 없으니까요. 우리의 민족주의는 종교사회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후발자본주의국가이면서도 가족주의적 관계가 강하고 개인주의가 저발전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어디엔가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거죠. 오늘의 지역주의 과잉, 종교 팽창도 이런 감정과 관련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놔두고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박=선생님의 홈페이지 프로필을 보니까, “남의 이론을 우리 문제에 단순 대입하는 학계의 풍토에 불만을 느끼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과학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고 하셨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김=우리 학문의 종속성은 학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종속성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지식의 소비국가였어요. 우리사회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면 그쪽을 빨리 알아야 했어요. 이건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입니다. 외국 이론 들여와 소비하고 폐기하는 것을 반복해 왔는데, 그렇게 해서는 이론 발전이 안 됩니다. 외국에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을 생산하려면 외국의 보편 이론으로 설명 안 되는 우리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저는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특수를 통해 보편으로 나아감으로써 일류 학자가 돼보고 싶어요. 가령, 지역주의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가면 거기서 인간의 의미·행동·정치와 같은 보편적 주제로도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김동춘이 말하는 김동춘
옛날에 운동권의 어떤 후배가 나를 보고 `가장 늦게 사고 칠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내가 그만큼 신중하다는 말이 되겠지만, 별로 좋은 평가는 아니다. 그의 말대로 수많은 후배들이 계속 사고를 치고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동안, 그들을 사고치게 만든 데 상당한 `역할'(?)을 한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들보다 편한 자리에 앉아서 지금껏 살아왔다. 연구사를 보면 무리하고 모난 주장이 이론의 발전에 기여한 경우가 더욱 많지만, 나는 어떤 현상을 분석할 때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정황들을 살피는 편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이론적으로도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논문만 양산한 셈이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는 좋아하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나지만, 나는 학문은 좋아하나 학자들과 만나는 것은 싫어하며, 학자연하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서 대개는 인생에서 궁지에 몰려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나도 크게 봐서는 그러한 부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동료 학자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했고, 농촌 출신에다 강한 유교문화의 세례, 학생운동, 교사 생활, 기독청년 활동, 군 복무, 연구자 운동, 시민운동 등 직업적 학자가 되기 전에 비교적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런 것들이 나를 고생시켰지만, 이제는 자산이 됐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들을 대신하여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오직 학문활동에만 매진하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더 잘 볼 수 있는 처지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행운이자, 큰 부담이다.
김동춘은 누구?
△경북 영주출생
△서울대 사범대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1993)
△구로고등학교 교사(1984-1988)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연구원(1994-1996)
△미국 UCLA대학 방문연구원(1996)
△<역사비평> 편집위원(1989-현재)
△<경제와사회>편집위원장(1997-2000)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및 엔지오학과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저서 <1960년대의 사회운동>(공저)(1991)
<한국사회노동자연구>(1995)
<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1997)
<분단과 한국사회>(1997)
<근대의 그늘>(2000)
[인문학데이트] ⑤ 노성두
`인문학 데이트' 다섯 번째 초청자는 미술사학자 노성두(41)씨다. 그는 12년 동안 독일에서 공부하고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파 서양미술사학자다. 대학에 몸담지 않고 집의 서재를 연구실 삼아 공부하고 있는 그에게 “미술사학의 고전을 번역하는 일이야말로 학자로서 필생의 임무”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윤세진(30)씨가 노씨의 르네상스 미술 해설서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를 놓고 흥미로운 대화의 시간을 보냈다.편집자
노성두가 말하는 노성두 나는 막 시작했을 뿐
“삼 세번, 세 차례까지는 괜찮다.”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뱉은 변명이 나의 삶을 방황에서 건졌다. 애당초 의학지망생이었다가 외국어로 지향을 바꾸고, 다시 미술사로 학문의 목표를 선회하게 된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우리 바깥의 세계로, 그리고 다시 문화와 인문학에 대한 그것으로 진화하게 된 역정을 투영한다. 세 차례의 굴곡 이후에 달콤한 유혹의 바람이 영혼을 흔드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그 때마다 파우스트 박사의 부끄러운 다짐을 떠올렸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세 사람의 엄격한 스승을 만났다. 첫째는 단테. 자신을 찾기 위해서 지옥의 고단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교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길벗으로 선택하는 용기도 지녔다. 둘째는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를 들고 몽 방투를 등정했고, 알프스 산자락에 숨은 으슥한 수도원 지하를 훑어서 어렵사리 찾아낸 고전 문헌을 일일이 필사했던 최초의 인문주의자이다. 셋째는 나의 지도교수 요아힘 가우스 선생님. 인문학을 하는 자의 고통과 더불어 그 고통을 즐기는 법도 가르쳐주셨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인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 `인문학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미술사의 한 귀퉁이를 막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결코 고독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감당할 몫이 없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문학은 딱딱한 마분지 껍데기에 싸인 논문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해도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안 그러면 손가락질 당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연기자는 액션과 로맨스를 가리지 않는다. 예컨대 학술논문과 추리소설과 시사칼럼을 구애없이 넘나드는 움베르토 에코는 보편적 인간을 추구했던 르네상스 사상으로 업그레이드된 현대 인문학의 예형을 제시한다. 이제 표현하는 인문학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랑받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수수께끼처럼 그림을 풀어보세요 재밌습니다
윤세진=평소에 선생님 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노성두=중요한 책들이라 열심히 번역했는데…, 근데 잘 안 팔려요(웃음).
윤=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노=성서와 미술을 주제로 한 <천국을 훔친 화가들>이 곧 나올 예정이구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론>을 번역중입니다. 그리고 미술가이드북 시리즈 기획을 위해서 이탈리아로 곧 준비답사를 떠날 예정입니다.
윤=일반인들의 관심에 비해 내용이 알찬 미술 안내서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시리즈는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노=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치체로네' 시리즈를 모델로 구상한 건데요, 미술작품뿐 아니라 문화, 역사, 인물, 사회, 정치를 관류하는 `서사시적인' 가이드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웃음).
윤=그 작업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역서나 논문들이 대부분 르네상스와 관련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르네상스 전공자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르네상스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노=글쎄요…. 고전미술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호기심이었죠(웃음). 그런데 80년대만 해도 우리 나라에 서양미술사학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도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독일로 떠났고 거기서 르네상스 미술에 푹 빠져들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르네상스의 작품들은 오래 우려낸 안료의 깊은 맛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윤=<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는 르네상스의 눈으로 고대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의 눈으로 고대와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르네상스 시기를 지금, 여기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노=르네상스는 미술의 여러 원리들이 다른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선도한 시기라는 점에서 미술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이 시기는 미술과 다른 학문들의 경계 허물기가 본격화한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의 본질, 예술가의 고뇌와 기쁨, 인간의 가능성과 그 한계 같은 존재론적 문제들을 성찰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윤=미술사 서술 역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해내는 문제라고 한다면, 선생님이 르네상스 미술사를 서술하실 때 기준으로 삼는 작품들은 어떤 것인가요?
노=전 개인적으로 `걸작'이라고 인정되는 작품보다는 당대의 이론이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작'들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 인간'은 작은 낱장 소묘에 불과하지만 연구자들에게 많은 연구거리들을 제시해 주거든요.
윤=원전을 번역하시는 것도 이론이나 원리를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하려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노=그렇죠. 문제는 원전 번역이 거의 안 돼 있다는 거예요. 레오나르도에 관한 논문은 50편이 넘는데 레오나르도의 <회화론>이 아직껏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원전 번역이야말로 미술사의 문헌적 토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미술사학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윤=저같이 공부를 막 시작한 사람에게는 그런 작업들이 정말 자양분이 되는데요, 왜 그런 중요한 번역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요?
노=학술번역이 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해당 언어에 대한 숙련 부족이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번역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은 것도 한 이유예요. 제가 번역한 기독교 상징사전 <피지올로구스>는 매우 중요한 저작인데도 300부밖에 안 팔렸거든요. 그러니 번역으로 먹고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웃음). 하지만 서양에서는 원전 번역에 박사학위를 줄 만큼 그 작업의 가치를 인정해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번역의 질이 높아지는 건 물론이구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인식이 없어요. 큰 문제죠.
윤=선생님 작업의 많은 부분이 번역인 만큼, 번역에 대한 선생님만의 기준 같은 것이 있을 법한데요.
노=좋은 번역은 잘 지은 집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비트루비우스는 잘 지은 집의 조건으로 내구성, 심미성, 유용성을 들었는데, 좋은 번역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윤=요즘 들어 미술이 대중화한 것 같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미술작품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선생님의 작품 읽기 방식, 혹은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란 어떤 건가요?
노=작품을 읽는 데 절대적인 하나의 방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저는 수수께끼처럼 그림을 풀어가는 방식, 아무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읽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윤=예를 들어,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통해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읽어내는 방식은 독창적이고도 흥미로운데요, 그 그림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을까요?
노=푸코의 서술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의 해석은 엉터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작품을 원근법을 통해 풀어냅니다. 원근법의 원리를 적용해 시선의 거리를 계산하면 그림 속 공간의 크기를 구할 수 있죠. 그렇게 해서 그림을 풀어보면,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가 실제 화가 앞에서 모델을 섰다고 볼 수 없어요. 그림 속의 화가는 다른 작품을 구상중이에요.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는 그 시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일종의 상징이지요. 이런 식으로 저는 작품을 읽을 때 다양한 관점을 적용하면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끌어 모아 능률적이고 새로운 접근을 합니다. 그게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은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죠.
윤=그런 즐거움을 다른 연구자들과 공유하면서 선생님의 연구를 더 확장시킬 계획은 없으신가요? 이를테면 공동작업 같은….
노=그러고 싶기는 한데 잘 안 되더라구요. 그렇지만 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언제라도 함께 공부하고 싶습니다.
윤=여담이지만, 대학교수직에 대한 미련은 없으신가요?
노=없습니다. 더 이상 추파를 던지기 싫어서요(웃음). 제 나름의 생활원칙은 공부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평론이나 특강을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대신 많은 시간을 작업하고, 생활이 좀 곤란해도 적게 벌고 적게 쓰자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유롭습니다. 사실 전 우리 나라 학자들이 바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하루 종일 집에 있거든요(웃음).
윤=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노=저는 원전 번역에 뼈를 묻을 거예요. 평생 백 권을 번역하겠다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 시간씩 헬스를 하면서 가슴 근육도 키우고 있습니다(웃음). 힘든 작업이지만 끝까지 `꾸역꾸역' 할 겁니다. 누군가는 인문학의 그런 밑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리 윤세진sj_0110@hanmail.net, 사진 이정우 기자woo@hani.co.kr
노성두는 누구?
△1959년 경남 산청 출생
△1982년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1994년 독일 쾰른대 미술사·고전고고학·이탈리아어문학 박사
△서울대 미학과 강사
△저서:<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한길사) <문명 속으로 뛰어든 그리스 신들>(공저)(사계절), <천국을 훔친 화가들>(사계절)
△역서:<알베르티의 회화론>(사계절) <예술가의 전설>(사계절) <피지올로구스>(미술문화) <정치적 풍경>(일빛) <예술의 재발견> 시리즈 전 8권(마루), <도상학과 도상해석학>(공역)(사계절)
[인문학데이트] ⑥ 홍윤기
정미옥=반갑습니다. 선생님이 <당대비평>에 관여하시듯이 저도 <고대대학원신문>이라는 매체를 만드는데, 먼저 <당대비평>에서 출발하는게 좋겠습니다. 이 매체가 지금 같은 위상을 얻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홍=위상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매체가 일정 궤도에 이르려면 사명감, 그리고 독자와 시대를 상대로 한 승부근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문부식 주간을 비롯한 우리 편집위원들이 노력도 했지만 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 개성이 강한 편집위원들이 서로의 다름을 자신의 보완점으로 수용하는 넉넉함도 다양한 기고자 확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다르더라도 합치점이나 지향점은 있지 않습니까?
홍=우리는 동인그룹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좀먹는 모든 반이성적인 것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한다는 공통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계간지의 한계상 나날의 정세에 대한 논평은 불가능한 대신,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반이성적인 것의 코드를 인문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판독하고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박정희 체제'에서 유래했지만 현재의 사회경제구조나 일상에서 끈질기게 작동하는 이 사회의 `주도적 지배권력'과 각 사회영역의 `국지적 권력'들이 그 일차적 타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발전의 추진력을 내부에서 갉아먹으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퇴행성 권력'들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지요. `진보에도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희의 확신입니다. 진보운동권 출신들의 최근 작태에서 이런 가설이 너무 허망하게 일찍 입증되어 좀 허탈하긴 합니다만.
정=<당대비평>에는 유달리 `야만성' `퇴행' `허약함'이라는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군부독재시대와 비교해서 오늘의 모습을 `야만으로의 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요.
홍= `오늘'에만, 그리고 우리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보인사들이 그렇게 됐다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진보를 거론하는 방식 자체에도 퇴행적 증상, 허약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가령 선생님이 <당대비평> 9호에 쓰신 `김지하론'도 그런 예입니까? 그 글의 제목이 `우리의 허약한 현대, 그리고 야만으로의 퇴행'이었는데, 김지하 비판으로서는 뒤늦은 편으로 보이는데요.
홍=뒤늦다니요. 김지하씨는 한번도 제대로 비판받아 본 적이 없어요. 김씨의 경우는 퇴행 증상의 한 표본입니다. 그는 `6·3 사태' 당시 박정희가 내세웠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지내는 자리에서 그 조문으로 한 시대의 이정표를 마련한 분입니다. 그런데 수십년 뒤 그가 비판했던 것과 별 차이 없는 담론틀 안에 처박혔습니다. 일종의 상상력 고갈에다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할 투지의 상실까지 겹친 진보권 최대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김씨는 내가 자랐던 시대의 일부입니다. 사실 그 글은 내 안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퇴행 가능성을 스스로 성찰하는 심정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정=그래서 김지하 시인을 비판하면서도 애정을 보이셨던 건가요?
홍=글쎄요. 70년대 김지하씨가 박정희 체제와 정면으로 싸웠던 것은 바로 그것이 가시적인 성과에 대한 도전이었다 라는 측면에서도 우리 현대의 계몽적 성과입니다.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는 비판은 불공정합니다.
정=<당대비평>이 9호와 10호에서 연거푸 제기한 `우리 안의 파시즘' 문제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반론도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11호 독자합평회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 문제이지만, `우리 밖의 파시즘' 또한 여전히 강고하다”는 문제제기였습니다. 모든 것을 미시 파시즘으로 돌리는 환원론 아닙니까?
홍=사실 그 용어 판권은 동료인 임지현 교수한테 있지만 저는 파시즘으로 지칭된 사회 전반의 권력망에 야합한 이들이나 그것을 상대로 싸우는 이들에 대한 성찰적 개념으로 수용했습니다. 실제로 권력의 변신술은 아주 교묘하여 그에 대한 별도의 반성력이나 대응력이 개발되지 않으면 모든 가치를 퇴화시킵니다. 현실적으로는 결국 불가능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건강성을 위해 `탈권력적 긴장'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 밖의 파시즘'이 기승을 부릴 기회를 주는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정=몇몇 진보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행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사실 곤혹스러운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권력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습니다. 권력체로서의 <조선일보> 비판은 그 신문의 극우체질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단지 거기에 기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이의 활동 전체를 과도하게 의문시하는 것은 권력비판의 초점을 흐릴 우려가 있습니다. 권력비판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인간비판에는 동반자적 긴장이 필요합니다. 정=전국 철학 교육자들이 모인 <철학연대>에도 활동하고 계신데, 왜 그런 모임이 필요했습니까?
홍=국민윤리교육과가 독점했던 중등학교 도덕·윤리 교사 양성권을 철학과뿐만 아니라 교육학과에도 나누어준 교육부의 정책이 계기인데, 한심한 일이죠. `철학'과 `윤리'를 따로 가르치고, 윤리 교사를 그 분야와 별 상관 없는 학과에서 양성해도 좋다는 그 무지함에 철학계가 발끈했는데, 교육학과 출신들이 장악한 한국의 교육권력 문제가 철학계의 안이함을 각성시킨 것이죠.
정=선생님은 한국사회의 부패 문제나 시민사회에 대한 제언 등 현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써오셨는데, 공부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비판적 발언은 안하는 것이 관례가 아닌가요?
홍=지식인의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공부가 당대 사회에 갖는 의미에 대해 지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학술적 성과가 최우선이다'라고 말하는 분치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낸 분이 주위에는 없어요. 일종의 학문폐쇄주의인데, 지식사회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또다른 양상입니다. 가령 자연과학을 하는 분들이 핵문제나 환경문제를 외면하고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내면서 동시에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를 보면 이게 왜 잘못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적으로 철저하다면 당연히 그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 나아가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발언할 책무가 우리 학자들에게는 있다고 믿습니다.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yws@hani.co.kr
홍윤기가 말하는 홍윤기
나이 마흔이면 헤매지 않는다는 <논어>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십대쯤 되면 이런 일, 저런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좋아하더라도 삼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단지 철학을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을 진정 하려고 하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내가 20대를 보낸 70∼80년대를 돌아보면 당시 철학한다는 것은 억압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해방의 무기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철학'을 철학으로 고수하려고 하면 행동주의적인 동료들에게 약간은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철학, 아니 인문학 전반이 한 사회의 생동하는 영혼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은 유학 생활을 하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강의실에서였다. 1988년 10월 겨울학기가 시작되던 첫 날, 한다 하는 철학과 교수들이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을 시작하면서 주정부의 대학기구 조정안에 반대하는 교수시위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당부하는 말을 듣고 나의 독일어 청취능력을 의심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 문턱에 선 오늘날 중고등학교 도덕·윤리 교과목은 `철학'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으므로 철학 공부한 학생이 `도덕·윤리' 선생이 되려면 그 자격증을 따로 따야 한다는 대한민국 교육부의 야만적 유권해석에 또 다시 분노의 정념이 움직이니 아마 나의 40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든다. 60편 가까운 논문을 썼으나 바로 위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이런 저런 연유들로 쓴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과연 신문에 날 정도의 인문학자일 수 있는지 내 자신 의심스럽다.
나는 철학이 `한 시대의 영혼'이라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믿음을 아직도 갖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진짜 마흔 살이 되기 위해 나의 미혹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홍윤기는 누구?
△1957년 강원도 동해 출생 △서울대 철학과 석사 △베를린 자유대 철학·사회과학 연구소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철학과 교수 △<당대비평> 편집위원 △저서: <변증법 비판과 변증법 구도>(학위논문), <철학의 변혁을 향하여>(공저, 철학과 현실사), <이 땅에서 철학하기>(공저, 솔), <하버마스의 사상>(공저, 나남) △역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론과 실천>(종로출판사), 막스 베버의 <힌두교와 불교>(한국신학연구소), 울리히 벡의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생각의나무) 등. |
[인문학데이트] ⑦ 김상봉
`인문학 데이트' 일곱 번째 초청자는 철학자 김상봉(42)씨다. 한때 교수로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그는 지금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철학 강좌를 열고 있다. 독일에서 서양 전통철학을 전공했지만, 현재의 그에게 서양철학은 극복하고 돌파해야 할 `불구의 철학'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슬픔과 허무를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철학이 이 시대에 필요한 철학이라고 그는 말한다. 서미현(26·서울대 노문과 석사과정)씨가 그의 최근 저서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을 기초텍스트로 놓고 허심탄회하고도 열정적인 대화를 했다. 편집자
철학은 큰 귀, 슬픔향해 열린…
서미현=만나봬서 반갑습니다. 저는 전공은 러시아 문학이지만, 평소에 철학에 관한 관심이 많은 편이고, 또 제가 잠시 몸담았던 출판사에서 선생님 책을 직접 편접했던 일도 있습니다.
김=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서=선생님은 보편적 잣대를 제공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철학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철학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까?
김=보편학으로서 철학의 이념은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에도 그대로 유지됐어요. 20세기에 들어서서야 그 관념이 무너졌지요. 따라서 지금의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보편적 인식을 제공할 수 있는 철학은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어떤 시대든 이리저리 찢긴 인식들을 체계화해 보편적 세계상을 그리는 것은 불가피한 요구에요. 연구실에서의 삶과 연애할 때의 삶, 가정에서의 삶이 다 다르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죠. 인간이 다양한 장에서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한 분열된 인식들을 화해시키는 노력은 해야 하고, 그게 인문학, 그리고 철학의 사명이지요.
서=그렇다면 어떻게 보편을 찾아야 할까요. 그동안 많은 시도들이 있어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는데요.
김=지금까지 서양에서 보편을 추구하는 방법은 적극적인(포지티브한) `형상'을 공유하는 것이었어요. 그 형상이란 게 이론일 수도 있고, 이념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지요. 전지전능한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형제다, 공산주의 이념 안에서 우리는 동지다 하는 식인데, 이런 교의를 가지고 사람을 끌어모는 방식이 틀렸다는 건 역사가 보여주었어요.
서=그런 게 아니라면 어떤 방식의 보편성이 가능할까요?
김=은유로써 말한다면, 저는 낮의 밝음이 아니라 밤의 어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태양은 각자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없지만, 밤의 어둠은 사람을 무차별한 동일성 속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요. 인간 실존의 깊은 슬픔이나 허무, 고통이라는 어둠으로 사유가 돌아감으로써 보편을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부정적 보편성이라 할 수 있죠.
서=부정적 보편성이란 걸 좀더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김=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찾는 방식으론 보편성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죠. 무언가를 열심히 쌓아올려 보편적 체계를 세울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근원적으로 슬픔의 존재이고, 허무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공유지점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서=철학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합니까?
김=이제까지 철학은 높은 데서 설교를 해왔어요. 철학은 남 기죽이는 지식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우성,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을 듣고 전달하는 게 철학의 임무지요.
서=말씀을 듣다보면 선생님의 철학이 종교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저도 제 철학이 종교나 예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딴 게 아니라 위로잖아요. 인간은 위로를 필요로 하고 소망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게 종교죠. 그런데 이 종교가 철학에서 멀어지면,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유를 등지면 미신이 돼버려요. 겉으로는 위로와 소망을 준다하면서 실제로는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요. 종교가 인간의 삶과 죽음, 선과 악, 존재와 허무에 대해 답을 해주지 못할 때 철학이 그런 종교적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선생님의 철학을 `가난의 철학'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서구의 실존주의 철학과도 비슷해보입니다.
김=제 철학을 가난의 철학이라고 이름지어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실존주의는 부조리의 철학이에요. 가난한 영혼의 울림이 없고, 지식인의 분열된 자의식뿐이에요. 그들의 고통은 만들어낸 고통입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봤을 때 내 말을 대신 해주는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철학을 하고 싶습니다.
서=선생님의 글은 쉬운 편인데, 철학자들이 난해한 개념을 쓰는 건 삶이 그만큼 난제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김=저 또한 말을 쉽게 하는 게 `가난의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모범으로 삼는 문체가 플라톤인데, 그의 글은 대체로 일상어로 쓰여 있고, 또 아름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속류철학인 것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사유가 얼마나 깊으냐이지 말이 얼마나 어렵냐는 아니지요. 사유의 깊이는 곧 고통의 깊이입니다.
서=하지만 고통의 깊이가 바로 사유의 깊이를 보장해주지는 않지요.
김=맞아요. 그렇게 되는 것은 고통을 자기만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에요. 동학혁명에서부터 광주항쟁까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걸 자신의 고통을 넘어 만인의 고통으로 보지 못할 때 직접적인 분노나 회한으로만 남게 됩니다. 제 책에도 썼지만, 고통은 인간을 매마르고 천박하게도 만드는데, 우리 역사가 그랬어요. 이제는 이런 낮은 상태를 뛰어넘어 고통을 보편적인 문제롤 승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서=선생님은 `나와 그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강조하시는데, 이때의 `너'는 미하일 바흐친이나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너'를 떠올리게 합니다.
김=서구문명에서 지금까지 인간이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의 근본모델은 `나와 그것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이 방식에서는 나와 관계하는 대상이 언제나 사물화되고 대상화됩니다. 살아 있는 주체가 아니라 죽은 물건 또는 도구와 관계하는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것이 죽어 있다면 나도 사물화될 수밖에 없어요. `나와 그것 사이의 관계'는 모든 것을 사물화하는 메커니즘이에요. 타자를 `그것'이 아닌 `너'로, 살아 있는 인격적 주체로 만날 때만 이 비극적 메커니즘을 극복할 수 있어요. 나 혼자만 주체고 나머지는 대상·객체·사물이라는 인식이 바뀌어야 하지요. `홀로 주체성'을 극복하고 `서로 주체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때 철학자가 해야 할 것이 서로 주체성이 왜 근본적으로 중요한가, 왜 너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는가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일입니다. 부버나 바흐친은 그 일을 하지 못하고 당위론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서=그렇다면 `너와 나의 관계'에서 주체와 관계 중 어느 것이 먼저 있는 것입니까?
김=오래된 물음인데요, 관계가 주체에 선행하는 본질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게 헤겔 철학인데, 그때는 도리어 생동하는 주체들이 죽게 됩니다. 주체가 먼저 있는 것이죠. 나와 너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주체의 자유영역이고, 주체의 과제이지요.
서=만해 한용운과 르네 데카르트를 비교하는 책을 쓰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김=만해가 말한 `나와 임 사이의 관계'를 통해 `내가 어떻게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보려 합니다. 만해의 생각은 내가 나를 너에게 양도하고 너 속에 나를 상실할 때만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동적이고 자족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서양의 나, 데카르트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이지요. 자기 상실과 자기 보존의 변증법을 명료화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사랑은 타인 앞에서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것, 나의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이며, 그럴 때 자기 보존과 자기 성숙이 가능하다는 역설을 철학적으로 입증하고 싶습니다.
김상봉이 말하는 김상봉
아주 어렸을 적부터였던지라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날 덮칠 때마다, 어린 나는 깊은 밤 어둠 속에서 가위눌리곤 했다. 하지만 낮이 되면 무(無)는 잊혀졌다. 밝은 태양 아래 세상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 가득한 슬픔과 고통이 나로 하여금 밤의 허무를 잊게 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 괴상한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는 것, 아니 그보다는 혁명을 하는 것, 그것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그러나 밤이면 예고 없이 나를 엄습하는 그 허무의 그림자는 갈수록 커져갔고, 나는 어떤 혁명도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허무의 어둠이 나를 철학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평생을 책상머리에서 씨름하는 직업적인 학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세상에 넘치는 슬픔은 나를 더욱 자주 조용한 도서관이 아니라 바람부는 길거리에 있게 했다. 오랫동안 나는 현실의 세계나 학문의 세계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의 허무와 낮의 슬픔을 오가면서 나는 그 둘이 어쩌면 둘이 아니라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배운 철학들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진리의 빛에 대해서만 말해왔다. 그리고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 그러나 이제 진리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없음의 어둠 속에서 들리는 슬픔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더 늦기 전에?oudeis@hanmail.net
김상봉은 누구?
▲1958년 부산 출생
▲1984년 연세대 철학과 석사
▲1986년 독일 유학. 철학·그리스고전문헌학·신학을 공부하고 1992년 마인츠대학 철학박사
▲현재 김상봉 철학교실, 문예 아카데미, 철학 아카데미 등에서 강의.
▲ `학벌없는 사회' 운영위원
▲ `논지당 철학카페' 대표.
▲저서:<세 학교의 이야기>(공저)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역서:<칸트순수이성비판 입문> <소피의 세계>(감수)
[인문학데이트] ⑧ 진중권
인문학 데이트 여덟 번째 초청자는 정치·사회·문화의 다방면에서 매서운 필봉을 휘두르고 있는 논객 진중권(37)씨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공부하다 생활난(?)으로 지난해 일시 귀국한 진씨는 몇 년 전부터 우리사회의 중심부에 완강히 똬리 튼 사이비 자유주의자, 파시즘적 극우주의자들을 향해 순발력 넘치는, 혈기방장한 풍자와 비판의 글을 써왔다. 진씨의 글을 빠짐없이 읽어온 강지연(25)씨가 그의 대표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주요 소재로 삼아 유쾌한 대화의 시간을 보냈다. 편집자
우리 지식인은 하나마나한 얘기를 좋아하지요
강지연=진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핵심을 찌르는 게 시원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나만 하는 생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 생각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를 밝혀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진중권=제가 기대했던 효과를 거둔 것이군요.(웃음)
강=<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극우 파시스트들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본인의 이념은 무엇입니까?
진=사회민주주의적인 좌파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은 녹색당 쪽에 더 가까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사회정의를 제기하고 실현할 수 있는 정치그룹이 먼저 들어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강=그렇다면 <네 무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가 극우주의자를 향해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신 건가요?
진=그 책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자유주의자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사회가 공유하는 이념적 바탕이 자유민주주의잖아요. 이념과 이념을 대립시킨 것이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을 대립시킨 것이죠. 극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데 이게 얼마나 엉터리없는 허구인지를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입증해 보인 것이죠.
강=선생님의 극우파 비판은 유쾌해서 배꼽을 쥐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진=진지한 도덕적 선포는 극우파를 대상으로 한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극우주의자들은 그냥 미학적으로 비웃어주는 것이 권위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하는 중에 몸 속에 깃든 파시즘의 흔적들을 떨어내 버릴 수 있는 것이죠.
강=선생님의 글은 매우 가벼워보이지만 그 밑에는 단단한 지적 기반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극우파의 논리를 해체하는 데 적용한 방법론이 있습니까.
진=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는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저도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도 문법적 착각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자유라는 말을 봅시다. 일상적 어법에서 자유는 좋은 것인데, 이게 쓰는 사람마다 달라요. 공병호씨 같은 한국의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무제한적 영업의 자유에요. 그 자유라는 말로써 재벌을 옹호하지요. 또 극우파들이 말하는 자유의 반대말은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에요. 그래서 안정을 위해서라면 어떤 폭력도 정당화하는 것이죠. 이런 말의 오용을 드러내는 게 저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선생님의 작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도를 읽어내는 것이죠. 제가 이제껏 비판한 사람들은 특정 경향의 대변자들입니다. 그걸 표로 만들면 한국 사회 지배이데올로기의 구조가 보일 수 있습니다. 단편단편을 모아 사회의 몽타주를 그리는 것이라고 할까요.
강=그 몽타주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대상은 뭡니까?
진=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는 극우주의로만 구성되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반공주의·애국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주의 판본이 있는데,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 <한국논단> 발행인 이도형씨가 대표적입니다. 유교자본주의와 수구적 문화주의가 연대한 보수주의 판본도 있는데, 연세대 교수 함재봉씨가 그런 경우입니다. 또 다른 한켠에 시장 만능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 판본이 있는데, 최근 벤처기업가로 변신한 공병호씨가 이념적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결합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죠.
강=우익비판은 많이 하면서 대안적인 이념집단에 힘을 실어주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진=저는 진보 정당이 매우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진보정치>에도 글을 쓰고, 당원으로서 매달 2만원씩 당비도 내고 있습니다.(웃음)
강=우리나라에서는 꼬치꼬치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가볍고 내용 없다는 편견이 지식계에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진=우리 지식인들은 추상 수준이 높은 이야기 하기를 좋아해요. 추상수준이 높아지면 아무 맥락에나 적용할 수가 있고, 그럼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돼버립니다. 가령 우리 지식인들은 주사위를 던져야 할 때, 던지기는 안 하고, `주사위를 던지면 1~6 사이 어느 한 숫자가 나온다'고 말하고 끝내버려요. 던지고 들어가 `게임'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선 생산적 토론이 안 됩니다.
강=우리 사회에서 작지만 한 축을 이루는 좌파에 대한 공격도 하고 있는데 그런 비판을 하는 이유는 뭐죠?
진=좌파로서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공론의 장에 나와서는 추상적인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에서 유물론적인 원칙 아래 구체적인 발언을 해야 합니다. 가령, 요즘 논의되는 `자기 안의 파시즘', 일상의 파시즘 주장만 해도 그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입론인데, 문제는 이 일상의 파시즘을 온존시키는 것이 거시적 파시즘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극우 언론이라는 `한국적' 실상을 망각하는 것이에요. 그에 대한 견해도 없이, 좌파도 미시적 파시즘의 그물에 갇혀 있다고만 주장하면 `모든 게 내 탓이오'로 끝나버리는 일이 되고 말아요. <조선일보>에서 그런 미시파시즘을 키워주는 것은 반성하는 좌파를 `돌아온 탕아'쯤으로 보기 때문이죠. 위험하지 않으니까 글을 실어주는 겁니다. 언론이 현실의 역관계에서 얼마나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지식인들의 지적인 게으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강=<조선일보> 이야기가 나왔으니 묻고 싶은데요, 어떤 이유로 <조선일보>를 비판의 타깃으로 삼게 됐나요.
진=속이 뒤틀리니까 속편해보자고 한 것이죠. 독일 유학중에 계간 <상상> 등에 글을 썼는데 <조선일보> 비판만 하면 편집자가 잘라내는 거예요. 그 신문이 이상하게 권력화돼 있는 겁니다. 아마 한국에 있었더라면 당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조선일보>에서 책 소개해주면 잘 팔리는데 비판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맞아, 그래' 하면서 그만 뒀을지도 몰라요. 공간적 거리감이 그런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할 말 하게 해준 것 같습니다.
강=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서도 비판을 많이 해오셨는데 좀더 자세히 그 문제점을 설명해 주시면….
진=탈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주의도, 나치즘도, 유럽식 사회복지국가도, 미국식 자유주의 국가도 다 근대입니다.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양한 근대들 사이의 사소한(사실은 중대한) 차이를 둘러싼 싸움이지요. 그런데 이걸 다 근대로 몰아넣고 비판하니까 정치적으로 실천할 게 없는 것이죠. 그래서 문화로 도망가는 겁니다.
강=정치사회비평지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이기도 한데, 어떻게 끌어가고 싶습니까?
진=지배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논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이데올로기가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복제돼 힘을 키우고 현실을 역규정하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논리를 개발해나가고 싶습니다.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진중권이 말하는 진중권
읽기와 쓰기. 책을 읽으며 오르가즘을 느끼고 글을 쓰며 사정을 한다. 도색화 속의 거대한 물건이 기를 죽이듯이 어떤 저자들은 내게 무한한 열등의식을 주고, 사정 후에 때로 허탈감을 느끼듯이 책을 쓰고 그 빈약한 생식의 결과에 절망을 하기도 한다. 돈을 위해 섹스를 하는 사람이 있듯이 먹고살려고 책을 쓰는 사람도 있다. 에로 배우도 오르가즘을 느끼고 사정을 하고, 돈을 위해 책을 쓰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쓴다. 미로와 같은 `책의 세계' 속을 헤메고 다니며, 말라르메가 쓰려고 한 `세계의 책'을 사정할 궁리를 한다. 나의 세계는 책 속에 빨려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고, 그 책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씌여진다. 엄마 앞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을 뽐내는 아이처럼 그이 앞에서 철없이 재잘대고, 그이는 대견하다고 빙그레 웃는다. 전투적인 글쓰기? 그저 현실이 내 신경세포에 가한 불쾌한 자극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보복일 뿐. 제발 나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냥 좀 내버려 둬. 비트겐슈타인은 내 인식의 기초이고, 베냐민은 영감의 원천이다. 그밖에 여러 사상가의 단편들이 조각 조각 머리 속에서 들어와 별자리를 이룬다. 어린 시절 몽상의 공간 다락방에서 쓰다남은 플라모델의 부분들을 그러모아 접착제로 새로운 형상을 조립하던 버릇. 철학사를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 탈근대의 사상이 미학에 대해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것, 그리고 철학, 미학, 윤리학의 근원적 통일을 되살려 새로운 미적 에토스를 만드는 것. `학'을 하는 자는 그 몸 속에 수도승과 예술가와 과학자를 통일한다. 예술성과 합리성으로 즐겁게 제 존재를 만드는 것. `자기에의 배려.' kyoko@channeli.net
진중권은 누구?
△1963년생
△1986년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졸
△1992년 서울대 인문대학원 미학과 졸 (유리 로트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1994년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1999년 귀국
△옮긴 책:카간 <미학강의>, 가와노 히로시 <예술, 기호, 정보>
△쓴 책:<미학오디세이>1, 2(새길), <춤추는 죽음>1, 2(세종),<천천히 그림 읽기>(공저)(웅진),<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개마고원)
[인문학데이트] ⑨ 이진경
인문학 데이트 아홉 번째 초청자는 이진경(37)씨다. 이씨는 약관 25살 때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마르크스주의 원전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학생운동 조직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출감 뒤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강의와 공부를 하고 있는 그를, 같은 공간에서 강의를 한 바 있는 권보드래(31) 서울대 강사(국문학)가 만나 <수학의 몽상> 등 그의 저서들을 놓고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근대에 묶인 사람'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도 없습니다
권보드래=수유연구실에서 만난 지 1년 반쯤 됐죠? 이렇게 데이트를 겸해서 인터뷰를 해보는 건 처음이군요.
이진경=낯설게 만나면 아는 얘기도 흥미로울 수 있겠지요?
권=저서가 여러 권이던데, 사람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이=80년대 학번에겐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90년대 학번에겐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돼 있다더군요.
권=두 책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진경의 글에는 80년대와 90년대의 단절이 선명하다는 평가가 많은데요.
이=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던 80년대의 저와 `탈주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90년대의 저 사이에 단절이 있는 건 분명하지요. 하지만 80년대 운동권의 삶이란 어찌 보면 그 시대에 가장 전형적인 탈주의 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도바리친다'는 말이 일상화돼 있었는데, 이 말은 군대나 경찰 같은 국가권력과의 대결이고,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전복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연속적이라고 봅니다.
권=그렇지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에게로 옮아간 데서도 그걸 알 수 있을 듯한데요.
이=옮아갔다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접속'시킨 거라고 합시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로는 설명이 안 돼요.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 여기엔 틀림없이 근본적인 어떤 공백이 있는 겁니다. 이 공백을 메우려면,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죠. 가령 거기서 저는 경제적 생산양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생산양식'이 있다고 본 것인데, 푸코나 들뢰즈가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개념과 이론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권=그렇다면 붕괴 이전의 사회주의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생산양식 차원에서 보자면 분명히 사회주의였죠. 그러나 근대적 삶의 방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생산양식이 바뀌어도 근대인을 생산하는 주체생산양식은 바뀌지 않았던 겁니다.
권=그것이 선배님이 코뮨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려는 이유인가요?
이=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코뮨주의는 코뮨(공동체)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함께하는 삶, 그런 삶을 만드는 관계와 삶의 방식 문제를 새롭게 개념화하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같은 말의 번역어인 공산주의라는 말이 있지만, 이건 함께 생산한다는 뜻의 경제주의적 개념이어서 코뮨주의와는 다릅니다.
권=공산주의만큼 강력한 코뮨주의도 없을 것 같은데요.
이=하지만 그건 기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는 언제나 연기될 뿐, `결코 오지 않는 미래'예요. 현실의 사회주의는 코뮨주의적이라고 하기 힘들구요. 근대적 삶이 만들어낸 무의식적 습속을 바꾸지 않는 한, 그걸 바꾸기 위해 새로운 인간관계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새로운 종류의 주체는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광범위한 인간 변혁이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근대적 주체와 다른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이=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명령과 복종에 길들여진 근대적 삶을 깨나가는 삶의 방식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를 자본주의적 관계로 포섭하는 화폐 내지 가치법칙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본에 구매된 활동인 노동을 극소화하고, 자신의 생산적 능력을 확장하는 자기활동을 극대화하는 것도 그렇구요. 노동조합에서든, 당에서든, 공동체운동에서든 말입니다.
권=선배님이 말하는 그런 운동은 일상적이고 항상적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그게 어려운 건 이미 익숙한 우리 자신의 습속, 생각, 행동을 바꾸기가 힘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바꾸면 쉽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을 반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이고 집합적인 실천이 코뮨주의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거나 무슨 무슨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진보적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착각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를 빌려 말하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권=그런 코뮨주의적 실천을 `탈주'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탈주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히 이야기해주시면….
이=탈주는 도피가 아니라는 걸 먼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주는 차라리 지배체제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거부하는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이에요. 하지만 대개 기존의 지배적 체제는 그것을 가로막지요. 그래서 탈주자는 지배적인 체제와 투쟁할 수밖에 없지요.
권=최근 <수학의 몽상>이란 책을 쓰셨는데, 거기에서도 근대성과 관련한 선배님의 문제의식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어떤 것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수학입니다. 운동을 계산하는 것이 근대 과학혁명의 출발점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상이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며, 여기서 독창적 사유가 발전합니다. 그것이 수학의 강력한 힘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형식적인 틀을 씌우려는 노력 또한 공존했어요. 특히 19세기 이후 `엄밀성'이란 말은 다양한 모습의 수학들을 어떤 형식요건에 따라 가위질하는 재단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학을 가두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해요. 저는 근대 수학사를 통해서 수학의 그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권=근대 수학에 대한 비판이 모든 수학에 대한 적대는 아니란 거군요?
이=그래요. 마찬가지로 근대를 넘어서자는 뜻의 근대 비판이 근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적대는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지반에서 탄생한 요소들을 탈근대적 배치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인 거죠.
권=최근 들어 동아시아철학, 한국철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특별하다고 할 건 없는데, 먼저 우리 자신의 삶과 역사로 혁명을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지요. 우리 자신의 사유방식, 삶의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고 할 때 동양철학은 그리로 들어가기 위한 문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다른 한편, 그것은 근대적 삶과 사유에 대한 일종의 `외부'인 셈인데, 그런 만큼 근대의 외부를 사유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섭니다.
권=선배님 활동의 장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유를 통해 삶을 변경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고, 자신의 삶을 실험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적 문제의식이 필요한데, 연구공간 `너머'가 그런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율주의적 활동방식과 공동의 삶을 모색하는 실험을 여러 각도에서 모색하고 있는 셈이지요. 글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jskim21@hani.co.kr
이진경이 말하는 이진경
사회주의가 붕괴하고도 한참 지난 후 누가 그에게 “아직도 사회주의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뇨, 지금은 코뮨주의자예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함께하는 삶에 대한 꿈, 그것은 그로 하여금 대학에 입학한 이후 10년여의 시간을 `운동'의 물결 속에서 헤엄치게 했고, 그 물줄기를 따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아뿔싸! 그 강의 끝은 아득한 폭포였다. 몰락으로 귀착된 사회주의, 그것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감방에 앉아 있던 그가 대면해야 했던 역사였다. 그러나 함께 하는 삶, 상이한 것들이 공존하고 상생하는 삶에 대한 꿈마저 버릴 수야 없는 일 아닌가? 폭포를 지나면 강은 다시 흐르게 마련이고.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란 그 꿈이 한때 머물렀던 영토의 이름인 셈인데, 어쩌면 이젠 그 땅을 벗어나 새로운 땅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는 `공상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코뮨주의라는 말을, 함께 하는 삶의 이름이요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다. 그는 `횡단'이랍시고 마구잡이로 넘나들며 근대성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했던 것이나, 화폐에 대한 적개심을 이론화하려는 시도를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또한 함께 생산하는 체제로서 `공산주의'에서 코뮨주의를 떼어냈다. 코뮨이란 함께 사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요, 새로운 삶의 방식인데, 코뮨주의란 코뮨에서 나온 말이고,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오지 않는 먼 미래의 시제가 아니라, 현재성의 시제를, 하지만 지배적인 흐름에 반하는 `반시간적' 시제를 코뮨주의에 부여하며, 이를 이론화하려고 하고 있다. 나아가 코뮨주의라는 화두를 빌미로, 자신의 삶을 제약하고 있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 비판적 독해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이진경은 누구?
△1963년 서울 생
△1987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1990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논문:`일반적 위기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관한 연구')
△1998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논문:`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1999년 이후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연구 및 강의
△저서:<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 <한국사회와 변혁이론 연구>(1991),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관한 7편의 영화>(1995),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1997),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 <탈주선 위의 단상들>(1998), <수학의 몽상>(2000) 등.
[인문학데이트] ⑩ 김진호
인문학 데이트 열 번째 초청자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김진호(38) 목사다. 민중신학의 1세대인 고 안병무 선생이 창립한 한백교회 담임 목사이기도 한 김 목사는 민중신학 3세대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대 철학자들의 개념을 광범하게 수용해 민중신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그는 “올바른 세상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문을 닫는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뭇 `과격한' 주장을 펴는 예외적인 기독교인이다. 인천의 고등학교 윤리교사이자 한백교회를 다니는 김미정(28)씨가 나와 김 목사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편집자
세상 위해서라면 교회문 닫을 수도
김미정=목사님과는 한백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토론을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대화도 평소에 하던 이야기의 연장이 될 것 같은데요.
김진호=같은 교회 식구라고는 하지만 김미정 선생은 교회 안에서 저의 가장 강력한 논적 아닙니까? 부드러운 대화가 되면 좋겠습니다.
미=먼저 비교적 최근에 펴낸 책 두 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예수 르네상스>와 <예수 역사학>을 소개해 주신다면….
진=두 책은 연작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예수 르네상스>는 최근의 예수 연구에 관한 북미 학자들의 글을 번역한 것이 주내용이고요, <예수 역사학>은 <예수 르네상스>의 내용을 민중신학의 눈으로 평가해보려고 기획한 것입니다.
미=실존했던 예수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하고 조명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박정희가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평가가 극단으로 엇갈리잖습니까?
진=성서에서 예수라는 분은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으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실천행위는 독백하듯이 혼자 한 게 아니고, 참여자와 방관자와 적대자들과 얽힌 상태에서 한 것입니다. 그 얽힘이 예수 이야기로 남아 있는 것이죠. 또 전승자들은 그분의 이야기를 단지 암송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대와 욕망과 관심을 담아 전달한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연구의 단위는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 사건이 돼야 합니다. 사건의 관점에서 예수에 관한 역사적 물음을 해야 하는 것이죠.
미=그렇다면 예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진=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권력 해체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 예수의 실천이었던 것이죠. 최근 예수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점을, 그러니까 그분이 동시대 권력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싸웠던가를 많이 밝혀 냈습니다. 그 동안 민중신학자들이 제기했던 것을 증명하고 보충한 셈이지요.
미=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권력해체를 거대권력뿐만 아니라 작은 권력, 우리 내부의 권력에까지 적용하는데, 거대 권력 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이야기하는 건 전선을 흐리게 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박정희 이후 한국의 산업화가 압축 성장의 표본인데, 사회변혁마저도 압축적으로 해야 한다면 그건 압축 성장만큼이나 폐해가 날 수도 있습니다. 거대 권력에 대한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 내부의 문제들을 동시에 성찰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미=목사님의 권력이해에 대해 더 묻고 싶은데요, 현대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진=푸코에게서 배운 점이 많습니다. 가령, 권력이란 사회 안에 그물처럼 펼쳐져 있고 우리 자신이 거기에 수동적으로 걸려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그물을 손질하고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통찰을 들 수 있습니다. 작은 권력이나마 그 권력을 행사하고픈 욕망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저는 그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욕망을 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질 들뢰즈는 유목민이라 했고,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표류자라고 했는데, 저는 순례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만큼이나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의 모습이 곧 순례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그렇다면 그런 현대철학을 통해 권력해체자로서 예수의 모습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진=예수를 보는 다른 관점은 푸코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기독교의 거의 유일한 제도적 실체인데 이게 예수의 참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면이 많았어요. 사실, 회복불능할 정도로 가렸죠. 제 경우, 교회의 눈에서 벗어나 예수를 다시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현대철학자들에게서 교회를 넘어 예수를 볼 수 있는 눈을 길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역사학>의 원제가 `예수로 예수 넘어서기'였는데, 후자의 예수가 교회가 강요한 예수라고 한다면, 전자의 예수는 여러 사상가·실천가들의 눈으로 보면서 다시 포착한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미=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자기중심성 해체, 배타성 해체는 목사님이 자주 강조하시는 부분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교회만큼 배타적인 곳도 없지 않습니까?
진=그렇습니다. 교회의 자기중심주의나 배타성은 거의 극복 못할 정도예요. 저는 제가 교회의 담임목사 처지에 있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내야 한다고 봅니다. 목사는 교회를 살리고 성장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망하게 하고 문 닫게 하는 사람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죽여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이 그것인 것 같습니다.
미=그렇군요. 이야기를 바꿔서 목사님의 정신적 젓줄이라 할 민중신학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목사님은 안병무·서남동 같은 분들이 창안한 민중신학의 3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세대의 특징은 뭔가요?
진=80년대의 민중신학이 정치경제학적인 경향이 강했다면, 90년대 3세대의 민중신학은 문화정치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정치체제가 거대한 영역에서 인간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삶의 작은 영역, 일상생활에까지도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그래서 문화의 문제가 정치경제적인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미=라틴아메리카에서 발원한 해방신학과 우리의 민중신학은 어떻게 다른 겁니까?
진=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억압체제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매우 신학적인 반면, 민중신학은 신학해체적이고 탈신학적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달리 말하면,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 곧 구원, 교회, 메시아 등의 개념들을 해방사상과 정교하게 연결시켰는데, 민중신학은 이런 신학적 전제들을 기반부터 뒤흔들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방신학자라면 메시아가 민중을 구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와 달리 민중신학자는 고난받는 민중의 얼굴에서 예수를 발견한다고 말하고, 예수를 민중이 구원한다고 말하고, 결과적으로 예수와 민중이 함께 구원사건을 일으킨다고 말하겠죠.
미=교회를 비판하는 목사님 말씀을 듣다보면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진=제가 한국사회의 나쁜 면을 혐오하고 남성중심주의의 모습을 싫어한다고 해도 한국인으로서, 남자로서 제 정체성은 그대로이듯이, 그리스도교로서, 목사로서 정체성도 그대로입니다.
미=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참된 신앙과 참된 실천은 무엇일까요?
진=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존재하는 권력 질서에 순종하지 않으면 당장 보복이 오는 그런 세상에서 거기에 타협하지 않고 사는 것이 저한테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종착지가 어디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매번 실패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순례자이고 싶습니다.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bong9@hani.co.kr
김진호가 말하는 김진호
뭘 공부하는지도 모르고 대학엘 들어갔고, 아는 것 없이 졸업했다.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준 신문광고 쪽지 하나 든 채 신학대학원엘 지원했고,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려 민중신학에 입문했다. 그때 그땐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충 얼치기로 살아온 인생이다.
민중신학에 입문한 지 이제 햇수로 15년쯤 됐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 학문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민중신학자의 길은 이래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은 자신에게 기고만장한 자만심이 더 컸다. 그렇지만 세월은 이런 불순한 생각을 연단시키는 훌륭한 대장장이다. 적어도 지금은 왜 이 길을 가는지를 알게 됐고, 어떤 자세로 가야하는지도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를 목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교회를 지키는 목사가 아니라, 교회를 공격하는 목사요, 교회를 변증하는 신학을 저주하는 목사다. 생존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교회가 존속하는 한, 민중신학 연구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나의 길은 그러하다. 한데, 그런 내가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란다. 소신껏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나름대로 그런 주장을 자제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신념과 직업간의 괴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런 갈팡질팡하는 얼치기 목사/신학자의 동요가 얼마의 세월 동안 더 다듬어져야 해소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남들 잠 오는 시간이 되면 눈이 말똥해진다. 아프다가도 몸 상태가 말끔해진다. 그리고 남들이 깨어나서 일을 막 시작하려 할 때쯤 되면, 소리도 잘 안 들리고 말도 버벅거린다. 그래서 자칭 타칭 올빼미다. 기나긴 밤을 지새며, 마구 써댄 원고가 제법 많다. 하지만 누구 말에 따르면, 읽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매번 책을 내려할 때마다 시혜를 베풀어줄 출판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내게 닥친 또 하나의 유혹은 신념을 상업주의에 팔아넘기려는 얼치기 글쟁이를 향한 동경이다. 이런 유혹에 빠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정말 내가 제도권 진입의 욕망에서 자유로운가,라고. http://theology.co.kr/jinho
김진호는 누구?
△1962년 서울 생.
△1985년 서강대 수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석사).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역임.
△현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실장.
△현 한백교회 담임 목사.
△현 <진보평론> 편집위원.
△저서: <함께 읽는 구약성서>(공저, 1991) <함께 읽는 신약성서>(공저, 1992)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예수운동의 혁명성 연구>(1992) <예수 역사학―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2000)
△편저:<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1996)
△역서:<열왕기> 상·하권 국제성서주석(1992 )
[인문학데이트] ⑪조 국
인문학 데이트 열한 번째 초청자는 조국(35) 동국대 교수다. 조 교수는 꽤 이른 나이인 27살 때 울산대 전임강사로 대학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전공 분야는 형사법·인권법이다. 형사 피의자 및 피고인의 인권 침해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취약 지점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의 반헌법적 성격을 폭로하는 글을 많이 써왔으며 현재는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 교수와 사제지간인 이선영(24·동국대 대학원 법학과)씨가 그와 만나 우리나라 사법 현실에 관해 장시간 대화했다.
이선영=선생님과는 세미나에서 여러 번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일반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보는 게 좋겠습니다.
조국=좋습니다.
이=제 전공이 형사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으아, 무섭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사실 형사법이란 게 범죄자에게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법이기도 한데 왜 무섭다는 생각부터 할까요?
조=권위주의 체제가 수십년 동안 지속되면서 시민들이 법이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법 때문에 구속당하고 고통받고 하는 것만 겪었으니까요. 본디 법이란 게 시민의 자유와 재산과 명예를 보호해주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권위주의 체제 때문에 법에 대한 이미지가 정반대로 돼버린 것이죠.
이=사람들이 법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그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은 탓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그렇죠.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동시에 바뀌는 것은 아니죠. 운용하는 사람이 권위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않으면 민주주의 법이라 해도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법부의 권위주의가 그런 것인데, 법은 민주화됐지만 법관들은 여전히 옛날의 `영감'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에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이죠.
이=교수님이 형법을 공부하게 된 동기가 뭔지, 왜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조=대학 다닐 땐 법의 이름으로 국가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법을 공부할 의욕이 없었어요. 그런데, 대학 졸업 뒤 뭘 할까 고민하던 중에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어요. 그 사람 제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그 때문에 충격이 더 컸죠. 박종철군은 당시 피의자도 아니고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고문당해 죽은 것인데,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 무렵, 1960년대 미란다 원칙을 비롯한 형사절차 혁명을 주도한 미국의 얼 워런 대법관을 알게 됐어요. 그의 판결을 통해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이 혁명적으로 신장됐는데, 그걸 알고서 형사절차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이=교수님 논문 중에 `헌법적 형사법·형사소송'이 있는데, 헌법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을 듯한데요.
조=형사법은 사람의 생명·신체·재산을 박탈·제한할 수 있는 법인데 국가에 엄청난 힘을 준 것이죠. 따라서 국가가 그런 형벌권을 운용할 때는 헌법정신에 따라야 합니다. 권위주의 시대에 우리의 형사절차는 경제개발과 마찬가지로 `속도전'이었습니다. 효율이 최고였던 것이죠. 범인을 빨리 잡으려면 위법도 불사한다는 것이었는데, 범인 체포가 늦어지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 헌법적 원칙입니다.
이=그런데 절차를 강조하다가 절차상 잘못 때문에 피의자를 처벌하지 못한다면 피해자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잖습니까?
조=고전적 논점 중의 하나인데요. 제가 피의자 인권을 강조한 것은 우리나라 수사기관의 관행이 범인처벌주의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이 법인을 잡기 위해서도 수단과 절차를 잘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대에 엄청난 오판 사건이 많았잖아요.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끌어냈는데, 결과적으로 진짜 범인은 안 잡히는 것이죠. 또 이렇게 절차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죄없는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박종철 사건도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살인범에게 무슨 인권이 필요하냐 하지만 절차를 밟아야 살인범을 잡을 수 있고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게 됩니다. 절차를 지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건 민주사회가 감당해야 할 필수적 비용입니다.
이=교도소 시설을 개선하는 데 대해 반감을 느끼는 것도 범죄인에겐 인권이 필요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조=그렇습니다. `요즘 감옥 시설이 좋아졌다더라, 감옥이 좋아지니까 나와서 또 죄를 저지른다'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먼저 일반인이 언제라도 범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인권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감옥이 개선돼야 하는 것이죠. 또 중요한 것이 교도 행정입니다. 이름은 교도소인데, 실제로 교도하는 데 투자를 제대로 안 합니다. 우리나라 교도소는 교도소가 아니라, 범죄인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역할만 하는 감옥입니다. 재범률을 낮추려면 교도소 안에서 재활 프로그램에 따라 사회복귀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것이죠. 죽도록 고생해서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만 생각하니까, `무슨 신문이고 텔레비전이고 교육이고 컴퓨터냐' 하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이=미국에서도 공부하셨는데, 그쪽의 법정과 우리 법정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조=가장 눈에 띄는 차이가 피의자의 수의 착용 여부일 겁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1심 판결 이전까지는 피의자가 사복을 입습니다. 확정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헌법상의 원칙에 따른 것인데, 객관적 시각을 유지해야 할 판사들이 수의를 입은 사람을 보면 범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차이가 우리 법정의 배치인데요, 피고인이 변호사와 떨어져 앉는 현재의 배치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변호인이 피의자 옆에 앉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다 그렇게 하고 있죠.
이=교수님께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글도 여러 편 썼는데,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보안법이 제정된 게 1948년인데, 그때는 국제적으로는 철저한 냉전 상황이었고 국내적으로는 항상적 무장반란이 계속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가지가 다 없어졌습니다. 보안법 조항이 필요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법 조항의 모호성입니다. 보안법이 즐겨 사용하는 찬양·고무·동조·사회혼란·이적 등등의 용어들은 너무 모호한 개념들이어서 형법상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는 것들입니다. 그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시민의 사상이나 활동에 대해 이것이 적을 이롭게 하는지 안 하는지, 고무·찬양 하는지 안 하는지 같은 판단을 냉전적 사고에 찌든 공안당국이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 때문에 엄청난 인권침해가 발생했던 것이죠. 민주주의 형법에서 핵심은 사상만으로는 그것이 비록 위험하다 할지라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안법은 이런 민주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교수님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을 위해서도 노력을 하고 있는데, 정부와 인권단체 간에 생각이 달라 진척이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법무부는 민간법인으로 하자고 하고 인권단체는 국가기구로 하자고 하는데, 법무부 말대로 민간법인으로 하게 되면, 그것의 관리·감독청이 있어야 하고 자연히 법무부가 그 지위를 맡게 됩니다. 인권위원회는 국가기관, 곧 경찰이나 검찰 등이 저지르는 인권침해를 막자는 것인데, 그 기구가 법무부의 관장 아래 있다면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인권단체의 주장입니다. 저는 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국가기구로서 독립성도 보장되고, 정부조직법만 고치면 되니까 번잡함도 줄일 수 있습니다. 글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yws@hani.co.kr
조국은 누구?
△1965년 부산 출생
△198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198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
△199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법과대학원 석사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법과대학원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
△저서 및 논문:<실천법학 입문>(1991), <사상의 자유>(1992), `압수·수색 및 경찰신문에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의 배제'(박사학위논문·1997), `미란다 규칙의 실천적 함의에 관한 소고'(1998), `특별검사제 도입에 관한 일고'(1999년)
조국이 말하는 조국
나는 마르크스에 공감, 푸코에 전율했다
헌법이 휴지조각 또는 장식적 허언(虛言)에 불과했고 형사법은 강압적 통치의 도구에 불과했던 시절, `육법당'(陸法黨)의 일원은 결코 되지 않겠다 결심하면서 법학 책보다는 다른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데 몰두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법과 법학에서 사회진보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며 회의에 빠져 있던 나를 건져 올린 것은 평민의 입장에 서 인도주의 형사법의 기초를 놓은 베카리아의 저작과 `형사절차혁명'을 통해 형사피의자·피고인과 수인(囚人)의 권리를 획기적으로 신장시킨 미국 워런 연방대법원 판사의 판결이었다.
대학원 시절 형식적 평등 속에 실질적 불평등을 감추고 있는 근대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 공감하고, 합리성이란 이름 아래 인간의 정신과 몸에 대한 지배를 도모하는 근대법에 대한 푸코의 해부에 전율하고,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재단하고 폄하(貶下)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이드의 일갈(一喝)을 가슴에 간직하며 학문에 임했다. 틈틈이 병행했던 `노동야학'에서 학자로 사는 데 필요할 `긴 호흡'을 배웠다.
젊은 나이에 과분하게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선 뒤,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을 꿈꾸면서도 `민주화' 이후 사회세력 간의 분쟁이 법적 분쟁으로 바뀌는 것에 주목하며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한 법적 논리 개발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의 형사사법이 범죄통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헌법정신에 따라 절차를 지키고 형사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며 운영되길 희망하며 `헌법적 형사법학'의 이론을 구축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꿈꾸었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소중한 성과를 제도화하는 것, 그리고 이 제도를 운영할 사람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사회활동에 임하고 있다. kukcho@dgu.ac.kr
[인문학데이트] ⑫고정갑희
인문학데이트 열두번째 초청자는 고정갑희(46) 교수다. 고정 교수는 영문학을 연구하다 페미니즘(여성주의) 문제에 눈을 돌려 지금은 페미니즘을 이론적·실천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민족이나 계급문제보다 여성문제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관점은 `급진적'이지만, 동시에 계급·자본·국가 등과 여성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찾는다는 점에서 그의 관점은 급진페미니즘과 다른 면이 있다. 그의 강의를 들어온 이현(25·한국외국어대 스칸디나비어과)씨가 고정 씨가 펴내온 반년간지 <여/성이론> 등을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이 현=선생님과 `데이트'라니 쑥스럽네요.
고정갑희=내가 이현씨를 데이트 상대자로 요청한 건데, 여자와 남자가 짝이 돼야 한다는 게 사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남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어떻습니까? 하지만 이왕 만났으니 즐거운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이=좋습니다. 페미니즘의 명제 가운데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게 있는데,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거라고 봅니다. 영문학에서 출발해 여성주의 문제로 눈을 돌리셨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고정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들라면 한도 없이 많을 거예요. 네 번째 딸을 낳고 돌아누운 어머니의 삶이라든지, 딸은 착해야 한다, 여자는 똑똑해봐야 시집가면 그만이다 하는 학창시절의 이야기들, 여성으로서 겪는 고통스러운 일들에 화가 났지요. 그런 것들이 문제의식의 바탕이 됐을 거구요, 제가 공부했던 영문학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다면, 문학이론이 모두 남성의 시선에 지배받고 있어서 여성을 있는 그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는 걸 들 수 있겠군요. 이런 문제들로 내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을 때, 페미니즘이 나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는 데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도 했구요.
이=유학생활 중에 페미니즘을 알게 됐다고 들었는데, 그런 계기를 만들어준 문학작품은 없습니까?
고정=특별히 하나의 작품을 들기는 어렵구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인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를 통해서 페미니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고 할까요. 메리 셸리는 영국 낭만주의 6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퍼시 셸리의 아내였는데, 이때까지 메리에 관한 문학담론에서는 이 여자가 남편 퍼시의 보조자로서만 등장했어요. 메리는 <프랑켄슈타인> <최후의 인간> 같은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이지만, 그의 삶은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문학사에서 사라져요. 남편보다 30년 더 오래 살았고 작품활동을 계속했는데도 말이죠.
이=메리 셸리의 문학 속에서 남다른 무엇을 발견하셨던건가요?
고정=메리가 쓴 작품들에는 기괴하고 음울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최후의 인간>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지요. 저는 이것을 남성지배의 상황에서 고통받는 여성이 뿜어내는 분노로 읽었습니다. 메리를 통해서 영국 낭만주의를 삐딱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여/성이론> 창간호에서 선생님은 여성주체와는 다른 여성주의적 주체를 제시하셨는데요, 그런 개념들을 내놓은 이유가 있을 텐데….
고정=여성 주체라는 건 여성으로서 주어진 정체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주체입니다. `넌 여자야'라고 사회에서 얘기할 때, `그래, 난 여자야'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여성 주체죠. 반면 여성주의적 주체는 페미니스트적 주체, 여성주의자로서 의식화된 주체입니다. 굳이 이 둘을 나눈 것은 여성 주체가 곧바로 여성주의적 주체는 아니라는 것, 또 여성 주체에서 여성주의적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그렇다면 그런 여성주의적 주체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습니까?
고정=의식화된 여성주의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여성이 어떻게 여성으로 만들어지는가를 봐야 하는데, 그래서 먼저 관심을 갖게 된게 문화라는 장이었다. 문화가 여성을 형성하는 공간이니까요. 저는 여기서 `성장치'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요, 사람을 기존 체제에 통합시키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장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개념입니다. 성장치는 여러 차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족, 육체, 시장, 학교, 미디어, 국가, 서사구조 등등에서 성장치가 발견되는 것이죠. 가령 육체는 `여성적인 태도'를 담는 그릇이구요, 서사구조는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남녀가 갈등을 겪다가 결혼으로 들어가는 해피엔딩이라는 천편일률적 구조에서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는 성장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치를 깨나가는 것이 여성을 여성주의적 주체로 만드는 이론적·실천적 작업이 되겠습니다.
이=선생님은 `성계급'이라는 개념도 내놓으셨는데,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고정=성계급에 대해 쓸 때 부르디외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징자본이니 문화자본이니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르디외가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에 문화를 끌어들였다면 저는 계급에 성을 끌어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에 버금가는 성계급을 내놓은 것이죠. 태토에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성/남성이라는 성계급이 형성돼 노동분업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계급의 패러다임을 다시 구성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내놓은 개념입니다.
이=흔히 페미니즘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그 내부를 보면 갈래가 다양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이론은 어느 쪽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정=정신분석학, 생태학, 탈식민주의 등등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이 많이 있는데, 저는 성을 계급보다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지만, 70년대 미국에서 발흥했던 급진적 페미니즘이 포착하지 못했던 민족·국가·자본 등을 페미니즘의 논의 안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이제까지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 시각을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페미니즘의 한 지류에서는 모성이나 여성성을 높이 사기도 하는데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정=기본적으로 나는 지금의 가부장제가 여성을 이상화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모성에 대한 강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모성을 강조해 여성성과 모성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여자는 누구나 모성을 `자연적'으로,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는 생각은 남성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 기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어떻게 활용되는가가 문제인 것이죠.
이=이리가라이 같은 학자는 남성적 글쓰기에 대항해 `여성적 글쓰기'를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고정=여성적 글쓰기는 여성의 몸을 통해 사유하는 글쓰기를 말합니다. 남근적 글쓰기와는 다른, 여성의 성적 차이를 상징하는 모유라든가 여성의 성감대를 를쓰기의 상징으로 삼아보겠다는 의도가 깔린 시도인데요, 여성의 몸이 담고 있는 역사나 체험에 의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형식과 내용이 기존의 글쓰기와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적 가치나 여성적 측면들을 긍정적으로만 보게 되는 위험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남성이 여성주의적 주체로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저는 꽤 노력하고 있는 편인데요.
고정=여성주의적 주체는 일단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도 스스로 남성으로 길러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여성주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당히 어렵겠지만요.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고정갑희는 누구?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서강대 영문과 졸업
△1977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 석사
△1983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1 미국 뉴욕대 영문학 박사
△1992~94년 영미문학 페미니즘 학회 연구이사
△현재 한신대 영문과 교수, 여성문화이론 연구소 소장, <여/성이론> 편집인 및 발행인, <열린지성> 편집기획위원,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
△저서 및 역서:<19세기 자연과학과 자연관>(공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공역), <영문학 연구와 교육의 문제들>(공저) 등.
고정갑희가 말하는 고정갑희
한 때 내가 누구인지 몰라 실종된 나를 찾아나선 적이 있다. 찾아나선 길에서 나는 내가 실종되었다기 보다 타인들이 나라고 하는 `나'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실종되었다고 생각된 `나'의 저변에 내가 타인들에게 여자로 인식되어왔으며 나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해 온 시간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으로 한 여자에서 한 여성주의자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상의 남성들과의 관계와 그들의 시선에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주눅들어 있었던 상태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97년 여성문화이론연구소를 세우는 과정에서 주축이 되고, 그 후 소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연구소를 책임지는 한 사람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여성연구자들과 여성활동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자들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과 관계를 꿈꾸는 자는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남자들의 권력과 시선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또 걸릴 것인가. 교수가 되어 경제력과 사회적 위치가 보장된 후 갖게된 이 개인적 자유는 남성중심체제라는 거대한 권력체계 앞에서 또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남북한 관계를 두고도 여성은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만 등장한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사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론사 사장도 거의 모두 남자들, 두 정상도 남자, 보도 기자들도 남자들….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자유롭지 않은데 나는 자유롭다 하겠는가.
이제 `나'는 내가 얻게된 상대적 자유를 바탕으로 여성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거듭 거듭 태어나며, 이 세상의 여자들의 세포 하나 하나가 자유롭게 될 그 날을 위한 초석을 다져나가고자 한다.
[인문학데이트] 광해군은 최선을 다하려 한 사람
`인문학 데이트' 열세번째 초청자는 한명기(38)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이다. `선조 후반~인조대 초반 대명관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연구원은 얼마 전, 비운의 군주를 내세워 17세기 초반 조선 정치를 조명한 <광해군>을 펴낸 바 있다. 학자적 엄격성과 문체의 유려함이 조화를 이룬 이 교양서에서 그는 `폐주' `혼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을 외교전략가의 관점에서 새롭게 서술함으로써 4강이 각축하는 오늘 한반도의 정세를 이해할 실마리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장지연(26)씨가 <광해군> 등을 놓고 우리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주고받았다.[편집자]
장지연=안녕하세요. 저는 전공이 고려말조선초의 도시사여서 선배님의 전공 분야는 잘 모르거든요.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명기=장지연씨는 학부 때 광해군대의 궁궐에 관한 논문을 써서 학회지에 실리기도 했잖아요. 나야말로 초보 연구자라서 이 자리가 쑥스럽네요.
장=최근 쓰신 책이 <광해군>이니까 그걸 화제로 삼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용 위인전이면 모를까 인물을 전면에 등장시킨 역사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광해군을 주제로 잡은 것이 의외였습니다.
한=88년도에 석사 논문 쓸 때 주제가 광해군대 정치사였습니다. 그때로부터 10여년 지나고 보니까, 나름대로 광해군 상이 그려졌고, 그래서 써볼 용기가 났지요. 또 요즘은 1등이 아니면, 승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외치는 1등주의가 판치고 있는데,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패자예요. 하지만 그는 17세기 초반 명청 교체기에 집권자로서 최선을 다하려 한 사람입니다. 요즘의 조류에 역행해서 그런 인물을 부각시켜보고 싶었습니다. 또 인물을 통해 시대를 보는 게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효용가치를 지닌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군요.
장=16세기말~17세기초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격변기였습니다. 광해군이라는 인물은 이 역사적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나요.
한=<임진왜란과 한중관계>는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낸 것인데, 여기서 제가 관심 가졌던 것은 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한반도 참전이 이후 조선의 역사와 대외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였습니다. 전쟁이란 것이 졌나 이겼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나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인간의 삶과 생각을 바꿔 놓는다고 할 때 그 대표적인 인물이 광해군입니다. 임진왜란이 조선 후기 사회에 남긴 영향, 그 중에서도 명군이 남긴 영향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광해군인 것이죠.
장=임진왜란과 명나라 군대가 남긴 영향이라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한=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은 한국전쟁 때의 미군 참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먼저 전황 자체만 놓고 보면, 명군 참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측면이 있습니다. 미군 참전으로 한국전 상황이 반전된 것처럼요. 그런데 세상엔 공짜라는 게 없습니다. 명군이 들어온 순간부터 조선군 작전권은 명군에게 넘어갔습니다. 또 조선 국왕의 인사권이나 전쟁결정권도 명나라쪽으로 넘어갔어요.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은 명의 참전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명분으로는 조선을 돕는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자기나라 안보를 위해 남의 땅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었어요.
장=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도 명의 참전에 따라 변화했겠군요.
=그렇습니다. 명은 조선의 의지나 입장과는 다르게 자기들의 상황 변화에 맞춰 전쟁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명군이 일본군을 격파하다가 벽제에서 한 번 패하니까 전쟁을 포기해버리는데, 굳이 일본군과 목숨 걸고 싸울 것 없이 잘 달래서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조선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방해하는 일까지 생겼어요. 또 전쟁은 안하고 주저 앉아 있으니까 생기는 게 민폐에요. 살인 약탈 강간 식량징발이 횡행하는 거죠. 당연히 민폐를 직접 당하는 일반 민중이 명군을 좋게 볼 리 없죠.
장=그런 전쟁상황에서 광해군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현장에서 싸웠죠.
한=그랬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는 명의 실체를 깨달았습니다. 광해군이 집권 뒤 친명 일변도의 정책을 버리고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한 것은 이런 전쟁체험에 영향받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장=광해군의 퍼스낼리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재위 기간중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경연(왕과 신하가 모여 학문을 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한 번도 안하고, 대신에 풍수 술사들을 불러들였다고 돼 있는데요. 또 결정을 내릴 때 미적거리는 것을 보면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신하들의 생각을 마구 비판할 때는 이렇게 똑똑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한=타당성 있는 말입니다. 광해군은 정비의 소생이 아니라 첩의 소생이고 게다가 둘째 아들이었어요. 정상적 상황이라면 왕이 될 가능성이 전무했죠. 왜란을 맞아 신하들의 추천과 선조의 지명을 받아 세자로 책봉된 건데요, 그런 핸디캡이 있다보니 소심해지고 우유부단해진 면이 있어요. 한편으로 그는 전쟁을 일선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역대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전쟁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로 외세의 본질을 명확히 꿰뚫어봤고, 그래서 대외관계에서는 결단력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실록을 보면, 강화도를 최후의 저항 거점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분분하던 때에 광해군이 신하들한테 일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계획을 세우면 1~2년 준비하는 척하다가 흐지부지해버리는 경우가 많고 끝까지 추진하는 게 없다고 호통치거든요. 요즘 상황과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맞습니다. 광해군을 내치고 들어선 인조 정권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도망가는 데 급급했습니다. 우리는 무력이 약하니까 후금의 상대가 안 된다는 패배의식이 가득했어요. 일부 신료들이 `우리가 화포만 잘 활용하면 후금의 기마병과 겨뤄볼 만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인조는 지레 겁먹고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광해군은 명이나 후금에 굴종하지 않고 양자를 구스르고 얼러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화포를 개량하거나 군사력을 기르고, 끊임없이 주변국가에 첩자를 보내 정보를 캐고, 원수인 일본에까지 사신을 보내 일제 장검 수입을 타진하면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착실히 준비를 해갔습니다. 긴 안목으로 전략적 사고를 했던 것이죠.
장=역사에 가정이 필요하다면 현재를 돌아보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광해군>을 흥미롭게 읽은 것도 과거의 문제를 현재로 돌려 적용하는 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김대중 정권은 광해군 시대를 통해 배울 점이 있다고 봅니다. 남북정상회담은 열강끼리 흥정대상이었던 한반도 통일 문제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켰는데, 커다란 성과죠. 문제는 내치의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치가 외교의 성과를 잠식해 유야무야될 우려가 있습니다.
장=역사 연구자로서 요즘 저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가령 대중음악이나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즐거움을 주는데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라는 사람들은 어떤 유효성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이죠.
한=역사는 긴 시간을 다루는 것인데, 변화가 빠른 시대에 호흡이 긴 생각은 환영받기 어렵죠. 하지만 한 세대가 공통으로 경험한 것을 역사라고 할 때, 그걸 후대에 알려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기르려면 전략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인문학은 그런 점에서 필수 학문입니다. 최근 `경영 마인드'를 강조하는 분이 교육부장관이 됐다가 물러났는데, 대학도 돈 되는 것만 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아닌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서는 전략적 사고를 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습니다.
[인문학데이트] ⑭ 권성우
우리사회는 논쟁이 부족해서 문제
`인문학 데이트' 열네 번째 초청자는 문학평론가 권성우(37) 교수다. 권 교수는 1980년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일군의 비평가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비평가로 꼽을 만하다. 그는 특히, 최근 문학계 안팍을 뜨겁게 달군 `문학권력 논쟁'을 주도함으로써 90년대 이래 다소 긴장이 풀어졌던 문학계에 반성적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의 대학 후배인 김윤정(31·서울대 강사)씨가 비평 또는 비판의 기능을 둘러싸고 진지하게 대화했다. 편집자
김윤정=평론집 <비평의 매혹>이나 연구서 <모더니티와 타자의 현상학> 등의 글을 통해, 독자로서, 또 후배 연구자로서 만나왔는데 오랜만에 직접 얼굴을 대하게 됐네요.
권성우=집과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게 제 일상이고, 그래서 후배 만나는 일도 별로 없는데, 이런 기회에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김=국문학 연구자보다는 평론가로 더 알려져 있으니 먼저 비평 이야기부터 할까요. 일반 독자들은 비평 하면, 딱딱하고 추상적이고 현학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비평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권=저는 비평을 타인의 글쓰기와의 만남을 통해 소중한 `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글에 매혹되면 `비평의 매혹'이 나올 것이고, 타인의 글쓰기와의 거리가 일종의 논쟁으로 형성되면 비판적 글쓰기가 되겠죠. 요컨대, 매혹과 비판이야말로 제 비평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하겠습니다.
김=90년대 이후 문학계의 논쟁에 참 많이 참여하셨는데, 대표적인 경우로 90년 불거진 김영현 논쟁, 그리고 올 봄과 여름을 달군 문학권력 논쟁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의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권=어찌 하다 보니, 여러 가지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비평가로서의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다른 분들은 암묵적으로 지나치는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문제의식을 가지다 보니, 논쟁을 지속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학권력 논쟁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요새는 이왕 벌인 논쟁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전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김=그 논쟁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든 생각인데, 우리나라는 아직 논쟁 문화가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쟁을 하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한데요.
권=몇 차례 논쟁을 하다 보니까 제 자신이 실존적으로 해체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고, 고독감도 밀려왔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평적으로 저를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과정이 제가 참여했던 일련의 논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실존이 해체되는 듯한 느낌이란 무슨 뜻입니까?
권=우리 사회에서 대화는 열린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이를테면,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 당사자와 인간적으로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과연 내가 옳은 입장인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논쟁을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논쟁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접근하더라도 타인의 비판으로 상처를 받게 되고 저 또한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런 부분을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때로는 아득한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김=논쟁이나 비판은 학문정신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학자는 논쟁과 비판을 통해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렇지만 우리 현실은 일단 논쟁을 회피하고 보자는 쪽 아닌가요?
권=우리 사회가 논쟁을 공적인 차원에서 펴나가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탓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학자라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논쟁의 공적인 맥락을 스스로 체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런 점들을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선배의 글쓰기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비평의 매혹'에서 `비판적 글쓰기'로 옮겨가게 되는데요, 그 이행의 계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권=94년 창간된 계간지 <리뷰>에 문학 에세이를 연재했는데요, 창간호의 주제가 전복적 상상력, 비판적 상상력이었어요. 저도 그 대의에 찬동하면서 이제는 비판적 글쓰기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비판이라는 지적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비평가의 자율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더군요. 이해관계를 떠나 비평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면 소신 있는 비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 무렵부터 우리 문학계에 상업주의화가 팽배해졌고, 문학집단의 분파주의화가 심해졌습니다. 이런 사정이 제가 매혹에서 비판으로 옮아가게 된 계기가 아닌가 합니다.
권=비판적 글쓰기가 지닌 전복적 성격은 의미가 크기는 하지만 나름의 한계도 있지 않습니까?
김=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령, 강준만·김정란·진중권 이런 분들이 거둔 비판적 글쓰기의 성과는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런 글쓰기가 지닐 수 있는 한계, 이를테면 사안의 복합성·중첩성에 대해 면밀한 분석이 부족한 점 등에 대해서는 냉철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비판적 글쓰기의 맥락과 대의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없이 진행되는, 비판적 글쓰기에 대한 성의 없는 반비판들도 문제입니다. 최근에 이진우씨의 `사이버 시대 실명 비판의 역기능'을 읽으면서 그런 아쉬움이 들더군요. 비판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진지한 자기 성찰로 이끄는 제대로 된 비판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에 대해 말하자면, 소신 있는 비판과 활발한 논쟁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비판과 토론이 과잉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치열한 현장 비평을 하는 한편,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데도 열심이신데, 서로 다른 영역이어서 균형감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권=저는 이 두 작업을 서로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하려 합니다. 그래서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현재의 중요한 사안이나 쟁점과 대화할 수 있는 학문을 추구합니다. 그런 자세로 1920~30년대 비평가들의 `타자성'을 탐구해보았고, 현재는 한국 현대 문학비평에서 근대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4·19세대 비평가들의 성취와 한계에 대해서 탐색 중입니다.
김=20~30년대 비평가들이 어떤 차원에서 현재적 의미가 있던가요?
권=비평과 권력의 문제, 비평가의 자기 성찰 문제가 최근 논쟁에서 중심점이 됐는데요, 이 문제들은 임화를 비롯한 식민지 시대 비평가들에게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타자를 가장 성실하게 관찰한 비평가가 가장 올바른 견해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당시 비평의 풍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요. 임화가 이론적 치열성을 확보한 요인도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 연유합니다.
김=임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권=임화는 그 시대를 예술가로서, 혁명가로서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다양한 논쟁을 주도했고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영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탁월한 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임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보려고 했는데, 53년 그가 미제의 간첩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는 장면에서 글을 써나가다가 능력이 부쳐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데, 임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나 본격적인 평전이 나온다면 좋겠습니다.
김=`매혹'에서 `비판'으로 왔는데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은 어느쪽입니까?
권=당분간은 논쟁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텍스트의 매혹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참여해야 할 논쟁이 전개된다면 소신껏 참여할 것입니다. 두 세계를 균형감 있게 아우르는 것이 제 몫이라고 할까요.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곽윤섭 기자kwak1027@hani.co.kr
권성우는 누구?
△1963년 서울 출생
△1986년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86~1994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박사
△1993~1998: 하이텔 문학관 자문위원
△1994~1997: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현재 동덕여대 인문학부 교수, <내일을 여는 작가> <사회비평> 편집위원, 문학비평가
△저서 및 평론:<비평의 매혹>(1993), <문학이란 무엇인가?>(편서), <모더니티와 타자의 현상학>(1999). `비판, 그리고 성찰의 현상학'(1999), `동경과 분석, 그리고 유토피아'(1992)
권성우가 말하는 권성우
푸르스름한 초저녁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삶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생긴다. 그런데 그 열정은 정확히 말하자면 허무를 동반한 열정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허무주의자에 가깝다. 아나키스트가 되기에는 나는 용기가 없고, 조직인으로 활동하기에는 나는 지나치게 비조직적인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허무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다만, 니체가 말했던 바, 적극적인 니힐리즘의 가능성을 항상 꿈꾼다. 그러니, 허무의 한 자락을 볼 때마다 나는 역설적으로 생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새로운 의욕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비평가로서, 나의 중요한 관심사는 `매혹'과 `비판'이다. 나에게 책읽기의 매혹을 선사한 텍스트와 정말 행복한 열애를 하고 싶다. 청아한 보석 같은 작품과의 만남으로 생성되는 자발적이며 행복한 비평 쓰기는 내 비평의 원초적 태도이다. 문제는 이러한 비평의 매혹을 가능케 하는 빛나는 작품을 점점 만나기 힘든 문학적 현실이다. 이 점을 앞으로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의 문제가 나의 비평적 현안이다. 아울러 순수한 비평의 매혹을 어렵게 만드는 야만적인 문학환경에 대한 응시는 자연스럽게 비판을 동반하게 된다. 여기서 비판은 문학다운 문학, 작품다운 작품의 탄생을 제한하고 왜곡시키는 모든 문학제도와 문학적 관행을 과녁으로 한다. 진정한 매혹을 위해서도, 진지한 비판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판이라는 지적 행위를 성실하게 통과했을 때, 나는 한결 밀도 높은 새로운 매혹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궁극적으로 나는 아름다운 비판이 스며든, 그리하여 한 단계 버전업된 `비평의 매혹'을 꿈꾼다. nomad33@dongduk.ac.kr
[인문학데이트] ⑮ 임석재
건축은 사람을 생각하고 돌보는 정성
`인문학 데이트'는 이번에 건축학자를 초대했다. 건축학 자체는 인문학의 본령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인문학적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처럼 우리 건축문화가 황량해진 데는 이 인문학적 정신이 빠진 채 물량과 속도에만 의존한 탓이 크다. 인문학 데이트 열다섯 번째 초청자인 이화여대 임석재 교수는 한국의 이런 건축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건축사와 건축이론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건축론은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돌보는 건축”, 한마디로 줄여 “정성의 건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건축에 흥미를 느껴 뒤늦게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배지운(25·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씨가 임 교수와 만났다. 편집자
배지운=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자리가 `인문학 데이트'이니 인문학과 건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아직까지는 건축이 기술공학적 측면에 치중돼 있는 것 같은데, 최근 저서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에서는 건축을 역사나 문화, 삶의 관점에서 설명해주는 게 좋았습니다.
임=건축의 인문학적 특징을 저는 건축이 생활과 밀접한 분야라는 사실에서 찾고 싶군요. 인문학이란 게 인간 현상에 대한 기본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어서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건축은 사변을 바탕으로 하되 항상 현실 체험을 통해 검증돼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자체와는 다릅니다. 건축은 건물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죠. 건축에 대한 이런저런 정의가 많은데, 저라면 건축은 정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정성을 들이듯이 건축도 제대로 하려면, 그런 생활 차원의 끊임없는 관찰과 체험이 바탕에 깔려야 한다는 것이죠.
배=건축의 인문학적 연구가 요즘 들어 많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국내에서 건축인문학이 시작된 건 출판계 쪽 성화에 힘입은 바 큽니다. 출판이란 게 우선은 대중의 취향을 따라가는 것인데, 건축학자들의 노력보다는 대중의 요구가 먼저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니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좋은 시도들도 보이는데, 서현씨가 쓴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같은 경우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서울의 거리를 일일이 답사해 왜 문제가 있고 어떻게 망가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데, 본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문제의식이 있죠.
배=건축은 대중의 삶 안에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건축 하면 멀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학문으로는 공학이라고만 생각하고, 생활로는 부동산이라고만 보는 것이죠. 건축 대중화의 방안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임=저는 우리나라에서 건축 대중화 가능성을 `전통'에서 찾고 싶습니다. 전통을 현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대중에서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전통이라고만 말해버리면 상당히 막막하게 느껴지는데요.
임=전통이라면 우선은 서구화나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생활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 안에 건축도 포함되고요. 저는 건축에서 전통의 요소를 현대로 되살려낼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집은 사람들이 몸동작을 여러 형태로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공간이었습니다. 반면, 요즘의 아파트는 몸동작을 단순화시킵니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밖에 못하는 건데, 몸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몸동작을 돌려주는 것도 전통을 되살리는 일인 것이죠. 또 색이나 곡선도 전통의 특징 중 하나인데, 그걸 오늘의 건축에 재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에서 20세기 물질문명의 폐해를 지적하셨는데 그 대안이라고 할 건축적 개념을 들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임=제가 생각하는 대안 개념은 자연·고전·원시입니다. 자연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의 바탕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생활공간을 만들어낸 것이 건축의 출발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데, 물질문명이 발흥하면서 자연이 정복 대상이 되고, 그 정도가 한계를 넘어버림으로써 인류의 삶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 거죠. 자연과 기술의 공존이야말로 21세기적 과제라 할 텐데, 건축도 예외가 아니죠. 저는 그 방안으로 고전과 원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고전을 바로미터로 삼아 현재를 조회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이 추구하는 진보성에 적절한 제어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원시는 계몽에 대한 쌍개념입니다. 계몽이라는 말은 오늘날 식민주의·물질주의·합리주의·엘리트주의 등 현대 문명병을 낳은 개념들과 동의어가 돼버렸습니다. 원시를 살리자는 것은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화제를 좀더 구체적인 곳으로 돌려보죠. 몇년 전 강남의 대형 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죽은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 붕괴를 건축학자의 눈으로는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임=한국 사회의 전근대적인 부패구조가 청산 안 된 상태에서 근대문명의 물질주의를 극단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봐야겠죠. 근대성의 여러 요소들이 상호 보완·견제·조화를 통해 균등하게 나아가야 하는데, 한쪽만 극단적으로 나아간 결과인 거죠.
배=건물이 무너졌다는 건 시공이 잘못됐다는 건데, 건축계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임=시공현장의 관리감독도, 설계도 건축학과를 나온 사람이 관련돼 있을테니까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의 한계를 개인이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건축문화가 그 수준이라는 것이죠.
배=그렇더라도 시공현장에서 불량 건축을 고발하는 양심선언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문제 아닙니까. 최근 한 건축잡지에서 건축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을 묻는 설문에서 도덕성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임=건축이 명색이 조형예술인데, 그것을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 1위가 도덕성이라는 건 참담한 일이죠. 건축인들이 비겁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배=우리 근현대사는 외세의 폭력적 지배로 얼룩져 왔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근대화를 겪기도 했는데요. 건축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임=서울의 역사가 600년이라는데, 그 역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다 사라져 버렸어요. 문제는 그게 폐해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죠. 가령,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세계적 명소인 것은 박물관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거리와 풍경 등 도시 전체가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때문이거든요. 서울은 강과 능선 등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폭력적인 개발로 다 없애버렸어요.
배=건축은 정치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분야이기도 한데요. 가령, 독일의 나치즘이 남긴 건축물들이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임=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서부터 현대의 히틀러까지 절대권력자들은 대체로 권위적인 건축물을 좋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절대권력자들이 고전주의 양식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대중이 고전주의적 건축물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위압적으로 권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배=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서 권위적인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임=대검찰청, 헌법재판소,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등이 대표적인 경우죠.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은 없는 채로 권위적이기만 한 건데, 구청을 비롯한 관공서 건물들도 획일적이어서 시민의 편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쓰셨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까?
임=예,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관심이 많은 반면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편인데요, 건축은 그런 점에서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도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직접 부대끼면서 느끼는 주관적 느낌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성을 건축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지점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려다 보니까 책을 여러 권 쓰게 됐습니다. 20~30년쯤 계속 공부해서 나만의 건축사상을 쓰고 싶습니다.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임석재는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1980~1987년:서울대 건축학과 및 같은 대학원
△1989:미국 미시간대 건축학 석사.
△1992: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 박사
△1993년:원도시 근무
△1994년~현재: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저서:<추상과 감흥:비엔나 아르누보 건축>1·2(문예마당, 1995), <장식과 구조미학:불어권 아르누보 건축>1·2(발언, 1997), <형태주의 건축 운동:형태와 조형의지>(시공사, 1999), <생산성과 시지각:뉴 브루털리즘과 대중사회>(시공사, 2000), <한국 현대 건축 비평>(예경, 1998),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임석재 교수의 현대 건축 이야기>(북하우스, 2000), <한국적 추상 논의>(북하우스, 2000) 등 다수.
임석재가 말하는 임석재
철들면서 시작된 사춘기 때 나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조형 환경은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시(詩)였다. 한국 현대시의 고전들을 암송하고 스스로 시작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관심이 합쳐져 나는 지금 건축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아직은 사춘기 때의 감성과 열정이 유지되고 있다고 자평하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 사는 방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사람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일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고 책 쓰는 데 보낸다. 건축에 요구되는 실용성과 현실성은 골목길 탐방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얻고 있다. 요즘은 그 동안 공부해온 내용을 응용할 설계 작업도 시작하여 1~2년 후면 처녀작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연구는 20세기 서양 근현대 건축사, 한국 현대 건축사, 서양 건축사의 세 분야로 나뉜다. 각 분야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저서 시리즈를 기획하여 매일 열심히 공부하며 집필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최종 목표는 나만의 건축 사상을 세우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끼여 철학 강의를 듣는다.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던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다.
[인문학데이트] 16. 이영미
이번주 데이트는 대중문화예술 전문연구자인 이영미(39)씨와 함께 했다. 80년대 민중가요·마당극운동 현장을 누볐던 이씨는 90년대 이후 작가의식보다 수용자인 대중들의 정서와 흐름을 중시하는 서민문예론을 표방하면서 독창적인 대중예술 비평을 벌여왔다. 특히 역저 <한국대중가요사>(시공사)는 식민지시대부터 지금까지 대중가요의 역사를 언어예술적 분석을 통해 우리 문화사에 편입시킨 성과물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위원인 그는 한때 `민족극 연구회'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연구자 김영찬(35·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씨와 만나 현 시대 대중문화에 대해 진지하고도 치열한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주
대중예술 비판적 수용자 길러내야
김영찬=오랜만입니다. 이 선배의 많은 책들을 다시 읽다보니 글을 쓰는 데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함께 토론도 한 사이지만, 대담을 위해 꼼꼼히 뒤져 보았더니 참 책을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영미=내가 생각해도 무리하게 일을 했어요. 91년 첫 평론집 낸 뒤로 거의 1년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이죠. 마흔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 데 약속은 지킨 것 같아요. 하지만 양에 대한 욕심은 많이 줄었고, 덜 쓰더라도 좋은 책을 많이 내려합니다.
김=<한국대중가요사>를 포함해 근래 이 선배의 저서들은 80~90년대 문화현장의 생생한 체험과 고민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난 시기의 한 매듭을 지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또 죽 지켜봤던 저로서는 미처 정리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짐도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한국대중가요사>를 쓰고난 뒤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지요. 하지만 과거에 아쉬움이 남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남아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내 경험이나 우리 현상을 설명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민족극의 작품·작가론, 예술문화운동 조직활동사나 민중가요사와 작품·작가연구는 정리할 시간을 놓쳤어요. 주제자체가 2000년대 관심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론적 정리작업이 외면당하는 상황에 온 게 아쉽습니다.
김=90년대 문화비평은 80년대의 좌절을 맛본 운동가들이 대중문화쪽으로 눈돌리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80년대의 문제의식과 실천적 관심을 지금까지 견지하며 대중문화 비평의 틀 속에 녹이려 한 이 선배는 좀 특이한 부류 같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견지해온 당신의 문제의식은 무엇입니까.
이=나는 항상 `~~이어야 한다'이기 보다는 `~~이다'라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중요시해왔습니다. 섣불리 방향을 제시하라는 식의 주문을 싫어해요. 방향성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무엇인가 먼저 설명해야 어떻게 하느냐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90년대 대중문화 연구의 활성화는 80년대 정치, 경제에서 90년대 문화일상으로, 즉 인식에서 욕망으로 관심이 이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80년대 다른이들은 후자쪽의 측면을 무시했지만 나는 그 두가지 관계 자체에 원래 관심을 두고 있었거든요. 80년대 주류인식으로 보자면 나는 주변적이고 탈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를테면 민중가요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가 방송의 `가요톱텐'에 올라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권력을 잡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런 구조나 체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관계도 제로섬게임처럼 서로 소멸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침으로써 노래문화 전체를 어떻게 역동적으로 발전시킬까의 구조에 천착하는 거죠. 가요의 경우 민중가요의 경험이 있어 90년대 저항적 록으로 대별되는 인디음악의 구조가 가능했던 겁니다. 실제로 민중가요 운동가 출신들은 지금 대부분 인디음악 유통을 담당하고 있어요. 또하나 저를 특징지우는 건 당대를 좌우하는 중심적인 이론에 별로 휘둘리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외국이론을 별로 안쓴다는 지적이 그런 건데, 난 이론이 옳거나 권위적이므로 그 이론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는 식의 방법론을 취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천속에서 이 문제 푸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 논리의 발전을 위해서, 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이론 때문에 관심 갖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사고방식은 귀납적인 쪽입니다.
김=연극과 대중가요비평을 동시에 하고 있고 저서 역시 일반연극과 민족극, 대중가요, 민중가요 등을 아우르고 있는데, 그런 영역을 한데 이어주는 고리 또는 접점이 있습니까.
이=한마디로 말하면 언어예술이고, 다른 말로 하면 문학인데요. 나는 문학연구자로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을 얘기할 때와 문학을 얘기할 때 뉘앙스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실제로 난 시각예술이나 무용, 풍물 등에 대해서는 평론을 하지 않습니다. 대중음악평론가라는 명칭도 맞지 않죠. 노래를 분석하고 비평하려면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진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게 내 생각이고 이런 전제아래서만 음악이 고려사항으로 들어옵니다. 향가 고려가요 시조가 원래 악곡이 붙은 노래였잖아요. 말로 전달되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저는 구비문학, 연극, 노래, 방송극, 극영화를 비롯해 심지어 최불암, 사오정시리즈 같은 넌센스퀴즈까지도 다 문학이라고 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서민적이라는 것도 제 관심과 통하지요.
김=제도권 대중예술문화에 비해 비제도권적인 민중가요 민중극이 가진 잠재력은 무엇인가요.
이=80년대 문화운동쪽에서 활동하면서 이른바 비제도권이라고 말하는 영역의 존재가 대중예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지요. 이런 장르들은 제도권 장르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변화를 몰고옵니다. 나는 마당극처럼 서구 근대극과 원리가 다른 장르에 주목했어요. 우리는 이제 서구 비서구를 아우르고 전문창작자가 아니라 비전문창작자 수용자까지 아우르는 예술이론이나 문예학을 꿈꿀 때가 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연구는 일종의 커밍아웃이라고 봐요.
김=요즘 대중예술은 신자유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가 보통사람들의 생활정서, 욕망과 한데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80년대 대중예술과 90년대 대중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근본적으론 변화가 없다고 봐요. 90년대에는 80년대 비제도권의 진보적 예술의 성과와 역량을 흡수해 저항성과 진보성을 얘기할 수 있는 다분화된 대중예술작품들이 늘어났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태지가 <발해를 꿈꾸며> 같은 현실참여적 가요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나 다양한 젊은 영화의 약진이 그런 사례지요. 그러나 대중문화의 자양분이 되는 비제도권 예술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문제입니다. 70~80년대보다 똑똑해지고 개성이 다양해진 수용자의 안목을 높이기 위해 비제도권에서 또 딴짓을 해야하는 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겁니다.
김=사실 그 가능성이 높아보이진 않아요. 이 대목에서 비제도권 예술을 강화시킬 대안이 궁금해집니다.
이=수용자교육과 수용자네트웍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용자가 변하지 않으면 서민들의 대중예술은 변하지 않아요. 민중가요사 흐름을 보면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조직적 노래운동 없이 존재했어요. 대중이 먼저 독자적 노래문화를 만든 겁니다. 운동가들의 선도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예술을 만드는 건 선도적 창작자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수용자교육과 네트워크는 대중예술이 가지고 있는 맹목성에 어느정도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문화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서의 문화수용자를 만드는 활동입니다. 문화모니터 비평모임 같은 수용자들끼리의 네트워크나 비평가, 이론가들의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특히 중고생 대상으로 대중문화의 올바른 수용태도를 가르치고 조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김=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네요. 앞으로 또 어느쪽으로 건너뛸 생각을 하고 있는 지요.
이=다음 단계로 가려면 다시 넓이뛰기를 해야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언어가 있는 한국의 대중예술이 어떤 양상과 원리를 갖는지를 일반론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중가요사를 대충 정리했고요, 지금은 텔레비전 드라마 담론쪽으로 옮겨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러나 옛 녹화본도 거의 없고 자료수집이 너무 어려워 한참 고생해야할 것 같아요.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며 감각을 회복(?)하고 있습니다(웃음).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사진/서정민 기자westmin@hani.co.kr
이영미는 누구?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남.
△1981~85년: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1983년부터 부정기간행물 <노래> 동인으로 활동.
△1989~94년 민족극운동 이론비평모임인 `민족극연구회'에서 활동.
△1994~현재: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
△저서:<민족예술운동의 역사와 이론>(한길사, 1991), <노래이야기주머니>(녹두, 1997),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서울미디어, 1994), <서태지와 꽃다지>(한울, 1995), <이강백 희곡의 세계>(시공사, 1998),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6), <마당극·리얼리즘·민족극>(현대미학사, 1997), <한국대중가요사>(시공사, 1998) 등 다수.
이영미가 말하는 이영미
어릴 적 나는 TV에 코를 박고 살았다. 언니 덕분에 열살부터 송창식·김민기의 팬이 되었고 하이틴이 되면서 연극을 봤다. 대학 가서는 극회 활동을 하며 남들처럼 루카치, 하우저, 백낙청을 읽었는데, 이공계 분위기의 집안 탓인지 예민한 문학청년들은 싫어하는 조동일의 도식적이면서도 담대한 분석 또한 꽤 흥미로웠다.
난 국문과 학생이면서도 시보다 말로 된 문학, 즉 구비문학이나 방송극, 노래 가사, 넌센스퀴즈, 연극 같은 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운동권 부근에 있으면서도 정세분석보다는, 새 세상에서 예술문화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혹은 왜 요즘 음울한 단조의 노래가 유행할까 등의 '이상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마당극·민중가요 등을 연구하고 싶어 노래운동·연극운동 하는 사람들과 10년을 붙어다녔다. 나의 '현장'에 있기 위해 박사과정도, 취직도 포기했고 10년 동안 원고료만으로 먹고살았다. 그 시간은 내게 새로운 생각거리와 할 말을 만들어주었고, 생계형 글쓰기는 글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 서른 즈음, 노동가요 대중성 논쟁을 하면서 석사논문 `1920년대 대중화논쟁 연구' 때부터 내가 대중성을 화두로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주 관심대상은 서민들의 언어예술이다. 마당극이나 방송극이나 민중가요나 다 그런 것들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결국 문학연구자이지만 시·소설 중심의 문학관으로 보자면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나는 여태껏 문학연구 바깥에 버려져있던, 시시껍절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연구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 관점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문예학의 굵은 줄긋기를 다시 하고 싶다.
[인문학데이트] 17. 이거룡
“포기하고 체념하라. 하지만 먼저 넉넉히 쌓아두는 것을 잊지마라.” 인문학데이트의 17번째 손님인 인도철학자 이거룡(41)씨는 대화내내 화두처럼 이 말을 새기고는 했다. 초월, 명상 따위의 거창한 개념을 두르지 않고 대중과의 만남 자체를 수행도량으로 삼고있는 그는 인도철학 담론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 애쓰는 별종연구자로 꼽힌다. 데이트 상대로는 대학시절 그에게서 인도철학 강의를 들은 바 있는 민기은(25·시공사 편집부)씨가 나섰다. 현실과 이상의 돌고도는 고리를 풀어가는 사제지간의 대화는 가뿐한 듯하면서도 미묘한 긴장과 성찰의 흔적들을 느끼게 했다. 편집자
민기은=첫 강의시간에 학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선생님 책이나 방송강좌는 유심히 보는데, 솔직하게 내면을 털어놓으며 청중과 함께 고민하는 모습이 여전히 인상에 남더군요. 다만 전과 달리 머리를 짧게 깎아 조금 어색해 보입니다.
이거룡=자의반 타의반으로 깎았습니다. 연구교수 채용을 앞두고 총장면담을 하게 됐는 데, 주위에서 어른을 만나는 데 단정하게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요. 마지못해 했지만 좀 착잡해요. 동료들은 덕담삼아 보기좋다 하는 데, 조만간 다시 기를 것 같습니다. 자식들 키우면서도 느낀 건데 사회가 끊임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요. 일상 속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키우는 셈인데, 나또한 지극히 일상적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위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민=인도 힌두교 하면, 선생님 외모처럼 초월한 듯한 자유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죠. 힌두교의 매력은 개방성이라고 보는데, 종교다원주의와도 통하는 맥락이 있는 듯 해요.
이=대중강좌를 하고나면 꼭 받는 질문이 인도의 가장 큰 매력이 뭐냐는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변한다는 것, 즉 느리다는 것을 첫째로, 다양하다는 것을 두번째로 꼽습니다. 어떤 문화든 내부 요소들이 건전하게 성장하려면 다양성이 필요하고, 다양하려면 다른 것에 대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사실 인도는 포용력이 돋보이는 사회입니다. 이질적인 문화들을 끌어안기보다 내버려둡니다. 자신의 영향권 안에 이질적 요소가 들어와 알짱거리는 것을 그냥 놓아둔다는 것은 대단한 역량과 배짱이 있어야 가능하지요. 인도사람들은 이런 포용심을 힌두교의 전통을 통해 핏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경전 <베다>같은 경우도 진리를 찾는 과정에 여러 길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민=인도사상의 특징은 종교 철학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일텐데요. 가난에 찌들었지만 <바가바드기타> 따위의 철학경전을 항상 머리 맡에 두고 잘 정도로, 일체성을 놓지않는 인도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경제위기를 겪고있는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기본적으로 인도사람이 생각하는 삶의 네 단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공부하는 학생기와 가정생활을 하며 자녀를 낳고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가주기(家住期), 모든 걸 버리고 명상하는 임서기(林捿期), 탁발하며 운수행각하는 유행기(遊行期)가 그것인데, 이들 단계가 지닌 의미들은 상당히 큽니다. 세속의 삶과 초월의 삶, 즉 초세간과 세간의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들이 희구하는 건 해탈이지만 그 과정이 처음부터 다리 꼬고 명상하는 따위는 결코 아닙니다. 지금 인도는 세속의 삶을 겪는 앞의 두 단계가 경제사정 때문에 대단히 허약해졌습니다. 흔히 인도를 초월, 명상, 신비적 이미지로 보지만 유학가서 본 것은 속절없는 체념이 거의 전부였어요. 물질적인 삶에서 실패하면 해탈도 무의미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앞의 두단계는 급속히 진행됐는데 그 다음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4단계의 전제인 포기에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끌어모으기만 하다가 가지요. 물론 버리려면 우선 가져야합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것은 비상하기 위해서지요. 끝없이 미끄러져가면 사고가 납니다. 삶도 쌓는 과정이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게 인도사상의 핵심메시지입니다.
민=지금 한국사회에서는 타의에 의해 포기당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버릴 수 있는 것을 갖지도 못했는 데 타의에 의해 버려야하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내가 강조하는 포기는 자발성의 차원, 즉 있을 때 포기하라는 의미입니다. 좀더 본질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실업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관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한 노동자들이 조화로운 인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의 <부모은중경>을 보면 내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굴곡없는 삶을 찾지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일과 직장은 경제적으로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한번쯤 내면을 되돌아 볼 계기를 실업이 제공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냉혹한 사회환경에 무심해선 안되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민=구조적인 실업문제를 의식적 깨달음의 계기라고만 보기에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실업이나 금융위기 등은 우리 사회의 업이 쌓은 결과입니다. 60~70년대 급속성장의 과정에서 잉태된 것이죠. 숙명론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나 업이 현실을 긍정하게 만드는 측면은 있습니다. 동양사상 뿐 아니라 기독교도 개인의 영성이냐,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갈리지 않습니까. 시대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를 뿐 두 요소는 늘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개인의 마음가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구조조정 과정을 거쳐도 부작용은 틀림없이 나타날 겁니다. 무기력해 보일 지 모르지만 `천천히 낫도록 처방하는 의사가 제일 좋은 의사' 아닌가요. 천천히 변하는 게 인도의 매력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민=인도관련 책을 읽는 독자들이 때때로 현실도피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옵니다. 인도사상·문화에 대한 지나친 몰입도 짚어봐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인도사상의 본질은 불교처럼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여행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으로 항해하라고 가르치죠. 명상만 한다고 정체성이 문제된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내면여행은 주체성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지요. 문제는 메시지에 대한 곡해입니다. 실제로 인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약이나 프리섹스 같은 일탈에 젖어들 가능성은 많아요. 하지만 시인 훨덜린은 자신의 시에서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따라 자란다”고 했어요. 맛있는 음식에 파리가 끓는 격입니다. 포수가 공을 받으려면 글러브를 끼어야하듯 문화를 수용할 사유의 틀은 있어야겠지요.
민=인도사상과 대중과의 만남을 계속 해오셨는데요. 대중들과의 만남을 수행방편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의 고향인 마드라스의 무르티 재단에 가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새로운 부분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왜 그가 추종받는지를 따져보니 자신의 뜻을 펴기보다는 말과 글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내가 대중강연을 하는 것도 그 자체가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회의하며 추스르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첫 강의때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민=90년대 인문학 위기론이 제기되면서 다원주의적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인도철학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고 있습니까.
이=여지껏 인문학이 이성중심의 담론이었던 만큼 위기론은 이성의 시대가 가라앉는다는 얘기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성중심 인문학이 주는 메시지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안적 인문학은 초이성, 초합리적 토대 위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봐요. 인도적 사고로 본다면 이성은 의식의 지극히 얕은 차원입니다. 난 우리 민족이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훨씬 감성적인 민족이라고 봅니다. 근대이성은 우리 몸에 잘 안맞는 옷이었습니다. 뿌리가 그런 쪽인만큼 초이성 초합리로 돌아가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맞는 옷이니까요.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김경호 기자jijae@hani.co.kr
이거룡은 누구?
△195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남.
△1986~89년:강원도 삼척군 산자락에서 홀로 살며 수행생활.
△1987년: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 졸업.
△1989년: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1991년:인도 마드라스대 철학석사.
△1996년:인도 델리대 철학박사.
△1997~1998년:동국대·한겨레문화센터 강사.
△2000년:동국대 연구교수
△지은책과 옮긴책:<인도철학사Ⅰ-Ⅳ>(옮김, 한길사, 1996-1999), <아름다운 파괴>(거름출판, 2000),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명진출판, 1998),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함께지음, 한길사, 1999), <구도자의 나라>(함께지음, 명진출판, 1998),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함께지음, 예문서원, 1997).
이거룡이 말하는 이거룡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를 기억할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골트문트의 길을 간다. 수도원에 남아서 주어진 계명을 좇고 수행하여 하자 없는 수사(修士)가 된 나르치스가 아니라, 수도원을 뛰쳐나와 순간마다 자신의 전부를 걸며 방랑하는 골트문트의 길이 나에게는 어울린다. 나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지금도 나는 길 위에 있다. 이 방랑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이생 어디쯤에서나 끝나게 될지, 아니면 다음, 그 다음 생에서나 끝나게 될 지 모르는 방랑이다. 그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나의 역마살을 시험하고 다독거리며 떠돌 것이다. 산에 오르면 속을 그리워하고 저자거리에 서면 다시금 산을 그리워하는 만다라의 혼처럼, 역설과 모순의 경계선을 넘나들 것이다.
온갖 사상을 접했다. 특히 여러 종교 사상들을 편력했다. 그러다가 인도사상을 만났다. 그건 일탈을 꿈꾸던 나에게 한 줄기 소나기였다. 공간을 수평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라, 내면으로 침잠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재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무작정 떠나는 맹목적인 여행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이 길을 따라 오는 중에 한 번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나는 인도철학자다. 그러나 정작 나의 주요 관심사는 인도철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 그리고 `우리'의 문제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든 대중강의를 하든, 이 점은 마찬가지다. 인도철학을 전하자는 게 아니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을 돌이켜, 삶의 면면을 늘 처음으로 재창조하는, 일상에 대한 끊임없는 혁명을 시도할 것이다.
[인문학데이트] 18. 윤지관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붙여오고 그 두 개가 된 혹을 또 떼러 갔다가 또 혹을 그 위에 하나더 붙여온 셈이 되었다'
번역이나 외국문학 연구를 돈벌이나 처세술 쯤으로 치부하는 천박한 풍토를 30여 년전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한탄했다. 95년부터 동학들과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를 결성해 이끌어온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46·영문학)는 이런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토종학자다. 번역문화 후진성 극복과 영문학의 한국성 찾기는 그가 천착해온 필생의 과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미연에서 내는 계간지 <안과밖>은 번역물과 해외 인문학연구에 대한 정밀한 비판으로도 성가가 높다. 영미연 비평분과의 후배 김금주(35·연세대 영문과 박사과정)씨가 그를 찾아갔다. 편집자
김금주=수시로 얼굴 마주보며 토론해왔지만 이렇게 직접 선배님 생각의 이모저모를 캐어보게 되어 무척 설렙니다. 사실 고대해왔던 기회이기도 하지요.
윤지관=금주씨에게도 그동안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고 싶었던 터여서 저도 이런 자리가 반갑고 감회가 새롭군요.
김=영문학이자 문학비평가로 일하면서도 항상 외국문학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시각, 즉 주체적 해석을 유독 강조해오셨지요? 원전의 구절구절을 세세히 탐독하는데 치중해온 영문학계의 관행에서 이런 시각은 특이함을 넘어 모난 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윤=외국문학을 공부하는 자체가 독특한 선택이겠죠. 아직도 사고나 인식의 근대화가 온전히 뿌리박히지 않은 우리 현실에서 외국문학의 심층적 연구는 특히 그렇습니다. 사회가 미국문화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음을 고려한다면 영미문학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두지않을 수 없고 당연히 외국과 다른 특징을 띠게 되지요.
김=미국의 세계패권을 업고 영어의 지배력은 갈수록 지구화되고, 공용어화론까지 나옵니다. 저도 강의하다보면 학생들이 고급구문에는 거부감을 보이고, 오히려 취직 잘되는 영어 중심으로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기도 해서 혼란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영어교육에서도 인문학 위기의 징후들이 적잖이 나타나는 셈이죠.
윤=영어가 보편어가 된 상황은 인정해야지요. 배우기의 현실적 필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영어열풍의 현상 뒤에 언어를 부릴감(도구)으로만 보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점입니다. 언어는 사람사이에 뜻과 생각이 통하도록 구실주어진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 영혼, 가치의 문제 등까지도 담지하는 그릇인데, 실용영어만 강조하는 영어붐은 얕고 비뚤어진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인과 똑같이 회화하자는 식의 교육은 영어를 할 때 민족적인 자의식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바로 그런 대목에서 영문학자가 개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문학계가 이런 점에서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순히 영어를 전공하고, 공부하는 차원의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인간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자로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의 영어논란은 결국 언어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문제입니다. 자아문제를 젖혀두고 정책적인 영어구사능력향상을 꾀하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김=번역문제로 말을 돌려볼까요. 두달전 영미문학연구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번역문제와 관련한 토론이 있었죠. 선배님은 그때 번역과정에서의 언어간 권력관계에 주목하자는 의미에서 `번역의 정치학'이란 표현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개념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윤=번역행위에 내포된 정치적 사회적인 힘의 관계를 좀더 깊이 짚자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겁니다. 우린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한마디로 번역을 기술적 차원에서만 이야기하는데, 좀더 의식적으로 번역에 접근하자는 의미와도 통합니다. 식민지시대를 겪고나서 그 극복이 우리 사회 과제라고 한다면 우리 처지에서 번역을 통해 외국을 수용하는 것은 근대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역이 식민지배도구가 됐던 게 역사적 현실이고 보면 무엇을 어떻게 왜 번역하느냐는 번역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번역을 저항의 공간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지않을까를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김=번역이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확성 충실성에 강조점을 뒀지만 요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처럼 번역도 하나의 창작품이라고 보는 견해도 나옵니다. 정확성이나 충실성이란 개념 자체를 어떻게 보고있는 것인지요.
윤=심포지엄에서 논쟁거리가 됐던 걸로 기억해요. 난 번역속에는 저항만 아닌 생산적인 면도 같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번역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는 의미랄까요. 두 문화사이의 접합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도 가능하지요. 따라서 번역의 정치학은 저항만이 아니라 창조성도 살리는 이중적 작업이 될 수밖에 없어요. 정확성이라거나 충실성은 원전을 제대로 옮기는 것을 강조하는 태도일텐데 그 태도와 창조성 문제가 엇갈리는 듯 해도 기본적인 번역의 정확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창조성만 강조하게 되면 해체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발적인 오역까지 허용하는 위험이 생기지요. 아직도 정확성은 기본적 합리성조차 미숙한 우리 사회의 근대성 확립과도 연관된 문제입니다.
김=최근 서점에 가보면 번역물이 전례없는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과정의 의미와 맥락을 고민하기보다는 인기에 영합한 대중서쪽의 번역물들이 활개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론서의 경우도 상투적인 오역이나 원문문장 빼먹기 등의 관행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윤=번역이 활발한 것은 사실인데 대개 관심은 기능적인 쪽에 한정되고, 번역의 정치학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어요. 요즘 번역서만 봐도 역시 현실에서 번역문화의 후진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일본번역서의 중복번역과 같은 식민지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습니다. 제가 최근 근대기 번역서 분석논문을 보았더니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이미 국내의 서구문학 번역은 일역서를 중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나와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영문고전만 해도 번역본이 많이 있지만 신뢰할 만한 검증절차도 없고 서로의 판본을 마구 베끼다시피하다보니 정본을 찾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오히려 국제저작권 협약가입으로 새 작품의 판권을 출판사가 독점할 경우 번역이 나빠도 다른 번역본을 출간할 수 없는 악순환조차 우려되는 형편이지요.
김=어렸을 때 세계문학전집에서 흔히 읽었던 <주홍글씨>가 떠오르는 데요. 제목도 원문그대로 해석하면 `주홍글자'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역자들이 마구 베껴놓은 태작번역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론서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윤=이론서도 오역으로 담론형성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년 전 문단에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이 재연됐을 때 많은 문인, 학자들이 해외유명이론가의 저술번역본을 참조했으나 결정적 오역이 많아 오해가 빚어진 적도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팽배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왜' 란 근본적인 문제의식보다도 시장주의가 번역을 가늠지우는 철칙이 되고있습니다. 영미연의 계간지 <안과밖>에서 고전번역의 문제점들을 계속 점검해왔습니다만 등급평가작업을 해서 적어도 번역서의 수준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김=따지고보면 번역작업이란 것도 외국문학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겠지요. 영문학의 주체적인 수용과 연구에 관한 전망을 어떻게 보는지요.
윤=서구문화 수용은 우리 근대형성의 한 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외국문학을 하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주체적인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적이라고 해서 꼭 배타적이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서구에 합일되는 것도 곤란하지요. 어떻게 보면 이중적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간지 <안과밖>의 제목자체가 그런 문제의식을 함축합니다. 영문학은 밖이고 타자이지만 이미 안에 들어와 우리의 일부로 박혀있는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영문학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문제는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탐구와 얽혀있다고 봅니다.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곽윤섭 기자kwak1027@hani.co.kr
윤지관은 누구?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남(그뒤 경북 영천에서 성장).
△1978년:서울대 인문대 영문과 졸업.
△1985년~현재:덕성여자대학교 영문과 교수.
△1989-1996년: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
△1993년:서울대 인문대 영문과 대학원졸업(박사).
△1997-1998년:미국 버클리 대학 초빙교수.
△1999-현재: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지은책:<민족현실과 문학비평>(1990, 실천문학사), <리얼리즘의 옹호>(1996, 실천문학사),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1995, 창작과비평사).
△옮긴책:<언어의 감옥>(까치, 1985), <현대문학이론의 조류>(학민사, 1983),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종로서적, 1983) 외 다수.
윤지관이 말하는 윤지관
유신체제 아래서 대학시절을 보내며 수업에조차 별로 충실치 못했던 내가 공부를 업으로 삼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졸업 뒤 사병으로 복무하던 때였다. 1980년을 전후한 사회적 격변을 맞아 연일 계속되는 비상대기에 시달리면서, '대학생들'을 증오하는 동료들의 거친 발언들을 들으면서, 기이하게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속 다짐이 일어났던 것이다. 제대말년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멜빌의 <모비딕>을 `씨그넷 클래식' 판 문고본으로 독파한 것이 내 영문학 공부의 시작이었다. 광주항쟁의 충격과 <모비딕> 독서. 얼핏보아도 엄청난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둘의 어느 한쪽도 놓지 않고서 그 사이의 어떤 관련성을 이해하려는 일이 내 뒤늦은 공부길의 피할 수 없는 과제였던 듯싶다. 대학원을 마친 80년대 후반부터 공부가 부족한 대로 변혁적인 문학론과 연결된 비평을 발표하고 한 진보적 잡지에 몸을 담게 된 것도, 그 어떤 책임감에 시달린 탓은 아니었을까? 역시 80년대적 체험과 의식이 나의 연구와 비평활동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비딕>의 의미를 궁구하는, 변함없는 인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이야말로 지극한 의미에서 변혁적임을 믿는 문학주의자라고도 생각한다. 이 문학이라는 진지에서 수행하는 싸움에, 전후방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90년대 이후의 깨달음이었다. 한때 선명한 이념을 앞세워 진군하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후방에 있던 진지가 어느새 최전방이 되어버리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진지전의 가치를 믿는다.
[인문학데이트] 19. 오주석
새해 인문학데이트의 첫 초대손님은 단원 김홍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전통회화사 연구에서 돋보이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소장 미술사학자 오주석(45)씨다. 신문기자였다가 홀연 전통그림의 묵향에 취해 미술사의 외길로 들어선 오씨는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적 고증을 통해 회화사의 저변 넓히기에 힘써왔다. 강단과 일반인을 잇는 대중강좌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후학이자 애독자인 백남주씨(서울시립박물관 연구원)가 만났다. 대담에서는 외형성장에 치우친 미술사학계의 거품현상과 큐레이터 양성제도의 허실에 대한 진중한 논의가 펼쳐졌다. 편집자주
백남주=선생님 책의 애독자로써 새해 벽두에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후학의 처지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로 생각합니다.
오주석=연말 연시에 박물관 일도 바쁠텐데 초대에 응해줘 고맙습니다.
백=선생님이 99년 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보며 여러 궁금증들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그림을 아는 사람은 설명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기 그려지는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는 서문 구절을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빨리 해치우며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숨 고르고 그림 볼 여유를 즐기는 게 가능할까요?
오=바쁘다는 것은 곧 속도의 문제지요. 속도는 질보다는 양을 따지고 문화는 질이 중요한 잣대로 봅니다. 특히 도자기처럼 갑자기 드러난 땅 속 유물도 아니고 갸날픈 종이와 비단에 그려진 그림이 세대손손 입김과 손때 입으며 전해지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런 그림 한점 감상할 여유가 없는 생활은 비극입니다. 마음먹으면 대단히 쉬운 일이기 때문이죠.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서 그 많은 전시실을 하루만에 돌고 '다 봤다'고 한다면 우습지 않습니까? 뷔페 음식점에서 모든 음식을 다 먹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드는 작품 하나를 골라 사진을 벽에 붙이거나 전시실 찾아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감상의 가장 좋은 정도입니다.
백=얼마 전 유행한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과 달리 선생님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옛 말씀을 즐겨 인용했는 데, 우리는 정말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박물관 관람은 초중고생들의 방학숙제가 된 지 오래지만 대부분 설명문 베껴가기가 고작이거든요.
오=감상의 금도는 욕심 버리고 빈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비지식은 없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관람객들을 보면 종종 작품보기보다 설명문 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지식은 양날의 검과도 같아 `아는만큼 보인다'는 `아는 만큼만 조금 보이게'하는 위험도 있습니다. 옛 그림 속 사연들은 말로는 설명 못할 정도로 복잡미묘하므로 얄팍한 지식이 풍부한 감상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감상은 영혼의 떨림을 느끼는 행위인 만큼 마음 비우기는 중요합니다. 평심(平心)으로 보아 수준맞는 것을 좋아하면 되고, 이후 다른 작품으로 심미안을 넓히면 더욱 좋겠지요.
백=조선후기 대화가인 단원 김홍도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 또한 책을 통해 단원에 대한 선입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풍속그림만 떠올리고, 산수화나 인물화 등의 다른 걸작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오=단원은 글씨, 시문, 악기에도 능했고, 인품또한 훌륭한 인물이었어요. 단원 연구에 천착한 것도 폭넓고 깊은 인간적 면모에 심취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산수, 동물그림, 불화 등 거의 모든 장르에 능했던 천재였어요. 단원의 대명사인 풍속화를 조선후기 서민의식 고양의 결과물로만 알고있지만 실제로 후원자 정조가 당시 고양된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서민문화를 이해하고 이끌기 위해 풍속화를 주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화 자부심이 드높았던 영정조 문예부흥기의 산물로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백=이야기를 바꿔보죠. 인문학의 침체상과 달리 요즘 미술사 분야는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강좌마다 사람들이 몰리고, 관련 서적 출간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전공자로서 이런 인기가 온당한지 회의감이 들 때도 많습니다.
오=인문학은 사람이 사람답도록 하는 기본바탕을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그 위기는 곧 삶의 위기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과거 다른 학문발전이 저조했기에 인문학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이지 학문풍토가 진정 빼어났던 적은 없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황제내경><플라톤전집> 따위의 동서고전 완역본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아닌가요.
최근의 미술사 부각은 인문학 전반에 드리워진 그늘을 배경삼아 좀더 빛을 발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욕구가 증대하면서 이미지 학문인 미술사가 흥미를 끌고있지만 질적으로 비약한 것은 아닙니다. 저만 해도 학교에서 슬라이드 작품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뒷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정신사적 가치를 해설하면 지루해합니다. 인문학 본령에 맞게 근본요소를 다지는 자세가 아쉽습니다.
백=미술사 역시 다른 학문처럼 학연과 지연의 고리로 굳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문적 경쟁풍토가 미흡하다보니 대학원생들의 전공도 교수가 선택해주는 기현상도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해관계 때문에 침묵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좋은 해결책은 없을까요.
오=학문발전은 축적된 기반위에서 새 해석을 내놓아야 가능합니다. 선배학자들이 오류를 지적한 후배들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학문풍토가 참으로 절실한 상황입니다. 미술사에서는 더욱이 `작품감정'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추가됩니다. 사료의 진부를 가리는 것은 분석이전의 전제인데, 그 안목의 문제에서 판단을 달리할 때 논의를 통해 풀어갈 풍토가 희박합니다. 미적 판단을 수학처럼 증명해 가부를 가리기 어렵다면 결국 감식안을 가진 이를 가리는 것은 양질의 큐레이터 육성과도 연관됩니다. 진부를 가릴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시야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데 당국은 단기 큐레이터 배출을 위해 교육과정을 급조하는 등 코미디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큐레이터는 고급예술가인 동시에 대학자인데, 대학교육으로 이를 배출한다는 것은 음악에 소질없는 학생을 음대에 진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죠. 큐레이터는 당사자의 책임의식을 전제로 정실추천에 의해 뽑아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그림감상을 배부른 자들의 호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박제된 학문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기쁨과 희망을 주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오=그림은 단지 시각적 쾌락을 주는 오락거리가 아닙니다. 잡지에서 멋진 사진을 보고 반해도 여러번 보면 시들해집니다. 그러나 보름달 뜨는 가을 숲을 그린 단원의 <소림명월도>나 웅장한 정선의 <금강전도> 등은 볼수록 경탄하게 되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고의 정신세계가 대가의 놀라운 기교와 어우러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양 옛 그림에서는 기운생동을 중시했습니다. 기와 음양오행으로 대표되는 성리학 불교 도교 등의 내밀한 종교적 사유체계가 그림이면에 폭넓게 깔려있다는 얘기지요. 전통미술사학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림 저변의 철학과 역사, 사상체계를 더듬어가는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나 지금 학계는 대체로 이런 논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서구 양식사만을 기형적으로 답습하는 관행에 젖어있습니다. 전통문화토양 내부에서 미학적 광맥을 찾으려는 성찰과 노력을 함께 병행해야지요. 따라서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연구는 더욱 깊고 넓게 하면서도 발표글들은 쉽게 쓰도록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옛 그림읽기는 금전적 가치를 따지는 것과 다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이 영혼을 감동시키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느냐의 문제이겠지요.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서정민 기자westmin@hani.co.kr
오주석은 누구?
△ 1956년 수원에서 태어남
△ 1979년 서울대 인문대 동양사학과 졸업
△ 1987년 서울대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1990년~91년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수
△ 1982년 <코리아 헤럴드> 문화부 기자
△ 1983년~86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원
△ 1987년~94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1995년 김홍도 탄생 250주년 기념 `단원 김홍도 특별전' 등 25차례 전시 기획
△ 현재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중앙대학교 겸임 교수
△ 저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999, 솔), <단원 김홍도>(1998, 열화당)
△ 공저: <우리 문화의 황금기-진경시대>(1998, 돌베개), <단원절세보>(1996, 삼성문화재단)
오주석이 말하는 오주석
고등학교 입학 뒤 난 클래식 기타에 미쳤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직행해 밤늦게 하숙방으로 돌아오는 생활,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동네 기타를 쳐 왔던 터라 일년쯤 되자 그럭저럭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을 연주할 정도까지 되었다. 음악대 입학을 꿈꿨지만 당시엔 기타전공이 없어 좌절되었다.
인문대 진학은 왠지 당연하게 여겨졌다. 문제는 문학, 사학, 철학 중의 선택. 어린 눈에 사학은 문학과 철학을 포괄하는 듯 보였고, 국사, 서양사, 동양사 가운데, 국사는 답답하고 서양사로는 이류학자밖에 안된다는 얕은 생각으로 동양사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은 최루탄으로 얼룩졌다. 공부가 멀어진 대신 농악반 장구 가락과 연극 동아리 배우 노릇에 맛을 들였다. 시인이 되겠다고 두툼한 공책 한 권을 취기로만 메운 적도 있었다.
입영 날짜가 다가왔다. 클래식 다방에서 석 달 동안 디스크자키를 했다. 하루 종일 서양음악만 들으면서 양코배기의 정확한 음정 박자가 못 견디게 지긋지긋해지면, 수제천이나 자진 한 잎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병으로 군생활이 지나갔다. 27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총을 메고 들판에 나가보면, 가을 논 베어낸 벼 그루터기 위로 서리가 내리고 흰 눈이 덮이고 다시 봄 연둣빛에 물들었다가 한여름 일렁대는 푸른 물결, 우리 자연은 우리 가락을 타고 춤을 추었다.
다 늦게 철이 들어 대산 김석진 선생님의 주역 강좌에 입문해 3년간 겉핥기 공부나마 했다. 젊은 날은 두서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옛 그림 공부라는 텃밭에 뿌려진 퇴비로서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문학데이트] 20. 박은정
인간 유전자지도와 동물복제 게놈지도 탐구 등으로 생명과학기술은 정보화혁명과 함께 21세기를 움직일 중요한 열쇠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복제와 유전자 변형 등의 성과들은 인간개념과 실존에 대한 불안감 또한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국내에서 여전히 생소한 생명윤리 담론과 그 법제화 작업을 10여 년 동안 묵묵히 실천해온 박은정 이화여대(49)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성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생명공학자와 인문학적 가치의 융화를 역설해온 박 교수의 지론은 최근 생명윤리위원회 신설 등으로 조금씩 싹을 맺고 있다. 과학철학을 전공한 학문적 도반이자 후배인 소장연구자 임종식(42)씨가 그와 만났다. 편집자
임종식 =<생명공학시대의 법과 윤리> 같은 선생님의 역저를 보면서 생명윤리에 대한 깊은 학문적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가 척박한 상황에서 생명윤리 연구에 일찍부터 눈길을 돌리게 된 배경이 평소 궁금했습니다.
박은정=제가 관련 논문을 처음 쓴 것은 80년대말입니다. 뇌사와 장기이식 문제로 관심을 갖게됐고, 인공수정 소식 등을 접하면서 이런 사건들이 유전자 혁명의 일보가 될 것이란 예측을 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생명공학의 발전은 예측보다 훨씬 빠르더군요. 논문에 미래체로 쓴 글귀들이 10년 뒤 현재형으로 바꾸니 다 그대로 맞아 떨어져요. 그만큼 윤리와 안전성의 측면에서 잠재적 위험요인이 적지않은데도 사회적 합의는 미진한 상황입니다. 인문학자로써 이 문제에 집착하게 된 것은 연구성과가 금방 산업화쪽으로 빠르게 연결되는 데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처럼 옛적엔 연구자 이름이 이론에 붙었는데, 생명과학 연구는 특허제품에 이름이 붙는 게 예사입니다.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껏 과학연구의 자유보장을 당연시해왔지만 지금은 중상주의적 흐름 때문에 과학의 공공성이 무너지고 고전적 윤리도 쉽게 손상되곤 합니다. 그래서 연구윤리를 따지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본 것입니다.
임=딱딱한 법학과 고도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포함하는 생명윤리의 접목은 어떻게 보면 독특한 인식으로 비쳐집니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는지요.
박=생명과 관련해 인류가 합의한 가치는 존엄가치인데요, 그것은 바로 법이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친화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사실 법이란 적정절차를 중시하는 학문인데, 절차적 정의가 생명윤리 영역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연구자와 소비자, 정부, 관련 기업체 등 이해당사자간에 기술적·윤리적 갈등이 많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불임부부가 배우자 체세포를 복제해 `돌리'양을 탄생시킨 그 유전자 기술로 아이를 낳겠다는 의도는 반인간적이라는 주장과 출산의 자유라는 주장이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생명과학 분야는 가치적 합의가 절실하지만 실제로는 쉽지않고 논의도 빈곤해요. 특히 현대사회에서 가치에 대한 추상적 합의가 더욱 희박해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절차적 정당성은 더욱 필요합니다. 또한 법은 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 만큼 생명기술의 개별적 적용사례들이 윤리에 반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기능일 수 있습니다. 제가 관심가진 생명윤리의 문제영역은 그래서 실질적이고, 절차적이고, 구체적인 정의의 문제인 셈이죠.
임=지난 2년 사이 국내에서도 체세포 복제기술을 놓고 생명윤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논의의 중심축은 주로 관련분야 종사자들이어서 질적인 성과에는 회의감이 듭니다.
박=생명공학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더라도 기술적 성과 중심으로만 다루려는 흐름이 강하고 사회적·윤리적·법적인 영향과 평가에 대한 가능성은 여전히 별로 열어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난해 생명윤리 자문위가 결성되고, 과학기술부의 유전공학 연구사업에 윤리·법제 연구를 포함시킨 것은 큰 변화입니다. 문제는 생명윤리 담론들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죠. 인문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가 필요하다면서도 각론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종교계-과학계의 논쟁은 소모적일 때가 많아요. 신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문제를 전적으로 과학자들에게 맡겨놓을 수도 없다고 봐요.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인간 배아복제연구나 경희대 불임클리닉 연구팀의 체세포 배아배양 발표 등은 많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데, 학문공동체를 통해 여과되지 않고 언론에서 먼저 선정적으로 보도해 억측과 오해를 낳았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미국 등은 엄정한 인가절차와 자체 연구규정에 의해 이런 과정 자체를 통제합니다. 우리도 연구와 공표절차를 투명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과학자들의 자발적 의지가 중요하겠지요?
임=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잉여수정란 가운데서 폐기할 수정란을 가지고 배아복제 실험을 한다면 법적으로 허용해야할까요. 배아의 인간개체 여부에 대해 찬반론자 어느쪽도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한 상황이라면 도덕적 위험이 적은 선택을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배아가 아닌 성인 체세포에서 장기기관의 씨앗인 간세포 배양연구에 주력하는 서구의 사례는 좋은 전범이죠.
박=수정 뒤 14일을 기준으로 배아를 인간으로 보느냐 마느냐의 논란이 일고있습니다만 연구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남용되지 않도록 공공성에 입각한 절차에 따르게 하는 것이 전제이겠지요. 배아가 인간인가 조직인가는 철학적·윤리적인 테마일 것 같은데, 간단하게 답을 내기엔 곤란한 문제입니다. 적절한 중용을 취할 필요가 있지않을까요. 이를테면 수정이후 14일 경과 이전의 배아는 인간은 아니나 일반 장기와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라든가 하는 것이죠. 이런 연구들이 상업적 측면을 일정부분 띠고있지만 전체 기술에 대해 바리케이트를 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윤리와 복지 사이에서 경계선을 긋는 법철학적 고민과 노력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임=인류역사상 특정과학분야에서 부가가치 큰 기술력을 확보할 경우 윤리적 이유로 개발을 삼가한 사례가 있다고 보십니까. 결국 그런 기술개발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게 전례였다면 논의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박=기본적으로 오늘날 생명공학 기술이 지닌 장래의 위험성에 대해 줄기차게 문제의식을 가져야한다는데는 이론이 없습니다. 저는 생명윤리의 문제가 장차 사회정의의 쟁점이 되리라고 봅니다. 우려하는 것은 이런 발전이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관용을 말살하는 쪽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할지 모른다는 거죠. 20세기 10대 뉴스에도 들어간 인간게놈 프로젝트 완성으로 유전정보가 폭발적으로 확산될 경우 정보 불균형이 생길 것입니다. 유전자 우열을 따져 정상·비정상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넌 유전자가 달라'라는 식의 불관용이 만연하는 경우도 배제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인간을 위한 과학이란 신념을 잃지않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발전을 끌고갈 수 있도록 시민과 과학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하겠지요.
임=조금 다른 얘긴데…. 기존 사회제도와 도덕관에 이의를 제기해온 여성주의가 생명윤리의 쟁점에서도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여성들은 출산, 육아 등을 통해 생명현장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오랜 경험 탓에 인간의 몸에 개입하는 기술에 여성은 가장 민감하다고 봐요. 생명공학 기술의 적정성과 한계에 대한 여성적 사고와 가치관들은 이런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생태, 환경과 함께 주변부로 밀려나온 여성들의 시각은 생명공학을 포함한 과학기술사회가 발전할 수록 더욱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의료나 생명공학연구자 대부분을 남성이 차지하고 남성중심적인 기술환경으로 뒤덮힌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은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봅니다.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김종수 기자
박은정은 누구?
△ 195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남.
△ 1974년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 197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 졸업(법학박사).
△ 1980년~현재 이화여대 법과대학 교수.
△ 1989~90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객원 연구원.
△ 현재 한국법철학회 회장,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 위원, 참여연대 공동대표.
△ 쓴 책: <자연법사상>(1987, 민음사), <현대의 사회문제와 법철학>(1993, 교육과학사), <인권과 연구윤리>(1999, 이화여대 법학연구소), <생명공학시대의 법과 윤리>(2000, 이화여대 출판부) 등 다수.
박은정이 말하는 박은정
교수란 평생학생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새학기 들어 61학기째 법학을 공부하는 셈이다.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생각은, '있는 법'은 언제나 '있어야 할 법'에 비추어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있어야 할 법'은 인간가치를 정점으로 하는 실천원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0년 가까이 생명윤리에 관심갖게 된 것도, 앞으로 한 세대 동안 각광받을 첨단생명공학이 인권과 인간의 존엄가치에 새로운 도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사람이 지닌 유전자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존엄'보다는 '행복' 혹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나는 행복이니 삶의 질이니 하는 단어들이 두렵다. 필경 저마다 달리 원할 행복과 삶의 질을 찾아 나서면서, 오늘날 가뜩이나 도처에서 목격되는 계층간, 세대간, 국가간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합의는 점점 어려워 지는게 아닐까. 수명을 연장시키고 똑똑한 아이를 갖게 해주고 병 없는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기술이 힘을 얻는 사회일수록, 인문정신은 개인으로서 저마다 다르게 원하는 바 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다같이 원하지 않는 바, 피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사람이면 누구나 당하고 싶지않은 불편, 재난, 굴욕, 억압의 조짐을 찾아다니는 쓰기, 읽기, 사귀기를 계속하고 싶다.
나이 40들어 드나들기 시작한 참여연대 사무실 벽에는 '혼자서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글이 붙어 있다. 이 글을 대할 때마다 읽기와 쓰기 때문에 꿈 꿀 사람사귀기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더 부지런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인문학데이트] 21. 안대회
전통고전은 삶의 지표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지금 세태에서 국학정신을 떠받치는 주춧돌이다. 이번 데이트의 주인공 안대회(40)씨는 옛 선현들이 남긴 한문고전의 바다 속에서 생생한 현실의 지혜를 건져올리고자 애써온 젊은 학자다.
실학자 박제가에 매료되어 `외로이 도리를 지키며 갈길 가는' 벽(癖)의 정신으로 한적읽기에 매달린 그는 대학원 재학중 낸 <균여전> 국역본과 <한서열전>의 국내최초 번역 등으로 일찍 두각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조선후기 시화사연구>와 <윤춘년과 시화문화> 등의 역작들로 한시연구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대중과 호흡하는 한문학을 주창해온 그가 대동문화연구원의 동료인 정은진(31·성대 한문학 박사과정)씨와 만나 자신의 학문세계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편집자
정은진=연구실에서 함께 옛 문헌들과 씨름하다가 이렇게 만나니 좀 어색하군요. 적절한 이야기 상대가 될지 걱정입니다.
안대회=인문학의 그늘자리에 가장 오래 잠겨온 분야가 바로 한문학 아닙니까. 방담 자체가 인문학 발전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정=옛 문헌을 연구하다 보면 문(文)·사(史)·철(哲)이 결코 나뉜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그만큼 옛 선현들의 사유와 학문이 이들 셋을 아우른다는 것이겠지요. 특히 최근 선생님의 조선시대 한시나 시화연구 작업에서는 역사적으로 바라보고 고찰하려는 거시적 안목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조선시대 시화사> 서문에 `무릇 저작이라 할 만한 것은 모두 사학'이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의 문구를 빌려쓴 것도 이런 뜻이 아닐런지요.
안=말씀대로 저는 문학연구에서 역사적 분석에 비중을 두어왔고, 당분간 그런 태도를 지키려 합니다. 그것은 한문학이 연구방법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실과 연관되지요. 50년 고전문학 연구사에서 한문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일천합니다. 한문학의 세계상과 현재 삶의 거리가 갈수록 커지는데도 학계는 객관성을 잃은 채 막연히 오래 된 것을 좋아하는 취미 또는 조상을 기리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주의적 균형감각이 연구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문학을 포함한 대다수 학문에서 역사적 관점은 학문하기의 기본입니다. 현단계로서는 학계가 수많은 학문의 작은 영역에서 작은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한문학으로만 본다면 비평사 산문사 소설사 한시사 전기소설사 등의 세부장르를 시기별 흐름으로 나누어 고찰한다면 전통문화를 훨씬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정=거시적 안목만 강조하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놓칠 수 있고, 선입견에 따른 시대구분의 맥락 안에 작품들을 작위적으로 끼워넣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생기는데요.
안=현재 한문학쪽은 지나치게 주관적 작가론에 매몰되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풍토가 일반화되지 않았습니까. 산문사 소품사 등 작은 영역을 진중하게 다루되 어떤 식이든 역사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나름대로 거시적 시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겠지요.
정=당론이 조선후기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선생님도 저서 곳곳에서 조선후기의 문학적 특질과 관련해 당파성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지금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남인 연구자는 남인의 관점에 치우치고 노론 연구자는 노론의 관점에 치우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당파성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저서를 낸 뒤 `당신은 노론이냐, 남인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어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제가 당론에 치우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한문학계가 그런 파당의식에 지금도 은연중 젖어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학자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각과 정치적 견해를 지닌 것은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 역사를 평가하고 문학을 자리매김하는 데 지나치게 빠지면 역사를 왜곡하고 문학성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겠지요. 주의깊게 자신의 관점을 검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조선중기 이후 문학과 학술을 다룰 적에 경계해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조선후기 남인의 총수 채제공의 평안감사 시절 기행시를 두고 노론문인들은 경망하다고 혹평한 반면, 남인계열의 문인들은 위대한 기상이 엿보인다고 파당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비평이 당론에 따라 갈린 것이지요.
정=한문학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와 시화, 그리고 18세기라는 시기에 주목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18세기는 조선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각별한 세기였습니다. 근래 18세기학회까지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그럴만한 세기가 아닐까요?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흥미를 느끼는 최성대, 이용휴,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정약용 같은 분들이 모두 이 때 위인들입니다. 이 시대만큼 많은 문제적 작가와 학자들이 탄탄한 자기 목소리를 낸 시기도 드뭅니다. 시대적 간격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 학자들의 폭넓고 자유로운 세계관과 풍부한 감성, 날카로운 지성, 인간애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게다가 그들의 고민은 근현대사 굴곡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요. 우리 학문은 외세침략에 의해 이후 타의적으로 단절되는데, 그 연결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거죠. 내가 제일 존경하는 박제가처럼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의식과 그 당시 지성인의 문제의식은 연결되어 있어요. 개인적 기호탓도 있겠지만 한문학 작품만 해도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 19세기에는 별로 없고 18세기에 오히려 많아요. 제가 번역한 책이지만 박제가의 짤막한 소품문(요즘 수필) 같은 데서 현대적 감수성을 읽을 수 있었지요.
정=한문학이 21세기 어느 즈음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 가끔 자문해보곤 합니다. 인문학의 지평에서 한문학의 기능과 필요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우리 인문학은 서구담론에 기초한 학문과 한국적 현실에 바탕한 국학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외세침략에 따른 식민통치로 국가운명을 자율적으로 개척하지 못한 탓에 인문학 자체가 서구 콤플렉스에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따라서 학문의 뿌리는 근대와 그 이전 학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 기초로서 중요한 영역이 한문학입니다. 전통문예 차원이 아니라 고전언어인 한문자체를 다루는 한문학이 담당할 몫은 대단히 큽니다. 백년간을 제외한 국내 전적 가운데 95%이상이 한문이라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학술가치가 있는 한문자료들을 갈무리하지 않고는 인문학의 주체적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고전을 텍스트로 해석하는 문제에 소홀하면 인문학의 취약구조는 심화될 뿐입니다. 분야별 학문사에 대한 통사조차도 정리된 한적자료가 없어 못 쓰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는 한문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셈입니다. 서양인문학자들의 라틴어 그리스어 수준이 우리의 한문실력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유념해야겠지요. 정=박제가의 수필을 번역한 <궁핍한 날의 벗>을 지난 설날 읽었는데, 현대적인 번역문장을 통해 은은한 숯불처럼 시류 비판적인 그의 메시지가 잔잔하게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사실 한문고전은 딱딱하게만 인식되는데요, 한문학 유산을 좀더 친숙하게 대중과 만나게 하는 방법론은 없을까요?
안=지금 말한 주제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한문학자들이 사명감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요. <궁핍한 …>은 한양대 정민 교수와 한국 고전을 새롭게 번역하자며 시작한 첫 결실이었는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어요. 2세기 이전 우리 학자의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산 인간의 체취와 고민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시대 문제가 현실의 문제와 연계됐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었죠. 고전을 현대적 언어로 가공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런 작업이야말로 인문학에 관심있는 고급독자를 확보하는 길임을 확인하게 됐어요.
한문학자는 인문학에 무관심한 대중을 탓하기 전에 그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급독자의 관심을 일깨울 다채로운 고전독서물 개발이 시급하다 하겠지요. 번역시스템의 마련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열쇠는 인문학자들 자체의 자기혁신에 있습니다. 물론 저도 힘 닿는 대로 노력할 생각입니다. `두터이 쌓아 조금씩 덜어낸다'는 `후적이박발(厚積而薄發)'의 각오로 정진해야겠지요.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사진 이정우 기자@hani.co.kr
안대회는 누구?
△ 1961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남.
△ 85년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 94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 98년~현재 계간<문헌과 해석> 편집위원.
△ 서울대 연세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사.
△ 2000년~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책임연구원
△ 쓴책:<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1999, 소명출판),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2000, 연세대 출판부), <조선후기시화사>(2000, 소명출판), <윤춘년과 시화문화>(2001, 소명출판), <7일간의 한자여행>(1999, 한겨레신문사)
△ 옮긴책:<소화시평(小華詩評)>(1994, 국학자료원), <선집 한서열전(漢書列傳)>(1997, 까치), <궁핍한 날의 벗>(2000, 태학사).
안대회가 말하는 안대회
그저 한문이 좋고 학문이 좋아서 시작한 공부가 이제는 업(業)이 되고 벽(癖)이 되었다. 국문과에 적을 둔 대학 초년시절 철학에 더욱 관심을 두어 비트겐슈타인 등을 좋아했었는데 그리스 비극에 탐닉하면서 문학으로 회귀하였다. 우리 문학의 깊은 이해는 한문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게걸스럽게 한문책을 들여보았는데 구두가 달리지 않은 <경서(經書)>를 외우고, <서유기>와 <수호지>를 고생하며 독파한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4학년 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영인본을 사서 읽은 것이 한문학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였다.
대학원에 들어간 뒤 한적을 다양하게 많이 읽으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면서 얄팍한 자신의 국량을 감추지 못하고 번역도 하고 논문도 써서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는데 섣부른 짓임을 갈수록 느끼고있다.
공부, 그 자체는 즐거운 노동이라 어려울수록 쾌락이 배가하기도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은 사서하는 고생이다. 문명의 변모만이 아니라 제도와 인간관계가 채충(##채=病에서 丙글자뺀 부수부분을 祭글자 위에 덧씌운 것##蟲·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들의 장기를 파먹고 산다는 전설상의 벌레)이 오장육부를 파먹듯이 공부하는 즐거움과 의의를 갉아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이 길을 가야 한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지사 장이(張怡)는 그가 저술한 많은 저작을 보여달라는 이에게 "나는 저술하며 한 평생을 마치겠소. 벌써 단지 2개를 마련해놨으니 하관할 때 함께 묻을 것이오"라며 거절하고 저서를 자기와 순장하였다. 장이의 가혹한 처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인문학데이트] 22. 이기상
이번 데이트는 50대 중진철학자와 함께 사상의 오솔길을 걸어본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의 전문 연구자이자 주체적인 철학사유 운동을 주창해 온 이기상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초로 독일에서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이 교수는 1993년 소장연구자들과 함께 우리사상연구회를 창설해 자생적인 철학담론을 모색하며 우리말 철학사전 편찬을 진행해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말로 된 주체적인 철학 만드기를 강조하는 그의 신조를 철학연구자 이은주(37, 외대 철학과 박사과정)씨가 들어보았다. ■편집자
이은주=올해 안식년이라고 들었습니다. 머릿 속이 연구와 저술구상으로 가득할 듯 합니다.
이기상=방학이라지만 밀린 논문 쓰느라고 정신 없습니다. 일욕심 많은 게 탈인데요. 올해도 논문 대여섯편 써야할 것 같고, 번역서 한권도 6~7월께 낼 예정입니다. 후반기에는 내년을 대비해 사이버 강의를 준비하려 해요. 다행히 인문학데이트에서 대담을 핑게삼아 자유롭게 주변 이야기를 털어놓을 말미를 얻은 셈입니다.
이은주=유학 초기 신학을 전공하다가 하이데거 철학으로 공부 방향을 바꾼 이력이 흥미롭습니다. 하이데거 철학은 흔히 존재에게 말을 건네어 존재의 있음, 즉 실존을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되는 데요, 전공을 바꾼 계기와 하이데거 철학이 선생님께 어떤 내용으로 말을 건네는지 궁금합니다.
물질기술문명 추구 존재 망각
이기상=유신이 선포된 72년에 유학을 떠나 84년까지 13년간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 원래 신부가 되려고 떠난 유학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나 자신의 정체성과 진리란 무엇인가란 문제를 놓고 깊은 번민에 빠졌지요. 첫 유학지인 벨기에 사람들은 한국이란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공부하려했던 신학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는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시대 문화의 옷으로서 유럽의 신학은 효력을 다했다는 회의감이 밀려들었고, 두가지 문제를 나름대로 3년동안 고민하다 철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이데거로 방향을 잡은 것은 존재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이 자아와 진리찾기에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지요. 서구사회가 물질기술문명만을 추구하고 존재자체를 잊어버렸다는 점에서 새 사유의 시원이 필요하다는 그의 담론은 매혹적이었고, 그가 제기하는 인류의 철학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오기로 독일에서 학부부터 다시 공부했지요. 그 결과 어떤 사회비판이론도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의 눈보다 앞설 수 없다는 믿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은주=우리 학계는 80년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대표되는 비판이론의 시대를 지나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등 상반되는 담론들이 유행하는 혼란기를 겪었습니다. 서양 철학, 즉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르는데요. 이 땅의 철학적 현실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기상=저는 그것을 한국사회에 적용시켜 본다면 지금 우리사회에 통용되는 세계관 인생관을 포괄한 존재관이란 표현으로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존재를 보는 시각, 더 강력한 표현을 쓰자면 `존재의 눈깔'이라고 할까요. 예컨대 과거 선조들이 상투를 틀었던 것은 단순히 머리깎기 싫어서가 세계와 인생과 존재를 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50년대만 해도 이웃간에 음식을 나눠먹고 상부상조하던 우리 사회문화가 60, 70년대 이후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배금주의로 돌아선 것도 마찬가지로 존재에 대한 시각이 서구중심으로 돌아선 맥락이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은 쉽게 얘기하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에 따라 삶의 기준이 달라지듯이 만물을 볼 때 있음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세상과 사회는 판이하게 바뀝니다. 80 90년대 농지를 이윤의 대상으로 보고 부동산 투기가 횡행한 결과 농촌이 피폐화되지 않았습니까? 농부는 땅에서 재산가치만 보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게 된 거죠. 한 사회에 통용되는 존재를 보는 눈은 이만큼 중요합니다.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패배했고 황폐화되었습니다. 서양식의 존재를 보는 눈이 전세계를 지배합니다. 기술과 과학이라는 생산수단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그 기본축이죠. 이성중심 인간중심에서 벗어나 자연, 우주 등으로 존재의 시야를 확대하자는 하이데거의 주장이 유효한 것은 바로 이런 맹점을 짚는 동양친화적 배경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실존사상 현세태에 큰 호소력
이은주=하이데거 철학은 개인이 자신의 실존을 떠맡고 미래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이뤄진다고 설파합니다. 이 역사성과 실존이라는 의미 안에서 개개인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도 중요할 듯 싶습니다. 이기상=하이데거는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와 시간을 따로 떼어놓았던 기존 시각을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시간 속에 주어진 존재는 시간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었고 그런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시각을 뒤바꾸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하면 이성적 동물이자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선입관을 가지는 데, 그는 두 선입관이 생물학적, 신학적 편견이라는 것을 지적했지요. 이는 곧 다른 말로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언급하지 않고 이념,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점과도 통합니다.
실존개념 속에서 염두에 둘 점은 각자 자기가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 바로 그 존재를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존에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 내던져져 있음이란 차원을 전제하는 데요, 인간은 그런 내던져짐 속에 무기력하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상태를 떠맡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변형시켜나가는 데서 인간다운 위대함이 발견된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부정사실을 알고 자살을 꾀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그 죄의식까지 떠맡으며 실존철학의 시조가 된 키에르케고르의 삶과 아버지의 후광만을 믿고 무책임한 삶을 살다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지만씨야말로 그 대조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속박과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 곧 자신과 사회에 대한 적극적 규정의 노력이야말로 하이데거식의 실존적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가치관 혼란과 개인주의가 극도화된 세태에서 존재의 무게와 책임성을 강조한 실존사상은 그래서 역설적 호소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지요. 이은주=몇년간 심혈을 기울여온 `우리 사상연구소'의 작업내용도 눈길을 끄는데요. `이땅에서 철학하기'`우리말로 철학하기'`주체적으로 사유하기' 등을 모토로 삼으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우리말 철학사전 5년내 완간
이기상=앎과 삶이 괴리되면 철학은 화석이 됩니다. 그래서 철학은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삶에 되먹임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여러 고민들을 우리식의 사유를 통해 우리말로 담아내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겠지요. 인문학 위기를 논하기 전에 자기분야에서는 우리말 읽을 거리를 주어야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요? 그래서 연구소에서 처음 다뤘던 것도 신학자 안병무씨의 자생적 민중신학이었어요. 이어 서너차례의 연구모임을 가지면서 지금 말씀하신 세가지 틀을 잡은 것이죠. 저는 앞으로 대안을 전통사상의 뿌리인 생명철학으로 보고 있는데요, 21세기 인류 최대의 철학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서양의 이성주의에 바탕한 생명공학이냐 전통적 삶을 반영한 생명철학이냐의 갈림길에서 이를 쟁점으로 제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국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세계적 시야로 인류실존의 문제를 감지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구요. 앞으로 생명철학 연구에 주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말 철학하기에 대한 사유의 성과물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60개 개념을 다룬 우리말 철학사전을 5년내 완간할 계획인데, 그 첫 결과물이 6월쯤 `과학인간존재'라는 제목의 1집으로 나옵니다. 재정적 뒷받침만 된다면 장기적으로는 더많은 개념을 포괄한 대백과사전을 엮을 욕심도 있습니다.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장철규 기자chang21@hani.co.kr
● 이기상이 말하는 이기상
우리말로 사유하는 '살림살이 철학'노력
고등학교 시절 혜화동 신학교 기술사 골방에서 나를 헤집었던 물음들이 아직까지 나를 따라 다닌다. “나는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때부터 시작된 <자아찾기>와 <진리찾기>는 지천명의 나이인 50대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신학공부로 시작된 학문에로의 길은 철학으로 확대되고 교육학으로 가지를 치며 그 역시 40년 가까이 되어온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의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을 배우며 지내온 세월도 25년을 훌쩍 넘겼다. 죽음을 향해 한발씩 내딛는 나의 학문의 여정은 여전히 하이데거와 더불어 하이데거를 넘어서 진리를 찾아가는 도상에 있다.
주변국에서 태어나 이방인으로서 유럽의 중앙에서 철학공부를 하며 지낸 13년의 생활은 나에게 우리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자기네 세계관을 확장시키기 위해 벌이고 있는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는 철학적 논쟁을 깊이 들여다보니 그것은 결국 <언어>에 의한 세계해석을 둘러싼 문화권간의 싸움이었다. 우리말로 이 땅에서 우리들이 부대끼는 우리들의 문제를 우리들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사유하여 풀려고 노력하며 살아나갈 때 우리들이 고대하는 `한국 철학'이 태동할 수 있으리라. 한국인의 삶의 문법이 녹아 있는 <살림살이의 철학>이 모든 것을 원자재화 삼아 뒤틀고 쥐어짜는 죽임의 문화에 대응하는 대안철학으로 21세기에 우뚝 설 날을 기대해 본다.
●이기상은 누구?
△ 1947년 경기도 의왕에서 태어남.
△ 1972년 졸업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 1975년 벨기에 루뱅대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 1985년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 대학원 철학박사.
△ 1985-1994년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조교수, 부교수.
△ 1992년 제11회 열암학술상 수상.
△ 1993년 우리사상연구회 창설(현재 학술부장).
△ 1992-1998년 한국철학교육연구회 회장.
△ 1994-현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 쓴책:<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1991, 문예출판사),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1992, 문예출판사), <십대, 그 거부의 몸짓을! 청소년기 부정의 철학>(1994, 천재교육), <하이데거 사상 강좌.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1999, 철학과 현실사) 외 다수.
△ 옮긴책:<실존철학>(1987, 서광사), <철학과 종교. 현대의 종교철학적 논쟁>(1988, 서광사), <철학의 뒤안길>(1990, 서광사·공동번역), <하이데거 사유의 길>(1993, 문예출판사·공동번역),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95, 서광사), <하이데거와 선(禪)>(1995, 민음사·공동번역), <하이데거의 예술철학>(1997, 문예출판사), <존재와 시간>(1998, 까치), <논리학. 진리란 무엇인가?>(2000, 까치글방)외 다수.
[인문학데이트] 23. 김정동
건축은 역사의 맨얼굴
삶의 흘러온 공간 살려야
¨근대사는 역사책보다 장소에 녹아있어
전통민가는 보존되는데
근대시민건축은 관심도 못끈채 사라져
남아 있는 건물 보존 시급¨
`건축은 역사의 맨 얼굴이며, 역사는 건축의 원형질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한국근대건축사의 영역을 닦은 목원대 김정동 교수(53)는 평생 이런 신념을 되뇌며 `옹고집 학문'의 길을 걸어왔다. 전통과 현대건축 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고, 근대건축을 식민지유산으로 금기시해온 건축동네에서 그의 건축사담론은 아직 젊고 낯설다.
그러나 <근대건축기행> 등의 저작과 기고들을 통해 선보인 근대건축사료 발굴작업은 근대성에 대한 학문적 인식을 앞당기고 인문학으로서의 건축담론을 구축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역사경관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하 역사모) 등 그가 주도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도 대전 오정골 선교사촌과 강경근대건축물 보존 등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도 아침저녁 옛 신문의 건축기사를 탐독하고 강단과 건축사 현장을 바삐 오가는 김 교수가 후학 조은경(28·홍익대 건축학과 박사과정)씨에게 자신의 학문관을 털어놓았다.
■편집자
조은경=이제까지 해오신 작업의 특징은 건축 아닌 다른 분야에서 건축적 요소를 끌어내어 대중에게 알리려 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걷는다>란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건축분야 서가에만 꽂혀있었는데 나중에는 인문분야 서가에도 있더군요. 역사로서의 건축을 알리려는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보는 느낌입니다.
김정동=요즘 제 이메일에는 건축학도들보다 일반인이나 인문학자들로부터의 문의가 더 많습니다. 자기 사는 곳의 건물을 누가 세웠고 내력은 어떤 것인지를 묻지요. 관련서적이나 건축물의 지난 흔적들을 가급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그런 작업자체가 참 행복해요. 어차피 근대사는 개화기·식민지사와 맞물려있어 인문학이나 본격사학을 하는 분들도 건축장르를 몰라서는 허구적인 글밖에 쓸 수 없지요. 이를테면 조선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어디 살다가 피살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따위가 대개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는데, 기존 사서들은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보다는 추상적 업적·사상에만 천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실감이 안가죠. 근대사는 일반대중에게 장소로서 녹아있는 것이지 건축가나 사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지껏 전통건축만 문화재라 했다가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최근 관련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그런 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조=건축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사의 중요한 요소임을 누누이 강조해오셨는데요. 그러면서도 그동안 저작에서 특정 사관이 개입된 근대건축통사 대신 해외근대건축이나 우리 근대건축의 개별사례만을 주로 언급한데는 까닭이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김=지금껏 일련의 저술을 낸 이유는 궁극적으로 한국근대건축사의 결정판을 쓰기위한 작업의 일부입니다. 근대건축에서 100% 독자적인 한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전통건축이 아닌 근대 신건축은 새로운 것에 대한 요구에서 출발합니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마천루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소화했지만 아시아쪽은 근대건축을 복사하는 것조차 힘겨웠지요. 따라서 남겨진 우리 것만 봐서는 근대건축사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고전주의나 국제주의 등의 그럴싸한 이름으로 찾아온 근대건축은 우리에겐 의식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인 식민양식의 표현갈래였을 뿐입니다. 조선총독부나 한국은행, 화신백화점 건물 등이 그런 것들이었지요. 저는 우리 근대건축의 흐름이 외국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이상 외국건축부터 먼저 주시해야한다고 보았어요. 신건축의 발생지인 열강의 건축과 이들 양식이 극동, 동남아 지역에 유입되는 과정들을 살펴본 뒤 당시 우리 상황 등을 녹이며 차분히 근대건축사를 쓰겠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음악, 미술 등의 예술사에도 해당되는 것인데, 근대성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지않고 장르사를 섣불리 정리하는 것은 무리란 생각이 듭니다.
조=우리 건축의 역사적 종속성이나 주변부적 성격을 짚어낸 것으로 들리는군요. 사실 한국근대건축과 관련해 학계는 관점이나 시대구분에 대한 정리조차도 미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근대건축사관은 어떤 것입니까.
김=건축가들은 한국성이란 말도 합니다만 어차피 이 땅에 세워졌다면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사회사적 견지에서 건축사를 봐야하지 않을까요. 정치적으로만 보면 식민성에 대한 얘기가 압도하면서 결국 근대성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건축사가의 처지에서는 근대건축물이 외세의 상징이었더라도 지금도 보고 써야하는 시설이란 점에서 갈등이 남습니다. 실제로 재료나 자본의 일부, 건설인력은 우리 것이었습니다. 건물을 짓기위해 서양과 일본의 기술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우리 땅에 역사의 얼굴로서 계속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시대사의 아픈 흔적이자 앞으로 현대건축의 방법론을 해결할 본보기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죠. 사실 눈에 익은 근대건축물들은 당시 건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실제로 주거공간이나 상점 등 민중의 자발적 욕구로 지은 건물이 더 많았습니다. 국도극장, 단성사 철거에서 보이듯 문제는 이런 건물들마저 현대사적 격동과 개발명목아래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점이죠.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하면서 옛 상도 강경의 근대경관 보존운동 등을 하는 것도 이런 `시민건축'을 살리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건축사관에서 총체성을 중시합니다.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 의식, 삶의 양상을 통해 건축을 되짚자는 것이죠.
조=건축에서도 근대를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측면을 눈여겨보자는 얘기군요. 하지만 이런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의 몫이고, 이또한 남아있는 소수 근대건축물을 통해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계가 아닐런지요.
김=전통건축에서는 평민층의 살림집도 조명받고 있으나 근대건축에서는 이른바 `시민건축'인 당시 생활·생산시설 등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습니다. 사실 일제시대 근대기 소설에는 주요 무대로 주거시설이나 교회 따위가 많이 등장하는 데 지금은 족보없는 건축처럼 사라져버렸어요. 지정문화재가 아니란 측면도 있고 관심거리가 되지않은데도 원인이 있지요. 구한말 서울 삼청동에 세워진 최초의 신식무기 제조공장 번사창만 해도 서구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가 서린 기념비적 건물이지만 누구하나 주목하지 않습니다. 해방 뒤 지어진 충남 대천해변의 외국선교사 수양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서구화는 시대의 필연적 흐름이었기에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성격이 뒤섞여있습니다. 단순히 자의냐 타의냐가 아니라, 근대 건축물에 대한 당대사람들의 고민과 의식을 최대한 따라가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조=아직까지 학계에는 근대건축사에 대한 총체적 담론틀이 형성되어 있지 못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작업이 지엽적인 개별건물만을 서구적 근대성의 틀 안에 끼워맞추려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근대성을 논하기 전에 당장 그 논의의 터전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더 급하지 않습니까.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자료목록부터 제대로 정리해야 합니다. 추상적인 건축사관을 따지기보다 불도저에 밀리고 태풍에 날아가는 지방 근대건축물 발굴과 건축기록 정리 등을 통해 연구의 바탕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지금 건축사학자들의 할 일입니다. 게다가 대학 건축학과 교과목에는 전통과 현대건축사를 잇는 우리 근대건축론이 거의 없어 실제로 한국적 근대건축이 어떠했는지 만져볼 기회조차 없습니다. 제가 자료발굴에 목을 맨 것은 어찌보면 그런 답답증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조=학술활동과 더불어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민간차원의 보전운동에도 열심이신데요. 운동의 전망과 계획에 대해 듣고싶습니다.
김=일단 그나마 남아있는 근대건물을 살려야지요. 아직 초보단계이므로 주민들이 자기네 삶의 흘러온 공간에 대해 애착을 느끼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여전히 재산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지요. 보존재원 마련을 위해 제대로 된 기부문화를 만드는 것도 과제입니다. 강경에선 `역사모'와 언론의 도움 덕분에 보존예산 10억원을 확보했어요. 인터넷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꾸준히 관심을 호소하고, 관련학자들이 꾸준히 건축물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죠. 근대건축에 얽힌 새 자료와 건축가의 자취를 꾸준히 찾고 평가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계획이 없는 셈입니다.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김경호 기자jijae@hani.co.kr
●김정동은 누구?
△ 1948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남.
△ 70년 홍익대 공과대 건축학과 졸업.
△ 82년 홍익대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
△ 91년 홍익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
△ 93~94년 일본 도쿄대 객원연구원
△ 96년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초평상)수상
△ 98년 대한건축학회 특별상(남파상) 수상
△ 80년∼현재 목원대 건축·도시공학부 교수
△ 한국건축가협회회원, 명예이사
△ 쓴 책:<일본을 걷는다 1·2>(97~99, 한양출판), <하늘 아래 도시, 땅 위의 건축 1·2>(98, 가람기획),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99, 푸른역사),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2000, 대원사)
●김정동이 말하는 김정동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아름답게 살게되기를
나는 매일 과거와 현재 두 시대를 사는 느낌으로 일한다. 과거 자료를 뒤지며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바쁜 오늘날 과거지사는 그야말로 역사 속의 일이다. 사실 우리 삶은 오늘과 내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건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건축은 예술과 기술의 집합체다. 그 결과물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사회의 얼굴이 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은 다양한 사회를 만든다. 건축이 공학이자 인문학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럼에도 건축이 모든 사람들을 만족치 못하게 하는 원인은 공학, 인문학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건축에 예술성을 집어넣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 인식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서양건축은 아름답다"고만 얘기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회의 공동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류·중류·하류사회가 있었다면 건축도 그 부류에 따라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기 이래 우리에겐 그런 위계 공간이 없었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질곡의 사회를 살았고, 도구에 불과했던 건축가는 우리 것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는 근 1세기를 그렇게 지내왔다.
땅과 건축물이 가진 자의 재산가치라는 인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후손을 위해 이 땅에 남길 의무가 있다. 정치가의 쉰 소리나 학자들의 글 줄은 종이에만 남게되지만 그것을 담아 밖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건축뿐이다. 건축사가의 길은 그 일의 접점을 찾아주는 데 있다. 나 자신 이를 위해 건축의 역사를 챙기고, 오늘 건축의 흐름을 기록하려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건축물 속에서 아름답게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인문학데이트] 24. 이삼성
미 패권주의 속 한반도 평화
우리에게 달렸다
¨미사일방어체제는
미국의 21세기 패권유지전략
자원 파괴적 낭비 초래
반핵·평화 운동 등
인류의 노력은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 끼쳐¨
초강대국 미국을 아는 것은 현대 한국인들의 역사적 실존을 규명하는 것과 같다. 해방 이후 분단과 정치·경제사의 배후동력으로서 미국은 그만큼 우리 삶과 밀착된 그림자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심도깊은 분석서를 잇따라 낸 이삼성(44)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는 여느 정치학자와 다른 행로를 걷고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 사유양식의 문제와 문명사라는 거시적 틀을 중시하는 그의 연구작업은 미국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나 긍정을 피한다. 자국과 다른 나라를 철저히 구분하는 미국세계전략의 본질과 배경을 탐구한 끝에 이른 결론은 평화주의 운동으로 패권산물인 군비확장을 견제하고, 상생의 희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본, 미국 등의 국제평화운동에 활동가로 참여해온 이색경력은 이런 평화담론을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평소 그의 저작을 즐겨 읽는다는 후학 김정아(30·연세대 비교문학 박사과정)씨가 눌변의 이 교수와 `미국읽기'에 얽힌 대화를 나눴다. 편집자
김정아=현실 정치학의 테두리에 맴돌지 않고 폭넓게 미국을 읽으려는 시도가 흥미롭습니다. 국제정치학하면 흔히 가치평가를 배제하고 국제정세에서 패권관계의 실상만 분석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미국의 대외관계를 다룬 선생님의 저작들에서는 그 이면에 일관되게 진보적인 지향점을 꾸준히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느책에서인가 `진보적 외교의 비전'이라고 표현했던 그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이삼성=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저는 지배적인 이론, 담론에 대해 어떤 것이든 약간 거리를 두려는 정서가 있어요. 이론으로 담을 수 없거나 내버려둔 채 있는 인류의 현실이나 인간의 희망 같은 것이랄까요. 미국의 힘이 주도하는 일반 국제정치나 정책에서 느껴지지 않는 부분에 대할 갈증을 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지요. 대개 국제정치학은 정세나 역학관계분석 등을 하면서 어느 한쪽 이론이나 이념적 지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만으로는 세계나 우리 인생의 복잡성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치학의 전통영역으로 규정된 공간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미국정치 이면의 미국 지성사에 관심이 많고 언젠가 연구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현상이나 사물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생이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 않겠어요.
김=최근 저작 <세계와 미국>에서는 주류 정치학계에서 지엽적인 요소로 취급받던 인권 반핵운동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비현실적이며 몽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이런 운동들이 국제 권력관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논지가 눈에 띄더군요.
이=기존 국제정치학계의 지배적 담론은 국가권력이나 거대업 등을 주동적인 행위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역사를 결정하는 힘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다릅니다. 예컨대 탈냉전의 물꼬를 텄던 1987년 미-소 중거리 핵폐기협정(INF)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미국에 대한 유럽 나토동맹국들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끌어낸 것이 바로 유럽평화운동의 급속한 발전이었다는 게 많은 군축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무기가 80년대초 다시 늘어날 조짐이 보이자 반핵평화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여러 도시에서 몇십만씩이 모이는 대규모 시위사태가 80년대초 유럽정세를 뒤흔들었던 거죠. 냉전지향적인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고르비와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정치학자들이 그냥 지나치는 부분입니다만 당시의 상황에서 평화운동은 분명 탈냉전을 이끄는 지렛대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의 노력이 역사전개에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요.
김=최근 한미정상회담에서 현안이 됐던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문제도 그런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 러시아, 유럽의 반대가 만만치않은 데, MND의 의미와 전망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NMD는 방어중심 군사전략이라고 이야기되지만 20세기 무한군비경쟁의 주역이던 핵무기체제를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이뤄지는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인류의 공통자산인 자원을 써야할 곳에 안쓰고 엉뚱한데 쓴다는 점에서 그것은 지난 세기 핵무기 개발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시행정부는 미사일 방어체제 심혈 기울이면서도 20세기 핵무장 해체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과학기술이 군사무기로 전환되는 건 역사적 필연이라고 봐요. 문제는 성숙하지 않은 단계의 과학기술을 군사무기로 전환하려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인류의 자원배분체계를 왜곡하는 상황이라는 거죠. 지금 NMD계획은 핵 우위를 포기하지 않은 채 전지구적 군비경쟁을 새롭게 재촉하려는 미국 권력집단의 정치적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중한 인류의 자원을 파괴적으로 낭비하면서 성숙하지 않은 과학기술을 착취해서 군사무기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에 근본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미사일 방어체제라는 것이 현재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21세기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세계군사전략의 한 중심으로 정립되어 가고 있음이 우려됩니다. MND논란이 미칠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한반도 평화과정을 지켜내고 동아시아 공동안보논의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가 핵심적인 고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미국의 주류담론을 비판할 수 있는 제3세계 지식인의 가능성도 이런 경험들에서 나오지 않을까요. 코소보 사태의 경우 미국의 패권주의와 국가테러뿐 아니라 코소보 지역 내부의 갈등요인도 지적하셨는데, 제3세계의 역사적·정치적 역량에 대한 자기확인이야말로 미국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아닐까요.
이=제3세계의 현실을 규정하는 것이 초강대국 미국의 권능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들도 미국의 정책판단이나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반도 정세에서 미국이 직접 변수임에 분명하지만, 북한핵·미사일 문제를 둘러싼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의 선택과 사회집단간의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기본환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부시 집권 뒤 국내 수구세력이 다시 냉전논리를 재생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대처해야합니다. 현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실패를 바라는 세력이 광범위하게 포진해있지 않다면 부시정부가 그렇게 `방자하게' 목소리를 높일 수 없겠지요.
김=미국담론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많이 이야기한 듯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NMD중심의 새 패권질서 앞에서 미국에 대한 학문적 인식 자체도 바뀌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미국의 세계지배메카니즘은 경제군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과 문화적 흡수력 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성격을 지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삶과 세계의 환경을 규정하는 현실의 구조로 이어집니다. 미국비판이,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될 때 우리는 삶의 기본조건을 스스로 자기부정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어떤 측면을 어떤 이유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를 중시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풀어 미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부정이나 비판과는 좀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보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제글들을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우리 정치사회경제적 삶과 세계의 조건이라는 것이 긍정과 부정의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동시에 그것은 미국의 세계패권이란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책에서 제기한 것들은 사실 미국비판이라기보다는 미국 권력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질서의 문제입니다.
김=미국연구의 측면에서 국제평화운동에 참여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구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할 지 궁금합니다.
이=궁극적으로 평화의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치사를 얼룩지게 한 대학살과 인권침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21세기 정치학의 근본과제라고 생각하는 데 그것은 곧 세계질서와 거기에 가장 깊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분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21세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미국의 문명과 사유양식, 외교행태 등을 연결지어 이해하고 대안을 내포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 불변의 과제가 되겠지요.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곽윤섭 기자kwak1027@han,co.kr
●이삼성이 말하는 이삼성
어릴적 황혼녘 고향마을 내 정신의 탯줄
사람들은 때때로 저마다의 이유에서 이른 새벽에 잠을 깬다. 그리고 새벽의 정적과 침실의 어둠 속에서 가슴 에이는 질문에 부딪친다.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대로의 삶을 용납할 수 있는지 회의하기도 하고 이 일상을 언제까지 이을 수 있을지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삶의 껍질들을 걷고 그 의미의 뼈마디들을 긁는 아픈 질문들을 어둠 속에서 망연히 응시하게 된다. 그것은 현재 삶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허무의 의식이며, 삶과 일상의 존재근거에 대한 정체 모를 불안과 비확신의 표출이다. 이같은 회의와 불안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경험한, 삶의 근원적인 탯줄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아픈 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형태로 근원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살아가듯 나 역시 언젠가부터 내가 갈증하는 그 근원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 정신의 탯줄을 생각할 때 언뜻 떠오르는 한가지 이미지는 어린 시절 황혼녘 고향마을을 둘러싸기 시작하던 어스름, 삶의 놀이터와 우주 전체를 조용하게 감싸오던 그 절제된 빛과 무한히 부드럽던 어두움이다. 그 신비스런 천지의 내음과 분위기 속에서 경험한 내 영혼의 소스라침이 인생의 어느 시점 이후 상실하게 되는 근원과의 밀회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학업은 궁극적으로 내 빛깔의 생(生)의 의미를 찾는 고고학일 것이다. 유년(幼年)의 새벽에 가능했던 근원과의 밀회를 다시 꿈꾸는 안타까운 시지푸스의 노동일지 모른다. 과학이기보다는 지혜의 추구이고, 집단적 노력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산책자의 끝나지 않을 꿈길에 가깝다.
●이삼성은 누구?
△ 1957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남.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 미국 예일대 정치학 박사.
△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임.
△ 현재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 쓴책:<미국외교이념과 베트남전쟁>(1991, 법문사),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민족주의>(1993, 한길사), <현대미국외교와 국제정치>(1993, 한길사),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1994, 한길사),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1995, 당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1998, 한길사), <세계와 미국>(2001, 한길사).
[인문학데이트] 25. 구승회
개인자유의 절대가치를 강조하는 아나키즘이 현대 지식인들을 새롭게 매혹시킨 데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인간을 속박한 근대문명의 독선적 사고를 배격하면서도 인간이성에 대한 도덕적 믿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5년 <에코필로소피>를 출간해 학계에 생태철학 연구의 서막을 열었던 구승회 동국대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란 등식을 깨는 데 힘써온 아나키스트다. 생태환경문제를 인간과 인간의 문제로 통찰하고, 이성과 도덕으로 자연, 인간의 공동체를 모색하는 그의 방법론은 특히 명분론에만 집착해온 국내 환경운동에도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다. 아나키즘 관련 논문을 준비중인 동국대 대학원생 심지원(27)씨가 그와 에코 아나키즘의 의미와 한계, 전망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편집자
지구적으로 생각하되 자기동네부터 시작해야
¨아나키즘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규제된 자유 강조
협조와 공생에 바탕한 소규모 자연공동체 지향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대등
탈중심적 관점이
에고아나키즘의 핵심¨
심지원=이번 데이트 주제인 아나키즘을 얘기하려면 아무래도 얼마전 상영된 영화 <아나키스트>를 화제로 꺼내야할 듯 싶네요. 영화 보셨나요.
구승회=비디오로 봤는데, 그다지 유쾌하게 보지는 않았어요. 영화 덕분인지 제 아이들이 외출할 때 옷깃을 접고 나오는 걸 보고 “아빠 깃 올려. 그래야 아나키스트야”하고 웃더군요. 역시 21세기에도 아나키스트는 빈정거림의 대상인가 봅니다. 물론 영화제목은 흥행을 위해 붙였겠지만 줄거리는 20~3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21세기 아나키스트들의 모델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당시엔 두 부류가 있었는데, 영화처럼 낭만주의자로써 사회참여 의지를 지니면서도 놀이로서 아나키즘을 추구한 부류가 있었고, <아리랑>의 혁명가 김산처럼 도덕적인 지성인 부류가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영화는 일면만 비춘 셈이지요.
현대 아나키즘의 네가지 특징
심=아나키즘하면 무정부주의자로 뭉뚱그려 생각하는 부정적 시각이 강한데, 그런 편견의 뿌리는 어디서 비롯됐는지요.
구=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백년 이상된 역사적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말뿌리인 `아나키'는 원래 사람을 비난하는데 쓰는 용어입니다.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주의자 프루동이 정형화한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사용하기 전까지는 매사 부정적인 인간형을 조롱할 때 쓰는 형용사로 쓰였습니다. 뒤이어 아나키즘 혁명론을 정립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마르크스와 논쟁할 당시엔 마르크스의 동료 엥겔스가 아나키스트들을 슬라브민족주의자라고 몰아세우면서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들이 유포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스파링 상대'였던 셈이랄까요(웃음). 국내에서는 일제가 불온한 조선인(불령선인)으로 분류한 사람들이 대부분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인식이 뿌리박힙니다. 실현불가능한 극단적 자유주의 이념을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견지한 만큼 일반인들이 일탈적인 몽상가들이란 편견을 가질 수 있었다고 봐요. 심=말씀대로라면 최근 부각되는 아나키즘은 과거와 상당히 달라졌다는 의미인데요. 현대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구=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학적 공산주의라는 명쾌한 단문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나키스트는 그렇게 대답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명징하게 체계화하고 구조화한 혁명이념이라기보다는 일상 삶의 문제에 매우 가까운, 보편적인 사람들의 심성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체로 네가지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사회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인데요, 흔히들 말하는 사회계약론과 달리 아나키즘은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자연적 결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것인데요. 방종이 아니라 자기규제된, 즉 자주관리적인 개인적 자유를 강조합니다. `내 자유는 내가 다 가진다'고 보기에 계약중심의 사회틀에 속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구성된 사회니까 연대의 개념이 소중해지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세번째 특징은 협조와 공생에 바탕한 소규모 자연공동체를 주장한다는 거죠. 고전 마르크시즘이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며 세계주의와 국가소멸, 평등사회 유토피아를 강조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덧붙여서, 주어진 사회시스 안에서 평등한 분배와 위계구조의 철폐가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반성적 분노와 저항이야말로 사상적 기반이 되는 셈이죠.
심=현대 아나키즘의 사상적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고 알고있습니다. 다른 사상과는 어떤 측면에서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아나키즘은 포괄적인 사상체계입니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식으로 말하면 거대담론인데, 여러 사상, 심지어 기독교, 불교까지도 연관시킬 수 있어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취약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운동의 영역들이 확대되어 각기 다양한 지향과 목표를 갖게 된 상황에서 아나키즘적 틀은 사안별로 각각 친화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외국인노동자 권익운동, 여성운동 등이 사안별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데 이들과 넓게 연대·협조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는 거지요. 세계화 시대에 아나키즘은 분절화되는 문화집단간의 차이를 매개하고 절충하고 조절하는 접착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한국적 아나키즘 양식으로서 계속 천착해오신 에코아나키즘론이 눈길을 끕니다.
구=아나키즘과 생태학을 접목시킨 개념이지만 아직 완결적인 사상체계는 아닙니다. 살을 더 붙여야겠지만 분명한 지향점 가운데 하나는 환경생태문제가 초계급적으로 풀어야할 과제라는 점입니다. 청와대 산다고 오염된 서울공기를 마시지 않을 수 없고, 부잣집, 판자촌 가릴 것 없이 서울시민이라면 팔당저수지의 오염된 상수도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따라서 환경문제를 계급해방적 관점에서 접근해선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굉장히 글로벌한 문제임에도 해결은 글로벌하게 이뤄질 수 없다는 고민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코아나키즘의 해법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대등한 존재라는 탈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라는 환경운동의 명제를 실천하려면 자기 나라 자기 지역 자기동네의 환경문제 해결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거지요.
심=서로 부조하는 자발적인 지역공동체를 에코아나키즘의 구체적인 실천방식으로 주장해온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가 지금껏 종교나 사회단체에서 펼쳤던 소규모 공동체 운동과 어떻게 다른거죠.
구=러시아의 19세기 사상가 크로포트킨이 역설한 상부상조와 공유의 아나키 공동체가 가장 적절한 대안사상이라고 봐요.사실 아나키즘이 꿈꾸는 자족적 생태공동체는 스스로 자동차나 기계류까지 만드는 완전무결한 공동체가 아니라 환경자족적 공동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마을에서는 구정물을 단 한방울도 배출하지 말자거나 쓰레기수거차가 오지말게하자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어요.
심=공동체개념이 인간의 거대한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란 비판이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구=자본주의체제의 광고와 같은 욕망의 확대재생산 방식이 아나키즘 공동체에는 없습니다. 아나키 공산주의 공동체는 욕망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아니라 적어도 강제된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마냥 고상한 공동체는 아니지요. 독일 유학할 때 지도교수 집에서 석달간 사는데 68년산 흑백텔레비전을 보고있어 깜짝 놀란 기억이 있는데, 아나키즘적 삶은 일상에서 그런 삶의 양식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됩니다.
환경자족적 생태 공동체 꿈꿔
심=한국아나키즘 학회창립을 주도하셨지요. 학문편력을 비유하자면 녹색외투에서 아나키즘 외투까지 걸치고 있는 셈인데 앞으론 어떤 옷을 선물할 생각인가요.
구=더이상 보일 색깔은 없어요(웃음). 검은 색깔이 흔히 아나키스트를 상징하는데, 난 가능하면 무정부주의로 대표되는 극단 테러리스트, 허무주의자 따위의 부정적 시각을 엷게 만들고 흑색과 녹색을 잘 조화시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항상 유연하게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에코이데올로기의 토양을 갈이하는 것이 제 구실이 되겠지요.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root2@hani.co.kr
구승회가 말하는 구승회
삶을 계획하지 않아 자유롭다
내가 나를 말하는 것, 더욱이 혼잣말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들을 강제된 회고에는 '계산된 인생'이 삽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하랴! 거울은 나를 비추지 못하고, 오직 내가 보여주는 나를 비출 뿐인 것을.
어릴 적부터 남달리 수줍음이 많았다. 수줍음은 기질이라기보다는 그런 풍습에 젖어 있던 안동이라는 곳의 독특한 유교문화와, 겸양을 최고 미덕으로 가르치셨던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치 않은 나로서는 "돌아보는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원칙으로 살았다. 누구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가능하면 나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비밀이 적으면 발걸음이 가볍고, 발걸음이 가벼우면 옳든 그르든 먼저 결정하고, 먼저 판단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이런 전략의 치명적 단점은 결정과 판단에 대한 오류가능성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포기하라!"는 보충 원칙이 필요했다. 매사에 '지는 게임'을 하자는 것인데, 처절한 생존·승인 게임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태도만큼 든든한 배후는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는 게임에 임하는 자는 '계획'이 필요없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는 인생을 계획할 수 없다!"는 제3원칙을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나키스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삶을 자기계획 아래 둘 수 있다고 믿고, 전략을 세우는 친구들을 경멸한다. 계획과 신념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뜻을 세우기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어떤 이념에 대한 봉사도, 인생계획도 가져본 적이 없다. 돌이켜 보건대 참으로 찰나적이고, 아슬아슬한 임기응변이었을 뿐이다.
구승회는 누구?
△ 1956년 안동에서 태어남.
△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사).
△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 독일 다름슈타트대학교 역사·정신과학부 졸업(철학박사).
△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역임.
△ 한국아나키즘 학회 창립회원.
△ 현재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윤리문화학과 교수.
△ 지은책: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1994, 온누리), <에코필로소피>(1995, 새길), <아나키·환경·공동체>(공저·1996,모색출판사), <철학의 변형을 향하여>(공저·1998, 철학과 현실사)△ 옮긴책: <칸트와 더불어 철학하기>(1993, 청하),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1996, 한국경제신문 출판부), <환경윤리학의 제문제>(1997,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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