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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의 역사적 경험과 정체성_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

사이박사 2009. 6. 12. 12:56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경험과 정체성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사이>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조국, 모국, 고국. 통상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에 의하면 ‘조국’은 조상의 출신지(뿌리), ‘모국’은 자신이 실제로 국민으로 소속되어 있는 국가, ‘고국’은 자신이 태어난 곳(고향)을 의미한다. 사실 태어난 나라에서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 이 미묘한 차이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은 그렇지 않다. <난민과 국민사이>의 지은이 서경식은 자신의 경우 ‘조국’은 조선, ‘모국’은 대한민국, ‘고국’은 일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한국과 일본 사이 문화적 교류가 엄청나게 늘어난 지금, 여전히 낯설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와 같은 번역소설을 접할 때에나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아로새겨진 한국인 차별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정치,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유해 온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사이>는 돋보이는 책이다.

고국 ‘일본’과 조국 ‘조선’의 관계 속에서

20세기는 제국주의의 팽창과 전쟁,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대 등을 이유로 여러 민족들이 자신이 살던 곳을 선택적 혹은 강제적으로 떠나는 이주(디아스포라)의 시대. 그런데 재일조선인은 다양한 이주집단 가운데서도 이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기간 동안 종주국인 일본영토에서 살았으며, 식민지배가 끝난 뒤 일본국적이 아닌 조선 혹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부여 받은 채 계속 일본에서 살고 있다. 즉 이들은 자유의지에 의해 이민을 간 것도 아니고, 자기 민족을 지배했던 종주국 일본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재일조선인이 안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는 단순히 조국, 고국, 모국이 다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고국’인 일본과 ‘조국’인 조선이 가치를 달리 하기 때문이다. 일본사회는 여전히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열등한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었다’는 언설까지 난무하는 가치관은, 조선의 역사적인 경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재일조선인은 완벽한 조선인도 아니다. 이미 조선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데다, 모국어=일본어인 재일조선인들에게 한반도 문화는 낯설기 그지없다. 결국 재일조선인들은 지배자의 땅에 살기에 완전한 피지배자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지배자도 아닌 이중적인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1990년대 들어 일본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다민족 공생’ 논리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이 ‘공생’ 논리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원래 문화를 상실한 존재로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일본사회에 각인된 재일조선인의 이미지를 분석한다. 1958년 ‘강간 및 살인혐의’로 체포된 조선청년 이진우는 일본사회에 불만을 품은 ‘괴물’로 이미지화됐다. 비슷한 시기 차별에 항거하며 분신자살을 택한 조선청년 양정명은 그 어떤 역사에도 포섭되지 못해,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틈새산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일본의 편견-‘과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일본의 과거를 추궁하는 것은 사실 돈이 목적이다’ 등-섞인 이미지가 고스란히 투영되는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국제난민처럼 그 어디에서도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있지는 않다. <난민과 국민사이>가 지닌 설득력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성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半난민’ 규정이 그러하다. 지은이는 분신자살을 택한 양명과도 다르고, 가싼 카나파니의 <불볕 속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더운 물탱크에 갇혀 죽어가는 난민들의 처지와도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반난민’으로 규정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와 ‘사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현실에서 느끼고 살기 때문인지 지은이는 민족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민감하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민족주의 담론이 팽창하면서, 지식인집단에서는 민족주의의 허구성, 구성적 성격을 비판하는 담론 또한 증가했다. 지은이는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고 밝히면서도, 완벽하게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민족이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대로 ‘상상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현실에서는 사람들을 구분 짓는 중요한 물질적 토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해체하고 국가를 해체하고자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구체적인 대안이 없을 경우 자칫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

지은이는 재일조선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드는 기준에 대해, 문화나 국적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을 지적한다. 즉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이주하여 일본에서 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경험, 조선과 일본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현 상태 그 자체가 재일조선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주’라는 주제는 한 국가의 안정된 공동체를 이룬 다수자들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주는 소수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고립되거나, 일종의 판타지가 되어 ‘유목적 삶’을 동경하는 따분한 다수자들에 의해 소비될 뿐이다. 지은이는 재일조선인의 문제에서 확장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다수자들에게 배제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국외에서 지속적으로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작곡가 윤이상, 국가가 안전보장을 해주지 않는 홈리스들을 작품에 담은 구 소련의 사진작가 보리스 미하일로프, 독일에 의해 ‘유대인’으로 강제 분류되어 수용소로 가야 했던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프리모 레비 등이 그 대상이다.

이처럼 지은이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확장하여,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유한다.


기사입력: 2006/05/02 [17:40]  최종편집: ⓒ www.ild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