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_8만5000원에 사서 9만원 현금화.. '지역상품권 재테크 비법' 돌아
8만5000원에 사서 9만원 현금화.. '지역상품권 재테크 비법' 돌아
정지섭 기자 입력 2020.04.28. 03:07최대 37.5% 할인에 5% 캐시백.. 액면가 60% 쓰면 40% 환불
지자체들 경쟁하듯 판촉, 취지는 사라지고 현금화 꼼수 만연
전남 나주시에 사는 A씨 등 두 명은 지난해 서울과 익산에 있는 지인 명의 법인을 통해 모 금융 기관에서 나주사랑상품권 1억6000만원어치를 5% 싸게 구입했다. 이들은 이렇게 할인받은 상품권을 자신들이 세운 나주 시내 유령 가맹점 다섯 곳에서 스물아홉 차례에 나눠 정상가 현금으로 바꿨다. 사업자등록증만 있으면 영업장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손쉽게 가맹점 등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 간단히 800여만원을 벌어들인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적발한 나주시는 부당이득금을 환수하고 허위 가맹점을 직권 해지하는 소동을 벌였다.
◇남발되는 지역상품권
지역상품권은 소상공인 지원을 명목으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2018년 경기 침체로 위기를 겪던 전북 군산과 경남 거제의 지역화폐 발행 금액 10%를 국비 지원하면서 이름도 '○○사랑상품권'으로 통일하도록 했다. 현재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이런 지역상품권을 발행하는 곳은 204곳(84%)에 이른다.
지난 3월 코로나 사태로 경기가 얼어붙자 행정안전부는 지역상품권 할인율 상한선(10%)을 폐지했다. 이에 전국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재정을 털어 파격 할인에 나섰다. 화성시는 지역상품권 20만원어치를 사면, 카드에 32만원을 넣어 주는, 할인율 37.5%짜리 판촉 행사까지 했다.
서울도 지역상품권 할인율을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8일까지 기존 10%에서 15%로 올리고, 일정 기간 결제 금액의 5%를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캐시백 행사를 펼쳤다. 서울시 관계자는 "판매 개시 열흘 만에 준비 물량 380억원어치가 매진됐고, 이후 800억원어치를 서둘러 추가 발행했는데 이마저도 순식간에 동났다"고 말했다.
할인율이 올라가면서 상품권 악용 사례도 늘고 있다. '상품권 깡'이나 환불 규정을 이용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커지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식자재마트 사장은 "며칠 전 단골 고객으로부터 액면가 10만원짜리 지역상품권을 현금 9만원으로 바꿔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전했다. 서울시가 할인해 준 1만5000원을 식자재마트 사장 1만원, 단골 고객 5000원으로 나누자는 제안이었던 셈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자체별 발행액과 1인당 구매 한도가 정해져 있고 사용처가 제한적이어서 대리 구매와 '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할인 혜택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메운다. 정부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자체에 발행액의 4%에 달하는 할인 지원액을 국비로 지급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지역상품권 발행 규모를 3조원에서 6조원으로 두 배로 늘리고, 추가 3조원에 대해 8%까지 국비 지원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올해에는 작년의 네 배가 넘는 예산 3600억원이 투입되고, 지자체들은 지난해의 두 배 가까운 발행 목표를 세우고 있다.
서울시는 올해 발행분(2000억원)이 상반기 안에 소진될 것으로 보고, 3000억원어치 추가 발행을 추진 중이다. 이미 올해 할인 지원금 예산 130억원은 바닥나 특별 교부금으로 할인액을 메우고 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말 어려운 취약 계층에게 나눠 줬을 때는 소비 진작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반인에게 줄 경우 원래 써야 할 현금 대신 사용하는 대체 효과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세금이 악덕 소비자 호주머니로
'세금으로 돈 나가는데 환불신공이라뇨. 이건 정말 아닙니다.' 최근 재테크 정보 커뮤니티에선 지역상품권 '환불신공(換拂神功)' 논쟁이 뜨겁다. 지역상품권의 환불 규정을 악용해 할인 폭을 극대화하고, 현금까지 손에 쥐는 '악덕 소비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울사랑상품권을 살 때 15% 할인, 21일까지 결제액의 5% 캐시백, 액면가의 60%만 사용하면 나머지 40%를 현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 '세금 캐시백'에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10만원 상품권을 15% 할인된 8만5000원에 구입해 6만원짜리 물건을 산 뒤, 차액 4만원을 환불받고 결제액의 5%를 캐시백(3000원)으로 받으면, 6만원짜리 물건을 결국 30% 할인된 가격(4만2000원)에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자체별로 지역 상품권을 60~70% 사용하면 환불이 가능하다"며 "서울의 60% 기준은 공정거래위원회 표준약관에 따른 것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동네 소상공인에게 사용하는 효과도 일부 있겠지만, 현금화를 시도해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저축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원 대상과 사용처를 잘 타기팅해야 한다"고 했다.
☞지역상품권
중소벤처기업부(정부)가 발행하는 온누리상품권과 달리 시·군·구 등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관내에서만 쓸 수 있도록 발행한 상품권. 통상 ‘○○(지역명)사랑상품권’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된다. 사용처는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른데, 서울은 ‘대형 마트·백화점, 프랜차이즈 직영점 등을 제외한 상시 종업원 5인 미만, 또는 업종별 매출 10억~120억원 이하’ 소상공인 업체로 제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