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3-02-26 오전 11:51:38
고민했던 어젠다를 박 당선인이 가져가 버렸다." "당선인의 (복지정책에 대한) 포용력에 따라 민주당은 앞으로 20년 가까이 집권하지 못할 수 있다." (동아일보, 2월 6일)
대표적 진보지식인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들에는 진보의 정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서려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비단 우 교수의 것만이 아니다. 진보진영 전체의 고민이다.
지난 18대 대선은 진보 진영에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줬다. 권력을 가져오지도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간판 어젠다를 보수 정권에 넘기고 말았다. 진보의 전통적 어젠다인 복지를 보수 진영에 빼앗긴 건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마저 들게 했다. 진보 진영이 대선 패배 후 '멘붕'에 빠진 건 이 때문이었다.
복지에 대한 요구는 높지만, 진보의 정치력을 믿지는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꿰뚫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보수 진영에선 무상급식 등 복지 정책에 '퍼주기'라며 철퇴를 날리는 사이, 박 대통령은 '복지 완전 정복'에 나섰다. '한국형 복지'를 내걸고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를 제시했다.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3년 뒤, 마침내 그를 취임식장으로 인도했다.
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2013년을 '한국형 복지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취임 하기도 전부터 박 대통령의 복지 정책을 두고 "말 바꾸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불과 3개월 전 진보진영을 위기감에 몰아넣었던 박 대통령, 이번엔 그가 위기다. 위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위기 극복 앞에 놓인 과제들은 무엇인가.
취임도 전에… '반쪽' 된 복지 공약
지난 21일, 인수위는 5대 국정목표, 21개 국정전략, 140개 국정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5대 국정 목표는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이었다. 대선 기간 동안 강조한대로 복지를 5대 국정 목표에 포함시키면서 박 대통령은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내보였다.
김용준 인수위원장 복지 정책과 관련,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커졌으나 국민 개인의 행복수준은 낮은 상황"이라며 "이제는 국민행복과 국가발전이 선순환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복지 정책을 국가의 총량적 차원이 아닌 국민 개개인 차원에 맞춰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총론은 좋았다. 그러나 각론이 문제였다. 지난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의 복지 분야 최대 공약이었던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관련 공약은 이날 발표에서 상당 부분 바뀌어있었다.
기초연금
우선 기초연금부터 살펴보자. 인수위는 기존의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바꾸고, 이를 국민연금과 통합해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국민행복연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에서, 최소 4만 원~최대 20만 원의 차등 지급으로 수정됐다.
소득 하위 70%에 국민연금 미가입자는 원안대로 20만 원 전액을 받는다. 소득 상위 30%에 속하는 국민연금 미가입자도 약 4만 원을 받는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경우 가입기간에 따라 복잡한 계산식이 따른다. 결과적으로 인수위 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을 받고 있는 소득 하위 70% 노인들은 14만 원~20만 원의 연금을, 소득 상위 30%에 국민연금을 받고 있으면 4만 원~10만 원을 받는다.
이같은 안은, 인수위가 '모든 사람에게 기초연금을 준다'는 기준과 '국민연금 가입자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기준을 합친 결과다.
그러나 인수위 안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따른다. 인수위는 연금가입자들의 박탈감을 무마하기 위해 가입기간에 따라 기초연금 지급액수를 달리한다고 밝혔지만,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안정적으로 노후대책을 세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에게 덜 주고 여유 있는 사람에게 더 주게 되는 꼴이다.
저소득층의 국민연금 이탈 현상도 우려된다. 국민연금을 한 푼 내지 않아도 기초연금 20만 원을 받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저소득층의 경우 국민연금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강제가입자와, 고소득자 위주로 국민연금이 축소돼 장기적으로 국가적 부담이 커질 뿐 아니라 노후 보장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연구센터장은 "자칫하다간 저소득층이 대거 국민연금에서 빠져나가면서 반쪽짜리 연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보영 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는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경우, 국민연금과 별도로 기초연금을 통해 얻는 '인센티브'를 기대했는데, 이 부분이 사라지면서 근로 의욕 부진에 따른 생산성 저하 등이 우려된다는 점도 짚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 운영하겠다는 계획도 근본적으로 불씨를 안고 있다. 세금으로 충당하는 공적부조 성격의 기초연금과 보험 성격의 국민연금을 한 틀에 묶으면, 제도 정체성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4대 중증질환 外
인수위는 "4대 중증질환 치료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는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2016년부터 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대해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핵심쟁점이었던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현행대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인수위는 여기에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등에 대해서는 실태조사를 통해 실질적 환자 부담 완화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완화 대책'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지금도 4대 중증질환의 본인부담금은 5~10%로 다른 질환에 비해 낮다. 4대 중증질환의 본인 부담 완화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따라서 중증질환 환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를 제외하고 건강보험 보장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밖에 어르신 임플란트 공약,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도 다소 후퇴했다.
박 당선인은 '노인 임플란트에 건강보험을 적용한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지만, 이날 발표에선 다시 75세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어금니만 할지, 모든 치아에 적용할지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의 경우, 현재 소득에 따라 3단계로 나뉜 본인부담 상한제를 50만 원~500만 원으로 나눠 지급한다고 공약했지만, 인수위에서는 저소득층의 상한액은 120만 원으로 높이기로 했다.
"국민 맞춤형 아닌 '예산 맞춤형' 국정 전략"
이날 발표내용은 충분히 예견된 시나리오였다. 인수위는 이같은 '공약 후퇴'를 인수위 출범 후 조기 예고하기도 했다.
박근혜 선거 캠프의 민생경제대응단장을 맡았던 나성린 당 정책위부의장은 기초연금 관련, "대선 공약에서 기초노령연금을 2013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전부에게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1월 14일)"고 한 데 이어 "공약 '말 바꾸기 비판'은 대선 공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1월 16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근혜 표' 복지 공약이 줄줄이 후퇴한 이유는 재원 때문이다. 실제 인수위 업무 보고 과정에서 각 정부 부처는 재원을 이유로 복지 공약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 감면 등으로는 훌쩍 늘어난 복지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정부 출범을 앞두고 '증세'를 공언하기도 부담스럽다는 판단 하에 공약을 차등적으로 바꿔 재원을 줄여보려는 의도인 셈이다.
재원을 핑계로 복지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른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24일 논평을 통해 복지정책 국정비전 전략에 대해 "국민 맞춤형이 아닌 예산 맞춤형으로 변질됐고 대선공약의 핵심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국민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무보다 재정 건전성을 내세워 있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또한 "국정과제는 이행시기를 늦추거나 단계적 도입을 제시하는 등 명시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공공성보다는 시장을 통한 효율성을,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별적·잔여적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보영 교수 역시 "재원 방안은 증세가 아니더라도 재정 구조 조정, 세출 조정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율 가능하다"며 "재원 고민 이전에 복지 정책 수행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번 '공약 후퇴' 요구에 대한 朴 처신이 관건"
과거 역대 정부들은 대부분 복지 정책에 있어 첫 목표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2006년 '참여정부 보건복지 핵심공약 이행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의 대표적 의료 공약으로 꼽았던 공공의료 확대 공약은 도시형 보건지소의 시범사업만 실시하는 등 10% 수준이었고, 치매 중풍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확대 공약 역시 기존 계획보다 크게 축소됐다. 경실련은 2011년 비슷한 취지의 'MB정부 보건복지 공약 및 국정과제 평가 보고서"를 통해 84개 세부과제 중 성과가 인정된 B등급은 16개(19%), 사업이 매우 부진하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낙제수준 D등급이 24개(29%)라고 평가했다.
전례에 비춰봤을 때 '복지 대통령'을 꿈꾸는 박 대통령 역시 험로가 예상된다.
복지 분야는 정권 내에서 확장보다 축소되기 쉬운 영역이다. 복지는 사람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토목사업 등과 같이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지에 '퍼주기'라는 오명이 붙은 이유도 이같은 특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복지 대통령을 꿈꾼다면, 무엇보다 끈기를 갖고 뚝심 있게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취임하기도 전에 공약을 수정하는 등 복지 정책 이행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출범도 하기 전에 (수정안을 밀고 나가는 것은) 국민에게 '실패한 정부'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이라며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끌기가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창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앞으로도 계속 주변에서 '후퇴 요구'가 들어올 텐데 이때 박 대통령의 결단을 봐야 한다"며 "(의지 부족 비판을 극복하려면) 현재 애매하게 남아있는 공약들을 서둘러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복지 공약에 대한 이행 의지가 높다는 점을 직접 국민들에 알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약 수정에 대한 '대국민 해명'이 먼저라는 의견도 있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공약을 축소하거나 다소 변경할 수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왜 바뀌었는지 해명을 해야 한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했던 국민과의 약속, 신뢰에 흠집이 나 버리면 추후 정국 운영에도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 정책 관계자들 간에 불필요한 잡음을 조기 차단하는 것 또한 과제다. 박 대통령은 복지공약 실행의 컨트롤타워인 보건복지부 장관에 진영 전 인수위 부위원장을 내정했다. 대표적 친박계 인사인데다 여야에 두루 덕망이 높은 진 부위원장을 내정한 것은 새 정부의 복지 공약 이행을 상징하는 인선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팀을 이끄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후보자가 정치권의 복지확대 논의에 비판적이었던 현오석·조원동 후보자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일부 엇박자가 나오지 않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총리실 사회보장위원회가 복지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결국 복지재원 논의로 들어가면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팀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공한 대통령-'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 朴 선택은?
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취임사에서 "어떤 국민도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맞춤형의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으로 국민들이 근심 없이 각자의 일에 즐겁게 종사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고 박 대통령을 밀었던 국민들은 그의 '공약 수정' 이후 믿음이 깨질까 두려워한다.
일단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섰다가 다시 크게 뛰어오를 것이냐, 아니면 물러선 상태 그대로 뒷걸음질칠 것이냐. 그에 따라 그는 '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으로 남을 수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의 태도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진보가 10년간 대표적 진보지식인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들에는 진보의 정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서려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비단 우 교수의 것만이 아니다. 진보진영 전체의 고민이다.
지난 18대 대선은 진보 진영에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줬다. 권력을 가져오지도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간판 어젠다를 보수 정권에 넘기고 말았다. 진보의 전통적 어젠다인 복지를 보수 진영에 빼앗긴 건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마저 들게 했다. 진보 진영이 대선 패배 후 '멘붕'에 빠진 건 이 때문이었다.
복지에 대한 요구는 높지만, 진보의 정치력을 믿지는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꿰뚫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보수 진영에선 무상급식 등 복지 정책에 '퍼주기'라며 철퇴를 날리는 사이, 박 대통령은 '복지 완전 정복'에 나섰다. '한국형 복지'를 내걸고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를 제시했다.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3년 뒤, 마침내 그를 취임식장으로 인도했다.
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2013년을 '한국형 복지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취임 하기도 전부터 박 대통령의 복지 정책을 두고 "말 바꾸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불과 3개월 전 진보진영을 위기감에 몰아넣었던 박 대통령, 이번엔 그가 위기다. 위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위기 극복 앞에 놓인 과제들은 무엇인가.
▲ 취임식장인 국회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
취임도 전에… '반쪽' 된 복지 공약
지난 21일, 인수위는 5대 국정목표, 21개 국정전략, 140개 국정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5대 국정 목표는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이었다. 대선 기간 동안 강조한대로 복지를 5대 국정 목표에 포함시키면서 박 대통령은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내보였다.
김용준 인수위원장 복지 정책과 관련,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커졌으나 국민 개인의 행복수준은 낮은 상황"이라며 "이제는 국민행복과 국가발전이 선순환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복지 정책을 국가의 총량적 차원이 아닌 국민 개개인 차원에 맞춰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총론은 좋았다. 그러나 각론이 문제였다. 지난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의 복지 분야 최대 공약이었던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관련 공약은 이날 발표에서 상당 부분 바뀌어있었다.
기초연금
우선 기초연금부터 살펴보자. 인수위는 기존의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바꾸고, 이를 국민연금과 통합해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국민행복연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에서, 최소 4만 원~최대 20만 원의 차등 지급으로 수정됐다.
소득 하위 70%에 국민연금 미가입자는 원안대로 20만 원 전액을 받는다. 소득 상위 30%에 속하는 국민연금 미가입자도 약 4만 원을 받는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경우 가입기간에 따라 복잡한 계산식이 따른다. 결과적으로 인수위 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을 받고 있는 소득 하위 70% 노인들은 14만 원~20만 원의 연금을, 소득 상위 30%에 국민연금을 받고 있으면 4만 원~10만 원을 받는다.
이같은 안은, 인수위가 '모든 사람에게 기초연금을 준다'는 기준과 '국민연금 가입자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기준을 합친 결과다.
그러나 인수위 안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따른다. 인수위는 연금가입자들의 박탈감을 무마하기 위해 가입기간에 따라 기초연금 지급액수를 달리한다고 밝혔지만,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안정적으로 노후대책을 세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에게 덜 주고 여유 있는 사람에게 더 주게 되는 꼴이다.
저소득층의 국민연금 이탈 현상도 우려된다. 국민연금을 한 푼 내지 않아도 기초연금 20만 원을 받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저소득층의 경우 국민연금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강제가입자와, 고소득자 위주로 국민연금이 축소돼 장기적으로 국가적 부담이 커질 뿐 아니라 노후 보장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연구센터장은 "자칫하다간 저소득층이 대거 국민연금에서 빠져나가면서 반쪽짜리 연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보영 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는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경우, 국민연금과 별도로 기초연금을 통해 얻는 '인센티브'를 기대했는데, 이 부분이 사라지면서 근로 의욕 부진에 따른 생산성 저하 등이 우려된다는 점도 짚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 운영하겠다는 계획도 근본적으로 불씨를 안고 있다. 세금으로 충당하는 공적부조 성격의 기초연금과 보험 성격의 국민연금을 한 틀에 묶으면, 제도 정체성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9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대한노인회를 방문해 임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4대 중증질환 外
인수위는 "4대 중증질환 치료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는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2016년부터 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대해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핵심쟁점이었던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현행대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인수위는 여기에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등에 대해서는 실태조사를 통해 실질적 환자 부담 완화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완화 대책'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지금도 4대 중증질환의 본인부담금은 5~10%로 다른 질환에 비해 낮다. 4대 중증질환의 본인 부담 완화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따라서 중증질환 환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를 제외하고 건강보험 보장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밖에 어르신 임플란트 공약,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도 다소 후퇴했다.
박 당선인은 '노인 임플란트에 건강보험을 적용한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지만, 이날 발표에선 다시 75세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어금니만 할지, 모든 치아에 적용할지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의 경우, 현재 소득에 따라 3단계로 나뉜 본인부담 상한제를 50만 원~500만 원으로 나눠 지급한다고 공약했지만, 인수위에서는 저소득층의 상한액은 120만 원으로 높이기로 했다.
"국민 맞춤형 아닌 '예산 맞춤형' 국정 전략"
이날 발표내용은 충분히 예견된 시나리오였다. 인수위는 이같은 '공약 후퇴'를 인수위 출범 후 조기 예고하기도 했다.
박근혜 선거 캠프의 민생경제대응단장을 맡았던 나성린 당 정책위부의장은 기초연금 관련, "대선 공약에서 기초노령연금을 2013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전부에게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1월 14일)"고 한 데 이어 "공약 '말 바꾸기 비판'은 대선 공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1월 16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근혜 표' 복지 공약이 줄줄이 후퇴한 이유는 재원 때문이다. 실제 인수위 업무 보고 과정에서 각 정부 부처는 재원을 이유로 복지 공약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 감면 등으로는 훌쩍 늘어난 복지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정부 출범을 앞두고 '증세'를 공언하기도 부담스럽다는 판단 하에 공약을 차등적으로 바꿔 재원을 줄여보려는 의도인 셈이다.
재원을 핑계로 복지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른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24일 논평을 통해 복지정책 국정비전 전략에 대해 "국민 맞춤형이 아닌 예산 맞춤형으로 변질됐고 대선공약의 핵심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국민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무보다 재정 건전성을 내세워 있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또한 "국정과제는 이행시기를 늦추거나 단계적 도입을 제시하는 등 명시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공공성보다는 시장을 통한 효율성을,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별적·잔여적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보영 교수 역시 "재원 방안은 증세가 아니더라도 재정 구조 조정, 세출 조정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율 가능하다"며 "재원 고민 이전에 복지 정책 수행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지난해 6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농민·여성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노인 빈곤 해소와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위한 운동본부(준)'를 발족하고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
"다음번 '공약 후퇴' 요구에 대한 朴 처신이 관건"
과거 역대 정부들은 대부분 복지 정책에 있어 첫 목표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2006년 '참여정부 보건복지 핵심공약 이행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의 대표적 의료 공약으로 꼽았던 공공의료 확대 공약은 도시형 보건지소의 시범사업만 실시하는 등 10% 수준이었고, 치매 중풍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확대 공약 역시 기존 계획보다 크게 축소됐다. 경실련은 2011년 비슷한 취지의 'MB정부 보건복지 공약 및 국정과제 평가 보고서"를 통해 84개 세부과제 중 성과가 인정된 B등급은 16개(19%), 사업이 매우 부진하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낙제수준 D등급이 24개(29%)라고 평가했다.
전례에 비춰봤을 때 '복지 대통령'을 꿈꾸는 박 대통령 역시 험로가 예상된다.
복지 분야는 정권 내에서 확장보다 축소되기 쉬운 영역이다. 복지는 사람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토목사업 등과 같이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지에 '퍼주기'라는 오명이 붙은 이유도 이같은 특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복지 대통령을 꿈꾼다면, 무엇보다 끈기를 갖고 뚝심 있게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취임하기도 전에 공약을 수정하는 등 복지 정책 이행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출범도 하기 전에 (수정안을 밀고 나가는 것은) 국민에게 '실패한 정부'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이라며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끌기가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창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앞으로도 계속 주변에서 '후퇴 요구'가 들어올 텐데 이때 박 대통령의 결단을 봐야 한다"며 "(의지 부족 비판을 극복하려면) 현재 애매하게 남아있는 공약들을 서둘러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복지 공약에 대한 이행 의지가 높다는 점을 직접 국민들에 알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약 수정에 대한 '대국민 해명'이 먼저라는 의견도 있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공약을 축소하거나 다소 변경할 수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왜 바뀌었는지 해명을 해야 한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했던 국민과의 약속, 신뢰에 흠집이 나 버리면 추후 정국 운영에도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 정책 관계자들 간에 불필요한 잡음을 조기 차단하는 것 또한 과제다. 박 대통령은 복지공약 실행의 컨트롤타워인 보건복지부 장관에 진영 전 인수위 부위원장을 내정했다. 대표적 친박계 인사인데다 여야에 두루 덕망이 높은 진 부위원장을 내정한 것은 새 정부의 복지 공약 이행을 상징하는 인선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팀을 이끄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후보자가 정치권의 복지확대 논의에 비판적이었던 현오석·조원동 후보자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일부 엇박자가 나오지 않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총리실 사회보장위원회가 복지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결국 복지재원 논의로 들어가면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팀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취임 연설 중인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
성공한 대통령-'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 朴 선택은?
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취임사에서 "어떤 국민도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맞춤형의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으로 국민들이 근심 없이 각자의 일에 즐겁게 종사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고 박 대통령을 밀었던 국민들은 그의 '공약 수정' 이후 믿음이 깨질까 두려워한다.
일단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섰다가 다시 크게 뛰어오를 것이냐, 아니면 물러선 상태 그대로 뒷걸음질칠 것이냐. 그에 따라 그는 '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으로 남을 수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의 태도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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