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모여살이)

서러운 김칫국물 자국 / 박경철

사이박사 2007. 7. 3. 14:58
[삶의창] 서러운 김칫국물 자국 / 박경철
삶의 창
한겨레
» 박경철 시골의사
2년 전 여름이었다. 앙상한 모습을 한 남자가 아내의 손을 잡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첫눈에 봐도 말기암 환자가 틀림없었다. “어디가 편찮아서 오셨어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죽으려고 왔어요.” 병을 고치러 오는 병원에 죽으러 왔다는 그의 말이 의사를 당혹스럽게 했다. “죽으러 오시다니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내가 되묻자 그가 말했다. “선생님 보시다시피 저는 암환자입니다. 내 짐작에 이제 길어야 며칠인데 치료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여기서 조용히 죽도록만 해주십시오.”

같이 온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신장암 진단을 받은 것은 1년 반 전이었지만, 그때 이미 수술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권했지만 생존 가능성이 적다는 이야기에 치료를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부부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발병하기 몇 달 전에 빚을 내서 어렵사리 시작한 식당이었다. 그래서 그 안타까운 가장은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일이 그리 길 수는 없었다. 결국 중간에 쓰러진 그는 식당에서 음식 재료를 다듬고 청소를 도와 왔다고 한다. 그러다 요 몇 달 사이에는 가끔 정신을 잃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더니, 이제는 거의 한계에 이른 것이다. 그나마 자기가 끝까지 집에 누워 있으면 식당이 문을 닫아야 한다는 걱정에 마지막 길은 병원에서 떠나기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는 중환자실과 영안실을 둔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어렵게 그를 설득해서 인근의 종합병원으로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남은 가족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연을 정리했다. 그 후 그의 아내가 가끔 병원을 찾기는 했지만, 지난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내가 결국 식당 문을 닫고 인근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인근 빌딩에 있는 식당에 들렀다. 점심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는데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어떤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더니, 뒷모습이 익숙한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 벌잖아요. 매달 조금씩 이자라도 드리잖아요. 올해만 지나면 딸아이가 졸업하고 돈을 벌 거고요. 그럼 원금도 갚을게요. 제발 좀 봐주세요. 제발 몇 달만 봐 주세요.”

본의 아니게 엿들어야 했던 통화는 사채를 빌린 곳에서 집을 압류한다는 통보에 조금만 여유를 달라고 사정하는 내용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한 발 다가가서 바라본 그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지하 기계실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혼자서 도시락을 먹고 있다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왼손에는 한 입 베어 문 열무김치 한 조각이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색 바랜 양은도시락에 담긴 차가운 밥과 검은 비닐에 싼 열무김치, 그것이 음식의 전부였다. 그나마 그 서러운 식사를 하는 중에 독촉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도시락 위로 떨어지는 눈물과 콧물, 왼손에서부터 팔뚝으로 타고 흐른 벌건 김칫국 자국, 그리고 도시락에 담긴 찬밥 한 덩어리가 지금 그가 처한 고단하고 처절한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