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회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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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월) 11:31 한겨레
[단독] “내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 이상 있었다”
[한겨레] [한겨레21] 삼성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
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인가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 관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과 정황 증거물이 그룹 핵심 관계자에 의해 제시됐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2006년 3월 ‘전략기획실’로 개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10월27일 <한겨레21>과 인터뷰를 갖고 “삼성이 (자신 명의의 계좌로)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삼성본관 2층 소재)에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었다”며 관련 기록과 실태를 공개했다. 김 변호사는 문제의 계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설된 것이며, 이자소득세 납부 기록 등을 바탕으로 은닉 비자금의 규모를 50억원 안팎으로 추정했다.
그는 “삼성은 본인 동의없이 은행, 증권사 등에 계좌를 개설한 뒤 이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하거나 자금 세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내가 입사할 때(1997년) 제출한 주민등록증 복사본과, 자기들이 임의로 만든 도장을 이용해 수시로 신규 통장을 개설하고, 해지했다”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는 검사 출신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해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상무, 법무팀장(전무급)을 거친데서 짐작할 수 있듯 삼성그룹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
삼성그룹의 핵심은 구조조정본부를 이어받은 전략기획실이며, 법무팀은 그 전략기획실의 핵으로 꼽힌다.
김 변호사는 비자금 문제 공개에 대해 “이는 폭로나 배신의 문제가 아니며 꼭 누구를 처벌해야한다는 것도 아니다”며 “다섯달 이상 고민한 끝에 삼성의 ‘사회적 기능’이 왜곡돼 있는 것을 바로 잡고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은 엄청난 국부를 창출한 공도 있지만 ‘시스템적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며 “‘삼성 장학생’이니 ‘삼성 돈 먹으면 뒤탈이 없다’는 식의 잘못된 전통을 깨야한다”고 말했다.
‘보안계좌’ 본인도 조회 못해
<한겨레21>은 김 변호사와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기 전 관련 기록을 미리 확보했으며, 김 변호사가 10월29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비자금 은닉 사실을 공개한다는 전언에 따라 서둘러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김 변호사가 제시한 첫번째 물증은 ‘2004년 10월 현재’로 찍혀있는 ‘굿모닝신한증권 도곡지점’에서 보낸 ‘주식 잔고확인 요청서’이다. ‘계좌번호: 012-01-112XX’, ‘계좌명: 김용철’로 돼 있는 이 잔고확인요청서에는 주식 26억6820만4500원어치가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확인 결과 해당 주식은 삼성전자 6071주였다. 김 변호사는 “나도 모르는 삼성전자 주식이 보관돼 있다가 인출됐으며 내 명의였음에도 계좌의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5월 종합소득 신고를 앞두고 삼성 쪽에 “차명 계좌를 빨리 정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삼성으로부터 정리하고 있다는 답변을 듣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는 주식을 위장으로 분산해 비자금을 관리한 통로였을 것이라고 김 변호사는 추정했다.
두번째 물증은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돼 있는 김 변호사 명의의 계좌이다. 이는 김 변호사의 2006년도 금융소득 종합과세 납부 실적에서 드러났는데, 자신도 모르는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 계좌에서 무려 1억8185만4326원의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에 따른 소득세는 2545만9560원에 이르렀다. 물론, 김 변호사는 소득세를 납부한 사실이 없으며, 삼성 쪽에서 대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당 계좌를 저축예금이라고 가정해 당시 이자율(4.7%)을 적용하면, 예금액은 50억원 안팎에 이른다.
김 변호사는 10월18일 우리은행 △△지점에 확인한 결과, 이 계좌가 있는 것은 파악됐지만, ‘보안계좌’여서 계좌번호조차 조회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 변호사는 10월24일 우리은행 OO지점을 통해 또 한 차례 계좌 조회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계좌의 존재 여부마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10월18일 계좌 조회를 한 사실이 삼성 쪽에 알려짐으로써 아예 계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도록 삼성 쪽에서 서둘러 조처한 때문이며, ‘비자금 조성용’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김 변호사는 밝혔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보안 계좌’는) 계좌에 ‘시큐리티’(안전장치)를 거는 것으로, 계좌 개설을 신청한 지점에서 관리하며, 개설된 지점이 아닌 곳에서도 확인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반 사람들은 보안계좌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담당 관리자가 따로 있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본다”고 말했다. “계좌는 신청 서류를 받아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본인 동의없는 차명 계좌는 있을 수 없다. 위임장을 발급받아 대리인이 개설할 수 있기는 하다. 만약 차명으로 계좌를 만들었다면, 금융실명제 위반이다. ” 그는 또 “만약 명의가 도용당한 것이라면, 은행은 업무 취급자의 업무부주의에 대해 징계를 하게 되지만, 계좌 개설을 요청한 사람에게는 어떤 조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명의상의 예금주가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해야 조치가 내려질 수 있다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나타났다 사라진 주식과 현금
김 변호사가 제시한 물증으로는 이 밖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1002-301-722068’이 그 하나다. 계좌 번호와 함께 찍혀있는 계좌의 활동 시기는 ‘2004년 8월26일~2004년 12월7일’이었다. 김 변호사는 10월18일 우리은행 △△지점에서 이 번호의 계좌는 확인했지만, 거래 내역은 조회할 수 없었다. 그는 10월24일 우리은행 OO지점에 다시 계좌 확인을 요청한 결과, 계좌의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계좌에 대한 조회 사실 또한 삼성 쪽에 알려져 차단 조처가 내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금세탁용’으로 추정된 네번째 물증은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1002-635-117357’이다. 계좌 개설 시기는 2007년 8월27일로 돼 있었으며, 개설 당일 17억원을 입금한 뒤 다음날 ‘삼성국공채 신매수’ 자금으로 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 변호사는 “올 7월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뒤 8월초 재발급받았는 데도 (내 동의없이 내 이름으로) 계좌를 신규로 개설한 것은 과거에 그룹에 제출된 내 주민등록증 복사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현금으로 입금한 뒤 하룻만에 빼낸 것으로 보아 ‘자금세탁용’이라고 추정했다.
김 변호사는 자신 명의의 또 다른 계좌들을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져 추가적인 물증 제시가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김 변호사의 기자회견 소식과 <한겨레21>의 기사화를 감지한 삼성그룹은 10월27일부터 집중적인 해명과 반박 작업에 나섰다. 이날 오후 삼성그룹 3층 기자실에서 만난 그룹 전략기획실의 한 임원은 “(김용철 변호사 명의로 돼 있는 주식보유 계좌에 대해) 전략기획실 재무팀의 고위 임원이 김용철 명의로 ‘파킹’시켜놓고(넣어두고) 제테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 차명거래일 뿐, 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 관리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었다.
삼성그룹 쪽 “비자금 조성은 과잉해석”
하지만 만약 재테크 수단으로 차명거래를 했다면, 계좌의 실제 주인에겐 어떤 실익이 있었을까?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 기준(한해 이자소득 4천만원 이상)을 훌쩍 넘어서는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을 감안할 때 자금 분산으로 어떤 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계좌 외에 이자소득세를 대납한 은행 계좌들도 여럿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식 ‘파킹’시켜놓은 것과 연결돼 있는 것”이라며 사실상 한 덩어리라고 말했다.
전략기획실의 또 다른 임원도 “개인간 거래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은) ‘카더라’(근거없는 주장)일 뿐이며, 통장 존재(에 얽힌 의문은), 100% 설명된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길가다 내가 교통사고 내면, ‘삼성의 교사’라고 할 수 있느냐? ‘오버’다”라는 말도 했다. 개인들 사이의 차명거래일 뿐인데, 당사자가 삼성 구성원들이라고 해서 삼성의 비자금 조성, 관리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건 과잉해석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오후 시간이 흐르면서 삼성 쪽의 해명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도 엿보였다. 문제성 계좌들의 실제 주인이 재무팀 고위 임원이 아니라 그룹 밖의 사람이라는 해명이 나오는가 하면 (김용철의)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옆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
삼성은 10월28일 오후 “김용철 변호사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차명 계좌와 그 계좌를 통한 자금 거래는 회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김 변호사와 김 변호사 주변 인물간의 사적 거래’”라며 “우리도 김 변호사 주변 인물이 김 변호사의 명의를 차용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밝혔다. 개인간 사적인 금융거래이므로 내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도 했다. 삼성은 또 “누군가가 김 변호사의 이름을 도용 또는 차용했다면 관련법에 따른 시정 조치가 있을 것으로 본다”며 “이는 회사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 김 변호사와 김 변호사 주변 인물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라고 밝혔다.
삼성 쪽의 해명과 반박을 전해들은 김용철 변호사는 “그래도 이런 사실(계좌 개설, 운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희생양’을 내세우는 상투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관리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개인을 내세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내 동의도 안 받고 계좌를 개설한 ‘그 사람’(계좌의 실제 주인)이 자금 출처를 대야 한다”며 “최종적으로는 검찰 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삼성 쪽에서 어떤 인물을 내세울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에 대해선 이메일 답변에서 “정반대이다. 김 변호사는 개인 또는 그의 주변 일을 회사의 일로 확대시켜 회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변호사가 제시한 물증과 증언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법적 문제들이 얽혀 있어 삼성 안팎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본인 동의 없이 계좌를 개설한 행위는 형법상 사문서 위조에 해당한다. 형법 제231조는 ‘사문서 위·변조’에 대해 징역 2년 이하 또는 벌금 500만원 이하라는 엄한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도 뚜렷해 보이며, 여기에는 해당 은행 쪽의 책임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 수사로 이어져 자금의 출처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횡령이나 조세포탈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비자금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그 사용처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을 비롯한 삼성 바깥으로 퍼져나갈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다 김 변호사가 비자금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삼성의 시스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불법·변칙 물증들이 제시되면서 삼성을 둘러싼 파문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최대 재벌그룹 삼성의 70년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터져나온 고위직 핵심 임원 출신 인사의 ‘내부고발’은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히게 될까?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임직원 차명계좌, ‘X파일’로 폭로돼
재벌의 명의신탁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상속·증여세 탈루, 비자금 조성 등에 사용
삼성 이건희 회장은 19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부터 “부정은 암이고 그것이 있으면 회사는 반드시 망한다”며, “도덕불감증,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 수 없고 나와도 반갑지 않다”고 윤리경영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 회장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후보 쪽에 비자금을 건넨 혐의로 1996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삼성은 또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 동안 250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게 드러나 이 회장이 법정에 서기도 했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때는 1997년 대선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비서실장이 여야에 수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 회장은 무혐의 처리됐다. 이학수 삼성 부회장은 2002년 대선에서도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해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특히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이 회장이 법정에 선 이후 삼성은 비자금 조성·전달을 임원들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진다. ‘은둔의 경영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은 철저하게 뒤로 빠지는 모양을 갖춘 것이다. 1997년 및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에 대한 책임을 이학수 부회장이 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삼성의 경우 그룹 임원들 명의의 차명계좌를 대거 동원해 비자금을 조성해온 사실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안기부 X파일 대선자금 사건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과 이대원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 소병해 전 삼성화재 고문 등 삼성 전·현직 임원들이 “개인 돈으로 민주당에 낸 단순한 후원금(3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계좌추적을 통해 이 돈의 출처가 삼성 계열사를 통해 마련된 비자금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삼성그룹의 방계인 보광그룹은 대주주인 홍석현 회장이 1071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조세를 포탈한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재벌의 명의신탁(차명계좌)은 경영권 승계와 상속·증여세 탈루를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했고, 때로는 비자금 조성에 사용돼왔다. 재벌그룹들이 차명계좌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김용철 변호사의 이번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는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차명계좌를 활용한 비자금 조성의 특징은, 벽 속에 감춰진 대형금고에 현금을 넣어놓지 않고 은행·주식계좌에 비자금을 넣어놓음으로써 겉으로 정상적인 돈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 있다. 양지에서 내놓고 돈세탁을 하는 것인데, 명의신탁은 안 걸리면 다행이고 걸려도 그때 세금을 내고 처벌을 받으면 된다는 것일까.
이번 양심고백에서 드러난 삼성의 흥미로운 비자금 조성 수법은 △그룹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비자금이 조성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점 △때로는 전·현직 임원들의 명의를 ‘도용’해 비자금 계좌를 트기도 한다는 점 △현금보다는 차명보유 ‘주식’ 형태로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현금으로 보유하면 수억원짜리 계좌가 쉽게 드러나고 은행 쪽의 특별관리 대상이 되지만, 주식으로 보유하면 은폐하기도 쉽고 주가의 등락 때문에 자금의 규모도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다. 앞으로 차명주식 계좌의 진상을 둘러싸고 △차명 주식의 실제 소유자 △명의신탁된 원본 주식의 취득자금 원천 △명의신탁하게 된 경위 등을 둘러싸고 공방이 예상된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정의구현사제단 “거대권력 삼성의 엄청난 비리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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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인가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 관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과 정황 증거물이 그룹 핵심 관계자에 의해 제시됐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2006년 3월 ‘전략기획실’로 개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10월27일 <한겨레21>과 인터뷰를 갖고 “삼성이 (자신 명의의 계좌로)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삼성본관 2층 소재)에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었다”며 관련 기록과 실태를 공개했다. 김 변호사는 문제의 계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설된 것이며, 이자소득세 납부 기록 등을 바탕으로 은닉 비자금의 규모를 50억원 안팎으로 추정했다.
그는 “삼성은 본인 동의없이 은행, 증권사 등에 계좌를 개설한 뒤 이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하거나 자금 세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내가 입사할 때(1997년) 제출한 주민등록증 복사본과, 자기들이 임의로 만든 도장을 이용해 수시로 신규 통장을 개설하고, 해지했다”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는 검사 출신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해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상무, 법무팀장(전무급)을 거친데서 짐작할 수 있듯 삼성그룹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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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변호사는 비자금 문제 공개에 대해 “이는 폭로나 배신의 문제가 아니며 꼭 누구를 처벌해야한다는 것도 아니다”며 “다섯달 이상 고민한 끝에 삼성의 ‘사회적 기능’이 왜곡돼 있는 것을 바로 잡고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은 엄청난 국부를 창출한 공도 있지만 ‘시스템적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며 “‘삼성 장학생’이니 ‘삼성 돈 먹으면 뒤탈이 없다’는 식의 잘못된 전통을 깨야한다”고 말했다.
‘보안계좌’ 본인도 조회 못해
<한겨레21>은 김 변호사와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기 전 관련 기록을 미리 확보했으며, 김 변호사가 10월29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비자금 은닉 사실을 공개한다는 전언에 따라 서둘러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김 변호사가 제시한 첫번째 물증은 ‘2004년 10월 현재’로 찍혀있는 ‘굿모닝신한증권 도곡지점’에서 보낸 ‘주식 잔고확인 요청서’이다. ‘계좌번호: 012-01-112XX’, ‘계좌명: 김용철’로 돼 있는 이 잔고확인요청서에는 주식 26억6820만4500원어치가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확인 결과 해당 주식은 삼성전자 6071주였다. 김 변호사는 “나도 모르는 삼성전자 주식이 보관돼 있다가 인출됐으며 내 명의였음에도 계좌의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5월 종합소득 신고를 앞두고 삼성 쪽에 “차명 계좌를 빨리 정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삼성으로부터 정리하고 있다는 답변을 듣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는 주식을 위장으로 분산해 비자금을 관리한 통로였을 것이라고 김 변호사는 추정했다.
두번째 물증은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돼 있는 김 변호사 명의의 계좌이다. 이는 김 변호사의 2006년도 금융소득 종합과세 납부 실적에서 드러났는데, 자신도 모르는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 계좌에서 무려 1억8185만4326원의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에 따른 소득세는 2545만9560원에 이르렀다. 물론, 김 변호사는 소득세를 납부한 사실이 없으며, 삼성 쪽에서 대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당 계좌를 저축예금이라고 가정해 당시 이자율(4.7%)을 적용하면, 예금액은 50억원 안팎에 이른다.
김 변호사는 10월18일 우리은행 △△지점에 확인한 결과, 이 계좌가 있는 것은 파악됐지만, ‘보안계좌’여서 계좌번호조차 조회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 변호사는 10월24일 우리은행 OO지점을 통해 또 한 차례 계좌 조회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계좌의 존재 여부마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10월18일 계좌 조회를 한 사실이 삼성 쪽에 알려짐으로써 아예 계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도록 삼성 쪽에서 서둘러 조처한 때문이며, ‘비자금 조성용’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김 변호사는 밝혔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보안 계좌’는) 계좌에 ‘시큐리티’(안전장치)를 거는 것으로, 계좌 개설을 신청한 지점에서 관리하며, 개설된 지점이 아닌 곳에서도 확인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반 사람들은 보안계좌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담당 관리자가 따로 있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본다”고 말했다. “계좌는 신청 서류를 받아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본인 동의없는 차명 계좌는 있을 수 없다. 위임장을 발급받아 대리인이 개설할 수 있기는 하다. 만약 차명으로 계좌를 만들었다면, 금융실명제 위반이다. ” 그는 또 “만약 명의가 도용당한 것이라면, 은행은 업무 취급자의 업무부주의에 대해 징계를 하게 되지만, 계좌 개설을 요청한 사람에게는 어떤 조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명의상의 예금주가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해야 조치가 내려질 수 있다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나타났다 사라진 주식과 현금
김 변호사가 제시한 물증으로는 이 밖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1002-301-722068’이 그 하나다. 계좌 번호와 함께 찍혀있는 계좌의 활동 시기는 ‘2004년 8월26일~2004년 12월7일’이었다. 김 변호사는 10월18일 우리은행 △△지점에서 이 번호의 계좌는 확인했지만, 거래 내역은 조회할 수 없었다. 그는 10월24일 우리은행 OO지점에 다시 계좌 확인을 요청한 결과, 계좌의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계좌에 대한 조회 사실 또한 삼성 쪽에 알려져 차단 조처가 내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금세탁용’으로 추정된 네번째 물증은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1002-635-117357’이다. 계좌 개설 시기는 2007년 8월27일로 돼 있었으며, 개설 당일 17억원을 입금한 뒤 다음날 ‘삼성국공채 신매수’ 자금으로 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 변호사는 “올 7월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뒤 8월초 재발급받았는 데도 (내 동의없이 내 이름으로) 계좌를 신규로 개설한 것은 과거에 그룹에 제출된 내 주민등록증 복사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현금으로 입금한 뒤 하룻만에 빼낸 것으로 보아 ‘자금세탁용’이라고 추정했다.
김 변호사는 자신 명의의 또 다른 계좌들을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져 추가적인 물증 제시가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김 변호사의 기자회견 소식과 <한겨레21>의 기사화를 감지한 삼성그룹은 10월27일부터 집중적인 해명과 반박 작업에 나섰다. 이날 오후 삼성그룹 3층 기자실에서 만난 그룹 전략기획실의 한 임원은 “(김용철 변호사 명의로 돼 있는 주식보유 계좌에 대해) 전략기획실 재무팀의 고위 임원이 김용철 명의로 ‘파킹’시켜놓고(넣어두고) 제테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 차명거래일 뿐, 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비자금 조성, 관리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었다.
삼성그룹 쪽 “비자금 조성은 과잉해석”
하지만 만약 재테크 수단으로 차명거래를 했다면, 계좌의 실제 주인에겐 어떤 실익이 있었을까?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 기준(한해 이자소득 4천만원 이상)을 훌쩍 넘어서는 이자소득이 발생한 것을 감안할 때 자금 분산으로 어떤 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계좌 외에 이자소득세를 대납한 은행 계좌들도 여럿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식 ‘파킹’시켜놓은 것과 연결돼 있는 것”이라며 사실상 한 덩어리라고 말했다.
전략기획실의 또 다른 임원도 “개인간 거래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은) ‘카더라’(근거없는 주장)일 뿐이며, 통장 존재(에 얽힌 의문은), 100% 설명된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길가다 내가 교통사고 내면, ‘삼성의 교사’라고 할 수 있느냐? ‘오버’다”라는 말도 했다. 개인들 사이의 차명거래일 뿐인데, 당사자가 삼성 구성원들이라고 해서 삼성의 비자금 조성, 관리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건 과잉해석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오후 시간이 흐르면서 삼성 쪽의 해명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도 엿보였다. 문제성 계좌들의 실제 주인이 재무팀 고위 임원이 아니라 그룹 밖의 사람이라는 해명이 나오는가 하면 (김용철의)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옆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
삼성은 10월28일 오후 “김용철 변호사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차명 계좌와 그 계좌를 통한 자금 거래는 회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김 변호사와 김 변호사 주변 인물간의 사적 거래’”라며 “우리도 김 변호사 주변 인물이 김 변호사의 명의를 차용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고 밝혔다. 개인간 사적인 금융거래이므로 내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도 했다. 삼성은 또 “누군가가 김 변호사의 이름을 도용 또는 차용했다면 관련법에 따른 시정 조치가 있을 것으로 본다”며 “이는 회사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 김 변호사와 김 변호사 주변 인물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라고 밝혔다.
삼성 쪽의 해명과 반박을 전해들은 김용철 변호사는 “그래도 이런 사실(계좌 개설, 운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희생양’을 내세우는 상투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관리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개인을 내세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내 동의도 안 받고 계좌를 개설한 ‘그 사람’(계좌의 실제 주인)이 자금 출처를 대야 한다”며 “최종적으로는 검찰 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삼성 쪽에서 어떤 인물을 내세울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에 대해선 이메일 답변에서 “정반대이다. 김 변호사는 개인 또는 그의 주변 일을 회사의 일로 확대시켜 회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변호사가 제시한 물증과 증언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법적 문제들이 얽혀 있어 삼성 안팎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본인 동의 없이 계좌를 개설한 행위는 형법상 사문서 위조에 해당한다. 형법 제231조는 ‘사문서 위·변조’에 대해 징역 2년 이하 또는 벌금 500만원 이하라는 엄한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도 뚜렷해 보이며, 여기에는 해당 은행 쪽의 책임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 수사로 이어져 자금의 출처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횡령이나 조세포탈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비자금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그 사용처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을 비롯한 삼성 바깥으로 퍼져나갈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다 김 변호사가 비자금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삼성의 시스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불법·변칙 물증들이 제시되면서 삼성을 둘러싼 파문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최대 재벌그룹 삼성의 70년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터져나온 고위직 핵심 임원 출신 인사의 ‘내부고발’은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히게 될까?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임직원 차명계좌, ‘X파일’로 폭로돼
재벌의 명의신탁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상속·증여세 탈루, 비자금 조성 등에 사용
삼성 이건희 회장은 19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부터 “부정은 암이고 그것이 있으면 회사는 반드시 망한다”며, “도덕불감증,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 수 없고 나와도 반갑지 않다”고 윤리경영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 회장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후보 쪽에 비자금을 건넨 혐의로 1996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삼성은 또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 동안 250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게 드러나 이 회장이 법정에 서기도 했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때는 1997년 대선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비서실장이 여야에 수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 회장은 무혐의 처리됐다. 이학수 삼성 부회장은 2002년 대선에서도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해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특히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이 회장이 법정에 선 이후 삼성은 비자금 조성·전달을 임원들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진다. ‘은둔의 경영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은 철저하게 뒤로 빠지는 모양을 갖춘 것이다. 1997년 및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에 대한 책임을 이학수 부회장이 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삼성의 경우 그룹 임원들 명의의 차명계좌를 대거 동원해 비자금을 조성해온 사실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안기부 X파일 대선자금 사건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과 이대원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 소병해 전 삼성화재 고문 등 삼성 전·현직 임원들이 “개인 돈으로 민주당에 낸 단순한 후원금(3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계좌추적을 통해 이 돈의 출처가 삼성 계열사를 통해 마련된 비자금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삼성그룹의 방계인 보광그룹은 대주주인 홍석현 회장이 1071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조세를 포탈한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재벌의 명의신탁(차명계좌)은 경영권 승계와 상속·증여세 탈루를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했고, 때로는 비자금 조성에 사용돼왔다. 재벌그룹들이 차명계좌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김용철 변호사의 이번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는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차명계좌를 활용한 비자금 조성의 특징은, 벽 속에 감춰진 대형금고에 현금을 넣어놓지 않고 은행·주식계좌에 비자금을 넣어놓음으로써 겉으로 정상적인 돈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 있다. 양지에서 내놓고 돈세탁을 하는 것인데, 명의신탁은 안 걸리면 다행이고 걸려도 그때 세금을 내고 처벌을 받으면 된다는 것일까.
이번 양심고백에서 드러난 삼성의 흥미로운 비자금 조성 수법은 △그룹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비자금이 조성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점 △때로는 전·현직 임원들의 명의를 ‘도용’해 비자금 계좌를 트기도 한다는 점 △현금보다는 차명보유 ‘주식’ 형태로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현금으로 보유하면 수억원짜리 계좌가 쉽게 드러나고 은행 쪽의 특별관리 대상이 되지만, 주식으로 보유하면 은폐하기도 쉽고 주가의 등락 때문에 자금의 규모도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다. 앞으로 차명주식 계좌의 진상을 둘러싸고 △차명 주식의 실제 소유자 △명의신탁된 원본 주식의 취득자금 원천 △명의신탁하게 된 경위 등을 둘러싸고 공방이 예상된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정의구현사제단 “거대권력 삼성의 엄청난 비리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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