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2022.10],우리 학문의 어두운 기원을 파헤치다
- 김재호
- 승인 2022.10.04 09:25
정준영 서울대 교수·심희찬 연세대 교수 인터뷰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들은 ‘조선인 없는 조선학’을 추구했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사진 왼쪽)는 지난달 27일 <교수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즉, 일본인 교수들은 조선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 조선인을 단순히 정보제공자로만 간주했다는 뜻이다. 정 교수는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와 법문학부의 일본인 교수 5명을 분석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를 출간한 바 있다. 일본인 학자들은 ‘근대·제국·식민지’ 사이에서 조선을 연구했다.
정 교수는 “일본인 연구자가 한국인 연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극복돼야 할 식민주의 잔재라는 판단으로 기피돼 왔던 주제였다”라며 “하지만 한국학도 일본학도 아닌 그 중간적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생산의 영역을 포착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지식과 학술을 성찰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들의 조선 연구가 현재 갖는 의미에 대해 “우리의 근대학문이 출발한 자리, 그 원점이 품고 있는 어두운 면을 탐색해 봄으로써 지금 우리의 학문이 서 있는 현주소를 알기 위함”이라며 “특히 보편과 특수라는 이항 대립 속에 갇혀있는 한국학이 처한 아포리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제언”이라고 답했다.
경성제대 이외에 식민지에 활용된 제국대학이 있는지 물었다. 정 교수는 경성제대와 데칼코마니적 역할을 했던 식민지 대만의 대북제국대학을 꼽았다. 대북제국대학은 현재 국립대만대학의 전신이다. 정 교수는 “대북제대는 식민지대만에 관한 학술지식의 생산을 독점했고 제국 일본의 남방진출에 있어서 지적 교두보 역할을 맡고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식민지 시대 제국대학에 대해 더 필요한 연구에 대해 정 교수는 “의학부에서 조선 연구, 이공학부에서 조선 연구 등 외연을 넓혀가며 우리 학문의 어두운 기원을 파헤치고, 지적 식민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심희찬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교수(사진 오른쪽)는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인 교수들은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에 따라 식민지라는 조선의 현재를 역사의 최종적인 도달점으로 설정했다”라고 답했다. 심 교수는 “조선의 역사적 시간이 포함하는 다양한 가능성은 삭제되고, 모든 과거의 사건은 식민지라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거나 일제의 새로운 판도인 ‘동양’ 속에서 융해된다”라고 밝혔다. 그는 “조선을 연구할수록 조선이 사라진다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라며 “역설적이지만 일본인 교수들이 근대역사학에 충실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라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식민사학을 넘어서기 위해 ‘근대 동아시아 사학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흔히 일본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이라는 것이 단독으로 성립하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라며 “식민주의 역사학은 동아시아 역사서술의 복잡한 상호 관련 속에서 등장했다”라고 밝혔다.
>>> 아래는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인터뷰 전문이다.
△그동안 경성제대에 대한 연구와 본인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는 어떤 지점에서 다른 것인가? 이번 연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일본인 교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그동안 왜 이에 대한 연구는 없었던 것인가.
경성제국대학에 관한 연구는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경성제대는 일본인 식민자들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 일제의 침략을 긍정하는 친일파를 양산하는 ‘그네들’의 학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교육의 역사에서 경성제대는 배제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사정은 현해탄 건너 일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식민통치의 기억을 잊기로 작정한 듯, 자신들의 역사를 지금의 일본 열도로 한정해서 서술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 통치 당시에는 일시동인을 부르짖었지만, 패전 이후 일본은 아예 식민지는 없던 것처럼 처리하거나 뭉뚱그립니다. 경성제대의 처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네들’의 학교라고 하겠지만, 정작 그네들은 더 이상 우리 학교가 아니라고 부인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 경성제대가 새삼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식민지가 남긴 유산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만으로 잔재가 척결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부정적 유산을 정면으로 응시해서 지금 무엇이 어떻게 변용, 지속되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른바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가 부상하면서, 잊힌 존재였던 경성제대라는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친일파의 산실이라 비판받았고, 또 ‘애초에 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식민 지배의 용인’이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이들 경성제대의 조선인 엘리트들은 (그 용인에 바탕을 둔 것인지는 몰라도) 의외로 다른 식민지 공간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학술의 자유, 사유의 자유를 일정하게 용인받았습니다. 경성제대가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을 배출하게 된 데에는 이런 구조가 깔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학교가 배출한 학력 엘리트들, 이른바 경성제대의 조센진들은 해방 이후 분단된 남북이 대립적인 국가를 설립하고 그 내용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설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묶어주는 경성제대라는 존재를 이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경성제대의 영향력은 이런 사회 엘리트의 창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과학문에 기초한 근대학술,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 지식의 생산 또한 식민지 사회에서 학술생산을 지향했던 유일한 기관이었던 경성제대의 영향력이 지대했습니다. 서양의 분과학문은 일본을 경유해서 식민지의 제국대학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식을 창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성제대의 설립과 더불어 교수가 되어 건너온 일본인들은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분과학문의 이론과 방법론을 몸에 익힌 전문가들이었고, 이들은 부임한 조선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조선에 관한 과학적 연구’, 조선인들을 정보제공자(informant)로 삼는, “조선인 없는 조선학”을 추구했습니다.
물론 1930년대 조선인 지식인들에 의해 조선학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를 원점으로 이후 한국의 근대적 인문·사회과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갔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경성제대의 조선학, 즉 ‘조선인 없는 조선학’과의 대결 의식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 또한 명확한 사실이고, 현재의 한국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저류(底流)를 형성해 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제가 경성제대, 그 중에서도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들의 ‘조선학’에 주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국인 연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 극복되어야 할 식민주의 잔재라는 판단으로 기피되어왔던 주제였지만, 이참에 한국학도 일본학도 아닌 그 중간적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생산의 영역을 포착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지식과 학술을 성찰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습니다.
△경성제대 이외에 식민지에 활용된 제국대학들에는 또한 어떤 곳들이 있나? 간단하게 그 특징들을 알 수 있나.
식민지에 있었던 또 하나의 제국대학이 식민지대만의 대북제국대학입니다. 현재 국립대만대학의 전신이지요. 현재 서울대학교의 경우, 경성제대는 전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만. 논의가 좀 벗어납니다만, 당시 미군정은 경성제대를 비롯하여 일본이 남긴 관립 고등교육기관 일체를 적산(敵産), 즉 적의 재산으로 간주하고 이를 접수하여 새로운 학교를 만든다는 컨셉트로 서울대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다고 경성제대와 관립전문학교 각자에서 비롯된 다양한 유형/무형의 유산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는 의문입니다만, 일제의 잔재를 극복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식민지의 제국대학은 식민지에 대한 학술 지식을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한편으로, 일본제국의 확장되는 방향성과 관련되는 정책적, 학술적 의미를 도출하고 정당화하는 역할 또한 더불어 맡았습니다. 가령 경성제국대학은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으로써 제국일본의 대륙진출, 특히 만주, 몽고, 화북 진출과 관련해서 그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 현지에 대한 실증적 지식을 구축하는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경성제대의 연구풍토가 조선 중심의 관계적 연구에서 조선들 포함한 만주, 몽강, 대륙 연구로 방점이 바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북제국대학 또한 이런 점에서는 정확하기 경성제대와 데칼코마니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북제대는 식민지대만에 관한 학술지식의 생산을 독점했음은 물론, 제국 일본의 남방진출에 있어서 지적 교두보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요. 남양에 대한 역사적 고찰, 대만원주민에 대한 토속인류학적 고찰을 통한 동남아시아 체질인류학의 구축,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현재 사정에 즉응하는 열대의학의 모색, 남중국(화남)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현지연구의 출발점 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육기관으로서 대북제대는 대만 현지인 엘리트들을 창출하는데 원활하지 못했지만, 연구기관으로서 대북제대는 남진이라는 일본의 제국적 진출을 정당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들의 조선 연구가 현재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
앞서 왜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에 주목했는지에 관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현재적인 시점에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근대학문이 출발한 자리, 그 원점이 품고 있는 어두운 면(the dark side)을 탐색해 봄으로써 지금 우리의 학문이 서 있는 현주소, 특히 보편과 특수라는 이항 대립 속에 갇혀있는 한국학이 처한 아포리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제언입니다. 더불어 일본인 교수들이 추구했던 조선 연구를 깊게 살펴보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제국적 의도, 식민주의적 편견만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를 향해서 지적 식민자의 위치에 서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양의 근대 학문 앞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유색인의 지적 피식민자에 다름 아니며, 이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서구에 대해서 느끼는 지적 열등을 식민지에 대한 지적 우월로 푸는 특유의 학문적 태도와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지적 식민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서구로 일본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영향 관계의 지구적 연쇄와 그 지적 중심로 향하는 지적 열등감과 식민주의는 생각보다 뿌리 깊으며, 일본을 경유에서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큰 장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추후 식민지 시대 제국대학에 대해 필요한 연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경성제대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과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법문학부의 조선연구, 다시 말해 인문사회 분야의 조선연구에 초점을 좁혔고, 특히 표나게 조선연구를 표방하는 것을 분석하는데도 급급했지만, 경성제대의 조선연구에 대해서 좀 범위를 넓혀서 생각하자면, 조선을 사례로 한 것, 조선을 배경으로 한 것 등등을 포함한다면 경성제대의 학문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 조선연구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때 축적된 지적 기반을 토대로 해서 이에 반발하면서도 수용하는 형태로 한국의 근대 학문분과 전체가 만들어져갔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의학부에서 조선연구, 이공학부에서 조선연구 등 외연을 넓혀가며 우리 학문의 어두운 기원을 파헤치고, 지적 식민주의를 극복하며, 보편과 특수의 덫에서부터 벗어나 우리를 학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 아래는 심희찬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교수 인터뷰 전문이다.
△그동안 제국대학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던 것인가? 경성제대 이외에 다른 연구들도 있나.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교하면 양은 조금 적을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기에,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이란 단순히 사회나 세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특정한 의도 아래 재조직하는 한편 어떤 사유의 프레임을 구축하는 실천이기도 하다는 문제의식이 학계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지식의 정치성, 혹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것은 정치가 지식을 이용했다거나, 어떤 학문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봉사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작업과는 그 결이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비판은 학문의 중립성, 순수성이라는 지식의 자기언급적인 담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나르시시즘입니다. 하지만 지식은 정말 객관적이고 무구한 것일까요?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지식이 지식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필수요소일지 모릅니다. 이것이 없다면 지식은 대단히 공허하고 허무한 껍데기만 남을 것입니다. 한때 한국과 일본의 학계에서 꽤 유행했던 ‘학지(學知)’라는 단어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개념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일본의 연구도 포함하여 최근 등장한 경성제대 관련 연구는 대체로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식의 자기언급적 담론에 충실한 관점, 곧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학문의 정치적 공모를 비판하는 경향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의 자기언급적 담론을 해체하려는 관점, 곧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학문의 내재적 연관을 살펴보려는 경향입니다. 이 두 경향은 매우 유사해 보이지만, 실은 그 목표 및 방법론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정준영 서울대 교수의 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는 여기서 말한 두 번째 경향, 또는 이른바 ‘학지라는 물음’을 가장 멀리 밀고 나간 저술이라고 생각하며, 추후 경성제대는 물론 제국대학 자체에 관한 연구에도 중요한 시사를 제공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교수들의 조선 연구는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인가? 타자의 시선에서 혹은 식민 지배자라는 내부의 시선에서 더 자세히 바라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제가 서평에서 사용한 ‘불/가능성’이라는 표현은, 가령 외부의 타자에 불과한 일본인들이 조선을 연구하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중의 타자’인 일본인 교수들은 내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시점 아래 조선을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에는 조선 연구를 마치 과학자의 사명처럼 여기는 한편, 패전 이후에는 자신의 연구와 총독부의 권력을 매칭시키는 인식을 대단히 불쾌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령 경성제대에서 조선사학 강좌를 맡았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자신이 참여했던 조선고적조사사업 및 그 보존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100년 후의 한국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구 식민 지배자가 보여주는 이 거만한 태도는 학자로서의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후지타가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지식의 정치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후지타는 지식의 자기언급적 담론에 굉장히 충실하지만, 반대로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에 새겨진 정치성의 징후에는 매우 둔감합니다. 민족의 기원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현재의 국민국가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균질한 시간의 흐름 속에 과거의 수많은 사건을 배치하는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적으로 증명하는 내러티브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인 교수들은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에 따라 식민지라는 조선의 현재를 역사의 최종적인 도달점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의 역사적 시간이 포함하는 다양한 가능성은 삭제되고, 모든 과거의 사건은 식민지라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거나 일제의 새로운 판도인 ‘동양’ 속에서 융해됩니다. 조선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조선이 사라진다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일본인 교수들이 근대역사학에 충실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입니다. 동양을 지향했던 식민지조선의 경성제대가 빠질 수밖에 없었던 조선 연구의 ‘불/가능성’이란 이러한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식민사학 혹은 식민주의 역사학을 넘어서기 위해서 앞으로 필요한 연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에 식민사학 혹은 식민주의 역사학을 넘어서기 위해서 앞으로 필요한 연구는 ‘근대 동아시아 사학사’ 연구입니다.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의 이데올로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근대역사학의 원리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역사학에 관한 사학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근대사학사에 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다만 그 대부분이 일국사의 관점에서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을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이라는 것이 단독으로 성립하고 이것이 조선에 건너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식민주의 역사학은 동아시아 역사서술의 복잡한 상호 관련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식민주의 역사학을 동아시아 사학사라는 보다 큰 틀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해야만 그 학지로서의 성격 역시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식민주의 역사학 극복의 실마리도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