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탐을 내는 상황을 알고도 모두 함구하는 상황에서 저까지 제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평생 저는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겠지요. 마음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주에 연재한 <죽은 언론의 사회, 할 말 있습니다>의 속편이다.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태 이후 10년이 지났다.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파헤친 언론인 최승호, 한학수 PD는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쫓겨났고, 10년 세월을 떠돌고 있었다. 공익 제보자를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제보자가 배신자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10년을 견뎌낸 류영준 교수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죽은 윤리의 사회에서 제보자로 살아남기’는 가능한 일일까. 지난 10년간 학계는 변했을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를 통해서 ‘줄기세포 비망록’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어 보았다.
“연구팀 합류 석 달 지나면서 믿음 깨져”
영화 <제보자>가 나온 후, 제보자 K 류영준 교수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영화화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심경이 어땠나요.
“강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임용된 직후 영화화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용히 지내야 하는 조교수 입장에서 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두 번째는 학생들한테 저를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이어서 학생들 반응이 걱정되었구요. 숨어서 대처하기는 너무 힘들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영화 <제보자>를 본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영화를 본 후 저에게 더 믿음이 간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대학원 학생들 중에는 황 전 교수에게 간접 피해를 받은 이들이 꽤 있어요. 황 전 교수를 보고 꿈을 가지고 수의대에 진학했는데 이 사태가 벌어진 거죠. 실제로 분신자살한 사람도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죠.
“2000년도에 처음 만났습니다.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전문 기초의학자로 학자의 길을 가려고 몇 군데 타진을 했는데 황 전 교수에게서 응답이 있었습니다. 황 전 교수는 대동물수의사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고 복제 분야는 후발주자였으나 줄기세포 팀이 있다고 해서 2002년 3월에 대학원 전임 풀타임으로 들어갔습니다.”
황우석 박사가 무척 아끼는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황 전 교수하고는 매일 아침 6시가 넘으면 저하고 둘이 앉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뭘 할 건지 의논하고…. 두 사람 간의 믿음은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 말과는 다르게 줄기세포 연구를 하시는 게 별로 없었어요. 3개월쯤 지나면서 믿음이 완전히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실력에 강한 의심을 가지게 된 거죠.”
언론에 우선 주목받고 나서 나중에 실력을 키우는 식이었다구요.
“1999년에 탄생했다는 복제소 영롱이가 조작의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백두산 호랑이 프로젝트도 실은 다 유산되고 끝났죠. 개 척추손상 실험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복제소는 2003년에 성공했습니다. 복제소 영롱이는 논문도 내지 않고 언론에 먼저 터뜨린 거죠. 영롱이가 황 전 교수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인데, 영롱이도 숨겨 놓아서 볼 수가 없고, 연구 성과를 보려고 논문을 찾아도 논문이 없는 거예요. 3개월쯤 지나 호랑이팀 팀장이었던 선배와 소팀 팀장이었던 선배에게 영롱이 논문 좀 찾아달라고 했는데 당황하면서 말을 못해요. 나중에서야 ‘네가 도대체 뭘 알고 여기 왔느냐, 네가 이 지옥을 알고 왔느냐? 영롱이 논문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롱이, 백두산 호랑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연구실을 떠나게 되었나요.
“돼지 난자에 백두산 호랑이 체세포를 넣어서 돼지한테 넣는 건데, 돼지 난자하고 같이 넣기 때문에 임신이 되어도 돼지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언론에 초음파 사진 보여주니 사람들은 믿게 된 거죠. 제가 팀장으로서 맡은 일들은 마무리하고 나오려 했지만 연구원 난자 제공 문제가 터졌고, 계속 문제가 터졌어요. 실험을 스케줄에 따라서 해야 되는데 황 전 교수는 아침에 오면 스케줄을 다 바꿔버려요. 이 세포 쓰지 말고 저 세포를 쓰라든지, 데이터를 가져가면 볼펜으로 고친다든지…. 그분의 실력과 도덕성에 대해 신뢰감을 잃었기에 떠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인간적 매력 있지만 실력이 안 받쳐줘”
실험실을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들었어요.
“실험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논문이 사이언스에 올라갔을 때 황 전 교수하고 당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대판 싸우고, 다음날 아내와 같이 나왔습니다. 2002년에 들어가서 2003년에 나온 거죠.”
‘황우석 사단’이 유지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요.
“황 전 교수는 굉장히 인간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데 천재적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3개월만 있어보면 다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실력이 안 받쳐주기 때문에 인간적인 면만 가지고 그걸 유지하기는 힘듭니다.”
황우석 박사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정부도 한몫 하지 않았습니까.
“사단을 유지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명분, 두 번째는 경제적인 거죠. 11월쯤 국가적 R&D 자금을 펀딩하지 않았습니까? 거기 들어가서 천억 단위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밑에 있는 교수들은 꼼짝도 못합니다. 320억이라는 돈을 횡령해서 비자금으로 만드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황 전 교수는 한국 사회의 허술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우석 박사와 결별하고 난 뒤에도 황 박사팀 연구를 계속 주시하고 계셨던 거죠.
“실험실 내부 이야기는 전해들을 수 있었고,‘인간 체세포 회귀식 줄기세포 생산 방법이나 조건들’에 대한 특허보증 같은 게 필요하면 변리사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NT-1’은 과학자들이 검증을 해 보니까 99.9% 자가생식 가능성이 높아요. NT-1은 지금 실재합니다. 체세포 복제가 아니고 자가생식으로 발생한 줄기세포입니다. 황 전 교수 측에서는 체세포 회귀식이라고 계속 주장을 해요. 서울대 조사위원회도 두 번, 미국 독립적인 기관에서도 두 번 검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황 전 교수팀에서는 지금도 반박하고 있습니다.”
2005년 논문도 조작이었죠? ‘임상실험’ 소식을 듣고 제보를 결심하셨지요.
“황 전 교수가 ‘노벨상’, ‘사회적 파워’ 등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건 몰라도 사람 목숨까지 위협하는 경계를 넘실거리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2005년 5월에 사이언스 두 번째 논문이 발표됐는데, 안전성 검증도 없는 상태에서 임상실험을 하겠다고 장애 아동 부모한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아이의 생명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발상 자체가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보 후 10년 별별 고통 다 겪었다”
제보하기 전에 황 전 교수에게 경고를 했나요.
“일단 황 전 교수팀에 ‘줄기세포 11개는 있을 수 없으니 검증하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황 전 교수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모든 것을 일기장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보를 하기 위해 처음에 어디를 찾아가셨습니까. 모두가 제보를 말렸다고요.
“참여연대 김병수 선생, 이재명 투명사회 국장하고 먼저 상의를 했습니다. 김병수 선생이 제보자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많이 봐왔다며 저한테 신중하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믿을 만한 신문기자도 ‘인생 망가지고 싶지 않으면 제보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실제 검증해 줄 힘을 가진 언론으로 PD수첩을 선택하신 거군요.
“문제는 이 줄기세포를 공개적으로 검증할 힘이 없는 거예요, 언론도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5월 31일, PD수첩 15주년 특집 기념 방송에서 최승호 PD가 가슴에 와닿는 말을 했어요. ‘실력이 없어서 못한 적은 있었어도 외압으로 우리가 방송을 못한 적은 없었다.’ 아내하고 상의를 먼저 하고 한학수 PD를 만났습니다. 제 말을 해도 될 사람인지 한 PD를 떠보기 위해서 ‘진실이 우선이냐, 국익이 우선이냐’ 물어보았습니다. 주저 없이 ‘진실이 국익이다’라고 대답을 하셨어요.”
추격전, 위협, 주거침입… 영화 <제보자>에서 보면 류 교수님 가족이 제보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데요.
“13층에 살았는데 로프 타고 집안으로 들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누군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황 전 교수 지지자들은 과격하게 행동을 하셨고, 저희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며칠 전, 아내 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아내의 지지와 협력 덕분에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20살 때 만났습니다. ‘의리’도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겠지요. 아내는 저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저의 뜻에 동의해줬습니다. 사태 중간에 협박전화를 받고 가택침입을 받았을 때도 대담했습니다. ‘실험실에서 만났다’, ‘미즈메디 간호사 출신이다’ 등 황우석 지지자들의 잘못된 인신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영화 <인사이더>에서 제보자의 아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현실에 대한 우울증을 보이는 것이 훨씬 일반적인 상황인데도, 실제 제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 지날수록 진실은 더 드러날 것”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제보하실 겁니까.
“웬만하면 피하고 싶습니다. 저는 평범합니다. 그런 제가 전면에 나서야 했고, 그 후 10년간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탐을 내는 상황을 알고도 모두 함구하는 상황에서 저까지 제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평생 저는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겠지요. 마음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제보 후 10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종류별로 다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황 전 교수가 무덤에 가야 끝나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학계는 아주 폐쇄적이며 그 카르텔은 견고합니다. 제가 겪은, 그리고 겪는 일을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짐작은 하시겠지요. 때가 되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고려대학교 병원에 전공의로 들어갈 때도, 서울아산병원에 들어갈 때도, 그리고 강원대 교수 임용도 ‘공개채용’에 응시하고 합격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만 얘기하겠습니다.”
지금은 좀 안정이 되었나요.
“황 전 교수에게 피해를 입은 연구자들이 너무 많아요. 저 또한 인생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는 전문 연구자로 투신하려고 인생을 걸었는데, 제보한 대가로 전문 연구자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되고, 의사를 겸하는 반반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진실은 다 밝혀지지 않았다는 건가요.
“아직도 이 사람이 사회를 계속 어지럽히잖아요. 황 전 교수가 어지럽히는 만큼 사회가 정화되는 속도가 느려져요, 잘못한 사람이 퇴장을 당해야 하는데 지금도 연구를 계속한단 말이지요. 당시의 책임자들에 대한 기록조차 아직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은 더 드러날 거예요.”
황우석 사태 이후 10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말씀이군요.
“올해 한국생명윤리학회와 국제연구윤리심포지엄에서 학자들의 분석이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한국 사회가 변한 게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제2, 제3의 황우석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요. 바뀌지 않은 한국 사회가 그 어느 협박보다 더 강하게 저를 압박하고, 함께 타락하자는 듯한 카르텔이 그 어떤 회유보다 강합니다.”
제보자 류영준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겠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굵직한 사건의 실체는 이미 드러났지만 더 많은 부분이 수면에 잠겨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사건의 어느 부분에서 누가 어떻게 역할을 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잊고 싶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학계와 언론, 정부의 카르텔이 낳은 광란과 참사를 겪은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사회는 퇴보했고, 세월호의 모습으로 참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서 진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이 글은 지난주에 연재한 <죽은 언론의 사회, 할 말 있습니다>의 속편이다.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태 이후 10년이 지났다.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파헤친 언론인 최승호, 한학수 PD는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쫓겨났고, 10년 세월을 떠돌고 있었다. 공익 제보자를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제보자가 배신자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10년을 견뎌낸 류영준 교수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죽은 윤리의 사회에서 제보자로 살아남기’는 가능한 일일까. 지난 10년간 학계는 변했을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를 통해서 ‘줄기세포 비망록’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어 보았다.
영화 <제보자>가 나온 후, 제보자 K 류영준 교수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영화화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심경이 어땠나요.
“강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임용된 직후 영화화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용히 지내야 하는 조교수 입장에서 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두 번째는 학생들한테 저를 충분히 보여주기도 전이어서 학생들 반응이 걱정되었구요. 숨어서 대처하기는 너무 힘들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영화 <제보자>를 본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영화를 본 후 저에게 더 믿음이 간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대학원 학생들 중에는 황 전 교수에게 간접 피해를 받은 이들이 꽤 있어요. 황 전 교수를 보고 꿈을 가지고 수의대에 진학했는데 이 사태가 벌어진 거죠. 실제로 분신자살한 사람도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죠.
“2000년도에 처음 만났습니다.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전문 기초의학자로 학자의 길을 가려고 몇 군데 타진을 했는데 황 전 교수에게서 응답이 있었습니다. 황 전 교수는 대동물수의사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고 복제 분야는 후발주자였으나 줄기세포 팀이 있다고 해서 2002년 3월에 대학원 전임 풀타임으로 들어갔습니다.”
황우석 박사가 무척 아끼는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황 전 교수하고는 매일 아침 6시가 넘으면 저하고 둘이 앉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뭘 할 건지 의논하고…. 두 사람 간의 믿음은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 말과는 다르게 줄기세포 연구를 하시는 게 별로 없었어요. 3개월쯤 지나면서 믿음이 완전히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실력에 강한 의심을 가지게 된 거죠.”
언론에 우선 주목받고 나서 나중에 실력을 키우는 식이었다구요.
“1999년에 탄생했다는 복제소 영롱이가 조작의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백두산 호랑이 프로젝트도 실은 다 유산되고 끝났죠. 개 척추손상 실험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복제소는 2003년에 성공했습니다. 복제소 영롱이는 논문도 내지 않고 언론에 먼저 터뜨린 거죠. 영롱이가 황 전 교수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인데, 영롱이도 숨겨 놓아서 볼 수가 없고, 연구 성과를 보려고 논문을 찾아도 논문이 없는 거예요. 3개월쯤 지나 호랑이팀 팀장이었던 선배와 소팀 팀장이었던 선배에게 영롱이 논문 좀 찾아달라고 했는데 당황하면서 말을 못해요. 나중에서야 ‘네가 도대체 뭘 알고 여기 왔느냐, 네가 이 지옥을 알고 왔느냐? 영롱이 논문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롱이, 백두산 호랑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연구실을 떠나게 되었나요.
“돼지 난자에 백두산 호랑이 체세포를 넣어서 돼지한테 넣는 건데, 돼지 난자하고 같이 넣기 때문에 임신이 되어도 돼지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언론에 초음파 사진 보여주니 사람들은 믿게 된 거죠. 제가 팀장으로서 맡은 일들은 마무리하고 나오려 했지만 연구원 난자 제공 문제가 터졌고, 계속 문제가 터졌어요. 실험을 스케줄에 따라서 해야 되는데 황 전 교수는 아침에 오면 스케줄을 다 바꿔버려요. 이 세포 쓰지 말고 저 세포를 쓰라든지, 데이터를 가져가면 볼펜으로 고친다든지…. 그분의 실력과 도덕성에 대해 신뢰감을 잃었기에 떠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인간적 매력 있지만 실력이 안 받쳐줘”
실험실을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들었어요.
“실험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논문이 사이언스에 올라갔을 때 황 전 교수하고 당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대판 싸우고, 다음날 아내와 같이 나왔습니다. 2002년에 들어가서 2003년에 나온 거죠.”
‘황우석 사단’이 유지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요.
“황 전 교수는 굉장히 인간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데 천재적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3개월만 있어보면 다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실력이 안 받쳐주기 때문에 인간적인 면만 가지고 그걸 유지하기는 힘듭니다.”
황우석 박사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정부도 한몫 하지 않았습니까.
“사단을 유지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명분, 두 번째는 경제적인 거죠. 11월쯤 국가적 R&D 자금을 펀딩하지 않았습니까? 거기 들어가서 천억 단위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밑에 있는 교수들은 꼼짝도 못합니다. 320억이라는 돈을 횡령해서 비자금으로 만드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황 전 교수는 한국 사회의 허술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우석 박사와 결별하고 난 뒤에도 황 박사팀 연구를 계속 주시하고 계셨던 거죠.
“실험실 내부 이야기는 전해들을 수 있었고,‘인간 체세포 회귀식 줄기세포 생산 방법이나 조건들’에 대한 특허보증 같은 게 필요하면 변리사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NT-1’은 과학자들이 검증을 해 보니까 99.9% 자가생식 가능성이 높아요. NT-1은 지금 실재합니다. 체세포 복제가 아니고 자가생식으로 발생한 줄기세포입니다. 황 전 교수 측에서는 체세포 회귀식이라고 계속 주장을 해요. 서울대 조사위원회도 두 번, 미국 독립적인 기관에서도 두 번 검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황 전 교수팀에서는 지금도 반박하고 있습니다.”
2005년 논문도 조작이었죠? ‘임상실험’ 소식을 듣고 제보를 결심하셨지요.
“황 전 교수가 ‘노벨상’, ‘사회적 파워’ 등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건 몰라도 사람 목숨까지 위협하는 경계를 넘실거리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2005년 5월에 사이언스 두 번째 논문이 발표됐는데, 안전성 검증도 없는 상태에서 임상실험을 하겠다고 장애 아동 부모한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아이의 생명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발상 자체가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보 후 10년 별별 고통 다 겪었다”
제보하기 전에 황 전 교수에게 경고를 했나요.
“일단 황 전 교수팀에 ‘줄기세포 11개는 있을 수 없으니 검증하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황 전 교수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모든 것을 일기장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보를 하기 위해 처음에 어디를 찾아가셨습니까. 모두가 제보를 말렸다고요.
“참여연대 김병수 선생, 이재명 투명사회 국장하고 먼저 상의를 했습니다. 김병수 선생이 제보자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많이 봐왔다며 저한테 신중하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믿을 만한 신문기자도 ‘인생 망가지고 싶지 않으면 제보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실제 검증해 줄 힘을 가진 언론으로 PD수첩을 선택하신 거군요.
“문제는 이 줄기세포를 공개적으로 검증할 힘이 없는 거예요, 언론도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5월 31일, PD수첩 15주년 특집 기념 방송에서 최승호 PD가 가슴에 와닿는 말을 했어요. ‘실력이 없어서 못한 적은 있었어도 외압으로 우리가 방송을 못한 적은 없었다.’ 아내하고 상의를 먼저 하고 한학수 PD를 만났습니다. 제 말을 해도 될 사람인지 한 PD를 떠보기 위해서 ‘진실이 우선이냐, 국익이 우선이냐’ 물어보았습니다. 주저 없이 ‘진실이 국익이다’라고 대답을 하셨어요.”
추격전, 위협, 주거침입… 영화 <제보자>에서 보면 류 교수님 가족이 제보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데요.
“13층에 살았는데 로프 타고 집안으로 들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누군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황 전 교수 지지자들은 과격하게 행동을 하셨고, 저희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며칠 전, 아내 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아내의 지지와 협력 덕분에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20살 때 만났습니다. ‘의리’도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겠지요. 아내는 저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저의 뜻에 동의해줬습니다. 사태 중간에 협박전화를 받고 가택침입을 받았을 때도 대담했습니다. ‘실험실에서 만났다’, ‘미즈메디 간호사 출신이다’ 등 황우석 지지자들의 잘못된 인신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영화 <인사이더>에서 제보자의 아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현실에 대한 우울증을 보이는 것이 훨씬 일반적인 상황인데도, 실제 제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 지날수록 진실은 더 드러날 것”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제보하실 겁니까.
“웬만하면 피하고 싶습니다. 저는 평범합니다. 그런 제가 전면에 나서야 했고, 그 후 10년간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탐을 내는 상황을 알고도 모두 함구하는 상황에서 저까지 제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평생 저는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겠지요. 마음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제보 후 10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종류별로 다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황 전 교수가 무덤에 가야 끝나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학계는 아주 폐쇄적이며 그 카르텔은 견고합니다. 제가 겪은, 그리고 겪는 일을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짐작은 하시겠지요. 때가 되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고려대학교 병원에 전공의로 들어갈 때도, 서울아산병원에 들어갈 때도, 그리고 강원대 교수 임용도 ‘공개채용’에 응시하고 합격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만 얘기하겠습니다.”
지금은 좀 안정이 되었나요.
“황 전 교수에게 피해를 입은 연구자들이 너무 많아요. 저 또한 인생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는 전문 연구자로 투신하려고 인생을 걸었는데, 제보한 대가로 전문 연구자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되고, 의사를 겸하는 반반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진실은 다 밝혀지지 않았다는 건가요.
“아직도 이 사람이 사회를 계속 어지럽히잖아요. 황 전 교수가 어지럽히는 만큼 사회가 정화되는 속도가 느려져요, 잘못한 사람이 퇴장을 당해야 하는데 지금도 연구를 계속한단 말이지요. 당시의 책임자들에 대한 기록조차 아직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은 더 드러날 거예요.”
황우석 사태 이후 10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말씀이군요.
“올해 한국생명윤리학회와 국제연구윤리심포지엄에서 학자들의 분석이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한국 사회가 변한 게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제2, 제3의 황우석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요. 바뀌지 않은 한국 사회가 그 어느 협박보다 더 강하게 저를 압박하고, 함께 타락하자는 듯한 카르텔이 그 어떤 회유보다 강합니다.”
제보자 류영준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겠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굵직한 사건의 실체는 이미 드러났지만 더 많은 부분이 수면에 잠겨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사건의 어느 부분에서 누가 어떻게 역할을 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잊고 싶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학계와 언론, 정부의 카르텔이 낳은 광란과 참사를 겪은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사회는 퇴보했고, 세월호의 모습으로 참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서 진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제보자> 자문 역할 한 황상익 교수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진실발굴 계속돼야”
황상익 교수님께 여쭙겠습니다. 황우석 사태가 영화 <제보자>로 탄생하기까지 자문 역할을 맡으셨고,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가장 냉철한 평가를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는 ‘집단 지성의 승리’라고 글에 쓰신 걸 보았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진전시키는 건 영웅이 아니라 좌절하고 위축되었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YTN이 PD수첩을 난파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전문 연구자들의 온라인 대화 장소인 브릭의 ‘소리마당’이 열기를 뿜기 시작했습니다. ‘anonymous’라는 전직 연구자가 황 전 교수팀의 논문이 날조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고, ‘아릉’이 올린 ‘DNA fingerprinting 데이터 살펴보기’로 진실게임은 끝났습니다. 줄기세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그 허구가 제보자 류영준과, 브릭의 집단 지성에 의해 속속들이 드러났죠.”
황 교수님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광란의 참사’라는 표현은 촌철살인이었습니다.
“‘황우석에 의한, 황우석을 위한, 황우석의 소동’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었죠. 존재하지 않는 복제배아줄기세포를 내세워 호가호위했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적인규탄집회, YTN의 ‘청부 취재와 보도’, ‘난자 기증자 1000명 돌파 기념 연구복귀 기원 진달래꽃 행사’, 대통령까지 포함된 고위 인사들의 일방적인 황우석 비호, 급기야는 ‘서울대병원 입원극’까지 한국 사회를 온통 광란으로 몰아넣는 일들이 이어졌지요.”
황 교수님,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복제배아줄기세포는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원천기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제 암송아지 영롱이’는 복제 동물이 아니고, 송아지 ‘진이’도 마찬가집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는 광우병 뇌성 소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요컨대 ‘황우석 성공 신화’는 온통 거짓 위에 떠 있는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그래도 10년 전은 진실의 승리를 확인한 자랑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시대 자체가 지록위마(指鹿爲馬)인 지금이라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진전시키는 건 영웅이 아니라 좌절하고 위축되었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YTN이 PD수첩을 난파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전문 연구자들의 온라인 대화 장소인 브릭의 ‘소리마당’이 열기를 뿜기 시작했습니다. ‘anonymous’라는 전직 연구자가 황 전 교수팀의 논문이 날조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고, ‘아릉’이 올린 ‘DNA fingerprinting 데이터 살펴보기’로 진실게임은 끝났습니다. 줄기세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그 허구가 제보자 류영준과
황 교수님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광란의 참사’라는 표현은 촌철살인이었습니다.
“‘황우석에 의한, 황우석을 위한, 황우석의 소동’이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었죠. 존재하지 않는 복제배아줄기세포를 내세워 호가호위했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황 교수님,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복제배아줄기세포는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원천기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제 암송아지 영롱이’는 복제 동물이 아니고, 송아지 ‘진이’도 마찬가집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는 광우병 뇌성 소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요컨대 ‘황우석 성공 신화’는 온통 거짓 위에 떠 있는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그래도 10년 전은 진실의 승리를 확인한 자랑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시대 자체가 지록위마(指鹿爲馬)인 지금이라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박상미 문화평론가>
'* 악(몹쓰리)의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독] 수원 시립어린이집 학대 동영상·사진 나왔다 (0) | 2015.04.08 |
---|---|
전파무기_사람의 생각을 읽고 조정할 수 있는 (0) | 2015.01.16 |
당신들의 우경화 <르몽드 디풀로마티크>알랭 가리구 (0) | 2015.01.10 |
샤를리 엡도 트위터 이슬람 풍자 만평 (0) | 2015.01.08 |
샤를리 엡도의 문제 만평: 가톨릭, 이슬람, 유대주의 등 종교 문제에 부정적인 내용 다뤄 (0) | 2015.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