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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으로부터 듣다⑥

사이박사 2009. 6. 12. 12:27

소수자에게 자기 긍정의 힘을 주는 사람들
[특별기획] 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으로부터 듣다⑥
 
여성주의 저널 일다 림혜영
그때 아버지의 진지한 눈빛, 차분하지만 흔들림이 없는 말투는 ‘아, 이제 일본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구나’라고, 초등학교2학년이었던 나로 하여금 분명히 깨닫도록 만들었다.
 
학교친구들과 같은 이름을 지어달라면서 우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으신 아버지는 눈높이를 맞춰 똑바로 내 눈을 보면서 “혜영이는 일본사람이니?” 라고 물어보셨다. 아버지의 확고하면서 자신이 넘치는 모습에, 순간 나도 모르게 고민하며 “글쎄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렇지! 일본사람이 아니지. 일본사람이 아닌데 일본이름이 있어야 할까?”라고 거듭 물어보셨다. 그 질문에 나는 “아니요, 없어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답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지, 그럼 이대로 링혜영으로 학교 다녀보자꾸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전에는 어린 마음에, 일본인들 가정에서는 별로 먹지 않는 것 같은(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마늘이나 김치, 참기름이 우리 집 밥상에는 거의 항상 등장한다든지,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이면 그때만 갑자기 “고맙습니다” 라는 우리말을 해보라고 시킨다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 아무래도 내가 일본인이 아닌 것 같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때 아버지의 말씀은 내가 본명(민족명)으로 살아가도록 방향을 짓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그 한 마디
 
그러다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긍정할 계기를 최초에 얻은 것은 대학입시를 위해 다녔던 학원의 논문수업 시간이다. 강사인 U선생님은 전공투 마지막 세대(일본 학생운동세대)이고, 법학부를 졸업한 뒤 미대에 다시 입학한 경력을 가진 일본화가였다.
 
어느 날, 논문의 주제가 재일조선인과 다소 관련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사는 것이 그들 책임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배의 결과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 가슴에 크게 울렸다. 강의 후 선생님에게 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선생님은 반가워하시며 앞으로도 수업시간에 자주 재일조선인에 대해 언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실제로 토론시간 등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하곤 했다.
 
일본인이 재일조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죄악”이라고 단언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접한 것은, 내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비굴할 필요가 없고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식민지 역사 때문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만난 일본인 교사들 중에 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에 대해 배려를 해준 사람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이 역사와 우리말을 배우라고 몇 번 권하셔도 “평생 일본에서 살 건데 그런 것 따윈 필요 없다”며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었고, 조선반도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내 앞에 U선생님이 나타난 것이다.
 
일본인인 U선생님으로부터 일본에 전쟁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계속해서 일본사회로 인해 부정당해왔던 조선인인 나 자신을 인정해도 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자기긍정을 해나가는 길의 입구에 서게 된 마음이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진지하게 대면하면 진심으로 나오는 소리와 닿는다는 것. 아무리 부정만 했던 일에 대해서도 그 정당성을 알게 될 기회만 주어진다면, 제대로 사실을 배우게 되면, 긍정할 자세가 되어 자시 자신의 세계를 넓힐 힘이 사람에게는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나는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힘내라는 말이 힘이 되지 못할 때
 
대학 과 친구 중에 같은 재일동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녀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나와 대학 측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었다. 입학 첫날 자기소개를 했을 때, 그녀가 나에게 살짝 와서 “본명을 쓰고 있다니 기특하네. 대단하네”라고 속삭였다. 그 다음 날에는 “남과 북, 어느 쪽이야?”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내게는 가족과 친척 외에는 평소 관계가 있는 재일동포 커뮤니티가 없어서 “조선반도”와 관련된 일들은 일절 ‘눈 위의 혹’처럼 보지 않으려고 애써 피하고 다녔기 때문에, 뜻밖에 그러한 질문을 받아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일본인”인 그녀(그녀의 일본이름은 일본다운 것이었다)가 왜 그렇게 내 본명이나 국적에 관심을 보이는지 참 신기하게 느꼈었다.
 
몇 주 지난 어느 날, 담당교수가 “림혜영씨하고 OO씨(그녀), 지금 저랑 같이 제 연구실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서 교수는 입을 열자마자 우리 둘에게 “당신들 재일동포, 즉 소수자들이 힘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그 교수의 말로 인해, 나는 그녀가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교수는 당신이 러시아 유학 시절에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경험이 있기 때문에 차별 당하는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의 체험을 말해주면서 우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유학생 신분으로 러시아에 체재한 그와, 구 식민지 출신자의 후손으로서 “특별영주자” 자격으로 거주국에서 살고 있는 나하고는 법적 지위가 달랐다. 뿐만 아니라 러-일 관계와 조선반도-일본의 관계의 역사적 차이를 생각해봐도 교수의 말은 석연치 않는 느낌을 주었다.
 
그 교수로부터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배우면서 “일본과 러시아” 관계로만 일관되어 그 사이에 가로놓인 조선반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되는 강의내용에 위화감이 생겨났었다. 때문에 그의 “힘내세요”라는 말은 듣는 나의 입장에서 너무나 어색했고, 별로 “응원자”를 두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함께 고민하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
 
이후 같은 과의 재일동포 친구였던 00은 자기가 “비적출자(혼인 외 출생자)”라고 이야기했다. 부친이 일본인이지만, 재일조선인인 어머니와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 호적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라 했다. 그녀는 조선인 차별에 비적출자 차별이라는 사회적으로 이중적 소외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 상황을 걱정한 어머니가 그녀의 친아버지 성을 사용하게 해서,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취직할 때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대학 졸업 무렵에 일본에 귀화신청 할 예정이라고도 말했다. “살기”위한 선택.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기”위한 선택을 하며 사회 한 구석에서 남몰래 사는 재일조선인들이 많다.
 
다수자들이 자기들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소수자를 말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쉽고 편하게 할 수 있으니 때로 무책임하게 된다. 소수자 집단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기쁘고 정신적인 힘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남일이 아니라 자기 문제로 고민해주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함께 분노하고 울고 웃고 해주는 이들. 사회제도의 불합리와 사람들의 무관심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이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기긍정감을 준다. 그러한 시간을 한 명이라도 많은 경계인, 또한 경계인과 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한국사회의 시민들과 나누어가지고 싶다. 한국을 본격적으로 만난 10년 전부터 변함이 없는 나의 이 마음은 짝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언제 잘 익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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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24 [22:33]  최종편집: ⓒ www.ild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