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5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 ![]() ![]() 2015.01.25. 16:26 |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
< 저자: 구연상, 출판사: 채륜 >
제목부터가 특이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학이 매년 몸살을 앓듯 당하고 있는 언론사 대학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입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이자 우리말로 학문하기모임 총무이사인 글쓴이는 다양한 통계와 자료를 통해 자신이 속한 대학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학평가가 우리말을 병신 말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영어로 강의하기’와 ‘영어로 논문쓰기’ 등을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 내에서는 그런 비판을 꺼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학자는 교수 임용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고, 교수가 되려면 국제 학술지에 영어논문을 게재해야 하며, 교수가 된 뒤에도 영어 논문을 써야만 재임용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긴, 그런 현실에서 어떤 학자가 우리말로 학문해야 한다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차례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누기1 하얀 이야기
도막1. 하얀 이야기 한 도막
도막2. 하얀 이야기의 뜻
나누기2 우리말은 병신 말이 아니다
도막1. 병신(病身)이란 말
도막2. 우리말은 병신 말이 아니다
도막3. 우리말의 층층다리: 생활어와 문학어 그리고 학문어
나누기3 누가 우리말을 병신 말로 만드는가
도막1. 윗물과 아랫물
도막2. 영어 몰입 교육
도막3. 영어로 강의하기
도막4. 영어로 논문쓰기
나누기4 대학평가와 학문어로서의 우리말 문제
도막1. 대학평가와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문제
도막2. 정부의 대학평가
도막3. 외국(다른 나라)의 대학평가 차림표
도막4. 조선일보-QS의 대학평가
나누기5 중앙일보 대학평가
도막1. 2010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의 전체 지표를 차림표로 나타냄
도막2. 교수 및 연구 지표들의 우리말 병신 만들기
도막3. 국제화 평가 지표의 옳지 않음
도막4. 대학평가의 본질과 학문어로서의 우리말
나누기6 학문어로서의 우리말을 키우기 위한 길
도막1. 학문어의 특성
도막2. 우리말로 학문하기 운동
도막3. 우리 학문의 큰길(大道)
책에서 몇 구절 따오겠습니다.
우리가 우리말을 제대로 살펴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가슴 한 편이 저려 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은 글자 없이 반만 년, 제 몸에 딱 맞는 글자를 얻고도 한자에 눌려 지낸 지 오백 년, 새 빛이 비추어 힘찬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아오른 지 오십 년 만에 다시 영어에 내몰려 병든 몸이 되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겠습니까?(9)
우리말은 중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도 쓸 수 있다. 말은 그것을 배우기만 하면 누구든 쓸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영어를 쓴다면, 사전적 뜻매김에 따를 때, 먼저의 우리말은 사라져 없어지고 대신 영어라는 새 우리말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의 여러 말들 가운데 영어를 우리말로 뽑아 쓴다고 할지라도 영어가 곧바로 우리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어가 다른 누군가의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영어라는 전셋짐에 세들 들어 사는 것과 같다. 영어는, 그것의 소유권이 다른 나라의 ‘우리’에게 있는 한, 결국 ‘참 우리말’이 될 수 없다. 영어가 ‘참 우리말’이 되려면, 영어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정신적 알맹이가 되어야 한다.(55)
우리의 대학 교수들은 우리말의 학문어 곡창지대이자 모태이다. 그들은 우리말의 말꽃을 활짝 피워 값진 열매를 맺는 농부들과 같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이 학문 활동을 우리말 대신 영어로 하기 시작함으로써, 그것이 제도적 강제에 의한 것이든 어떤 개인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그들은 우리말 병신 말 만들기의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다.(83)
내 몸이 나와 분리될 수 없듯 내가 쓰는 말 또한 나와 떨어질 수 없다. 내가 우리말과 영어와 독일어를 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강의를 하거나 논문을 쓸 때 반드시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것은 그것의 뜻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앞말은 내게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뒷말은 나의 말할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의 한문몰입교육과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몰입교육과 같은 것이다. 과거 이러한 교육 정책이 사회적 신분 과착화와 민족정신의 쇠퇴를 불러들였던 것처럼 영어 몰입 교육 또한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정체성을 좀머어 헐어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중략) 영어 몰입 교육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낳아 결국 우리말의 학문화 가능성을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는 과거 한문몰입교육이 조선의 학자들에게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을 낳았던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대(事大)’가 비록 당시의 외교 정책 가운데 하나였을지라도, 한문몰입교육의 수혜자들이 앞장서 사대를 부추겼다는 사실은 언어가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게 만든다.(92~93)
대학이 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식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면, 대학은 그 사회와 인류가 그동안 일궈온 온갖 지식의 체계를 이어 가르치고,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보다 나은 앎의 짜임새를 일구어 가야 한다. 만일 대학의 국제화가 지식의 확장과 교육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의도치 않게 황무지로 만들거나 교육 제도를 대학 성장의 도구로 변질시킨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는 것과 같다.(102)
요즘 대학에서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우리말로 강의하는 게 마땅한 과목들인 한국문학, 한국역사, 한국철학, 나아가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같은 제2외국어 과목까지 ‘영어로 강의학’가 강제되고 있다. 이러한 강제 자체가 교수의 강의 자율권과 아울러 학생들의 강의 선택권을 크게 침해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교육 효과도 우리말로 강의하기에 비해 크게 뒤떨어질 수밖에 없음에도 이에 대한 대학 내반성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다.(107)
말과 글은 한번 병이 들면 고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말글이 예술 작품처럼 ‘그 자체로 존립’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은 공동체의 기억이고, 글은 공동체의 기록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기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듯, ‘우리’의 기억이자 기록인 말과 글 또한 결코 뜻대로 바꿀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기억으로서의 말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학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말에서 학문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고, 우리글로 학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글에 더는 학문의 기록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을 잃은 말을 말할 수 없고, 기록이 사라진 글은 물 위에 쓴 손 글씨와 같다.(127)
학문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우리말을 돌보고 키워야 할 사명이 함께 맡겨져 있다. 왜냐하면 학문어로서의 우리말은 바로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문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어쨌든 뛰어난 논문을 쓰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만일 우리가 세계의 좋은 논문들은 ‘우리말’로 쓰거나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말’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고 세계 학계의 학문어 다양성 증진에도 큰 보탬이 되는 일임에 틀림없다.(157)
‘영어로 강의하기’와 ‘영어로 논문쓰기’가 최근 10년 이내에 급격히 늘어나 까닭은 대학평가의 지표로 ‘영어논문’과 ‘영어강의’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들은 대학 순위가 매겨지는 대학평가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뒤 가릴 것 없이 엎어놓고 ‘영어논문’과 ‘영어강의’의 비중을 높여 왔다. 이제까지 우리가 따져본 바처럼 대학의 영어화 바람이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주범임에 틀림없음에도 우리말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못한 까닭은 영어문제가 대학평가 문제로 굳어져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163)
중평(중앙일보 대학평가)의 학술지 차별 대우는 이미 우리의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영어로 논문 쓰는 길을 가게 만들었다.그것이 꼭 중평만의 책임은 켤코 아니다. 그것은 대학 당국과 교수 그리고 우리 사회 모두의 탓이다. 우리의 학자들이 영어로 논문을 쓰는 일은 그들이 우리말로도 똑같은 수준의 논문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국제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우리말로 논문쓰기’를 그치거나, 아나가 더는 우리말로 논문을 쓸 수 없게 될 때는 ‘우리 학문’의 자살이 된다. 이때 중평은 자살을 부추긴 범죄자가 되는 셈이다. 중평은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이 이토록 막중하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244)
학문의 큰 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말 갈말(학술 전문용어)’의 수를 끊임없이 늘려 나가야 할 뿐 아나라 갈말의 뜻을 엄밀하게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학문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는 ‘atom’을 일본어에서 빌려온‘원자’라는 말로 썼지만, 우리가 미국 학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뒤부터 ‘quark’는 ‘쿼크’로 읽히고 쓰이고 있다.(287~288)
우리는 숨 가쁜 산업화와 가슴 뜨거운 민주화 그리고 한 발 앞선 정보화와 내달리는 세계화를 이루었다. 한류는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되살려 주고 있고, 한글은 우리의 모여살이의 완전한 소통 도구가 되었으며, 한국 사람들 자신의 경쟁력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네 삶의 원리와 살이에 큰 가치가 깃들여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아직 그 원리를 속 시원하게 밝혀내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는 분명 우리들 자신의 숨은 힘을 굳게 믿고 있다. 우리의 인문사회학자들이 우리말을 내동댕이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295)
지은이가 이 책을 풀어가는 방식과 내용이 참 특이합니다. 인문학 교수답게 우리말의 문제점을 다짜고짜 던지는 게 아니라‘하얀 이야기’ 한 토막을 먼저 들려줍니다. 이를 보고 말과 글의 문제란 본디 사람의 삶과 직결된 인문학적 문제임을 보여주는 거죠.
지은이는 오랫동안 우리말로 학문하기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 운동은 학문하기 영역에서 모국어를 잃고 영어를 써야만 한다는 것은 정체성의 소멸, 문화 다양성의 소멸을 뜻하고, 나아가 학문 약자들이 영어를 몰라 ‘학문 문맹자’가 된다는 것, 그로써 끝내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걱정을 앞세우는 운동입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외치는 한 마디는 ‘한국의 사회적 권력자(정부, 언론사, 대학 경영자 등)들이 영어화나 국제화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우리말을 마구잡이 병신 말로 만들고 있다’입니다. 모든 학문어의 영어화는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학문어 선택의 자유를 가로막고 학문적 자유를 짓밟는 폭력이며,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을 허물어버리는 일이라는 거죠.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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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생각나는 칼럼이 있어 소개합니다.
한국일보에 실린 서화숙 님의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칼럼을 소개합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일본인 일색이다. 고바야시 마코토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 명예교수, 마스카와 도시히테 교토대 명예교수와 일본계 미국인인 남부 요이치로 시카고대 명예교수이다. 일본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물리학상으로 첫 노벨상을 수상한 이래 물리학상 수상자만 7명이 된다. 올해도 수상자를 또 배출한 화학상과 생리의학상 같은 이학상을 다 합치면 수상자가 13명이 되어 이 분야 국가별 순위에서도 세계 7위이다.
일본의 물리학상 수상자들은 한결같이 일본에서 대학을 마쳤지만 특히 이번 수상자 세 명은 최종 학위까지 모두 일본서 마쳤다. 80대인 남부 교수가 비록 1952년 프린스턴대 초빙을 계기로 미국에 정착했지만 도쿄대에서 공부했으며 60대인 고바야시와 마스카와 교수는 나고야대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이번에 수상계기가 된 '고바야시 마스카와 이론' 자체가 두 사람이 대학원생과 연구원으로 만난 나고야대에서 탄생했다.
일본 토종학자의 노벨물리학상
일본의 기초과학이 왜 강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일본말로 학문을 한다는 것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기초과학은, 특히 물리학 같은 분야는 물질계의 작동원리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분야보다도 깊이 있고 독창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깊이 있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적인 개념이 일찍부터 제대로 잡혀야 한다. 남부 교수는 초등학교 때 과학시간에 느낀 흥미가 그를 과학자로 이끌었다고 한다. 기본개념은 어떻게 해야 잘 잡힐까.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과학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초등 중등과정은 물론 대학에서도 일본말로 과학을 가르친다. 그를 위해 서양에서 발달한 과학을 일본어로 옮기는 것을 당연한 기초과정으로 여겼다. 한자문화권인 동양 4국이 두루 쓰고 있는 과학이니 화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알파벳권 언어를 제 나라 말로 파악하려 한 일본 지식인들의 번역의 소산이다. 소립자나 양자 전자 같은 용어들도 모두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덕분에 일본인들에게 세계적인 수준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깊이 사고한다는 것이지 영어로 사고한다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외국어가 약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일본인들이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많이 받는 것에서나 마스카와와 고바야시의 연구가 일본의 대학에서 탄생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면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과정에서 과학의 기본개념을 파악하도록 잘 가르치지도 않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느닷없이 영어로 과학을 가르친다. 명문대학일수록 자연대 공대 의대에서 물리 화학 생리학 같은 기초분야에 영어교재가 쓰인다. 내용만 익혀도 부족할 시간에 외국어 부담까지 겹치니 한국어로 익혔을 때와 비교하면 절반도 못 배운다. 한국의 기초과학은 외국으로 유학갈 것을 아예 상정하고 가르치는 셈이다.
깊이 있게 사고해야 세계적
교수들은 기초과학 분야의 명저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서라고 말을 하는데, 이렇게 원서로 가르치니 번역할 의미가 없어진다. 한국어라면 열 권도 더 읽었을 전공서적을 한 권 파악하는 것도 힘겨우니 기본사양에서 한국 대학생들이 일본 대학생들보다 처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을 나와도 배운 게 없다는 것도 바로 이래서 생긴다.
대학의 기초과학 교육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외국의 석학들을 모셔오는데 나라에서 돈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다. 듣기에는 근사하다. 그런데 과연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과학실험은 맘껏 할 수 있는가. 초 중등 대학과정에서 과학을 바르게 이해할 기초는 마련되어 있는가. 세계적인 수준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영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깊이 사고한다는 것을 실천할 바탕은 마련되어 있는가. 한글날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한국일보, 2014.10.9.)
[출처] 2014-35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작성자 푸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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