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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디지털 컨텐츠와 사이버 문화

사이박사 2021. 7. 9. 16:49

디지털 컨텐츠와 사이버 문화

구연상(외대/경원대 강사)

 

들어가기

 

오늘날 디지털 혁명은 일종의 정보 혁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정보디지털은 결코 동일한 말이 아니다. 정보 시대라는 말은 정보가 중요시되는 시대를 의미하지만, 디지털 시대라는 말은 정보의 전달 형태가 디지털 방식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보에는 디지털 정보뿐 아니라 아날로그 정보도 있다. 정보 혁명은 바로 정보의 존재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보는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방식의 신호로써 전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정보의 전달방식의 발전은 정보의 발전을 가능케 해 줄 뿐 아니라 문화 자체의 변동을 초래할 수조차 있다.

정보의 존재방식의 차이는 그것으로써 주어지는 콘텐츠의 존재방식에도 큰 차이를 불러온다. 디지털 혁명의 핵심은 인터넷에 있다. 디지털화된 정보들은 computer network(셈하미 그물짓기)를 통해 서로 함께 나뉘어진다(공유). internet(사잇그물) 위의 디지털 정보들은 끝없이 복제될 수 있고, 끝없이 링크(연계)될 수 있다. 디지털 형태로 통합된 갖가지 정보들은 디지털 문화와 산업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communication(함께나누기)을 위한 internet media 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재촉해 왔다.

뉴미디어의 등장과 더불어 디지털 컨텐츠는 1995년 이후 상업화의 목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합 포털 형식의 수많은 웹사이트와 메일 그리고 게시판, 커뮤니티 등의 등장은 풍부한 컨텐츠를 사용자들에게 무료 또는 유료로 제공해 주고 있다. 게다가 사이버스페이스의 안정성은 전자상거래를 가능케 해 줌으로써 현실의 주요 상거래가 온라인 상으로 옮겨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컨텐츠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상업적 내지 유료 컨텐츠에 대한 나름의 반감조차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반감은 사이버 문화에 대한 이해 및 오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

본 논문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디지털(digital)”디지털 컨텐츠(digital contents)” 그리고 사이버 문화(cyberculture)”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시도한다. 먼저 디지털 개념에 대해서는 아날로그 개념과의 대비 속에서 표본화(sampling)”양자화(quantization)”를 중심으로 해명하고, 다음으로 디지털 컨텐츠에 대해서는 컨텐츠에 대한 정의 및 특성을 분석한 뒤 그것을 상업성 유무의 관점에서 크게 구분해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사이버 문화에 대해서는 이 문화의 성격을 크게 정보성, 개방성, 의사소통성, 생활세계성으로 규정짓고, 이 넷을 다시 익명성과 개방성으로 통일적으로 해명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을 대치하고자 하는, 글쓴이 자신이 만들어 낸 몇몇 낯선 낱말들이 나란히 쓰이고 있다. 이 낱말들은 결코 새로운 개념어(갈말)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번역어(옮김말)들이다. “새옮김말이 필요한 까닭은 첫째, 기존의 용어들이 사실은 옮김말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옮김말 자체가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막기보다 드높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옮김말쉬운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디말의 낱말뜻과 그 뜻하는 바를 함께 옮겨 주는 말이어야 한다. 따라서 옮김말을 갈말로서 쓰고자 하는 자는 이중적 어려움에 처하는 셈이다.

 

풀어내기

 

. 디지털 개념

 

손동현에 따르자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아날로그(analogue) 방식은 음성, 음향 등 청각적 지각 내용이나 색채, 명암, 영상 등 시각적 지각 내용의 물리적 속성을 전류나 전압의 크기 등 전기적인 연속량으로 변화시켜 전달했다가 이를 다시 역방향으로 원상 복구하는 방식이고,” 다음에 “...디지털(digital) 방식은......어떤 형태의 정보라도 바이너리 코드를 이용해 정보의 단위를 10이라는 비트로 분화시켜 이의 연속된 흐름을 전송함으로써 [아날로그에서와 같은] 기술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디지털 방식의 정보 처리 및 전달 과정에서는 음성, 문자, 영상 등 모든 정보 형태가 등질화되어 획일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윗글에 따르자면, 아날로그의 특징은 연속성에 있고, 디지털의 특성은 코드화에 있는 셈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신호이든 디지털 방식의 신호이든 정보는 그러한 신호들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지각될 때에만 주어질 수 있다. 보기컨대 텔레비전 시청자는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 그림과 소리의 신호 자체를 보거나 들을 수는 없다. 즉 아날로그와 디지털 개념은 정보의 물질적 또는 신호적 차원을 규정짓는 것이다. 아날로그 신호는 실제의 물질적 상태 내지 흐름을 나름의 연속적 체계를 통해 전달하는 것을 말하고, 디지털 신호는 이러한 아날로그 신호를 나름의 분화와 처리 그리고 재생의 과정을 거쳐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정보는 파(wave)로써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소리 정보는 공기의 진동을 전기신호의 파로 변환시킨 것이고, 영상 정보는 빛의 강약을 전기신호의 파로 형태를 바꿔 기록한 것이다. 아날로그 신호와 디지털 신호의 차이는 이러한 소리와 빛의 파()를 기록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날로그 신호는 주어진 파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모조리 기록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LP(long playing record/1분에 33 회전)는 검정색 판에 얇은 홈이 연속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 홈은 녹음할 때 소리의 진동이 기록된 것이다. 이 홈은 소리의 진동이 파()로 변형되고, 변형된 파형(波形)의 강약이 LP판 위에 요철의 높낮이로 기록된 것이다. 이 홈의 높낮이는 바늘에 의해 해독되어 다시금 전기신호파로 바뀌고, 이 신호는 소리의 진동으로 변환되어 우리의 감관에 지각되는 것이다. LP에는 음성소재의 모든 것이 기록된다. 따라서 잡음이 많이 섞여들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디지털 신호는 파형을 샘플링한 결과값으로 이루어진다. 소리 정보의 경우 음파를 시간축으로 정렬하여 잘게 분해한 뒤 그 각각의 시간에서 측량된 음파의 세기를 모두 수치화한 값의 연속이 곧 디지털 신호이다. 따라서 디지털 신호는 실제로는 계단형 또는 지그재그 형태를 띤다. 하지만 이러한 단절 내지 분절은 사람의 눈과 귀에는 전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세분화되기 때문에, 그 신호가 우리의 눈과 귀에 전달될 때, 우리는 아무런 불연속성도 느끼지 못한다.

아날로그는 자연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하고, 디지털은 그 상태를 이러한 연속량의 대표값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만일 싸인 곡선을 그리는 사람의 말소리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송한다면, 이 음성 데이터는 멀리 전송될수록 보다 많이 감쇄되고 찌그러질 것이고, 결국 수신자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반면 만일 사람의 말소리를 디지털 방식으로, 즉 소리의 연속적 싸인 곡선을 그 대표값을 추출해 전송한 뒤 수신자 쪽에서 그 값을 아날로그 형태의 음성으로 복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우리는 양질의 통화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디지털 신호의 경우에도 감쇄와 열화는 피할 수 없지만, 1.5k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중계기(repeater)를 통해 원래의 신호를 계속 복원되어 계속 다음 구간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데는 표본화(sampling)와 양자화(quantiz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샘플링은 연속적인 신호를 일정한 간격으로 분할하여 표본값을 뽑아내는 과정을 말한다. 유선 전화의 경우 샘플링은 1초에 8,000번 이루어진다. 이때 샘플링 주파수 fs8,000 Hz = 8 KHz가 된다. 소리이든 영상이든 샘플링 주파수가 높을수록 데이터는 보다 미세한 부분까지 디지털 신호에 저장된다. 사람의 가청 주파수는 20KHz이므로, 음향의 경우 샘플링 주파수가 그것의 2배인 40KHz를 넘으면 원래의 아날로그 신호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 전화의 경우 사람의 목소리를 3.4KHz 정도까지만 전송하면 알아듣는 데 지장이 없으므로 샘플링 주파수는 그것의 2배인 6.8KHz에 여유를 두어 8KHz로 샘플링한다.

샘플링은 아날로그 신호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서 그때마다 값을 뽑아내는 것이다. 이 샘플링 값은 연속적 실수로써 표시된 함수 값이다. 이 값은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비트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양자화이다. 서로 다른 샘플링 값은 동일한 양자화 구간에서는 같은 값을 갖게 된다. 이것은 85점부터 89점 사이의 학생이 모두 동일한 학점을 받게 되는 것에 비겨질 수 있다. 예컨대 아날로그 음성 신호를 8비트로 양자화했을 때 나타낼 수 있는 값은 28제곱, 256개가 되고, 데이터 량은 8×8k=64k bps(bit per sec)이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샘플링이 1초 당 8,000번 이루어졌고, 이 각각의 샘플링 값은 8개의 비트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보는 점차 디지털 방식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그 까닭은 정보가 아날로그 방식보다 디지털 방식에 의해 보다 고화질과 고음질의 상태로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별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있는 그대로 모조리 기록하는 방식보다 더 질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까닭은 디지털 방식이 노이즈를 제거하고 순수한 신호만을 재현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방식의 정보 속에는 매질과 헤드의 마찰 등에서 발생하는 노이즈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방식은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만을 거의 그대로 기록할 수 있고, 또 기록된 신호를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다.

디지털 신호는 01의 이진법으로써 표현되기 때문에 데이터의 가공과 교환이 용이할 뿐 아니라, 원본과 원칙상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복제물들을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디지털 정보 자체는 비트 열(bit stream)’로써 구성된다. 비트는 우리에게 감각 가능한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디지털 정보는 그 정보를 처리해 주는 기기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 줄 수 없다. 만일 정보의 본질이 알림에 있다면, “아무것도 알리지 못하는 정보는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디지털 정보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다양한 요소의 악기 소리들로 구성되듯이, 정보 처리장치 및 정보 기억장치 등을 통해 함께 구성된다. CD 음반은, 그 자체 속에 디지털화된 음악 정보가 담겨 있을지라도, 그것이 아직 CD 플레이어를 만나지 못하는 한, 아직 그 자체 내에 저장된 어떠한 음악 정보도 제공하지 못한다. 즉 디지털 정보는 벽의 그림처럼 그 자체로 이미정보를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정보는 아날로그-디지털 변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기술적 조작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전자기술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기술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computer(셈하미)는 디지털 신호를 가장 쉽고 안전하게 조작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이다. 셈하미의 monitor screen(보이미 비춤막)을 통해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비춤상(스크린 상)” -- 그림, 글자, 상징... -- 은 픽셀의 집합으로서 비트 코드가 셈하미에 의해 전자공학적으로 처리되어 재생된 것이다. 비춤상의 이동 내지 변동은 비트 연산 즉 프로그램의 처리를 통해 수행된다. 이렇게 처리된 비트 열은 출력 장치를 통해 비춤상 내지 프린트상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감각 가능한 형태로 전환된 비트 열, 즉 그것의 출력물, 달리 말해, 우리의 감관에 나타난 것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내보이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 볼 수있다.

우리는 비트 열로써 처리되는 디지털 신호 자체를 직접 지각할 수 없다. 비트 신호는 그것이 우리의 감각에 주어질 수 있는 형태로 변환되어야 한다. 직관되지 않는 디지털 신호는 아직 어떠한 정보도 제공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정보는 알리는 어떤 것으로서 알림거리 자체를 주는 것이 아니다. 즉 비춤상은 그 상이 가리키고 있는 것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만일 스크린 위의 비춤상이 그것에 대한 재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자에게 내보여졌다면, 이 존재자는 그 상이 어떤 상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비춤상의 형태를 꿰뚫어 그것의 실제 형상을 알아보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직관력에 놓여 있다.

TVComputer의 재현 방법은 예술작품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TV를 통해 재현되고 있는 그림은 실제로는 전자기술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고도의 기술로 우리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감각 차원에서만 보았을 때 비춤막(스크린)의 그림과 벽의 그림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그 둘의 존재 방식 및 재현 방식은 분명 다른 것이다. 다만 그 둘이 우리의 감각에 일으키는 효과 내지 결과는 동일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의 있음의 방식에 대해 전적으로 감각에만 의지해서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 둘의 있음 방식의 다름을 알지 못할 것이다.

TV 속 그림이나 예술작품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알리거나 내보이기 위해 즉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 그 둘은 모두 눈앞에 있음이라는 있음의 방식(갈래)을 함께 갖지만, 그러나 TV 속 그림은 비춤상으로서 전자기술의 맞춤품(TV)에 의해 조정되고 존립되는 반면,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존립한다. 비록 기술이 보다 좋은 TV는 보다 선명한 영상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채널이 바뀌거나 전기가 나간다면, 그 영상 자체는 TV 속 그 어디에도 존립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있지 않고”, “조정에로 맞춰 세우는 기술에 의존해 있다. 그것은 결코 자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결코 어떤 부정적 제한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제약은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되고 있다. 자연 자체가 디지털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 자체가 새롭게 편집되거나 가상화된다. 기술적으로 조작된 디지털 정보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세계의 곳곳으로 전달된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가 수많은 장소에서 동시에 재현되어 저장될 뿐 아니라, 저장된 비트는 다시금 새롭게 변형되어 세계로 전송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그것의 신호적 차원, 즉 정보 내용이 담겨지는 물질적 재료가 전자공학적으로 처리되는, 즉 지극히 가변적이고 미시적이며 섬세하고 유연한 것(비트)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창출과 폐기 그리고 복제와 전달과 확산이 용이하다. 또 그 산출의 과정이 수학적으로 조작되기 때문에 확실하고 안전할 뿐 아니라, 기존의 다른 모든 정보 양식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어떤 정보 매체보다 우수하고, 심지어 인간의 정서를 가장 잘 전달할 수조차 있다. 그것은 정보처리기로서의 셈하미(computer)와 그물짓기(network)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기인한다.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 또는 정보화의 시대이다. IT 기술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없는 양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보 기술은 현대의 문화적-지적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엔진이자 방향타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주도적 문화 내지 지식은 디지털의 형태로 단일화되어 가고 있다. 이때의 단일화는 획일화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 내지 다원화를 낳는 형태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디지털 형태로 통합된 정보를 총괄하여 디지털 컨텐츠라 부를 수 있다. 이제 디지털 콘텐츠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 디지털 컨텐츠

 

정보사회의 전개와 더불어 멀티미디어 컨텐츠”, “디지털 컨텐츠”, “인터넷 컨텐츠등의 유행어가 등장했다. 이러한 컨텐츠는 정보 인프라 -- 컴퓨터와 네트워크 및 그것을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 -- 를 통해 제공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총칭한다. 인터넷 컨텐츠는 인터넷에서 소통되는 디지털화된 내용 전체를 의미하는 반면, “디지털 컨텐츠는 디지털 방식으로 제공되는 모든 정보, 말하자면, CD나 온라인 상에서 제공되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게임, 음악, 교육, 전자상거래, 문화, 홍보 등을 말한다. 인터넷 컨텐츠는 디지털 컨텐츠 가운데 현재 가장 중요하게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컨텐츠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반 위에서 생성된다. 인터넷 컨텐츠는 특정 분야의 네트워크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의 수요와 원천자료의 공급에 의해 창출된다. 이 말은 인터넷 컨텐츠가 커뮤니티와 상호 보완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가치가 높은 컨텐츠는 그 주변에 쉽게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 이때 컨텐츠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요소 내지 힘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 -- , 거꾸로 그 커뮤니티에서 발생하는 정보들은 또 다른 컨텐츠의 중요한 원천자료가 된다.

인터넷 컨텐츠는 그 사용자 계층에 따라, 또 컨텐츠의 표현 형태에 따라, 그리고 그 위치에 따라, 무엇보다 그것의 상업성 여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디지털 컨텐츠는 대체로 젊은 계층, 그것도 10-20대에 의해 주로 사용된다. 디지털 컨텐츠의 기술적 표현 형태는 단순한 텍스트 형태, 음성 및 그래픽 형태, 동영상 형태, 애니메이션 형태 등 다양하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해당 컨텐츠의 선호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컨텐츠의 위치는 Web 상의 특정 BBS나 폐쇄 유저그룹 등을 뜻하는데, 동일한 컨텐츠도 위치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이메일 컨텐츠와 같은 것은 과거에서는 비공유성 또는 단방향성의 성향을 갖는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HTML 방식이나 그래픽 데이터 등이 효과적으로 적용되면서 계량화된 컨텐츠 속성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것은 전자우편이 메일 메거진(mail magazine)으로 활용되는 예가 급격하게 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컨텐츠는 가장 크게는 상업적 컨텐츠와 비상업적 컨텐츠로 유형화할 수 있다. 상업적 컨텐츠는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자본축적을 목적으로 기획된 온라인상의 정보내용이라 할 수 있고, 비상업적 컨텐츠는 인터넷 상업화와 자본축적의 논리에 결합되지 않는 온라인상의 정보내용을 말한다.

인터넷 컨텐츠는 정보사회의 핵심요소인 정보의 대표적인 발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컨텐츠는 과거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컨텐츠는 디지털 신호에 의해 표현된 정보 내용, 또는 이 내용의 표현물이다. 컨텐츠에는 그것의 신호적 차원과 체계화된 신호에 의해 표현되는 의미적 차원 그리고 신호의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표현의 차원이 속한다. 컨텐츠는 그것의 수용성을 최대한 고려해 꾸며 놓은 정보를 뜻한다. 정보는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정보에는 사실 정보도 있고, 허위 정보도 있으며, 시각 정보나 음성 정보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컨텐츠는 담긴 것이다. 담긴 것은 그것을 담고 있는 것과 다르지만, 담는 것과 따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디지털 컨텐츠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너무나 뚜렷하다. 이때 컨텐츠는 넓은 의미의 정보와 동의어이다. 정보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진 사람들은 디지털 정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디지털 정보는 비소모성과 확장성을 갖는다. 디지털 정보는 복제가 용이하며, 계속하여 확장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되는 동안 소모되지 않고, 따라서 물리적인 한계(physical limit)를 갖지 않는다.

디지털 정보는 다양성과 선택성을 동시에 지닌다. 디지털 정보는 그 형태가 다양하며 유연성이 높다. 따라서 개인들은 자신의 특수한 목적이나 필요에 따라 디지털 정보를 얼마든지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대치성을 갖는다. 디지털 정보는 자본, 노동, 원료를 대치해 주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노동의 성격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디지털 정보의 대치성은 정보사회가 진전될수록 높아진다.

 

디지털 컨텐츠 또한 디지털 정보의 장점들을 모두 함께 갖는다. 오늘날 컨텐츠가 중시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갖는 미래적 상업성 때문이다. 컨텐츠는 광고이자 판매이며, 경영이자 행정이다. 디지털 컨텐츠는 인터넷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급성장하고 있는 인터넷 마케팅의 주요 수단일 뿐 아니라, 기존의 거의 모든 집단 또는 단체가 자신들의 결속력과 대외 홍보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1995년 인터넷의 상업화 허용과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굳어지고 있다.

인터넷 상업화는 인터넷이 과학기술적 연구 네트워크에서 수익지향적 네트워크로, 정보 및 연구기관 주도의 네트워크에서 케이블 회사와 전화회사의 새로운 네트워크로 주도권이 넘어감으로써 시작되었다. 인터넷 상업화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망 서비스의 상업화정보 제공 서비스의 상업화라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인터넷의 상업화는 개인화(privatization/사유화)를 촉진하여, 인터넷 사용자의 공동체적 지향을 약화시킨다. 개인화와 상업화로 인터넷 문화는 자유로운 네티즌과 거대 기업, 그리고 온라인 시장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업가들에 의해 삼분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 또한 자유시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

상업적 컨텐츠는 대부분 인터넷 비즈니스 업체나 오프라인 기업으로부터 제작된 것이다. 여기서 제공되는 정보들은 컨텐츠의 시장성 혹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된다. 네티즌들이 선호하지 않는 컨텐츠는 비록 양질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상업적 컨텐츠 주체들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다. 상업적 컨텐츠 공급의 기본적인 맥락은 정보공유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시장성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비상업적 컨텐츠는 그 공급의 원천이 시장성의 원칙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여기서의 제작 주체들은 시장성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서도 컨텐츠 구성 주체의 핵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비상업적 컨텐츠는 시장성의 배제 때문에 누구나 쉽게 구성주체가 될 수 있다. 이들은 뚜렷한 자기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컨텐츠를 상업적 목적에 투여하지 않으며, 다만 컨텐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내용과 그것을 통해 보다 많은 동조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목표이다.

컨텐츠의 성격은 그 구성주체가 어떤 인식 틀을 갖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회운동의 차원과 정보공유의 정신 그리고 공익을 우선시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구성된 비상업적 컨텐츠와, 일확천금을 노리는 개인이나 기업이 만들어내는 상업적 컨텐츠는 전혀 상반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컨텐츠의 정보내용이라는 것이 구성주체의 동기에 따라 충분히 변형이 가능한 지식의 구성물이고, 그 내용은 인터넷의 커뮤니케이션적인 특성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상업적 컨텐츠는 그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활발한 의견 개진을 통해 구성되고 보완되어 나간다. 그러나 상업적 컨텐츠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할 뿐 아니라, 컨텐츠 구성에 대한 이용자들의 참여가 허용되는 경우에도 그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업적 컨텐츠의 경우 회원들은 상품의 소비자로서 간주되기 때문이다. 상업적 컨텐츠는 경제(증권, 쇼핑, 경매, 부동산, 보험) 분야, 뉴스와 방송분야, 엔터테인먼트(음악, 영화, 스포츠, 만화, 여행, 운세, 게임, 성인물) 분야, 교육분야, 컴퓨터 분야 등에 집중되어 있고, 부가적으로 건강이나 생활정보(요리, 취업) 등을 포함한다. 비상업적 컨텐츠는 학술연구(특히 사회인문, 순수과학) 부문, 공공부문, 사회운동부문 등에 한정되어 있다. 상업적 가치 또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컨텐츠가 비상업적 컨텐츠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 컨텐츠의 불균형적인 발달을 가져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포르노 사이트의 범람을 꼽을 수 있다.

인터넷 컨텐츠의 유료화는 닷컴 위기론이 제기되면서 급부상했다. 컨텐츠를 무료로 제공하더라도 회원만 많으면 높은 광고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 예상된 비즈니스 모델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컨텐츠의 유료화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특히 증권(stock), (sex), 교육(study), 영화(screen) 4S를 중심으로 인터넷미디어, 결혼정보, 무선인터넷, 포털 등으로 유료화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컨텐츠 유료화 추세와 함께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특허 소송까지 제기되고 있다. 인터넷의 상업화를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특허야말로 정보의 공개와 이용이라는 인터넷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인터넷 성장의 바탕이 되었던 개방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산업사회의 상품과 달리 정보는 소유보다 사용이나 교환이 더 중요하다. 하나의 정보는 다른 여러 가지 정보와 결합될 때 보다 많은 부가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이러한 특허 논쟁은 정보의 본질적 성격을 바꿔 놓고 있다. 컨텐츠는 더 이상 공공재화가 아니며, 경제재화로 거듭나고 있다. 정보공유를 위한 공공재에서 정보독점을 향한 경제재로 변해 가고 있다. 이제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상업의 들판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상업적-비상업적 인터넷 컨텐츠의 범람은 다양한 디지털 컨텐츠들과 함께 새로운 문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적-사적 디지털 컨텐츠들이 익명의 이름으로 끝없이 쏟아져 올라오고, 집단적-공적 디지털 컨텐츠들 또한 정보 공유의 이름으로 거듭거듭 제공되기 시작했으며, 상업적이거나 오락적인 컨텐츠들까지 벤처의 이름으로 무차별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사이버 문화의 열풍은 식을 줄을 모른다.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는 사이버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다음에서 나는 사이버 문화의 몇몇 특징을 현상적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 사이버 문화

 

사이버 문화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성되는 문화, 또는 디지털 컨텐츠로써 이루어지는 문화를 말한다. 사이버 문화는 정보기술의 바탕 위에서 전개된다. 사이버 문화의 주체는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인터넷 접속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뉴미디어를 개인적 또는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접속인들이다. 네티즌을 주축으로 하는 문화, 그것이 곧 사이버 문화이다. 사이버 문화인 내지 인터넷 문화인 단순히 정보 수용자 내지 정보 소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 문화에서 문화의 수용자 자신이 문화의 생산자가 된다. 단적인 보기로서 메일-(mail-zine) 서비스와 같은 곳에서 각 개인은 정보 발행인이 되며, 게시판에 올린 각종 글들의 ID 주인들은 독자와 저자의 지위를 동시에 얻는다.

사이버 문화는 디지털 신호를 이용한 인터넷 네트워크 또는 통신을 통해 형성된다. 이러한 사잇그물의 주체를 우리는 네티즌(netizen)이라 부른다. 네티즌은 컴퓨터 통신망으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이버 문화는 이러한 접속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접속의 매체로서의 인터넷은 다음과 같은 장점들을 갖는다. 첫째, 인터넷은 컨텐츠 검색과 활용을 위한 시공간의 한계가 없는 개방형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접속인이면 누구나 웹호스팅으로 구축된 사이트의 정보와 데이터를 언제 어디서든 끝없이 검색 및 복제 그리고 활용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되고 분류된 DB는 누구나 한 두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넷째, 디지털 정보는 그 이용료가 무료이거나 매우 저렴하다.

인터넷의 웹사이트는 노드(Node/내용)와 링크(Link/연결)로 구성된 하이퍼미디어(Hypermedia)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가 텍스트간의 링크를 의미한다면, 하이퍼미디어는 사운드와 영상 그리고 애니메이션 등을 곧바로 연결해 준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의 기능을 구사한다. 이러한 하이퍼미디어는 정보들을 비순차적 연결로 구성해 준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작용과 비슷하다. 물론 인터넷의 이러한 정보 구성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인력이 요구된다. 대량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구분짓고,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해야 하며, 코딩해야 하고, DB에 저장해야 하며, 저장된 데이터를 특정의 알고리즘에 맞춰진 검색 방식에 적용해야 한다.

하이퍼미디어의 발전은 사용자에게 정보를 선택하고, 선택된 정보를 조작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했다. 사용자 중심의 인터페이스, 효과적인 검색 서비스, 방대한 정보량, 다양한 응용 서비스, 개인적 미디어 등의 발전 경향은 사용자의 변화된 위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로써 네티즌의 자유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네티즌은 자신에게 허용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접속할 수 있고, 거꾸로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곳을 떠날 수 있다. 네티즌은 이러한 접속과 단속의 자유를 갖는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자유도는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터넷 자유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성격에 근거한다. 여기서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사회적 성격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방대한 정보 자료실(데이터베이스)이다. 사잇그물(인터넷) 위에 공개된 디지털 데이터는 정보 창고 속의 비밀 문서와 달리 접속인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에서나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알몸 정보이다. “키잡는 곳(Cyberspace)” 속의 정보는, 그것이 삭제되거나 바이러스의 침투 등으로 손상을 받지 않는 한,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고, 다양한 업데이트의 방식을 통해 새롭게 보완될 수 있으며, 양적으로 무한할 수 있고, 기존의 모든 정보 형식을 포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휴먼 인터페이스(Human Interface/사람같이 마주하기)를 통해 접근의 편리성이 크게 확장되었다.

게다가 키잡는 곳(Cyberspace)”에서의 정보의 존재양식은 정보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정보의 탈권력화는 근대 사회가 국가권력에 의한 정보의 수집 및 저장 그리고 통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 근대사회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기존의 정보 독점 주체들은 여전히 주요 정보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정보들을 인터넷에 공개할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열린 미디어(media/알림쇠)이다. 현실세계에서 대중매체(무리 알림쇠/mass media)는 특정 집단 내지 특정인에 의해 독점되거나 통제된다. 이때 대중(무리)은 조종된 메시지(message/보냄속)객관적 정보의 이름으로 전달받게 마련이다. “객관진리의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한, 대중 매체의 통제자는 진리의 지배자가 된다. 그런데 미디어(알림쇠)로서의 사잇그물(internet)의 사용은 일반 대중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즉 사잇그물의 그물짓기는 어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그곳에서는 거대 집단조차도 일종의 개인으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탈영토화된 곳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사잇그물)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보냄속(정보)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사잇그물에 접속한 네티즌들은 그들 자신이 정보의 생산자임과 동시에 송신자이며 자기 정보의 관리자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키잡는 곳(Cyberspace)”에 자리한 homepage(닻오름집), web-zine(거미줄잡지), 인터넷 여론, 게시판 등의 다양한 website(거미줄눈자리) 등은 기존의 다른 매체들에 대한 대안 매체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사잇그물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공적인 내용까지 포괄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사잇그물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다 확장되었다. 즉 오프라인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언론의 편집권 독립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집권은 우리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담론과 정보 그리고 사실들 가운데 편집권자에 의해 걸러지는 엄격한 사실 정보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표현들의 제약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미디어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생산되는 정보들, 그로써 사실 여부가 확인되기 힘들고, 가볍기 그지없는 표현들, 심지어 유해하다는 이유로 기존 오프라인 미디어로부터 철저히 걸러졌던 표현들, 예컨대 음란하거나 폭력적인 표현에게까지도 발언권과 유통 수단을 제공해 준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사람들이 서로의 뜻을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통로이다. 네티즌들은 전자우편을 통해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뉴스그룹을 통해 관심 있는 현안을 토론하고,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대화 속에는 서로의 감정과 의견 그리고 생각이나 삶의 가치관 등이 녹아들어 있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현실세계의 다양한 걸림돌이 익명의 가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거된, 자유로운 의사 개진과 활발한 토론이 전개될 수 있는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다양한 거대 담론뿐 아니라 연예계의 뒷소문이나 개인의 은밀한 고백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교통될 수 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적 공간으로서의 키잡는 곳(Cyberspace)”은 자유로운 만남을 가능케 한다. 그로써 이곳에서 형성되는 만남은 시공간적 제약은 물론 성별, 연령, 계층, 인종 등의 구속까지 덜 받게 된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개개인의 관심과 이해를 중심으로 한 관심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때로는 오프라인 즉 현실세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현실세계의 공동체가 오프라인을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이제 또 하나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매김되어 가고 있다. 사잇그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 사회적, 지적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은 키잡는 곳(Cyberspace)”을 통해 사업도 하고, 물건도 사고 팔며, 주식거래와 상품 마케팅, 전자결재 등의 전자상거래를 하며, 교육도 하고,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며, 게임을 즐기고,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는 등, 현실 세계의 많은 일들을 행한다. “키잡는 곳(Cyberspace)”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의 어디에나 열려 있다.

 

네티즌은 키잡는 곳의 이러한 네 가지 성격 -- 정보적 성격, 매체적 성격, 의사소통적 성격, 생활세계적 성격 -- 에 근거해 접속과 단속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를 대표하는 말이 익명성이다. “익명(匿名)”은 결코 무명을 뜻하지 않는다. “익명본명을 숨긴 채 따로 쓰는 이름을 말한다. “익명은 또한 별명(別名)”과도 다르다. “별명은 대개 남들에 의해 붙여진다. 익명은 스스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이 말의 함축은 키잡는 곳에서의 그물타미의 정체성은 그 자신이 제공하는, 또는 그 자신이 사용하는 정보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익명의 그물타미(netizen)는 현실의 신분을 숨긴 채 자유롭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 된다. 사이버 문화의 근간에는 이러한 익명성이 놓여 있다.

그물타미는 접속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에로 접근할 수 있고, 자신의 모든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공동체를 구성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일상을 영위할 수도 있다. “키잡는 곳의 가능성은 접속인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즉 그곳은 개방성의 공간이다. 사이버 문화는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또한 다양성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인터넷 상업화 이후 개방성의 성격은 많이 변화해 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익명성과 개방성에 의해 규정되는 키잡는 곳은 접속인 자신의 자율적 의지로 접속해 들어가거나 단속해 나올 수 있다. 접속인은 자율성을 갖는다. 키잡는 곳은 자율적 공간이다. 사이버 문화는 이러한 자율성에 근거한다. “자율스스로 법률을 세우고, 스스로 그 법률을 지킨다는 것을 뜻한다. 키잡이들은 필요한 디지털 컨텐츠를 찾아 자유롭게 나름의 거미줄타기를 할 수 있다. 이때 그들은 정보 공유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공개된 정보를 보호하고, 자신이 소유한 정보를 타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키잡는 곳의 개방성과 자율성은 그것에 대한 외적 규제, 즉 현실세계의 규제원리에 의한 통제를 어렵게 만든다. 네티즌은 표현의 자유와 만남의 자유 그리고 즐김의 자유 등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한다. 접속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접속과 단속을 통제하는 어떠한 권력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규제가 가해지면 저항하거나 그곳을 피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키잡는 곳(Cyberspace)”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의 행적은 우리 자신의 신상정보나 쿠키정보 등에 의해 언제든 추적될 수 있다. 신상정보는 인터넷 서비스 이용시 사업자 측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고, 쿠키(Cookie)는 특정 사이트 방문시 웹브라우저가 자동으로 만들고 갱신하는, 방문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기록되는 파일을 말한다. 따라서 만일 전자감시 제도와 같은 것이 허용된다면, 개인의 사생활 침해는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다.

프리이버시권은 종전에는 혼자 있을 권리라는 소극적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개인의 신상정보에 관한 수집, 분석, 검색, 복제, 유통 등의 감시 기술이 확산되면서 자신에 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적극적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프라이버시권은 한 개인이 자기에 관한 정보를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 타인에게 유통시키느냐를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말한다. 이러한 프라이버시권은 기술의 합리적 감시범죄 예방의 논리와 충돌을 일으킨다. 일본이나 영국에서는 조직범죄 방지를 명분으로 한 도감청법 제정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범죄자와 시민을 분리하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논리에 바탕해 권력의 통제와 감시 기능이 정당화됨으로써 보호관찰자 전자족쇄 제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도 했다.

전자감시는 개개인의 모든 일상적 삶이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속속들이 관찰되고 있다는 팬옵티콘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지배 엘리트들의 보다 효과적인 권력행사를 뒷받침해 줄 수도 있다. 지난 1996년 미국의 통신품위법(CDA: Communication Decency Act) 논쟁, 우리 사회에서의 통신질서법과 인터넷 내용등급제 문제 등은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정부, 학부모 단체, 종교단체 등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를, 시민단체와 대다수 네티즌들은 이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고 나섰다. 만일 인터넷에서의 사후심의적 검열이 허용된다면, 검열의 주체에 의한 통신 통제를 받게 되고, 이러한 정보 검열은 정보에 대한 취사선택의 가능성을 제한하며, 결국 개인의 일상의 삶과 의식을 지배세력의 의도에 맞게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작용하기 쉽고, 더 나아가 정치적 무관심과 무력감이 팽배한 곳에서는 부드러운 전제정치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사이버 디지털 문화는 다음의 3단계로 발전해 가고 있다. 먼저 기존의 문화를 사이버스페이스에로 그대로 이식해 놓는 단계. 다음, 기존 문화 가운데 인터넷에 적합한 것들을 성장시키는 단계. 마지막으로 사이버스페이스의 특정에 맞춰진 새로운 문화의 창출 단계. 사이버 문화는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꽃핀다. 인터넷 웹 사이트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포털 사이트: 검색기능을 중심으로 각종 부가 서비스를 다양하게 추가해 가고 있는 야후 코리아, 네이버, 라이코스 코리아, 심마니 등의 사이트. 2) 종합 컨텐츠 사이트: 이른바 원스탑 서비스를 구현하는 천리안, 하이텔, 네띠앙, 다음 등의 사이트. 3) 전문 컨텐츠 사이트: 특화시킨 컨텐츠를 주력으로 하고, 추가된 부가 서비스에 의해 포털을 표방하는 중앙일보 조인스, 디지털 조선일보, 메디다스, 마이폴더 등의 사이트. 4) 허브 사이트: 인기 웹 사이트끼리 컨텐츠 공유를 통해 창출해 낸 대형 사이트, 예컨대 인티즌과 같은 사이트.

인터넷 초창기에 포털 사이트들은 이메일, 무료 홈페이지계정 제공, 채팅, 동호회 등의 부가서비스 만으로 고객을 확보하고, 광고수익을 통해 운영되었지만, 인터넷 숙련자들이 늘면서 포털 사이트는 일종의 경유지 정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포털 사이트들은 사이트 검색은 물론 전자상거래, 금융, 뉴스 등의 컨텐츠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토털 미디어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 포털 사이트는 다양한 컨텐츠를 자체적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다양하면서도 신뢰성 있는 컨텐츠를 확보해야 하는 난제를 떠맡게 되었다.

인터넷 사용자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제공되는 디지털 정보가 신속하게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제공된 컨텐츠의 질적 수준도 높아야 한다. 문제는 개방형 네트워크의 구조에 있다. 인터넷 상에 제공된 디지털 컨텐츠는 삽시간에 수많은 접속인들에 의해 복제의 연쇄를 피할 수 없다. 복제된 컨텐츠와 원본 컨텐츠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인터넷을 가능케 했던 “information is free”의 이념 자체가 다시금 인터넷의 발전을 가로막게 되었다. 오늘날 인터넷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보 서비스를 통한 수익성 창출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유료화 가능한 컨텐츠의 발굴이 중요하다.

인터넷은 혼자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미디어이다. 촛불 시위는 한 개인이 던진 메시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개인은 자신들만의 홈페이지를 가질 뿐 아니라, 다른 홈페이지의 방문록에 기록을 남기거나, 여론의 공개 게시판에 자신의 글을 올린다. 뿐만 아니라 네티즌들은 다양한 사이트의 웹 기자로 활동한다. 정보 수용자가 이제는 저자의 지위를 곳곳에서 확보한 셈이다. 저자(author)는 권위(authority)를 뜻한다. 저자의 지위란 자신의 글이 공적인 영역에서 공개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터넷은 그 자체로 이미 공적 영역(public sphere), 그것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방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접속인은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또한 동시에 독자이기도 하다. 디지털 저자들은 저자라는 특권적 위치를 해체하지만, 그들 자신은 여전히 저자이다.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의 주체에는 글쓰기의 주체만 속하는 게 아니다. 인터넷 컨텐츠의 많은 부분이 하이퍼텍스트 컨텐츠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점차 이미지 내지 동영상 컨텐츠의 비중이 높아감에 따라 디지털 컨텐츠의 주체는 개인에서 집단 그리고 특정 기업 또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의 폭이 넓디넓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버 문화는 분권화의 문화이자, 뉴미디어의 문화이며, 보편 주체가 아닌 개성 주체의 문화이며, 외국어와 모국어가 혼재하는 multilingual culture이다.

 

끝맺기

 

초고속 인터넷 망의 마비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맞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안겨 줄 수 있다. 인터넷의 급속한 변화에 발맞춰 보안 패러다임 또한 숨가쁘게 변화해 가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은 턱없이 모자란다. 과거에는 인터넷 보안 피해자가 한사람에 그쳤으나 2년 전부터는 피해를 받은 곳이 공격의 근거지가 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 끝없는 피해의 연쇄를 낳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구축으로 국내의 통신 속도가 빨라진 만큼 바이러스의 유포 범위 또한 광범위해져만 가고 있다.

만일 이러한 바이러스의 공격 내지 트래픽 현상이 우리 나라의 네트워크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인터넷 강국으로서의 이미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보의 안정성 문제를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나라의 통신 업체들이 윈도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보안상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라면, 새로운 운영체제의 도입을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바이러스의 피해자는 곧 공격자가 된다. 주요 공공기관들 또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공공성에 위배되는 행위, 즉 정부가 관리하는 컴퓨터가 민간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정보 보호의 문제는 개인이나 기업의 차원이 아닌 공공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정보사회의 사이버 문화를 구성하는 디지털 컨텐츠는 그 편리성만큼이나 위험도가 높다. 이에 대한 국가적 대비가 없다면, 디지털 문화는 가장 위험한 문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극도의 개인적 문화 현상이 펼쳐지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공적 투자 내지 공권력의 개입은 수많은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본 논문은 사이버 문화 내지 사이버 사회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기 위해 디지털”, “디지털 컨텐츠사이버 문화에 대한 개념적 이해 및 그 특성 규정을 시도했다. 디지털화를 위해서는 표본화와 양자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신호의 통제성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디지털 신호는 전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 그리고 조정과 사용이 편리한 디지털 컨텐츠는 그것이 구동되는 공간의 이중적 특성 -- 개방성과 개인성(비밀) -- 으로 말미암아 질적-양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의 진리성 내지 유용성은 아직 미지수이다. 인터넷 중독과 같은 현상은 이미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지나친 상업성도 적절히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다시금 사이버스페이스의 본질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사이버 문화의 근본 특징에 대한 심층 이해를 통해서만 제대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