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한글이 세종께 역모를 꾀하다 10월9일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로 돌아왔다. 올해부터 쉬는데,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국어 단체가 앞장서기는 했지만 학부모, 시민, 노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회와 국민의 압도적인 호응이 정부를 움직였고, 마침내 2012년 12월24일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확정됐다. 2005년 말에 국경일로 정해진 뒤 7년 만의 일이다. 공무원의 주 40시간 노동 도입에 따라 2008년부터 제헌절이 공휴일에서 빠진 점에 비춰보면 뜻밖이지만, 그만큼 우리 국민이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신호가 아닐까 한다. 쉬는 날이니 푹 쉬자. 집에서만 뒹굴기에 아깝다면 여기저기서 열리는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여하는 것도 좋겠다. 한글날 아침에 광화문에서 출발해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신 집터와 주시경 선생 집터 등을 둘러보는 걷기대회도 열리고 한글옷 맵시자랑을 비롯해 여러 행사가 열린다. 무엇을 하며 보내든 단 한 가지만은 되돌아보는 날로 삼자.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도 인정한다. 얼마나 과학적이었으면 아무리 어리석어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한글 반포 당시에도 나왔겠는가. 한글날에는 세종의 마음을 되새기자.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이 제 뜻을 펼 수 있게 하고자 한글을 만드셨다. 품은 뜻을 펴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게 하겠다는 소통의 정신이고, 오늘날의 가치 가운데서는 ‘인권’이나 ‘차별 줄임’과 맞닿아 있다. 그런 마음에 세종의 천재성이 더해졌으니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낮은 건 자랑거리도 아니다. 한글 반포 567돌이 된 오늘날, 모두가 제 뜻을 펴게끔 하겠노라던 세종의 바람이 문자 생활에서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궤변 같지만, 한글의 뛰어남이 이제 세종의 한글 창제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 한글이 역모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워낙 뛰어난 문자다 보니 한글은 외국어를 소리대로 적는 데에도 아주 탁월하다. 마음, 태도, 자세, 심성 따위를 써야 할 자리에 버젓이 들어서고 있는 ‘마인드’라는 말을 영어 알파벳으로 적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어떤 ‘싱크탱크’에서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소득층이나 장애인에게 지급하는 복지 이용권은 ‘바우처’라고 적는다. 이렇게 영어 낱말을 술술 적을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한글은 ‘베스트로 엑설런트한’ 문자다. 문제는 글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말인 것이다. 차별 없이 제 뜻을 펴게 하려던 세종의 정신은 영어 능력 격차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 영어 낱말 섞어서 말할 줄 모르면 가방끈 짧고, 돈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자 취급을 받으니, 따돌림당하지 않으려 너도나도 기를 쓰고 그렇게들 말한다. 격차가 커지는 만큼 영어 광기는 더 이글거린다. 이 사슬 구조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력이나 영어 능력에 따른 양극화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글자는 말 다음에 오는 것이니, 사실은 우리말 생태계가 파괴돼 가는 꼴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날 뿐이다. 공무원들이 공문서 한글 전용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을 위반하지 않으려면 외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한글로 적으면 된다. 이렇게 영어 낱말을 한글로 적는다 하여 문자 체계인 한글이 파괴될 리는 없다. 우리말 생태계가 파괴되어도 한글은 그 파괴된 말을 다 적을 수 있는 뛰어난 글자니 한글이야 어찌 파괴되겠는가? 한글에는 외국말을 막을 힘도 방법도 없다. 그렇게 한글은 살아남으면서 세종의 창제 정신인 ‘차별 없는 소통’에 반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물론 한글 스스로 꾸민 역모는 아니다. ‘월드 베스트’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데에만 빠진다면, 당신도 그 역모에 가담한 대역죄인 누명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영어 낱말은 혼자 오지 않는다. ‘디지털’은 ‘사진기’라는 말을 ‘카메라’로 완벽하게 바꾸었고, ‘라이브러리, 리터러시’ 등 다른 말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생태계의 파괴는 점차 한글의 설 자리도 좁힐 것이다. 한글날에 세종의 마음과 우리말을 되돌아봐야 할 까닭이다. <이건범 | 작가·한글문화연대 대표> 입력 : 2013-09-25 21:25:11ㅣ수정 : 2013-09-26 00:2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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