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에 대한 서평' 낙서장 2007.07.04. 22:39 |
알렉스 캘리니코스 著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에 대한 서평 (2003년) wissenschaft 2006/06/02 01:01 |
Ⅰ. Marx을 다시 읽으며
학회 실이나 동아리 실에 가면 먼지를 잔뜩 얹고 책들을 볼 수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면, 대학에서 Marx와 마르크스주의 저작은 안타깝게도 고전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책들이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큼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다. 그리고 그 자취로써 책장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먼지 얹은 책들을 다시 꺼내어 보면 책의 여백에는 누군가가 꼼꼼하게 정리하여 놓은 내용과 의문점, 감상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거기서 내 글씨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상에 관련된 책에는 글씨나 이름을 쓰지 않았었는데 1학년 때 읽었던 책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처음 Marx를 접했던 98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98년은 96년 연대항쟁 등의 여파로 학생운동에 대한 반감이 매우 높은 때였다. 반면에 IMF로 인해 서울역에 넘쳐나는 노숙자와 가족 단위의 생계형 자살, 정리해고 등 급격하게 변해 가는 시기여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이기도 했다. 학회에서 철학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를 읽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하면 학생운동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 철학세미나를 하면서 무척이나 그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어린 맘에 동의를 하면 운동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나는 진행되고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견해를 이야기하려 했던 나는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일정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와 사물의 운동에 대한 Marx의 철학과 역사발전의 합법칙성,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사회주의 사상 등... 막연히 알아오던 것과 책으로 접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Marx의 사상은 나에게 단순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를 접하면서, 운동을 접하면서, 노동자들과 만나면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일원으로서 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그 때서야 Marx의 철학이 실천의 철학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몇 년만에 이 책을 읽는지 모른다. 세심하게 기억하던 부분은 많이 흐려졌다. 그러나 다시 읽는 즐거움은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던 부분을 이했을 때와 새로운 영감을 받을 때이다.
Ⅱ. 마르크스의 사상 - The revolutionary ideas of Karl Marx를 중심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Marx는 수많은 상반된 평가에 받아 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역시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성자로, 다른 한쪽에서는 ‘붉은 테러 박사’로 불리고 있다. 또한 Marx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 해석의 여지와 선을 넘어선 사람도 있고, Marx 사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이도 있다. Marx의 사상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은 평가하지만 이제 퇴색해 버렸다는 견해 역시 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심지어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는 자본주의에 이르러 역사의 정점에 올라 역사가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Marx의 사상이 현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 미친 영향은 혁명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사상’을 개관하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의 사상적 부분이 광범위 한만큼 책의 목차를 따라가기보다는 크게 철학, 경제학, 변혁론으로 나누어 요약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에 몇 가지 논제를 가지고 Marx의 사상의 현재적 의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Marx의 철학
Marx는 헤겔 철학과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을 혁명적으로 비판․계승하여 변증법적 유물론1)을 확립하게 된다. Marx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치중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단순히 세계변혁에 대한 실천의 문제를 제기할 뿐만이 아니라 철학의 사명에 대해서도 생각할 화두를 던진다. 철학의 대상과 사명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Marx의 사상에서 그 철학적 기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1) 철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 철학의 목표와 사명
철학에 대한 Marx의 생각은 19세기 독일의 상황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이에르바흐 등의 청년 헤겔주의자의 일단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억압된 독일의 상황에서 유용한 비판의 돌파구로 종교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곧 기존 체제의 비판이라고 사료했던 것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달리 혁명적인 경험이 일천한 독일 사회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은 사회변혁에 대한 선험적인 철학적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Marx 역시 청년 헤겔학파의 중추로 활동하면서 철학의 대상과 사명에 대해서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인신문’에서의 활동은 그를 부르조아 유물론을 극복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는 라인신문의 지면을 통해 ‘도벌법’과 모젤농민들의 상황에 대한 논설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그를 물질적 이해관계로 끌어 들였다. Marx는 순수한 정치적인 접근에서 현실에 대한 접근으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2)라고 회고하고 있다.
철학의 본질과 사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명쾌하게 답하는 것이 바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라는 Marx의 말이다.
먼저 철학은 세계의 존재와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Marx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한다’라는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결합하여 세계의 운동법칙을 발견했다. 이러한 운동법칙은 헤겔이 열렬히 옹호했던 기존의 상태 역시 변화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헤겔의 보수적인 철학과 관념은 상대적 진리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는 모든 것은 내적 모순에 기인하여 변화한다는 혁명적 성격이다.
또한 Marx는 관념론과 부르조아 유물론의 관조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실천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그람시는 Marx의 철학을 ‘실천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Marx의 의하면 사상은 사회생활의 부분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사회생활과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4) 이는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의 발전 문제를 말한다. Marx는 자신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문제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 문제에 대한 실천이 중요하다고 본다. 인식과 실천은 서로 조응(상호 관계)하며 변증법으로 상승하며 변혁을 가져오는 것이라 보았다5) 예를 들어 발전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보면 그들이 파업에 가담하면서 의식과 실천이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철학에 대한 Marx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철학은 세계의 운동과 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용하여 세계를 변혁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계변혁에 대한 철학의 근본문제는 Marx의 말 그대로 세계를 변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신이 처한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변혁하기 위해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며 인간만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이를 자신에 맞게 변혁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즉 Marx의 철학은 인간이 세계와 사회의 운동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변혁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모든 사물은 운동한다 - 변증법적 유물론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등의 일련의 저서를 통하여 Marx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립하게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Marx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 철학과 부르주아적 유물론의 계승 발전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헤겔은 변증법을 절대이념의 전개로 보아 사고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객관적 법칙이었지만, 사물의 근본에는 이념이 있고 따라서 사물의 변증법은 이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종국에는 절대 이념으로 환원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일체의 고정적인 것을 타파하는 변증법적 견해와 거리가 있다.
Marx는 이에 헤겔 철학의 혁명적 측면, 즉 변증법적 방법만을 수용하고 헤겔의 철학적 형태를 폐기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립 없이는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기 어려워서 Marx는 평생 이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고전철학과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 ‘포이에르바흐론’과 그 부록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기존의 헤겔 철학과 인간의 소외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에 감성적 인간론에 대한 반론을 펴면서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인간관을 제시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립하였다고 선언한다.
Marx에 의하면 보편적 연관 속에서 끊임없는 운동, 변화 발전이 세계의 기본적인 모습이라고 본다. 19세기 이후 과학이 에너지 전화의 발견, 진화론의 발견, 세포의 발견 등 형이상학의 영역을 넘어 발전한 바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개개의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사물의 질적 변화․발전은 양적인 변화와 사물 내부의 근거를 가진 부정을 통해 실현된다. ‘내부의 근거’란 사물 내부의 모순, 즉 ‘변증법적 모순’이다. 사물 내부에는 서로 대립되는 경향, 성질, 힘, 요소 등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부정하고 배제하면서 동시에 연관되어 있으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를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고 하며 이를 ‘변증법적 모순’이라고 한다. 대립물의 통일은 대립물의 투쟁을 그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대립물의 통일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지니고 있지만 절대적인 안정은 아니다. 이는 대립물의 통일이 대립물의 투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립물의 투쟁’은 사물의 상대적인 안정성을 파괴하고 다른 사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이 합법칙성이 인간사회에도 적용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사회발전의 역사는 한가지 점에서 자연발전의 역사와 구별된다고 한다. ‘사회의 역사에서 행위 하는 자는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행위 하는, 일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6)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사회의 영역에 있어서도 ‘무수한 개별적 의지와 개별적 행위의 충돌은 무의식적인 자연에서 지배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을 가져온다’7)한다.
(3) 역사적 유물론
Marx는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요소는 인간의 생산활동의 파악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역사에 대한 해석의 출발점은 “현실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활동, 그리고 이미 존재하거나 그들이 생산한 물질적이 사회조건이 들이다”8) 사회관계의 기초를 현실적인 경제관계로 바라본 마르크스는 인간사회를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따른 생산양식의 역사적 여러 형태와 그 변천으로 보는 유물사관을 확립하게 된다.
① 생산력과 생산관계, 계급투쟁
Marx는 생산자로서의 인간에 주목했다. 생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자신의 수요를 충족하고자 자연에 작용하는 활동과 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있다. Marx는 첫 번째 측면을 생산력 두 번째 사회적 측면을 생산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양자의 관계를 생산양식이라고 하였다.
생산력의 성격은 노동과정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과정은 인간의 노동력과 노동수단으로 구분되는데 어떠한 노동수단도 노동력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조직되어야만 협동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노동은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를 보아야 한다.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 생산과정에서 그들의 지위는 생산수단의 소유형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따라 계급이 생기게 된다. 분배의 형식 역시 생산수단의 소유 형식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생산력은 일정한 생산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토대로 형성되지만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생산력과 조응하게 된다. 즉 생산력의 발전에 앞선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생산력의 발전속도에 뒤떨어진 생산관계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후자의 경우 생산력의 발전은 구시대의 생산관계를 변혁하려 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구체화되고 첨예해져서 결국 충돌하게 되고 사회혁명은 낡은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 되게 된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불가분적으로 통일되어 것을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Marx는 생산양식, 즉 계급간의 착취에 기반한 사회의 형식을 구분하는 것은 잉여가치가 생산자에게서 수탈되는 형태라고 보고 있다. 노예제, 봉건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구별하는 것은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직접적인 생산자를 착취한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착취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Marx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단언했다. Marx에게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계급관계는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였다. Marx 이전에도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에 의해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Marx는 이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중요한 위치로 끌어 올렸다. 계급은 생산발전의 특정한 역사적 국면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결국 격렬한 폭력혁명을 통하여 관철이 된다. 이 폭력혁명의 주체가 되는 것이 기존의 생산관계로 인해 서로의 이해가 상반하는 계급이 되는 것이다.
② 토대와 상부구조
역사적 유물론은 모든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 가운데 물질적 생산관계들을 주요한 규정적 관계를 부각한다. 생산관계들의 총체란 소유의 형식들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생산과정 및 물질적 재화의 분배방식으로서의 사람들의 관계를 의미한다. 상부구조는 정치, 법률, 예술, 사상, 이데올로기 등을 말한다.
경제적인 토대는 현실적인 토대로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부구조가 새워진다. 봉건제 사회에는 그에 걸 맞는 상부구조가 세워진다. 따라서 어떤 계급이 토대에서 지배계급이 되냐에 따라 상부구조도 그들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편성이 된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도 생산력과 생산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조응하게 된다. 경제적 토대가 변화함에 따라 그에 따른 상부구조가 만들어지지만 상부구조는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통해 자신이 터 잡은 토대를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토대의 변혁에 대해서 상부구조 저항하게 된다. 이러한 저항은 이데올로기적 방법, 물리적 수단 등의 모든 방법이 동원된다, 이는 폭력혁명을 통해 타도될 수밖에 없다.
2. 인류 역사의 한 단계로서의 자본주의 - Marx의 경제학
자본론은 Marx의 가장 기념비적이 업적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전체적인 분석이다. 동시대 그리고 그 후에도 자본주의를 하나의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메커니즘을 분석한 경우는 거의 없다. Marx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결코 역사의 정점이 될 수 없음을 역설했다. Marx는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진전에 대한 미친 영향과 공적에 대해서 Marx는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생산력의 발전과 그로 인한 인류의 발전에 대한 평가는 그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찬사보다 더하다.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Marx가 그러한 평가를 한 것은 자본주의를 역사의 한 단계로써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 양태가 어떻든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착취에 터 잡은 사회인만큼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역사적으로 사멸할 체제라 생각하였다.
Marx는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두 개의 특징을 가진 체제라고 말한다. 하나는 노동의 착취와 소외이며, 다른 하나는 계속적인 자본축적과 성장, 그리고 필연적인 공황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 고전파 경제학의 두 이론적 기둥, 즉 자본축적이론과 노동가치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파 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성격의 이론체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 생산의 원동력으로서의 노동과 소외
Marx의 경제학에 있어 큰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이 노동가치설이다. 이는 이미 애덤 스미스나 리카아도 등의 경제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던 개념이다. 가치는 오로지 노동을 통해서만 창출된다. 생산수단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가치설은 어떤 상품이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의 양과 같다는 것이 이 이론의 내용이다. Marx는 이를 심화해서 노동을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으로 나누고 추상적 노동이 상품에 채화된 것이 가치라고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시대에 이르러서는 상품의 가치의 측정은 투입된 노동의 총량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라고 한다.
Marx는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에 대해서 노동자의 잉여노동이 창출한 잉여 가치로 보았다. 전 자본주의에서는 화폐는 단지 교환의 매개물일 뿐이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된다. 즉 일정량의 화폐는 자본이 되고 이것이 생산에 투자되어 증식되는 방식이다. 이 증식, 즉 이윤의 창출에 대해서 Marx는 노동가치설에 입각하여 설명한다.
Marx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한다. “그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노동력 실현에 필요한 다른 모든 상품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9)”
따라서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서 ‘노동력’이라는 특유의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해 생산에 투입한다. 주의할 점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산다는 것이다. 이를 가변자본이라 하고 노동수단을 불변자본이라 한다. 불변자본은 그 감가된 액만큼 상품의 가치로 이전된다. 노동자는 노동시간을 통해 자신의 임금 이상의 노동을 하게 되고 이에 상당하는 필요적 노동시간 외의 노동시간을 잉여노동을 하게 된다. 이 잉여노동시간에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리고 필요적 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에 생산된 가치의 비가 잉여가치율이다. 이윤율의 계산은 이와 좀 다른데 이윤율은 전체 투하 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로 나타낸다. 이와 같이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의 잉여노동, 즉 지불되지 않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에 있다. 이를 착취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의 본질은 임금제도를 통해 은폐된다. 임금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선전되는 것이다. 흔히 임금을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임금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가 얻는 이윤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인간의 노동 외에 생산수단은 죽은 노동으로서 그 가치가 상품으로 이전될 뿐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가는 남들보다 근면한 생활로 인해서 모은 돈의 투자와 경영행위를 통해 가치증식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Marx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과 지주들의 자본가화를 거론하며 역사적으로 이를 논박한다. 자본가의 이러한 착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의 속성상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에 대한 착취는 근원적 메커니즘이다. 자본가에 의한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소외는 바로 노동가치설에 의해 이론적으로 입증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가가 일단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면 그가 생산해낸 모든 상품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는 이렇게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결과로부터 소외되고, 대신 자본가가 지급하는 임금을 받게 된다. 그가 받는 임금은 노동을 재생산하는 데드는 비용, 다시 말해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수준에서 결정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해낸 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양자의 차이는 이윤으로서 자본가의 소득이 된다.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이윤은 기본적으로 자본가가 착취하는 잉여가치라는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2) 자본주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자본주의의 구조와 문제
① 경쟁과 이윤, 평균 이윤율의 저하 경향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부문 내 경쟁을 통해서 상품의 가격은 생산에 지출된 개별적 노동이나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품들의 시장가치로서 결정이 된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을 가진 기업이 유리하다. 이와 같은 기업은 초과이윤을 누리게 되고, 부문 내 다른 기업도 생산성 향상과 기술혁신을 도입한다. 그러면 초과이윤은 소멸하지만 새로운 기술혁신은 다시 초과이윤을 얻게 한다. 즉 경쟁을 통해 생산서이 점점 발전하는 것이다.
또한 부문간 경쟁을 통해서는 평균 이윤율이 형성되게 된다. 이윤율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자본이 이동하게 되면서 다양한 사업의 이윤율이 균등화되며 대체적으로 평균이윤율에 근접하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다. 기술적인 진정으로 인하여
설비, 원료 등의 불변자본이 가변자본보다 빠르게 증가하게 된다. 오직 가변자본인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는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이윤율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반작용을 가한다. 이윤율의 저하를 막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착취도를 늘리거나, 노동력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급하거나, 노동자의 건강, 생명을 담보로 하는 불변자본의 절약 등이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위와 같은 반작용을 불러오며 이는 자본가들의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물론이며 착취도의 증대에 따라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모순이 첨예해 진다. 즉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 따라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해지는 것이다. 즉 이윤율 저하의 경향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제한적이며 모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을 말한다,
② 재생산과 공황
자본주의 경제는 무수히 많은 개인과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자본가는 일정한 시점에 가장 많은 이윤을 제공하는 개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정부성은 시장에서의 상품의 실현을 어렵게 하고 과잉생산에 의한 경제 공황을 초래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확대재생산, 축적의 과정에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특징적인 것이다. 이는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산업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부문의 유기적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확대재생산의 경제적 법칙은 소비재부문의 생산보다 생산수단 생산부문의 더 빨리 성장한다는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항상 실체로 관철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조건은 끊임없이 파괴된다.10)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적대적 모순이 존재한다.11) 최대 이윤은 생산확대와 자본의 축적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생산확대와 자본 축적은 노동자의 생활 수준하락, 유효수요와 소비의 감소를 초래하게 된다. 평균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하기 위한 반작용, 혹은 노동자의 임금 상승, 조직화 등으로 인한 이윤의 감소 경향과 더불어 모순은 첨예화한다.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상품의 실현은 어려워지게 되고 이는 생산력을 파괴한다. 공황은 이러한 파괴과정을 통해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 일시적으로 해결되게 되는데 일종이 자본주의의 폭발적 평형 작용이다. 이 과정에서 일단의 자본가들은 몰락하게 되고 자본은 독점화 하게 된다. 또한 무산계급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자본주의는 그 모순으로 인하여 이러한 과정을 중도반단 없이 내포하고 있다. 공황은 일시적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3.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혁명가로서의 Marx
Marx의 사상이 실천의 철학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Marx는 탁월한 사상가, 경제학자라는 측면 보다 혁명가로서의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의 철학과 경제학, 그리고 모든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당위성과 노동자계급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1)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변혁의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 그리고 농민에 대해
Marx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창출한다고 보았다.12) 변혁의 주체, 즉 가장 변혁적인 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의 피 착취 계급인 노동자로 보았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가 잉태한 모순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자본주의를 무덤으로 보낼 강위력한 계급인 것이다. Marx가 공산당 선언에서 밝힌 것처럼 자본주의의 몰락은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의식화, 조직화, 투쟁에 달린 것이었다, 즉, 노동자계급이 단결하고 떨쳐 일어설 때 자본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하고 지배를 행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식이다. 자본의 조간은 임금노동이다. ․․․ 중략 ․․․ 산업의 발전은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결합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근대 공업의 발전에 따라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기초 그 자체가 그들의 발 밑에서 무너져 내린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생산한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 하다.13)
마지막 구절은 기계적이고 숙명론적인 자본주의의 사멸을 이야기한 것이 결단코 아니다. 생산양식의 변혁을 위한 과정에서 변혁은 추동 하는 ‘원인’ 자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변혁을 추동 하는 것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각성된 계급의 투쟁’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 Marx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가 붕괴하거나, 객관적 여건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는 기대하지 않았다. Marx가 예견하였듯이 공황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지배계급을 타도할 변혁역량이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변혁의 핵심역량이 되는 것은 Marx의 사상에 의하면 논리 필연적인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의 핵심에서 형성되고 그 모순을 체험하는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며,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투쟁 속에서 단련된다. 관념에 의해서 기반하지 않고 현실에서 인식하고 각성하며 투쟁 속에서 단련된다. 자신의 계급성을 명확히 할 수 있고 실제로 명료하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진전에 의하여 대 공장 등에서 노동함에 따라 조직화와 집단화가 필수적이며 용이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주성을 쟁취하여 해방되는 것은 보편적 인간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Marx는 농민들을 사회주의 변혁의 핵심역량이라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유럽의 농민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어 계급을 이루기 위한 단결이 용이하지 않으며,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고 본다.14)무엇보다 그들이 기반한 처지가 자본주의적이 아니라 봉건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핵심역량이라고 보고 있지 않은 듯 하다. 대신 Marx는 농민들이 노동자 계급과 손을 잡았을 경우 혁명의 주요한 역량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여러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에서 우리는 농민 계급의 중심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이는 농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의 성격이 ‘반제 반봉건 사회주의 혁명’의 성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봉건적인 요소는 특히 토지를 중심으로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모순과 봉건작 잔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 때 농민들도 변혁의 주요한 계급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어도 산업자본의 이윤 추구와 해외의 농업자본에 의하여 생산된 저가의 농산물에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농민들도 조직을 가지고 올바른 지도가 있다면 사회변혁의 주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2)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Marx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무 계급의 공산사회를 건설할 계급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곧바로 생기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혁명적 변혁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인 변혁의 시기도 수반되는데, 이러한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일 수밖에 없다”15)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Marx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노동자 계급의 소수 독재도 아니고 자본주의와 무 계급. 혹은 단일계급 공산주의 사회의 ‘필수적 경과점’이라고 보았다.16) 과도 정부라는 느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전체주의나 파시즘처럼 강제에 의한 독재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최초로 지배계급으로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라는 점에 있다. 기존의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해에 복종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민 그 자체가 국가가 되는(?)것이다. 이는 국가주의와도 분명히 구분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기존의 낡은 것을 청산하고 반혁명적인 일체의 시도를 무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 계급 공산사회로 이전하기 위한 토대를 구성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사회에 들어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의의를 잃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가장 민주적인 체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고자 합니다.
1. 역사는 끝났는가 -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정점인가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들의 사회주의의 거센 도전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역사적 정점에 서 있다고 보는 견해가 범람했다. 분명히 자본주의는 몇 차례의 대공황과 제국주의의 모순의 충돌인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고 현존 사회주의 국가17)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이 요원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승리가 의심할 수 없고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의 정점이라는 주장에는 섣불리 동의하기가 어렵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크게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부적 요인은 행정기구의 비대화, 관료주의, 총생산고 지상주의, 수정주의의 득세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과를 민중들의 것으로, 노동자의 것으로 돌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여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관철된 것도 아니며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주장대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초래해서 노동의 소외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국가자본주의라 일컫는데에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이 왜곡되면서 당과 국민은 괴리되고 국가가 그 자체로 지배했다는 점도 문제다. 국민 그 자체에 의한 국가가 아니라 국민을 지배하는 기구로 전락한 국가의 모습에 민중들은 등을 돌렸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조차 지켜지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동구 사회주의의 국가들 같은 경우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외연의 확장에 지나지 않았다. 외연에 걸 맞는 본질의 형성이 더디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그 사회의 근로대중의 합의와 투쟁으로 건설되어야 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의 부재나 느슨한 합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단순한 ‘일당 독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사회주의의 진전은 단순한 생산양식의 변화만으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새 시대에 맞는 사상의식이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을 때 가능하다. 그러한 사상의식은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층에도 발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민중에 의한 체제 전복이었다.
외부적인 요인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군사, 경제 대결을 들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공업화가 늦었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비경쟁, 이념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이로 인해 내부의 모순을 발생시키거나 심화되는 것을 방관하였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은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대결의 첨예화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 내부적인 모순이 사회주의 자체가 인간본성에 맞지 않거나 내적인 결함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튼튼히 움켜쥐어야 할 기본이 지켜지지 못한 것이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불러왔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먼저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 과정의 오류를 전체적으로 확장하여 사회주의 사상 자체를 폐기처분 할 수 없다는데 있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는 사회 국가적 원리가 천명되어 있다.
그리고 1990년대를 넘어서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신자유주의 반대의 움직임 조직되고 국제적 형태로 발현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권의 붕괴 이후 거칠 것이 없어진 자본주의는 단 1달러라도 더 거두어 들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사회는 점점 20대 80이 사회 , 아니 극소수와 대다수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사회적 국가적 단위에서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더불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빈곤과 수탈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증오의 고리가 전 세계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이다. 모순의 첨예화는 또 다른 혁명의 기반을 잉태한다.
2.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생각하며
사회 변혁적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의의를 다한 것일까. 제도적 사회주의의 몰락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회주의 사상을 폐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나 ‘사회과학적 마르크스주의’로서 그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나, 혁명이론이길 포기하고 비판이론으로서 자리 매김을 해야한다는 입장은 Marx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Marx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을 꿈꾸었다. 그리고 논리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으로써만 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에 영향 받는 존재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주의적 관점은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진정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라 부르기도 어렵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복지의 향상과 사회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수용은 비판이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비판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근로민중의 투쟁으로써 쟁취된 것이다. 그리고 비판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즉, 마르크스주의가 발 딛고 서 있는 근원문제 자체에 대한 외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개방적인 혁명사상이다. 사상은 레닌, 그람시, 마오쩌둥 같은 위대한 혁명가들로 인해 수정되고 보완되어왔으며 제3세게 민족해방운동과 혁명의 경험을 통해 실천적으로 풍부해져 왔다. 혁명과 사상은 계승되는 동시에 발전하게 된다. 인식과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물론 결코 수정될 수 없는 핵심은 대체될 수 없다.
초기의 Marx의 ‘순수한’ 사상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Marx가 혁명가였던 것처럼 그의 사상도 혁명적이다. ‘혁명적 사상’ 이라는 것은 단지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기로 만들어진 사상, 즉 생산양식의 변혁의 합 법칙성을 발견하고 그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을 세우는 사상이다. 그리고 단지 Marx의 사상만을 마르크스주의로, 하나의 도그마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Marx의 사상은 완결적이지도 않고 무 오류의 것도 아니다. 그는 19세기의 현실에 기반 하여 세계를 바라보았고 그 사유와 실천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같은 것을 한 노동자 역시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로부터 15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현실의 기반은 많이 달라졌고 Marx의 가설은 현실이 되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Marx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자본주의적 모순은 점증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일상적 해고 위협과 비정규직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 금융자본은 그 증식을 위해 전 세계 곳곳을 수탈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한 국가의 내부에서, 전 세계적 범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서 반대한 반 세계화 시위는 통신과 네트워크를 통해 점차 전 세계적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자본은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착취하고 이를 은폐한다. 그리고 그러한 착취의 모습이 노골화 되도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것은 관념적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현재적 의의를 고민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결코 수정될 수 없는 정수는 존재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하고 보편적 인간해방을 달성해야 한다는 목적과 Marx의 가장 일반적인 분석이 낡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는 Marx의 시대로부터 많은 것이 변해왔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혁신과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양보될 수 없는 본질을 지켜가며 ‘혁명적 사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계승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의 폐기나 위기로만 볼 수는 없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정치적 권위가 무너지고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해 가는 현실 오히려 마르크스 사상을 어떤 틀 지워진 해석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엥겔스, 김재용 譯,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새날, 1990
Marx,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 같은 책
빅토르 아파나세프, 김성환 譯, 역사적 유물론, 백두, 1988
철학의 기초이론, 편집부, 백산서당, 1990
데이비드 매클릴런, 마르크스, 시공사, 1998
니키친, 전효관 역, 정치경제학 입문, 동녘, 1990
마오쩌둥, 실천론
박경욱, 철학의 정립, 대동, 1990
민족과 철학, 편집부, 대동, 1989
1) Marx가 생전에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도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에 대하여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고 한다. (David McLellan, 마르크스, 시공사, 1998)
2)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책갈피, 1994 P.28
3) Marx,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4)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책갈피 , 1994, P.111
5) 마오쩌뚱, 실천론 중에서 요약
6) 프리드리히 엥겔스, 김재용 譯,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새날, 1990, p.70
7) 같은 책, 같은 곳
8) 칼 Marx, 독일이데올로기, p.58
9) Marx, 자본론, pp272, 마르크스의 사상 p158에서 재인용
10) 니키친, 전효관 譯, 정치경제학입문, 동녘, 1990, p144
11) 같은 책, 같은 곳
12)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책갈피, 1994, p193
13) 공산당 선언, 저작선집 제 1권, p412, 같은 책 p193-194에서 재인용
14) 같은 책, p199
15) Marx, 고타강령비판, p26 - 빅토르 아파나세프, 역사적 유물론,백두, 1988에서 재인용
16)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책갈피, 1994, p.216
17) 현존 사회주의 국가와 기존 사회주의 국가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라는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의 주장은 일단 보류한다.