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강미숙] 창자를 끊는 곡소리를 허하라(애도문학)
창자를 끊는 곡소리를 허하라
[강미숙의 궁리(窮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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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11.11 17:10
- 수정 2022.11.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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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는 곡하는 소리를 꽤 여러 번 들었다. 처음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는 소리를 내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점점 그 곡소리가 여간 위안이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저렇게 서럽게 울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좋겠다... 그러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망자라는 것. 그리고 곡소리를 듣는 대상은 상주가 아닌 망자이며 이렇게 슬피 울어줄 테니 이승에 미련 두지 말고 훠이훠이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미쳤다. 아이고 아이고, 망자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명복을 비는 세 음절의 곡소리는 연희의 성격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비보를 전해 들었을 때는 울부짖음에 가깝다. 어떤 죽음이든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의 원초적인 발화법이 곡소리다. 특히 자식을 잃은 단장의 슬픔을 담을 단어가 존재하긴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리스 비극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는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죽어간 페르시아 젊은이들을 애도하는 이야기다. 마라톤 전투 패배를 설욕하겠다고 수십만 용병을 데리고 아테네 원정을 떠난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을 전멸시키지만 아테네 앞바다 살라미스 해협에서 그리스 소형 갤리선들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진다.
코러스(원로)는 전쟁터에 나간 장수들을 호명하며 아시아가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노래하고 패전소식을 들고 온 사자는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이름과 병과를 하나하나 전한다. 절망에 빠진 페르시아의 원로들과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토사는 다리우스왕의 혼백을 불러내 국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월등히 뛰어난 페르시아제국이 왜 패배한 것인지 묻는다. 다리우스왕은 아들의 급한 성미와 오만 때문에 파멸의 열매를 맺고 눈물을 수확하게 될 것이라 탄식하며 지하세계로 돌아가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등장한 크세르크세스는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원로들이여, 슬피 우십시오. 삼단 노선들과 함께 죽어간 사람들이여, 슬프도다.” 그리곤 이 처연한 슬픔을 곡성으로 만가로 흰 수염을 뜯으며, 또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눈물로 애도하라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온 도성이 울리도록 아이고 아이고를 외치라고 요청한다. 이에 코러스는 시커멓게 멍드는 고통의 곡성으로 화답한다. 우리말 ‘아이고 아이고’로 옮겨진 고대 그리스어 ‘Ototototoi Ototototoi(오토토토이)’, 그들도 처절한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어 단순 반복되는 의성어에 담은 모양이다.
비극을 쓴 작가도 연극의 후원자도 관객도 다 아테네인들이다. 그들은 마라톤 전투 패배에 이어 엄청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살라미스 해전을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8년이나 지난 후에 상연되었으니 다른 정치적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했던 아이스킬로스는 전쟁 승리 후 델로스에 있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와 황금기를 누리던 아테네인들에게 권력자들의 오만과 자만이야말로 비극의 원천임을 페르시아인들의 패배를 상기시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테네인들도 숱한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형제를 잃었다. 그들은 비록 원수일지언정 자식들의 전사통보를 받아들었을 페르시아 부모들의 고통에 뒤늦게나마 깊이 공감하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승전을 기대하며 높은 언덕에 옥좌를 놓고 전투를 지켜봤다는 크세르크세스가 산 채로 수장되는 자국의 젊은이들을 보며 아이고 아이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도자라면 국민의 죽음 앞에 침통하고 애통해 하는 것이 상식이다. 자신의 자만과 오만 때문이라면 더더욱.
창졸간에 주검으로 돌아온 자식을 안은 어머니가 내뱉을 언어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기가 막히고 목이 막혀 미처 아이고 소리도 안 나올 시간에 국가는 정치적 애도, 정치적 분향을 강요하고 정치적 언행으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아직 숫자로만 존재하는 156명과 312명의 어머니 아버지와, 624명의 형제자매와, 1248명의 가족 친지와, 그리고 2496명의 지인과 4992명의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눈과 귀를 틀어막고 말이다. 아직도 치료중인 부상자들과 심리적 외상을 입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조용히 지구에서 사라져도 괜찮은 사람들인가.
장례식이나 분향은 산 자가 죽은 자와의 이별을 애도하는 자리이고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면 그 억울함을 함께하고 산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 하겠다 약속하는 자리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들의 멈춰진 숨을 애도하고 이별할 수 있겠는가. 어찌 숨이 끊겼는지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애석해하고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젊은이들을 고유한 서사를 가진 인격체가 아닌 숫자에 가두고 관제언어와 관제애도, 관제사과로 끊임없이 모욕하고 농담으로 대하는 자들, 그들을 두둔하고 망자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멈추지 않는 그 모든 혀에 화 미치리라. 그리고 그 업보는 자손이 짊어지게 될 것이다 반드시.
나는 교통사고로 인한 친정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발인 몇 시간 전에 맞닥뜨리고 울지 않았다. 아니 눈이 막혀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도 사고 뒤처리로 뛰어다니느라 제대로 울거나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일상에 복귀했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워 아주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지우려고만 했다. 그러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렇게 울어도 되는구나 대명천지에 어린아이처럼 저렇게 온 몸으로 울어도 되는구나. 무려 15년 동안 외면해온 눈물을 그 해에 무척 많이, 그것도 엉엉엉 소리내어 울며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비로소 어머니와 작별했다.
개인적인 죽음도 이러할진대 자식의 사회적 죽음을 마주한 어머니들임에랴. 태양도 달도 꽃과 나무도 빛을 잃은 어머니들에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부르며 통곡할 수 있게 하라. 갈가리 찢겨진 채 차디찬 아스팔트에 방치되고 영안실 바닥에 방치된 줄도 모르고 자식들을 찾아 헤맨 어미들의 짐승같은 곡소리를 들어라. 숨이 막혀 죽은 자식의 시커멓게 멍든 주검을 안아든 아버지들이 속울음을 게워낼 수 있게 하라. 그들의 벗들과 동료들이, 내 새끼는 아니라서 다행이라 말하며 동시에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목놓아 울게 하라. 나는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스물여섯 명의 열사를 하나하나 불러내고 그 끝에 이한열 열사의 혼백을 애도한 문익환 목사의 피맺힌 절규가 바로 오늘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애도문학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인들>에 이런 대사가 있다. “미망(迷妄)은 처음에 달콤하게 여겨지지만 일단 그 덫에 걸려들면 안전하게 벗어날 길은 없노라.” 권력자라면 뼈에 새겨야 할 말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오만으로 죽은 자들과 이를 마주한 산 자들의 고통에 자신의 옷을 갈가리 찢고 통곡한다. 그리고 이 연극이 상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으로 추방된다. 오만과 자만이 인간을 어떻게 쓰러뜨리는지 고전의 자장 안에서 수없이 반복해온 인간의 어리석음을 기억할 일이다.
◇강미숙은 정치와 일상을 넘나드는 시민의 말하기, 나아가 시민의 정치적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소셜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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