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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안의 일그러진 민주주의>

사이박사 2022. 8. 22. 17:41

<그들 안의 일그러진 민주주의>

 

우박 구연상(20220822,월)

 

아득했다.

 

2022년 8월 16~19일(금) 동안 국민대 교수회가 전체 교수를 상대로 진행한 ‘박사학위 논문 검증위원회 구성 찬반 투표’는 그 결과가 반대가 61.5%(193명), 찬성이 38.5%(121명)로 나왔다.

 

부결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갇혀 28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그를 가장 큰 절망의 불구덩이로 떨어뜨린 사건은 무인도를 지나가던 배가 자신이 피워 올린 봉화를 못본 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이 끊긴 채 저 홀로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국민대 교수회는 내가 피워 올린 ‘표절 봉화(烽火)’를 뚜렷이 알아본 뒤에도 ‘표절 악행’의 피해자를 구제하기보다는 국민대의 안위를 우선시했다. 반대표(反對票)를 던진 국민대 교수들은 한 사람의 구조요청에 등을 돌린 채 그 곁을 잰걸음으로 지나쳐 버린 ‘나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참다운 스승을 나타내는 사표(師表)라는 말에 빗대어 반대표(反對表)또는 반대하미[= 반대하는 이]로 부를 것이다. 스승은 ‘스스로 선 이’로서 슬기로운 길을 앞서 걷는 선생님이다. 스승은 따르는 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반대표(反對表)는 끼리끼리 뭉칠 뿐이다.

 

저마다의 고육지책(苦肉之策)

 

나는 국민대 교수회가 검증 반대의 의견을 낸 것을 존중(尊重)할 뿐 아니라 찬반 투표를 실시하기까지 용기있는 결단력과 실행력을 보여 준 수많은 교수님들께 존경을 표한다. 나는 이 결론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투표에 참여한 교수들 가운데 누구도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아 찬반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분들의 자율적 선택이었다.

나는 교수회 투표 과정을 지켜 보면서 공정을 회복하려는 국민대 지성인들의 투혼을 느낄 수 있었다. 찬반으로 갈린 그들의 선택은 서로 달랐지만, 국민대 교수 모두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을 피하고자 하는 ‘고육지계(苦肉之計)’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본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 반대표(反對表)를 시대의 사표(師表)[=스승]라 부를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렀다. 그들은 그 어리석음의 벌을 스스로 떠안고 살아갈 모이라(moira)[=운명]를 선택한 셈이다. 반대하미[=반대표(反對表)]는 앞으로 어떻게든 속죄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한편으로는 국민대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학자가 떠맡아야 할 ‘진리지기’[=진리의 지키미]로서의 의무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난을 자초한 것이다.

어쨌든 교수들도 저마다 제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하미의 ‘실존적 계산’에 따른 최종 결과는 표절 피해를 외치고 있는, 상처 난 내 아린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몹쓸 짓이었다. 나는 극심한 위궤양 환자가 된 것처럼 실제의 가슴 통증에 마음의 짓쓰라림을 느꼈다. 그들의 결정은 나를 졸지에 투명인간으로 ‘변신(變身)’시키고 말았고, 냉가슴을 쓸어내리며 토한 나의 외침을 ‘독백(獨白)’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집단지성이라 부르지 말라!

 

나는 반대표(反對表)의 집단지성이 ‘그들만의 셈법’으로 ‘또 다른 시스템 악행’을 저질렀다고 본다. 반대표를 던진 교수들은 표절을 ‘우리 모두’가 함께 물리쳐야 할 ‘악행(惡行)’이 아닌,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바꿔가야 할 ‘악습(惡習)’으로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이라 불리는 ‘컬렉티브 인텔리젼스(Collective Intelligence)’는 벌이나 개미, 새나 물고기 등의 활동 방식에서 보이는 ‘떼 지능(Swarm Intelligence)’을 일컫는 말이었다. 비록 이 말이 오늘날 위키피디아와 같은, 컴퓨터 이용자 간의 상호 협동적인 참여와 소통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을 뜻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쓰인 ‘인텔리젼스’라는 잉글리시 낱말은 ‘지성(性)’이 아닌 ‘지능(知能)’으로 옮겨지는 게 맞다.

지성은 지능과 다른 말이다. 지능이 ‘주어진 물음에 대해 올바른 답을 할 줄 아는 힘’을 뜻한다면, 지성은 지능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낱낱이 살펴 전체를 두루 헤아려 볼 줄 아는 힘이다. 지능은 잉글리시로 ‘인텔리젼스(intelligence)’이고, 지성은 ‘인텔렉트(intellect)’이다. 인텔리젼스는 ‘[똥오줌, 옳고 그름 등을] 가려낼 줄 앎’이고, 인텔렉트는 ‘인투스-렉티오(intus-lectio)’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말로 바꾸자면, ‘모아들인 전체를 스스로 헤아릴 줄 앎’이 된다. 인텔렉트는 독일말로 ‘페어슈탄트(Verstand)’[=지성(知性),오성(悟性)]나 ‘아인지히트(Einsicht)’[=통찰(通察)]로 번역되었다.

반대하미의 집단지능은 위키피디아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집단지성은 표절의 악행을 악습 정도로 되돌리는 퇴행성을 띠었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은 그것이 한 명의 뛰어난 사람의 판단보다 결과적으로 더 나을 때 쓰이는 말이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부터 돌아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집단지능으로 불려야 맞을 듯하다.

 

표절 불가피론은 ‘부초(浮草) 같은 논리’이다.

 

반대하미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이 어느 쪽인지를 잘 가릴 줄 안다는 점에서 지능적이었지만, 그들의 결론이 한국 학계 전반에 미칠 악영향을 두루 헤아려 볼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지성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산의 손놀림은 재빨랐지만, 지혜의 더듬이는 무뎌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신평 변호사의 ‘표절 불가피론’을 옹호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신 변호사는 ‘적당한 표절(剽竊)은 인용(引用)으로 볼 수 있다’는 ‘둥근 네모’ 같은 주장을 했다. 신 변호사는 ‘다른 사람들의 논문이나 글을 표절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때 그가 말한 ‘표절’은 그 맥락상 ‘출처를 밝히고 따오는 인용’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인용과 표절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무지 논변’을 펼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 뒤부터 ‘표절’을 ‘개인의 권리 침해’로 엄히 금지해 왔고, 한국은 2000년부터 이미 표절을 금하는 ‘연구윤리’를 마련해 왔다. 이는 교육부 훈령으로 엄히 금하는 ‘불법 행위’이기도 하며, 저작권법에 의해 ‘법적 처벌’까지 가능한 범죄인 것이다. 학계에서 다르미[=다른 사람]의 논문을 ‘출처를 밝혀 따오는 일’[=인용]은 본디의 글쓰미에게 명예(名譽)를 돌리는 도덕적 행위(예우)가 되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몰래 따오는 일’[=표절]은 남의 것을 훔쳐 제것으로 삼는 도둑질로 금기시되고 있다.

신평 변호사가 ‘표절을 저지르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라고 주장한 것은 ‘무지 논변’을 넘어 표절이 악행(惡行)이 아니라는 궤변(詭辯)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표절이 도둑질인 한, 그의 주장은 도둑질이 악행이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궤변은 상대를 ‘헐뜯는 말하기’로서 피장파장의 오류에 근거한 논증을 말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표절을 저질렀으니 김 여사의 표절도 문제를 삼을 수 없다는 ‘엉뚱한 논리’를 편 것이다. 이 논리가 비록 현실을 반영한 것이자 힘의 우위를 자랑하는 논리이기는 하지만, 그 논리는 현실이 뒤바뀌는 순간 궤멸되고 말 ‘부초(浮草) 같은 논리’이다.

 

공정으로써 정의를 허물었다.

 

말은 권력(權力)이라는 중력(重力)에 이끌려 휘어지고

생각은 집단적 이익(利益) 앞에서 구부러지며

판단력은 공정(公正)이라는 시대정신에서 한참 뒤어떨어졌도다.

 

권력은 ‘부릴 힘’이니 반대하미는 보이지 않는 힘에 무릎을 꿇은 것과 같고, 이익은 ‘제 몫부터 챙기는 것’을 말하니 그들은 순자가 말하는 편험패란(偏險悖亂)[=거대한 혼란]의 악을 초래한 것이며, 공정은 ‘나눔의 바름’으로서 모두의 이익과 책임과 의무를 이중잣대가 아닌 올바른 잣대로써 고루 두루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들은 ‘제 손안의 잣대’로써 자신들의 몫부터 챙겨간 것이다.

반대하미‘절차의 공정’은 지켰지만 ‘결과의 정의(正義)’는 그르쳤다. 정의는 ‘바름을 지켜 나가는 일’이고, 바름은 기울어지거나 비뚤어지지 않게 꼿꼿하게 세워져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뜻은 ‘똑바로 앉으세요.’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라는 우리말은 기둥처럼 지붕을 떠받치는 ‘세로’와 들보처럼 그 위에 걸쳐 얹는 ‘가로’로 짜인 집의 뼈대와 같은 것을 말한다. 바름이 무너지면, 집은 흔들리고 부서져 내리게 마련이다.

반대하미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정당화했다. 그들의 부정의(不正義)는 학문의 정신 가운데 진리 추구의 의무를 그르친 것이다. 논문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글쓰기이다. 학자는 스스로 알아낸 바의 체계를 논문을 통해 세상에 알린다. 이러한 앎의 체계는 끊임없는 검증 과정을 거쳐 우리 삶에 받아들여져 세계를 거듭 발전시켜 왔다. 학자는 제안된 수많은 앎들에 대한 집단적 검증을 직접 수행할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참인 앎들’을 교육 시스템을 통해 가르친다. 그들은 이 과정의 순수성을 더렵혔다.

국민대 교수회가 내린 검증 반대 결론은 대학에서 공정한 절차로써 정의가 외면 당한 하나의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사법 살인과 다를 바 없고, 민주주의 껍데기를 두른 채 시스템 악행을 다시 두둔(斗頓)한 양두구육의 작태와 다를 바 없다.

 

민주주의의 뜻매김이 애매한 탓이다!

 

논문 검증 과정에서 이러한 시스템 악행이 되풀이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표절이라는 악행이 바른 원칙에 따라 단죄받지 않는 상황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民主主義)’와 ‘의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긴 이야기는 짧게 줄인다.

한국사람 가운데 민주주의를 모르는 사람은 갓난아기를 빼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낱말뜻은 크게 잘못 알려져 있다. “민주(民主)”라는 말은 조선 때도 쓰였는데, 그때 ‘민주’는 ‘민이 주인(主人)이다’라는 것을 뜻하지 않고, ‘민의 주인’인 임금[왕]을 뜻했으며, 이는 일본에서 ‘민주’가 천황을 가리켰던 것과 같다. 일본에서 번역되어 한국으로 직수입된 ‘民主主義(민주주의)’라는 낱말 자체는, 이러한 아시아의 언어 전통 위에서 보자면, ‘왕[=천황]이 국민을 받드는 주의’, 말하자면,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잘못 이해되고 번역된 셈이다.

비록 많은 분들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민주주의를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본디 뜻에 따라 ‘민(民)[나람=나라의 사람]이 주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 형태’로 바르게 새기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라는 낱말은 그 주인이 때에 따라 민(나람)이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나 권력자가 될 수도 있는 애매한 말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이 말은 그 말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뜻매김이 180도 달라질 수조차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모두’를 위해 ‘모두’에 의해 나라를 끌고 나가는 것!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나 민본주의와 같은 하나의 ‘주의(主義)’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이나 사상의 외침이 아니라 통치(統治)의 한 방식을 나타낸다. 귀족(貴族)에 의해 통치되는 게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라면, 데모크라시는 데모스(demos)에 의해 그리고 데모스를 위해 데모스가 다스리는 통치 형태를 말한다. 데모스는 귀족뿐 아니라 부유한 상인, 가난한 농부, 높은 산의 양치기 등 ‘법 앞에서의 평등’(isonomia), ‘발언의 평등’(isegoria) 그리고 ‘권력에서의 평등’(isokratia)이라는 세 가지 ‘권리’를 가진 ‘모든 사람’을 말했다. 데모크라시는 ‘모두’가 ‘나라’를 함께 이끌어가는 통치제, 한 만디로 말해, ‘모두끌기’를 말한다.

모두끌기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우리가 국회의원을 가리켜 ‘국민의 머슴’이라 부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주인도 없고, 그렇기에 머슴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社會)[=모아리=모여사는 동아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우리의 ‘모두살이’를 위해 이바지하는 ‘분’이지 나람[=민(民)]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복(從僕)이 결코 아니다. 사실 데모크라시는 모두가 서로를 위해 이바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이 전쟁이 났을 때 자신의 부에 따라 돈을 냈을 뿐 아니라 무기를 들고 몸소 전투에 참여했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기면 다 갖기[=승자독식(勝者獨食)]는 민주주의의 적(敵)

 

대학의 총장과 이사장은 일반 교수, 직원 그리고 학생보다 높은 사람으로서 대학의 모든 결정권을 도맡아 한다. 이는 ‘21세기의 새로운 주인의식’이다. 대학은 그들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그들의 ‘것’이 되고, 다른 주체들은 그들의 관리 대상으로 전락한다. 총장은 대학에 속한 ‘모두’를 위해 대학을 이끌기보다 대학의 발전이나 성공 또는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를 위해 구성원들을 몰아대기 일쑤다.

도이칠란트(Deutschland)[=독일(獨逸)]의 철학자 칸트(Kant)도덕(道德)의 근본을 ‘보편화할 수 있음’에서 찾았다. 만일 우리 모두가 ‘모두가 표절해도 좋다.’라는 말에 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덕의 한 규범이나 규칙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표절은 누군가의 욕망 충족의 수단일 수는 있어도 ‘도덕적 행위’일 수는 없다. 우리가 표절을 악행으로 금기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학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義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利益)을 보장해 주며, 나아가 진리의 세계를 체계화하여 학문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등과 정의에 기초한 칸트의 도덕관은 ‘데모크라시(모두끌기)’의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모두끌기[=민주주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도 아니고 대중정치(大衆政治)도 아니며 집단지성에 의한 정치도 아니다. 모두끌기는 ‘다스림’[=정치]이 아니라 ‘끌기’[=통치(統治)]의 한 형태이다. 대학의 모든 결정권을 총장과 본부가 모두 다 갖는 것은 ‘모두끌기’[=데모크라시]의 정신과 원리에서 멀어도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은 되레 데모크라시를 무너뜨리는 ‘내부의 적’과 같다.

우리가 ‘대학의 민주화’를 외친 지 이미 반세기를 지났지만, 대학은 ‘모두끌기’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만 있다. 그 자리는 돈과 능력주의 그리고 서열화와 평가 시스템 등이 빼곡히 메워지고 있다. 이제 대학은 ‘가려내기’는 잘 하지만 ‘헤아리기’는 포기한 채 ‘사람 키우기’의 본질을 잃고 있다. 우리 사회에 사람다운 사람이 모자란다면, 그것은 대학의 책임이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넘쳐 나고 있지만, 우리 모두를 이끌고 갈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김건희 여사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며

 

나는 국민대 교수회가 내린 검증 부결이라는 결론이 김건희 여사의 표절 악행에 대해 면죄부(免罪符)를 줄 수는 없다고 믿는다. 비록 국민대가 김 여사에게 ‘정치적 사면’을 내리긴 했지만, 진정한 사과란 언제나 독립된 자유의지로써 감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의 때를 저울질하면서 세태를 관망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운명에 맡기는 비지성적 태도이다.

사과(謝過)의 본디 뜻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이 맡았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었다. 오늘날 사과는 자신이 잘못한 바를 돌이켜 바로잡는 일로 그 뜻이 바뀌어 가고 있다. 표절의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모르쇠잡기로 일관하면서 사과를 하지 않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은 바로잡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비도적이고 비양심적인 특권의식으로 비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