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박근혜

박정희의 술시중_박선호의 증언_김재홍

사이박사 2012. 11. 20. 13:58

정치

대구경북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 평가

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기자말>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권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왜 술과 여자 같은 사생활 문제를 들추어내느냐는 비판적 지적도 있다. 경제성장이나 국가안보 수호 같은 거룩한 의제(?)를 중심으로 따져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부분 그 측근의 후예들이거나 과장된 신화에 대한 신봉자들이 그런 얘기들을 한다. 우리가 이 만큼 먹고 살게 해놓은 사람이 누군데 그런 공로를 말하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을 건드리느냐고 항변한다. 이는 마치 박정희 시대 권력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남자의 배꼽 아래 문제는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나 똑 같다.

대통령이 술을 좋아하고 그 자리에 여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인가. 더구나 박정희의 그런 술자리 여자는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연예계와 요정 마담들을 동원해 조달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항상 내세우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국가정보기관으로서 일반에게 베일에 가려진 기밀부서다. 그런 허울좋은 비밀보호 속에 국민의 눈이 가려진 채 대통령은 은밀하게 술과 여자를 즐긴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여자 조달했다면 사생활이라 할 수 없어"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숨을 거뒀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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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름 있는 역사학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 박정희의 술과 여자 얘기를 부득이 더 이어나가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였던 시대는 불행하게도 그의 일거수일투족 뿐 아니라 표정과 기분까지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그의 사생활이 평범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생활은 이미 권력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는 권력의 풍향계였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어 민주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라면 그의 공적 활동과 사생활은 엄격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헌법을 짓밟고 절대권력자가 되었을 때 공과 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력의 사유화, 인격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여자를 조달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독재자의 사생활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다."

유신체제 말기 대통령 박정희의 비밀요정 행사는 그 빈도가 매우 잦았다.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소행사나 측근 권력자 3~4명이 함께 하는 대행사가 한달이면 열 번 정도씩 열렸다. 그러니까 사흘에 한 번 꼴로 주연을 벌였다는 얘기다. 그때마다 외부에서 술시중 드는 여자들을 불러 왔다. 대통령의 주연 담당이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일요일을 포함해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박정희 권력이 황혼녘에 들어 선 79년 가을 어느날 박선호와 비밀연회장 담당 사무관 남효주는 은밀하게 탄식조 말을 주고 받았다. 그래도 공직자라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또 한편 국정 최고책임자의 행실이 한심했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 육영수 여사 전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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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11일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에게 계속 '양심선언'을 유도했다.

강 변호인(이하 강): "피고인은 이제 말한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함께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

그러자 담당 검찰관이 재판부에 급히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본건 변호인은 본건 공소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제한해 주십시오."

그러나 재판부의 법무사는 "재판과 관련 있는 것은 신문해 주십시오"라며 변호사를 직접 제한하지 않았다. 법무사는 다른 한편 박선호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무상 비밀 등에 대해 진술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고지한 바와 같습니다."

이때만 해도 전두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12.12 군사반란 이전이어서 그 후보다는 비교적 재판 진행은 원칙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 변호사가 재차 물었다.

"소행사, 대행사 이런 빈도가 너무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는데 …?"
박선호(이하 박):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강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이 교도소에서 접견할 때 얘기하던 것과 달리 재판부가 주입하는 대로 따라 진술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어 변호사의 "… 있죠?" 하는 물음과 피고인의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는 숨바꼭질식 신문이 반복됐다.

화대는 지금 돈으로 100~200만 원 정도...10.26날도 "돈 다 줘서 보냈다"

 1977년 7월 수해를 입은 구로공단 복구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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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고등군법회의에서 박선호 피고인은 태도가 달라졌다. 약간의 심경변화를 보인 그는 박 대통령의 술자리 여자에 대해 조금씩 운을 떼기 시작한다.

10.26이 일어난 해를 넘긴 80년 1월23일,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

강 : 피고인은 1심에서 변호인이 당일 여자 두 사람을 인솔해 온 데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을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박 :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 지금 시내에서 일류 배우들로 활동하고 있는데… 역효과가 나서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또 고인을 욕되게 하므로 피했습니다.

이 답변에서 강 변호사는 중앙정보부 간부였던 피고인이 비밀을 지키려는 직업의식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강 변호사는 직답보다는 우회적으로 박정희의 술자리에 여자들이 동원됐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강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박 : 지금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 :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박 : … 저는 동기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존경하는 부장님의 지시면 무조건 한다는 것 외에는 없고, 만약 그 때 다른 짓을 했어도 응했을 것입니다.
강 : 만찬에 참석한 여자들을 몇 시에 보냈나요?
박 : 11시경에 …
강 : 거사가 끝난 뒤였나요? 돈도 주고 보냈죠?
박 : 돈도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군사법정에서의 심문과 변호인 접견록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 여자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 가치로 쳐서 보통 100만 원 정도였고 유명세를 계산해 더 주는 경우는 200만 원이었다. 당시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요정에서 이름 있는 모델이나 연예인들에게 뿌리는 팁에 비하면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의 유명한 마담들이 거느리는 화류계 여인 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마담이 장충동 모 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특히 연예계에서 유명해지기 전인 20대 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한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쾌히 응낙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 갔다 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한 발 다가 간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 종종 김 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술자리 여자 최종 심사는 차지철이, 0순위는 연예계 지망생"

 1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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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여자를 최종 심사했던 사람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다. 그는 요정에 소속돼 있는 여자들은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고위층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연예계 지망생이 0순위였다. 그 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 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차지철은 또 하나의 원칙으로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들여보내지 않았다. 단골을 만들면 보안상이나 기타 부담스러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정희가 국산영화를 시사하거나 TV연예프로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없는 한 대개 불러왔다.

갑작스레 궁정동 비밀연회장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중 일정이 펑크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자세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깨나 쓰는 무슨 협회 같은 곳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이 자리에 왔던 사실을 밖에 나가 일절 발설하면 안된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인사들의 대화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 것,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 것 등이다.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증인인 박선호 피고인은 결국 80년 5월24일 김재규 등 다른 5명의 피고인과 함께 사형당한다. 형장에서 그의 마지막 표정은 의연했다. 이미 그의 최후진술 때 엿보인 의연함이었다.

80년 1월 24일 고등군법회의 마지막 재판인 3회 공판. 재판정에서 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인 최후진술에서 박선호는 김재규의 명령에 따라 엄청난 일에 가담한 배경과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지난 10일 게재된 '박정희 시대 이야기' 1회를 들여다 본 방문자가 수십만으로 집계됐다. 그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리라. 필자로서 어깨가 무거워짐을 실감한다. 허무맹랑한 소문과 중상 아니냐는 댓글도 있었으나 이런 '성찰적 글쓰기'를 어떻게 근거 없이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들과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기 위한 일에 성실하게 임할 것임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