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가 도입되기 직전까지 쓰이던 독일 마르크화 중 액면가가 가장 높았던 1,000마르크짜리 지폐에는 그림 형제의 얼굴과 이들이 펴낸 독일어 사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형제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등이 실린 동화집으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들이 본래는 언어학자로서 독일어 사전을 펴내는 한편 독일어가 포함된 인도•유럽 어족, 그중에서도 특히 게르만 어군 언어의 자음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지를 연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림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형 야코프 그림Jakob Grimm, 1785~1863과 동생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1786~1859이다. 이들은 독일 중서부 헤센 주 하나우Hanau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주에 있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형제가 모두 대학 시절에 전공으로 삼은 분야는 법학이었지만, 이들을 가르치던 법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1861가 1804년에 연구차 파리로 떠나자 형제 모두 법학 공부를 접어 두고 그때부터 고대 독일 문학 연구에 심취했다.
이들은 대학 졸업 이후 나폴레옹 치하의 베스트팔렌 왕국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독일 민담을 채록했다. 이 민담들은 본래 독일어 음운론말소리의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과 문법론 연구를 위한 소재였지만, 나중에 언어학 논저들과 별도로 민담만을 따로 모아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림 동화집’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보다 《독일어 사전Deutsches Wörterbuch》을 집필하고 ‘그림 법칙Grimms Gesetz’으로 알려진 게르만 어군 언어들의 자음 추이 규칙을 발견함으로써 언어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림 형제가 1838년에 집필하기 시작한 독일어 사전은 이들 중 나중에 세상을 떠난 형 야코프가 별세한 지 꼭 100돌이 되는 1961년에야 완성되었다. 이 사전에서는 단지 표제어의 뜻만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그 표제어가 처음 쓰였는지, 그리고 다른 언어의 어떠한 단어와 대응되는지를 일일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고전 텍스트와 현대 텍스트에서 그 단어가 실제로 쓰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만드는 사전의 가장 모범적인 형태를 그림 형제의 독일어 사전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현재 독일 트리어 대학교에서 이 사전을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누리집을 개발해 공개하고 있다.
이 누리집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woerterbuchnetz.de/DWB
이들은 또한 풍부한 언어 자료를 수집한 덕택에 인도•유럽 어족, 특히 게르만 어군에 속하는 여러 언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 과정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독일어 문법Deutsche Grammatik》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림 형제는 독일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페르시아어, 벵골어 등의 조상이 되는 인도•유럽 어족 공통 조어의 자음 가운데 일부가 게르만 어군 언어들에서만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예컨대 신체의 일부인 ‘발’을 라틴어로는 pēs, 고대 그리스어로는 pū́s, 러시아어로는 pod, 벵골어로는 pā라고 하지만 독일어로는 Fußfuːs, 영어로는 footfuː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유독 독일어와 영어 등의 기원이 된 게르만 어군 조어에서만 그보다 더 예전에 쓰였던 인도 유럽어 공통 조어의 ‘p’가 ‘f’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림 형제가 발견한 이 규칙은 훗날 역사비교언어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글을 마치기에 앞서, 〈백설공주〉의 독일어 제목인 〈Schneewittchen〉에는 독일어 방언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이 숨어 있다는 점을 덧붙인다. 이 단어는 ‘Schnee눈-고지 독일어’, ‘witt하얗다-저지 독일어’, ‘-chen‘작은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접미사’이라는 세 형태소가 합쳐진 말인데, ‘Schnee’는 고지 독일어고 ‘witt’는 저지 독일어다. ‘-chen’은 두 방언에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Schneewittchen〉이라는 제목에는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가 섞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 형제가 활동했던 카셀 지역이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의 경계선인 ‘벤라트 선’에서 가까운 지역이라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림 형제가 펴낸 동화집 초판1812년판에는 저지 독일어 철자를 따라서 ‘Sneewittchen’이라고 나와 있지만, 이들이 살던 지역이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가 혼재된 지역이다 보니 고지 독일어 표현이 일부 반영된 ‘Schneewittchen’이라는 단어가 이 지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책을 새로 찍어 낼 때도 이 단어를 제목으로 삼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표준 독일어는 중부와 남부 독일 방언인 고지 독일어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 북부에서 쓰이는 저지 독일어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제목이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2)Kassel. 독일 헤센 주 북동부이자 지금의 독일 연방 공화국 영토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
3)2014년 1월 28일 <우리말 편지>에 나온 필자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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