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정현기_평론가 대담

사이박사 2013. 6. 16. 20:48

정현기
2008.07.15 21:49 twitter트위터 facebook페이스북 me2day미투데이 요즘요즘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문학 평론가 정현기 선생을 만나 그가 생각하는 《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정현기’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문학 비평가의 삶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그들의 삶이 한편으로는 순탄치 못했음을 직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된 과정이 자못 궁금해진다. 정현기 선생은 1960년 4∙19가 일어나던 무렵 연세대 국문과를 입학, 5공화국 시절 즉, 학원 민주화가 진행되던 시절 세종대학교 교수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세종대학교는 당시 한 가족이 전권을 휘어잡던 족벌학교나 다름없었다. “그 때, 그들을 포함한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영학과 누구 한 마디 해 봐’라고 하면, ‘아, 하바드의 어쩌구, 저쩌구’하고, ‘음대 교수 누가 노래 한 번 불러봐’하면 음대 교수 누가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 이러한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학생들 편에서 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어문학부장이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짤리고(?) 1년 정도 있다가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그러나 신원조회를 통과하고, ‘임용보고 끝’을 통보받은 그에게 과거의 전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종대학교 패거리들이 안기부를 움직여서, 연세대학교 총장에게 ‘정현기가 누군지 아느냐? 그를 어떻게 교수로 임용하느냐?’라며 한 마디 한 거야. 그랬더니 나보고 사표를 쓰라네. 그래서 썼지 뭐. 그 때 화장실로 도망을 가던지 해서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사표를 낸 거야. 물론 나중에는 복직이 되었지만. 아마 1987년도 지났을 때 일거야. 그 때 정부에서 정현기를 다시 복직시키라고 했는데, 당시 연세대 총장이던 안세희가 올 해는 안 되고, 내년에 복직시키겠다고 했어. 그런데 내년에는 안세희가 총장이 아니란 말이야. 총장일 때도 못 시키는데, 총장에서 물러난 사람이 어떻게 시키겠어. 그래서 내가 소송을 걸겠다고 했더니 복직을 시켜주더라구. 그것도 고령자 예우에 대한 특별 채용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물러난 후 선생은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아홉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그가 생활고에 허덕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결과였을까? 그는 자신이 거처할 수 있는 집조차 가지지 못하였으며, 지금 생활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의 집은 간호학과 제자의 집을 빌려 쓰고 있는 처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어떻게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그는 대학원 석사 때 ‘사상계’라는 잡지에서 ‘해학의 미적 범주’라는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게 된다. 그 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선생은 글을 쓴 이어령 선생을 찾아가고 그가 쓴 글들을 탐독하게 된다. 그 때 이어령 선생은 정현기 선생에게 평론을 써볼 것을 제안하였다. “그 때 이어령 선생이 내 글을 《문학춘추》라는 곳에다가 실어주었어. 물론 나는 실린 것을 못 봤지만. 하지만 그 곳에서 우선 추천이 된 거야. 그 다음 내가 석사 리포트를 쓰고 있을 때 그것을 이어령 선생에게 보여드렸는데, 당시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을 창간할 때야. 그리고 그것을 《문학사상》에다 실어 주셨지. 그래서 그 때부터 ‘평론’ 타이틀을 붙이게 되었어.” 그 이후로 선생은 평론활동을 왕성하게 하며, 몇 권의 평론집을 출간한다. 그런 그는 평론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평론에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 용어는 우리 것이 아니야. 가급적 우리말로 우리만의 표현으로 만들어진 용어를 사용해야 느낌이 살아 있지. 우리 용어가 아닌 것을 사용해서는 안 돼. 아마 지식인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사기를 친거야. 가령 한자나,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말, 우리식으로 표현을 해야지 잘 모르는 말,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자꾸 번역하고 있단 말이야. 특히 철학에서는 더 그래”라고 하며 어떤 글을 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말을 통한 우리식의 표현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런 그가 최근에 내놓은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책은 곧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 및 그가 말하는 ‘우리말로 표현하기’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다른 사람의 글을 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작가가 작품에다 숨겨놓은 작가적 생각이나 의도를 찾아내어 독자와의 소통에 가교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평론가는 어쩌면 작가의 글을 철저히 해부해 드려다 보는 역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좋고 나쁨을 가려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와 부딪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정현기 선생은 이청준 선생과 얽힌 일화를 전한다. “이청준 선생의 작품 가움데 《인간인》이라는 것이 있어. 아주 독특한 기법으로 서술했는데, 분량도 많아. 그런데 내가 그것을 시로써 평론을 썼다구. 시로써 평론을 쓰고 얼마 안돼서 중앙일보 문학가 모임에 갔었어. 그런데 그곳에 와 있던 김○○를 비롯한 사람들이 ‘얘들아 저 미친 ××, 정현기 ×× 왔다. 저 미친, 시로 평론 쓴 ××왔다.’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이청준 씨가 말하는 거야. ‘나도 봤어. 그런데 나는 너무 좋았다.’라고 하잖아. 그리고 ‘왜 시로써 평론을 썼느냐’고 묻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내가 읽은 서양의 평론은 가령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라던가 브라이든, 시드니 같은 사람들은 시로써 평론을 썼어. 그래서 ‘내가 그런 글 봤냐?’라고 했더니, ‘몰라’라고 하더라구. 여하튼 그래서 그것을 평론집에 내지는 못했어.” 정현기 선생은 최근 평론활동뿐만 아니라 《시에 든 보석》과 같은 시집을 낼 정도로 시작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는데, 이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文癖(문벽)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그의 열정에 경외심마저 느낀다. 선생은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고려 시대 이규보는 글의 종류가 굉장히 많아. 그리고 그의 글을 읽으면 생생한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나도 일지(日誌)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날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남기고 싶은 거야. 아마 오늘 여러분(필자와 기자)이 돌아가시면 또 쓸거야.”라며 그가 쓴 일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것 같지만, 한 시간을 놓고, 10분을 놓고, 1분을 놓고 보면 어느 순간도 매 순간 같은 것은 없다. 지난 삶이 우리의 미래를 기약해 주듯, 현재의 열정이 없다면, 그리고 현재의 기록이 없다면 이후의 우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일 것인가. 정현기 선생과의 대담은 이 미천한 필자가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필자가 이제껏 글을 써 오면서 이렇게 고심하고, 고심해도 글이 앞으로 나아기지 못할 일은 없었는데 이번 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에 오늘 이 글은 대학 초년생 때의 실력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필자는 기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글을 처음 쓸 때의 그 두근거림을 살아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현기 선생은 그런 분이다. 필자로 하여금 허위와 가식이 없게끔 만드는 사람.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에게 물들 것 같은 사람. 그것도 천진무구하게. 김상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 범성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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