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이 남긴 길고 긴 그림자
Editor! 2023. 4. 24. 11:00
2021년 12월 26일 에드워드 윌슨이 세상을 떠나고 벌써 1년여가 지났습니다. 사회 생물학과 통섭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과학계에 선물하고, 그만큼 커다란 숙제를 후학들에게 남겨 주고 간 거죠. 그는 미국에서도 과학 대중화가 상아탑 학자들의 멸시 어린 시선을 받던 시절부터 자신의 과학적 연구와 통찰을 대중과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두 차례나 주어진 퓰리처상은 그의 과학 대중화 노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죠. 하버드를 은퇴하고 실버타운에 들어가 노년을 보내면서도 그의 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 지식 사회를 뜨겁게 달군 『지구의 정복자』, 『인간 존재의 의미』 같은 베스트셀러가 그의 말년에 나온 대표작들이죠. 그의 책을 꾸준히 펴내 온 ㈜사이언스북스에서 그의 말년의 피와 땀이 어린 책이 한 권 더 나왔습니다. 사회성 진화, 진사회성의 기원, 나아가 인간 문명의 비밀을 움켜쥐고자 한 그의 노력이 응축된 짧고 굵은 책입니다. 『새로운 창세기』. 제목 그대로 기독교의 창조 이야기를 대체하고자 한 그의 노작(勞作)이죠. 다윈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을 번역하기도 했던 김성한 전주 교육 대학교 윤리 교육과 교수님의 옮긴이의 글을 특별히 공개합니다. 윌슨의 마지막 메시지에 주목해 주시죠.
에드워드 윌슨.박기호 ⓒ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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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드워드 윌슨 교수를 처음 만난 것(물론 직접 만난 것은 아니다.)은 1990년대 중후반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진화론이 윤리에 시사하는 바에 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나는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설명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도덕 철학과 관련되는 윌슨의 주장들을 이곳저곳 찾아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내가 이해하는 윌슨은 유전자 선택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이용해 개미와 인간을 포함, 사회성 동물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 확인되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이때 윌슨 교수와 더불어 내가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학자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였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유전자 선택이 사회 생물학의 토대를 이루는 이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유전자 선택 이론은 언뜻 봤을 때 상식적이지만 결코 상식적이지 않은 현상, 예컨대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이성애를 느끼지 사물을 대상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이유, 모성애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유 등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이론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물에 대해 이성애를 느낀다면 그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없을 것이다. 이것과 유사하게 어미가 자신의 자손을 돌보지 않을 경우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23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어떤 학자의 학문적 입장이 시간이 흘렀다고 확연하게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윌슨 교수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뒤늦게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이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나서 번역을 맡은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책에서의 윌슨 교수의 입장이 달라졌다고 해도 크게 달라졌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번역을 하면서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문득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윌슨 교수의 입장과 이 책에서의 입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이 생긴 건 그만큼 내겐 윌슨 교수의 태도 변화가 적지 않은 충격이기 때문이다. 이타성에 국한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오늘날의 진화론에서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이타성이 혈연 이타성과 호혜적 이타성이라 생각했고, 집단에 대해 나타내는 개체의 이타성은 변방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책에서 윌슨 교수는 인간과 일부 개미 집단의 진화를 설명하는 중심에 집단 이타성을 배치하고 있다.
그가 처음 『사회 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출간하면서 몰고 온 파급력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 책에 담긴 내용은 분명 인간 진화에 대한 새로운 논의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쉽게도 윌슨 교수가 2021년 12월 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가 더 이상 직접 논쟁의 한가운데에 설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쟁점이 만들어지면 가지치기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논의가 만들어지는 서구 학문의 풍토상 설령 윌슨 교수가 없어도 지금까지 간과해 왔던 수많은 새로운 논의들을 통해 여러 사회,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사회성 동물들의 기원과 특성 등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윌슨 교수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을 충분하고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포함해 여러 문제에 그토록 중요하다면 설령 전문적인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도 집단 선택을 둘러싼 이 책에서의 논의를 차근차근 살펴볼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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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교수는 철저한 유물론적 진화론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외부에서 어떤 영적인 힘이 개입되어 진화가 이루어졌음을 거부한다. 그의 생각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또한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며,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윌슨 교수는 학문이나 종교적 의문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건, 인류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건 이것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 예속되어 있는 생물학적 조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이해가 충족되어야 비로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의문과 문제 들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이 책에서 윌슨 교수가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는 개념은 ‘진사회성’이다. 진사회성 집단은 사회성을 갖춘 동물들이 이를 수 있는 최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집단으로,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일부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에 비해 번식을 적게 하는, 높은 수준의 협력과 분업이 이루어지는 집단”을 말한다. 이러한 진사회성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사회를 위해 일하는 많은 개체가 번식을 중단할 경우 어떻게 발달된 사회가 진화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답변은 “집단의 일부 구성원들의 희생이 다른 경쟁 집단들에 비해 그 집단에게 충분한 이점을 제공한다면, 그러한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자신들의 개별 번식을 줄이거나, 두 가지 모두를 실천에 옮길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경우 일부 개체들이 집단을 위해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소위 집단 선택 이론을 통해 진사회성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 있는데, 또 다른 윌슨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책에서 윌슨 교수는 그가 자신의 친척이 아니라고 농담을 하고 있다.) 뉴욕 주립 대학교 빙엄턴 캠퍼스 교수는 이러한 입장을 “이기적 개체들이 이타적 개체들을 누를 수 있지만 이타적 개체들의 집단은 이기적 개체들의 집단을 누를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진사회성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는 집단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17종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희귀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집단이 그 어떤 집단보다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면 훨씬 많은 종에서 진사회성의 발달이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진사회성에 제기되는 두 번째 의문인데, 윌슨 교수는 일부 계급의 진사회성 개체들이 이타성과 이기성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데에서 그 답을 찾는다. 즉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유전자 돌연변이가 진사회성 군락을 탄생시킬 수 있지만, 원래 유전체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홀로 사는 생활에 적응된 채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집단을 이루는 일부 개체들에게서 홀로 사는 생활에 적응된 측면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서 오직 이타적인 특성만이 남게 된다면 아마도 진사회성 집단이 훨씬 빈번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러한 개체들에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측면이 여전히 남아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진사회성 군락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것이다.
윌슨 교수는 일부 벌과 개미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진사회성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은연중 드러내려 하고 있는데, 인간에 대한 그의 입장의 타당성을 곧바로 확인하기에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증거가 다소 단편적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훨씬 심도 있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윌슨 교수는 후학들에게 문젯거리를 던져 놓고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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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교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 있으면서 남긴 여러 업적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구체적인 업적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사회 생물학: 새로운 종합』, 『인간 본성에 대하여』, 『통섭』 등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적만으로도 그가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자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퓰리처 상 수상자인 만큼 그는 해박한 지식과 문필력으로 비교적 생소한 분야의 학문을 널리 알려 왔고, 나 또한 인간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과거에 일부 사회 진화론자(socio-Darwinist)가 미친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은 한동안 거의 금기시 되어 왔다. 마치 모든 측면에서의 강한 결정론을 함의하고 있기라도 하듯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은 비판을 받기 일쑤였고, 이로 인해 설 자리를 잃고 주변부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러한 경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증거 수집과 이론 개발 등으로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객관성을 가지면서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윌슨 교수의 기여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 인문학과 생물학을 오가면서 인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촉발했던 그가 손수 쓴 새로운 글들은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준 인간과 사회 이해에 대한 영감만큼은 후대의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긴 파장을 드리울 것이다.
『새로운 창세기』. ⓒ ㈜사이언스북스.
김성한
진화 윤리학자. 「도덕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과 다윈주의 윤리설」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주 교육 대학교 윤리 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동물 해방』, 『사회 생물학과 윤리』, 『섹슈얼리티의 진화』 등의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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