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표절’ 제자들 문제제기에 ‘고소’로 답한 경희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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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10-02 15:06
수정 2019-10-02 20:41
수정 2019-10-02 20:41
경희대와 서울대, 논문 표절 의혹 제기한 학생 잇따라 고소
“대학에도 공론장 파괴…사법 만능주의 확산 우려”
박씨가 지난 6월5일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에 부착한 대자보. 박씨 제공.
경희대 학부생 박아무개씨는 지난 6월 교내에 ‘○○○ 교수의회 의장, 경희대학교 교수 심사 제출 논문 표절?’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다.
대학원 강아무개 교수가 임용과 승진 심사 때 경희대에 제출한 논문이 중국 옌벤대학교의 한 석사학위 논문을 상당수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담긴 대자보였다. 박씨는 대자보에서 “표절 판별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표절률은 80%에 달했다”고 썼다. 실제로 대자보에 적힌 논문을 포함한 강 교수의 논문 여러 건은 표절 의혹이 제기돼 경희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조사에 나선 상태다. 이 가운데 한 건은 진실위의 1차 판정에서 표절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다른 한 건은 무혐의를 받았다.문제는 강 교수의 대응이다.
강 교수는 지난 6월 박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강 교수는 박씨의 대자보 사진을 카카오톡을 통해 공유한 다른 교수 ㄱ씨도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박씨와 ㄱ씨에 대해 혐의없음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강 교수는 이런 처분에 불복해 지난달 9일 검찰에 항고했다. 강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진실위 조사가 완결된 것도 아닌데 박씨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대자보에 써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했다”며 “그 내용이 구성원들에게 확산하는 상황이라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고소했다. (항고는) 법적으로 다퉈볼 여지가 남아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지난달 23일 다시 대자보를 붙여 강 교수에게 “사과하고 교수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박씨는 “교수진의 자문을 거쳐 대자보를 작성했는데 그로부터 약 두달이 지나 강 교수가 나를 형사고소한 사실을 경찰을 통해 알게 됐다”며 “강 교수는 내게 어떠한 해명이나 고소 취지도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수의 논문 표절을 두고 대자보 등의 공론장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당사자 교수들이 이에 관해 토론이나 반박을 하면서 논쟁하는 게 아니라 형사나 민사 고소를 통해 대응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상아탑마저 ‘사법 만능주의’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서울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7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ㄴ씨가 대자보를 통해 자신을 지도한 박아무개 교수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을 조사한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2000∼2015년 박 교수가 발표한 논문 11편과 단행본 1권에 대해 “연구진실성 위반 정도가 상당히 중한 연구 부정행위 및 연구 부적절 행위”라고 지난해 결론지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지난 4월 ㄴ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ㄴ씨가 “학교에서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논문 8건도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대자보를 학내에 게시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대자보를 내리지 않을 경우 하루 100만원의 강제이행금을 부과해달라고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비교문학회는 서울대가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한 박 교수의 논문 2편에 대해서도 지난 5월 ‘중대한 표절’이라고 결론짓고, 학회에서 박 교수를 제명했다.
지난 19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들은 입장문을 내고 학생을 상대로 소송을 낸 박 교수에게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자신의 표절을 제보한 학생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선생으로서 본분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얘기다.
이를 두고 대학 사회에도 공론장이 파괴되면서 ‘사법 만능주의’가 확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삼호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학문 공동체인 대학에서마저 고유의 토론 문화가 쇠락하고 사법 만능주의가 확산하고 있다”며 “사법체계는 최후의 보루로서 약자가 기댈 공간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대학 내 강자라 할 수 있는 교수가 학생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이런 일이 일상화하면 학생이 의견을 내기 어려워지고 대학 내 공론장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교수와 학생뿐 아니라 학생 간에도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고준우 대학연구네트워크 대표는 “사법처리를 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은 대학 내 문제 제기를 힘들게 하는 행위”라며 “학술적인 문제는 학술의 장 안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인데 법적으로 다투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