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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으로부터 듣다⑧

사이박사 2009. 6. 12. 12:27

취업을 거부당하는 재일조선인
[특별기획] 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으로부터 듣다⑧
 
여성주의 저널 일다 림혜영
일본식 이름이 아닌 본명을 사용한 채로 일본교육기관인 공립학교를 다니던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미처 몰랐었다. 장래 꿈을 생각하면서, 만일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면 그건 나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그 외에 어떤 제한이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사회구조적으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차별을 받는 대상에 내가 포함될지 모른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십대시절을 지냈다. 주변 친구들처럼 공부 열심히 해서 소위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어느 정도 인생이 보장되는 줄 알고 인생 밑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땐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런 딸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우리 부모는 “넌 주변 친구들과는 다르다. 똑같이 행동하더라도 앞날엔 너를 기다리는 길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걸 잘 알아둬야 한다, 알겠니?”하고 가끔씩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 말이 ‘고마운 조언’은커녕 그저 ‘잔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내가 어디가 친구랑 달라?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복 입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수다 떨고 그러는데!” 하고 반발했다.
 
아르바이트 구직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된 현실
 
▲ 대학 졸업식
그런 나에게도 취직난이라는 ‘시련’이 찾아왔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강의실에서 친구들과 아르바이트 구인전문잡지를 넘기며 해보고 싶은 ‘알바’를 체크했다. 어떤 친구는 공중전화로 바로 연락해 면접 날을 잡았다. 나도 집에 돌아와 몇 곳 마음에 드는 회사를 골라 설레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통화는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밝히자, 상대편의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만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뒤에서 누군가와 상의를 하는 분위기다. 면접 날짜까지 정해놓고서 갑자기 “접수마감”이라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외국인을 고용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구실’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챈 것은, 이런 방식으로 몇몇 회사로부터 아르바이트 구직을 거부당하고 난 후였다.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던 구인잡지가 결코 살아가기 쉽지 않은 나의 현실을 대면하게 만든 것이다. 좋아했던 빵집, 카페, 레스토랑, 서점 등등. 단골집이라서 첫 아르바이트 하기에 참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던 나의 순진한 생각은 너무 차가운 현실 앞에서 잘라져 버렸다.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 당했던 경험을 제외하면,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일본사회에서 거부당한 경험이었다. 그때서야 부모가 하시던 “넌 다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외국인은 안 된다’는 이유라지만, 우리는 일본어가 모어(母語)인 특별영주권자이고 일본 법률상에서도 ‘특별영주권자들에게 취직에 있어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 따위는 고용주들에게 별 가치 있는 항목들이 아니었다. 다만 ‘외국인’은 ‘귀찮고 복잡한’ 존재이고 되도록이면 관련되지 않는 것이 좋은 대상인 것이다.

 
일본어가 모어(母語)라 업무를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특별영주자이기 때문에 불법취업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죄송합니다. 인연이 없었던 걸로…” 하는 식으로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하기 싫었던 학원강사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학에 직접 들어오는 구인정보는 ‘대학교’라는 사회적 신뢰가 있는 기관이 알선해주기 때문에, 재학생으로서 첫 관문을 쉽게 통과할 수가 있었다. 나도 본의 아니게 ‘교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의 이중생활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이 바로 사회의 소수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공평한 기회를 가질 권리’ 문제와 바로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식적으로 배우려 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서, 주변 재일동포들의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고모부는 재일동포 2세인데 나와 같은 재일동포 학생동아리 출신, 즉 내 선배이기도 하다. 그는 광고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2세 중엔 그리 많지 않는 “월급쟁이”다. 이렇게 말하면 소수자 중에 ‘성공사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그는 회사에서 일본이름으로 일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고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모부는 대학 때 ‘민족’을 배우는 우리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자녀 세 명 다 ‘본명’만 지어준 사람이다. 그러니 일본이름(창씨개명)을 사용해야 하는 사회생활로는 그 마음이 충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전통악기인 장구를 취미로 배우다가, 완전히 재미가 붙어서 어느새 장구를 가르치게 되었다. 다만 오로지 주말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장구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가진 소중한, 또 하나의 얼굴인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이중생활은 근본적인 의미를 짚어보면, 스스로 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우선 먹고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일을 구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직업을 구하기에는 일본의 노동시장이 재일동포들에게 아직 문턱이 높은 것이다.

 
기업광고탑 용으로 채용되는 극소수 재일조선인

 
최근 몇 개 지역에서 공무원 채용 시 국적조항을 철폐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국가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지방공무원 차원에서지만 말이다. 그런데 채용에 있어서 국적 관련한 차별을 없앤다는 직종이, 지방공무원 중에서도 어느 정도 권력이 있는 자리까지 승급하지 못하는 직종에 한정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재일조선인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봤자 출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또한 ‘공평한 기회를 가질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다.

 
얼마 전부터 언론사나 대기업들은 기업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요즘은 주로 “일류대학교” 출신 재일동포 인재들을 기업광고탑 용으로 적극 채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때문에 극소수이지만, 알아주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3세들이 있기는 하다.

 
대학 때 만났던 한 친구도 어마어마한 일본 대기업에서 종합직(남성들처럼 승진에 제한이 없는 직군)으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그녀는 우리말에도 아주 능통했다. 하지만 그 회사에는 일본이름으로 취직했고 우리말을 사용하는 직종도 물론 아니다.

 
이렇게 채용된 재일조선인 중에는 광고탑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만약 아무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제 ‘일본인에 동화가 다 되었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우리 재일동포 사회 내에 존재한다.

 
일본도, 한국도 소수자에게 ‘열린 사회’되길

 
한편으로 나는 재일동포의 취업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지난 여름 UN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로부터의 ‘다민족적 성격(multi-ethnic character)을 가진 사회라는 것을 인정(recognize)”하라는 내용의 권고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이 단일민족국가 이미지와 혈통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소자고령화(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몇 십 년 전부터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와 힘든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일본사회 못지 않게, 이제 한국도 다양한 구성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대우의 문제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으로 일본사회에서 차별 받고 노동시장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았던 경험에 비추어, 나는 일본사회뿐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민족주의와 혈통주의에 기반한 폐쇄성을 벗어나 소수자들에게 ‘열린 사회’가 되길 바란다. ‘다르다’는 이질성에 대해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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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15 [17:13]  최종편집: ⓒ www.ild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