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민/포천나눔의집 이주노동자 상담소장
‘다문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한국 유입이 시작된 지 20여년이 흘렀고, 10여년 전부터는 농촌을 중심으로 결혼이주 여성들이 늘어나자, 방송이나 신문을 중심으로 다문화 사회를 준비하자는 타이틀로 프로그램과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정부 부처나 지자체별로도 지역의 다문화화와 이주민들을 위한 예산을 편성하고 각종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 ‘다문화 센터’, ‘다문화 거리’, ‘다문화 축제’ 같은 말들에도 이제는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이는 그동안 제3세계 이주민을 편견과 차별, 혹은 동정으로 대하던 시각을 교정하자는 것으로, 그들의 문화와 한국 문화가 이제는 상호 공존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진일보한 움직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문화 움직임에서도 예의 한국의 ‘빨리빨리’ 정신과 ‘냄비정신’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보게 된다. 언론은 일제히 기삿거리가 나오는 사진을 찍기 바쁘고, ‘김치를 잘 만드는 효심 좋은 동남아 며느리’ 찾기에 나섰으며,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비용을 지원한다든가 ‘하인스 워드’나 ‘다니엘 헤니’ 같은 혼혈 성공 사례를 찾아내기 바빴다.

기실 다문화라는 말은 이미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이주민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백년 넘게 다루어져 온 주제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민족적·인종적·계급적 갈등과 차이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또 다문화주의 이면에 각기 다른 종교와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 식민지배를 가한 나라의 문화와 겪은 나라의 문화, 정복한 백인의 문화와 정복당한 원주민의 문화가 각기 등가의 ‘문화’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마치 ‘외국인 몇 명 시대가 도래했다’는 식으로 ‘새마을 운동’ 하듯이 다문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히잡을 쓴 학생들의 등교를 막아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다양성을 주창하면서도 다양성을 그 사회에 접합시키지 못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문화는 ‘다문화’적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 스스로 우리 안에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인식 속에는 우리 사회의 ‘베트남 문화’, ‘파키스탄 문화’가 들어와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이 이 사회를 활보해야 그것을 다문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 보면 한국 문화에서도 갓 쓰고 도포 입고 치마저고리 입는 시대는 진작 지나지 않았는가.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로 오는 건 단적으로 말해 ‘경제적’ 이유에서다. 먹고살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지구화 속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이동을 국경으로 제한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가운데 불법체류자를 향한 살인적인 단속과 불합리한 노동환경, 피폐해진 농업정책과 인신매매적 국제결혼이 성행하고 있다. 그중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저가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사람들의 이동을 통해 이익을 내는 사람들이다. 지금 한국에서 다문화란 인간을 이윤의 관점에서만 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그 가운데 생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화’의 만남이지, 결코 ‘한복’과 ‘아오자이’의 만남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다문화화는 이런 경제중심적인 문화를 ‘인간 중심의 문화’, ‘함께 상생하는 경제’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문화화’가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외적인 다양성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나마도 아직 ‘단일민족’ 운운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종민/포천나눔의집 이주노동자 상담소장

[한겨레 2007-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