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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나라 언론은 뭔가에 단단히 홀려 있다. 바로 ‘알권리 만능주의’다. 국민적 관심이 큰 이슈는 뉴스가치가 크고 따라서 언론이 이를 집중 조명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마구잡이식’ 보도 행태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 참사사건은 언론이 알권리를 빙자해 저널리즘 정신을 망각한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법하다.
첫째, 우리 언론은 시중에 떠도는 미확인 정보를 여과없이 보도하면서 오보성 기사를 양산했다. 용의자의 국적, 범행동기, 조씨 부모의 자살설과 모친의 강도 총격 사망설 등이 그랬다.
이젠 아예 이런 경우를, 예기치 않은 사건의 초기 보도과정에서 으레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관계의 정확성은 어떤 경우에도 보류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근간이다. 오히려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일수록 확인된 정보만을 보도하는 게 언론의 철칙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언론은 그 순간 ‘황색지’로 전락한다.
둘째, 우리 언론은 아니나 다를까 사건을 선정적으로 처리하는 구태를 잊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범행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는 것은 물론 조씨의 섬뜩한 육성과 동영상, 사진을 그대로 노출했다. 심지어 <문화방송>은 바로 이 때문에 미국 방송의 상업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전하는 와중에도 문제의 영상을 반복했다. 몰염치의 극치다. 이는 진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사건을 시청자의 이목이나 붙잡아둘 ‘호재’로 여긴 장사치의 심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셋째, 우리 언론은 가해자 주변 인물들의 인격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가족이고 친지라고 해서 이들의 사생활이 무고하게 침해되고 명예가 훼손당할 이유가 없다. 조씨는 이미 언론에 의해 반사회적 일탈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등은 조씨 누나의 실명과 직장, 사진 등의 신상정보를 시시콜콜 공개했다. <한겨레> 등은 조씨 가족의 과거 행적을 이 잡듯이 파헤쳤다. 그 전리품으로 이들이 서울의 반지하 집에 월세로 산 ‘이력’과 조씨 부모가 이웃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취향’을 소개했다.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조씨의 인격 장애와 무슨 관계인가. 행여 언론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비사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외톨이가 된다고,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암암리에 전제했던 것은 아닐까.
알권리라는 미명 아래 언론의 미확인 정보 유포가 정당화될 순 없다. 생생한 화면을 제공한다고 ‘친절한’ 뉴스가 되는 게 아니다. 인격권을 내팽개친 무분별한 보도는 엄한 희생양을 만들어내기 쉽다. 그래서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알권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세속적 호기심 차원에서 엿보고 싶은 인간의 말초적 심리에 편승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버지니아 참극의 당사자인 미국 언론은 비교적 알권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사안에 접근했다. 희생자들의 추모석 사이에 조씨를 빠뜨리지 않고, 그 위에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현한 것도 아마 알권리를 고집하느라 ‘재미없어진’ 언론 덕분일 것이다.
김재영/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2007년 4월 25일 (수) 20:01 한겨레
버지니아 참극의 ‘왜곡된’ 알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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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 언론은 시중에 떠도는 미확인 정보를 여과없이 보도하면서 오보성 기사를 양산했다. 용의자의 국적, 범행동기, 조씨 부모의 자살설과 모친의 강도 총격 사망설 등이 그랬다.
이젠 아예 이런 경우를, 예기치 않은 사건의 초기 보도과정에서 으레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관계의 정확성은 어떤 경우에도 보류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근간이다. 오히려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일수록 확인된 정보만을 보도하는 게 언론의 철칙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언론은 그 순간 ‘황색지’로 전락한다.
둘째, 우리 언론은 아니나 다를까 사건을 선정적으로 처리하는 구태를 잊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범행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는 것은 물론 조씨의 섬뜩한 육성과 동영상, 사진을 그대로 노출했다. 심지어 <문화방송>은 바로 이 때문에 미국 방송의 상업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전하는 와중에도 문제의 영상을 반복했다. 몰염치의 극치다. 이는 진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사건을 시청자의 이목이나 붙잡아둘 ‘호재’로 여긴 장사치의 심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셋째, 우리 언론은 가해자 주변 인물들의 인격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가족이고 친지라고 해서 이들의 사생활이 무고하게 침해되고 명예가 훼손당할 이유가 없다. 조씨는 이미 언론에 의해 반사회적 일탈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등은 조씨 누나의 실명과 직장, 사진 등의 신상정보를 시시콜콜 공개했다. <한겨레> 등은 조씨 가족의 과거 행적을 이 잡듯이 파헤쳤다. 그 전리품으로 이들이 서울의 반지하 집에 월세로 산 ‘이력’과 조씨 부모가 이웃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취향’을 소개했다.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조씨의 인격 장애와 무슨 관계인가. 행여 언론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비사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외톨이가 된다고,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암암리에 전제했던 것은 아닐까.
알권리라는 미명 아래 언론의 미확인 정보 유포가 정당화될 순 없다. 생생한 화면을 제공한다고 ‘친절한’ 뉴스가 되는 게 아니다. 인격권을 내팽개친 무분별한 보도는 엄한 희생양을 만들어내기 쉽다. 그래서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알권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세속적 호기심 차원에서 엿보고 싶은 인간의 말초적 심리에 편승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버지니아 참극의 당사자인 미국 언론은 비교적 알권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사안에 접근했다. 희생자들의 추모석 사이에 조씨를 빠뜨리지 않고, 그 위에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현한 것도 아마 알권리를 고집하느라 ‘재미없어진’ 언론 덕분일 것이다.
김재영/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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